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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외교의 핵심요소

 

“우리는 오랜 기간 동등한 협력 파트너로서 타국, 특히 영연방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국경일 혹은 6.25 참전용사 기념행사 등에 참석하다 보면 영국 정부 부처 직원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 평소 궁금한 것이 많았던 필자는, 영국인들의 특성상, 질문을 하면 성심성의껏 곧잘 답변해주기에 이것저것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곤 했다. 그러던 중, 한 영국 외교관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있는데, 상당히 흥미로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궁금해요.jpg

당연 이러진 않았다

 

당시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정확한 단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뇌리에 박힌 몇 가지 단어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영국의 외교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필자는 외교 전략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외교관의 답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음의 단어들이다.

 

“long-term relationship"

 

"strong partnership" 

 

"그리고 commonwealth countries”

 

(장기적 관계, 끈끈한 파트너십. 그리고 커먼웰스 국가들)

 

물론 지나가는 삼척동자도 답할 수 있는 뻔한 답변이긴 하다. 하지만 선택한 언어와 답변의 순서에 따라 우선순위가 전해진다는 외교 전략을 생각해 본다면, 해당 답변에는 나름 뼈가 있다. 

 

장기적인 안목을 두고,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전략과 더불어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그렇다. 영국은 짧은 시간을 투자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외교 전략을 지양한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 평생을 함께할 친구와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헌신하는 그들의 가치관이 외교에도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관련 내용 1편 참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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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멘웰스 회원국.

주황색 국가는 아일랜드와 짐바브웨로

옛 커먼웰스 회원국이었던 국가다.

 

 

영연방(커먼웰스) 국가 지원 규모

 

DFID

(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디.에프.아.디. 혹은 디피드라 불리는 정부 부처가 있다. 1964년 노동당 정부 시절 설립된 ODM(Ministry of Overseas Development)이 전신이며, 대표적인 영국의 해외지원사업을 담당하는 부처다. 우리말로 ‘국제개발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모잠비크.png

2019년 영국 DFID에서 사이클론 피해를 입은

모잠비크에 지원 물품을 전달하고 있다. 

출처-<the africa report>

 

2020년 브렉시트와 코로나19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며, 현재는 영국의 외무부(FCO, Foreign Commonwealth Office) 내 부속기구로 예편되었지만, DFID의 해외지원사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참고로 이 부처에 책정된 예산은 연 134억 파운드(약 20조 원) 정도로 상당하다. 영국 정부 전체 예산의 0.25%이다. 0.25라는 숫자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규모가 영국 외무부 예산의 1/5수준이라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외무부 예산 중 1/5을 원조사업에 대해 할애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 다른 서유럽국가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이다. 엄청난 규모의 지원 프로젝트인 셈이다. 

 

DFID의 전신인 ODM은 과거 영국식민지배를 통해 피해를 입은 지역에 대한 지원과 제3세계에 대한 원조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영연방 국가를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DFID로 새롭게 단장하기 전까지 예산의 50% 이상을 영연방 국가들에 할애할 정도였다. 이렇게 식민지배로 피해를 입은 지역 및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관심과 의지가 엿보인 정치적 결단에서 시작된 게 바로 ODM, 현재의 DFID이다. 

 

 

영연방 국가 지원의 이유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ODM과 같은 해외원조사업, 특히 영연방국가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실시한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앞에서 영국 외교관의 입을 빌어 언급했지만, 

 

1. 과거에 대한 책임감 때문

2. 영구 지속한 협력관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영국의 행보에 대해 겉으론 뻐꾸기(?)를 날리지만, 어떻게든 속국이었던 국가들과 관계를 지속하며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이득을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냐, 혹은 이미지를 위한 단순 외교적 미사여구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외무부가 강조하는 중요한 외교 원칙 중 첫 번째가 장기적인(long-term peace building initiatives / long-standing relationships) 안목을 갖고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라는 걸 볼 때, 단순 수사가 아닐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 돈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간다고, 60여 년간 국가예산, 특히 외교성 예산의 상당 부분을 원조 및 지원사업에 투자해 왔다는 것은 분명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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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서부 외곽 주택가에 위치한 북한대사관

 

영국이 외교를 하는 데 있어 ‘장기적인 안목’이라는 슬로건과 어울리는 예시가 또 하나 있다면 바로 북한과의 관계다.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몇 안 되는 서방국가 중 하나다. 당연히 북한도 영국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이런 점은 관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외교적 관점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 볼 수 있다. 미국과 함께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유엔의 북한 제재에 대해 지속적인 찬성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영국이 북한과 서로 대사관을 두며 교류를 이어간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도 서유럽 국가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통로로 영국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영국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어떤지 나타내는 단서이기도 하거니와, 영국의 외교 전략이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현재 좋은 관계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장기적인 관점으로 외교 전술을 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참고로 2016년 태영호 현 국민의힘 의원이 귀순한 것이 대대적인 이슈가 되었는데, 일개 대사관 공사 출신, 우리로 보면 2급 공무원 수준의 외교관 한 명이 귀순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겠지만, 북한 외교관 수가 많지도 않거니와 북한이 서방국가와 연락한 주 통로가 주영국 북한대사관의 공사였기 때문에 태영호가 좀 더 높은 급(?)의 취급을 받은 부분이 있다. 당시 태영호의 귀순을 도운 것은 영국 MI6와 미국 CIA였다. 태영호는 망명 시 미국과 한국행 둘 중 어디로 선택하겠느냐는 물음에 최종적으로 우리나라를 선택했다)

 

태영호.PNG

 

 

영연방 국가 국민에게도 투표권을 주는 영국

 

정리해보자면, 영국이 국가 예산 중 별도의 특정 금액을 지출로 결정하여 영연방 국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고, 지난 60여 년간 지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이 있다. 

 

영연방 국가 국민들은 영국 내에서 투표권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외의 시민권을 획득한 한국인은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총선 등에서 투표할 수 없다. 물론 국적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 국적을 가진 국민이 아닌 이상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을 넘어 불법 즉,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영국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원조를 넘어 영연방 국가의 국민들에게 영국의 투표권을 허가한다. 가령, 영연방 국가 중 인도를 예로 들면, 인도인이 영국에 학업을 목적으로 비자를 받아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 모든 형태의 국민투표에서 한 표를 선사할 수 있다. 비자 없이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주소지가 없기 때문에 예외지만, 적법한 절차에 따라 비자를 승인 받고 영국으로 입국한 영연방 국가 소속의 국민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이는 단순 지원국으로서의 대우가 아닌, 하나의 연방국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영연방 국가들을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외교적 대우를 넘어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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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투표하러 줄 서 있는 사람들.

출처-<Daily Express>

 

영국의 이러한 노력은 지금도 굳건한 영연방을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다. 사실 부정투표를 비롯한 각종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비자 제도도 영연방 국가들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게 적용하고 있다. 오고 가는데 있어 장벽을 제거해 주는 것인데, 런던에 인도나 아프리카 지역 출신의 이민자들이 엄청난 규모를 갖춰 특정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이유도 국가 상호간에 실시되고 있는 이런 관대한 비자 정책 덕분이다. 물론 이런 비자 제도도 위험요소가 있다. 

 

이민자들의 범죄율이 80년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에 있고, 이를 위해 매해 추가되고 있는 치안을 위한 – 경찰의 수를 늘리거나, CCTV를 설치하는 등 (참고로 런던은 전 세계에서 CCTV가 가장 많이 설치된 도시 중 하나로 손 꼽힌다) - 예산을 생각하면, 사실상 천문학적인 액수의 예산이 영연방을 위해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영연방 국가에 대한 외교 정책으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정책 방향 자체를 바꾸려기보다는 정책 방향은 유지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덕분에 영연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느슨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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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곳곳에는 이런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출처-<The Washington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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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 국가들에 돌려주려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영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쇠퇴했다. 전 세계를 지배하며 호령하던 대영제국의 위엄도 이젠 옛말이다. 한때 세계 최고 경제 대국이었던 영국에 대한 향수를 품은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호랑이 담배 필 적 얘기로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요즘 20대 젊은이들은 진주만 습격이 뭔지, 왜 세계 1차대전이 벌어졌고, 그것이 2차 대전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른다. 그냥 히틀러를 미치광이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 

 

그럼에도 영국은 여전히 세계 5대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글로벌 리더로서 프론티어 정신에 입각하여 지구촌 아젠더 제시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영국 글라스고에서 열린 COP26 기후변화 대책 회의와 같은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기후협약.PNG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각국 정상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COP26은 기후위기에 맞서 각국이 모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모색하는 회의다.

출처-<AP>

 

어떻게 지금까지 이러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영국의 외교 전략, 그중에서도 국제원조와 영연방 국가들과의 긴밀한 협력관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판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도,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에 대한 백신의 우선 보급을 약속했다. 지난해 7월 한 달에만 영연방 국가들에 900만 회분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지원했고, 특히 케냐에는 오랜 식민 통치기에 있었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백신 보급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빼앗아 갔고, 그로 인해 득을 많이 봤으니, 이젠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꾸려진 영국의 외교 전략이 DFID와 같은 정부 부처(이젠 기관)를 통해 발현되면서 현재의 영연방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ODM에서 DFID로 변경되면서 지속 가능한 개발 촉진, 세계 빈곤 퇴치, 제3세계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개발계획 등을 시작으로 교육, 보건, 위생, 환경보호 등 인도적 지원을 통한 세계 평화 구축으로 영연방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에서 방향성이 더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영연방 국가와의 관계를 제일 중점을 두고 있다.

 

 

다음 편, 예고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영국은 DFID를 통해 영연방 국가에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영연방 국가 사람들이 영국으로 쉽게 이민 올 수 있도록 이민정책을 대폭 수정했었다. 지금 런던 인구의 70%가 원래 영국인이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영국이 영연방 국가들을 상대로 얼마나 개방적인 이민 정책을 펼쳤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이와 관련된 영국의 국제화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