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주의

 

근육병아리는

 

요리에 관한 어떤 정식 교육도 받은 적 없으며,

 

 오직 유튜브와 만화책으로만 수련 중인

야매 수산인으로

 

 기사에 담긴 그 어떤 레시피도

성공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근육병아리 (2).jpg



칭찬은 병아리도 춤추게 한다

 

살다 보면, 뜻밖에 호의를 만날 때가 있다.

 

1.jpg

 

필진 시절, 처음 기사를 냈을 때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내 글을 누군가 돈 주고 사 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글이 올라가는 날엔, 밤새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며 달리는 댓글들에 일희일비하고 그랬었다.

 

사람들이 보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글이 썼던 의도와 다르게 읽히고 있을 땐 한 명 한 명 붙잡고 변명하고 싶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점이 행간에 드러날 땐 부끄러워 키보드에 대가리를 박아대던 날들, 꽤 많았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들을 보내오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지은 문장은 내 손을 떠난 순간부터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지금도 기사를 마감하고 나면, 내가 헛소리를 한 건 아닌지 독자들의 시간을 헛되이 쓰게 하는 내용은 아닌지, 항상 심장 쫄깃한 마음으로 송고 버튼을 누르곤 한다.

 

작업물 대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그래서, 내가 영 헛짓거리를 하고 사는 건 아니라는 안도감과 앞으로도 뭘 잘해보고 싶게 만드는 삶의 소중한 원동력이다. 톡으로 친히 남겨주신 어느 출판사 차장님의 따수운 피드백은, 사부작 사부작 이어가고 있는 이 연재물이 업계 슨배님에게도 꽤나 귀여운 일로 보이나 보다 싶어, 마음이 한결 놓였다.

 

2.jpg

 

아무튼, 그렇게 '심각한 미팅'에 초대된 근병은,

 

3.jpg

 

연남동 풀코스를 돌며,

 

4.jpg

 

업계 동료들의 연재 방향성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과 격려의 강강수월래 속에,

 

5.JPG

 

불타는 창작욕구와 간 수치를 만땅으로 올려놓고,

 

6.jpg

 

집에 네발로 기어들어오게 된다.

 

결초보은 오마카세

 

7.jpg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갚아야 하는 법. 은혜를 모르는 병아리는 결코 치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8.jpg

 

써머 시즌 오프를 앞둔 8월 말의 노량진 경매장.

 

9.jpg

 

올여름, 수급 문제로 유난히 얼굴 보기 힘든 친구가 있었는데,

 

10.jpg

 

그 도도했던 녀석은 바로,

 

11.jpg

 

잿방어 되시겠다.

 

12.jpg

 

방어와 같이 농어목 전갱이과에 속하는 잿방어는 따뜻한 물을 좋아하며,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맛이 들기 시작한다.

 

13.jpg

 

잿방어가 다른 횟감과 확연히 다른 점은,

 

14.jpg

 

숙성을 통해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15.jpg

 

방어에 비해 확연히 다른 잿방어의 탱탱한 살성은, 그 조직감이 너무 단단해서 활어 상태로는 살 속에 숨은 감칠맛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삼켜버리게 된다.

 

16.jpg

 

그래서 잿방어는 그 어느 때보다 숙성 준비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 숙성을 길게 가져갈수록,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17.jpg

 

이 뱃살을 지금 썰어먹으면 씹는 맛 밖에 안 나겠지만, 며칠 잘 재워두면 정말 어마무시한 한 점이 된다.

 

18.jpg

 

잿방어야말로 숙성의 묘를 제대로 살려볼 수 있는 횟감이라 할 수 있는 것.

 

19.jpg

 

숙성을 길게 가져가야 하는 만큼, 모든 과정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전완근에 온 힘을 모아 녀석을 진공의 세계로 포박.

 

잿방어를 마무리 짓고 옆을 무심코 보는데, 엉클마린 마도로스 김이 방금 낙찰받은 물건을 끌고 작업장으로 들어온다.

 

근병 : 뭐다요 그게?

 

마도로스김 : 금태 금태. 오늘 완전 A급 떠서 아도 쳐옴.

 

20.png

 

ㄷㄷㄷ?

 

21.png

 

600g을 훌쩍 넘는 보기 드문 사이즈.

 

22.png

 

최상품 등장에 반지를 본 골룸이 된 근병. 그 눈빛을 읽은 마도로스 김.

 

마도로스김 : 한 마리 쓰실?

 

근병 : ㅇㅇ 제시.

 

마도로스김 : ㄴㄴ. 우수고객 협찬 ㄱㄱ.

 

근병 : 얼마에 나가는 건디?

 

마도로스김 : x 만 원.

 

근병 : ㄴㄴ.. 김영란법 졸라 초과. 계좌이체 ㄱㄱ.

 

23.jpg

 

내돈내산 빅사이즈 금태.

 

24.jpg

 

이 분의 정식 명칭은 '눈볼대'다.

 

25.jpg

 

'농어목 반딧불게르치과' 라는 이름도 신비로운 가문의 족보를 가지고 계신 분인데, 이 집안엔 또 웅장하게 입신양명하신 분이 하나 계시니...

 

26.jpg

출처 - 링크

 

바로 전설의 물고기, 돗돔 어르신 되시겠다.

 

27.JPG

 

명문가 출신답게, 금태는 출중한 풍미와 고오급스러운 기름맛으로 무척 귀한 대접을 받는다. 가치는 가격으로 증명되는 법. 돌돔 킹크랩과 더불어 키로 단가 기준, 노량진 탑티어를 자랑하는 아주 쩌는 분.

 

28.jpg

 

특히 이런 특대 사이즈 횟감 금태는, 노량진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원물 가격이 한우 살치살을 그냥 처바른다.

 

29.jpg

 

꼬리 끝까지 살이 통통하게 차오른 최상품. 이런 게 뜨면 새벽에 장 보러 나온 셰프들이 가격이고 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쓸어 가기 때문에, 평소엔 구경하기가 힘들다.

 

30.jpg

 

나는 셰프도 뭣도 아니지만...

 

31.jpg

 

일단 사고 본다. 작고 귀여운 300g 따리도 눈 튀어나오게 맛있는데.. 700g에 육박하는 금태를 회 쳐먹고 구워 먹고 튀겨먹으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견딜수 있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말이다.

 

병아리의 초대

 

며칠 후, 잿방어살에 기름이 몽글몽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32.jpg

 

어제의 용사들을 다시 모아,

 

33.jpg

 

홈 오마카세 개최.

 

34.jpg

 

그냥 단무지만 썰었을 뿐인데, 갤러리 분들이 아침마당 방청객 마냥 환호를 쏟아낸다. 학예회의 주인공이 된 기분. 극 남초 집단인 딴지 편집부에서 회를 썰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갑자기 이게 사는 건가 싶다.

 

35.jpg

 

금태부터 시작.

 

36.jpg

 

이렇게 비싼 생선을 다룰 때는 특히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잠깐 칼이 헛돌면 0.5mm 당 500원 씩 살점이 차감되기 때문이다.

 

37.jpg

 

경건한 마음으로 뼈와 살을 분리하고,

 

38.jpg

 

다음 단계 세팅.

 

39.jpg

 

껍질 아래 살에 기름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40.jpg

 

껍질의 바삭함을 도모하는 것이다.

 

41.jpg

 

초장부터 다 죽여버릴 심산.

 

42.jpg

 

첫 접시는 금태 사시미.

 

43.jpg

 

기름이 촉촉하게 올라온 한 점.

 

44.jpg

 

다음 접시는 뱃살 쪽 껍질을 그대로 붙여서,

 

45.jpg

46.jpg

 

밥을 쥐고,

 

47.jpg

 

간장 붓질을 한,

 

48.jpg

 

금태 뱃살 초밥.

 

49.jpg

 

죽이쥬?

 

50.jpg

 

단무지 때 환호는 사회생활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찐 리액션.

 

51.jpg

 

후후.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잿방어 풀코스

 

52.jpg

 

숙성왕 등판.

 

53.jpg

 

뱃살에 칼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들어간다. 느낌 좋다.

 

54.jpg

 

역시 최고의 컨디션.

 

55.jpg

 

껍질을 사악 따보니,

 

56.jpg

 

기깔나는 기름.

 

57.jpg

 

맛을 좀 더 섬세하게 느끼도록 면을 얇게 따서,

 

58.jpg

59.jpg

 

잿방어 등살 대령.

 

60.JPG

 

안내대로 잘 따라오시는 손님들.

 

61.jpg

 

루에 주자가 다 찼으니, 이제 에이스를 출전 시켜 보자.

 

62.jpg

 

4번 타자, 잿방어 뱃살.

 

63.jpg

64.jpg

 

아찔한 한방.

 

65.jpg

 

여세를 몰아 끝판왕을 소환해보자.

 

66.jpg

 

기대하시고,

 

67.jpg

 

쏘세요.

 

69.jpg

 

좌우 위아래로,

쉴 새 없이 몰아터지는 기름의 향연.

 

68.jpg

 

잿방어 일생의 총체, 은혜 갚는 대뱃살.

 

돌돌돌

 

장내는 이미 감동의 도가니.

 

70.jpg

 

역시 인심은 곳간에서 나고, 사람이 맛있는 걸 먹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기 마련.

 

71.png

 

원래 이들은 냉철한 원고 분석과 단 한 줄의 비문도 허락하지 않는 프로페셔널 출판 편집인들이지만,

 

72.jpg

 

입안에 잿방어의 녹진한 기름을 잔뜩 칠한 이들에게 나는,

 

73.jpg

 

이미 하루키요 스티븐 킹이다.

 

74.jpg

 

쐐기는 이럴 때 박는 것.

 

75.jpg

 

쪽파를 적절히 올리고,

 

76.jpg

 

초생강 더블 캐스팅.

 

77.jpg

 

3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비법이라도 있는 듯 괜히 심혈을 기울이는 척하면서 살살 말아주면,

 

78.jpg

 

꽤나 그럴싸한 단면을 도출할 수 있다.

 

79.JPG

 

잠시를 못 참고, 동네방네 자랑 중.

 

80.jpg

 

대체 누가 시작한 건지, 등푸른 생선 + 파 + 생강 의 조합은 인류 최대의 발견이라 본다.

 

마무리는 역시

 

81.jpg

 

몸을 가꾸고 싶은 현대인들은 가끔 탄수화물을 배척하는 어리석은 일을 벌이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심신 안정은 오직 탄수화물로 가능하다는 것을.

 

82.jpg

 

제아무리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모든 식사의 마지막엔 탄수화물이 있다.

 

83.jpg

 

라면 사리를 넣지 않는 횟집 매운탕이 대체 무슨 소용이며, 밥을 볶지 않는 삼겹살 회식은 또 얼마나 비인도적 처사란 말인가.

 

84.jpg

 

금태 재등판.

 

85.jpg

 

수미쌍관으로다가 오늘 코스의 마지막 방점을 찍어 주실 예정이다.

 

86.jpg

 

간장 + 들기름으로 밑간 한 메밀면을 살포시 담고,

 

87.jpg

 

껍질 익힌 금태를 적절히 썰어둔 뒤에,

 

88.jpg

 

아웃소싱 해둔 들깨가루를,

 

89.jpg

 

면위에 2mm 정도로 도포.

 

90.jpg

 

준비된 금태 토핑을 올리고,

 

91.jpg

 

마지막 킥, 쪽파까지 투입하면,

 

92.jpg

 

오늘의 피날레, 금태 들기름 소바 완성.

 

93.jpg

 

출판계의 보아 : 근데 오늘 찍은 사진들도 기사로 나가는 거예요?

 

근병 : 그렇죠.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드리지만, 사실 여러분들은 촬영요원으로 섭외된 것..

 

출판계의 효녀심청 : 기자님 철두철미한 분이군요.

 

근병 : 이 바닥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원소스멀티유즈.. 일석이조.. 도랑치고 가재 잡고..

 

출판계의 바텐더 : 와인 끝난 거 같은데, 위스키 땁시다. 저거 좋아 보이네, 서른 즈음에 시퍼런 거.

 

근병 : 손님 저희가 이제 주방 마감이라..

 

독자 여러분께

 

추석입니다.

 

올해도 여지없이 귀성 열차표 예매에 실패하여, 하루 먼저 고향에 내려와 재택근무 중입니다. 대체 그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건지, 주변에 코레일 관계자분이 계시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코로나 여파, 박살 나는 경기 지표, 기록적인 집중 호우도 모자라 큰 태풍으로 많은 분들의 삶이 흔들리고 있는 이때, 명절에도 마음이 마냥 여유롭지 않습니다. 저와 제 주변에 살닿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 연휴 전날 용산역은 고향 가는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저마다 뭐라도 하나씩 들고 말이죠. 제아무리 역병과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더 단단한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근육병아리의 방구석 오마카세 : 여름 횟감 특집>은 여기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길고 무덥고 힘겨웠던 여름, 모두 애쓰셨습니다. 연휴 동안 잘 정비해서, 새로운 계절의 새로운 노량진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나 따수운 관심과 격려 감사드립니다.

 

포근한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일상이 단단하길 빌며,

 

전주 송천동 어느 PC방에서

근육병아리 드림.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