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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죽음

 

향년 96세. 1952년 즉위하여 재위 기간만 70년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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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

1926 . 04 - 2022 . 09

 

여왕은 자신의 첫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부터 시작해서, 존 F. 케네디, 넬슨 만델라 등 이젠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얽혔던 20세기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새 총리 임명 등)한 후, 그간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국왕으로서의 짐을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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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 윈스턴 처칠

 

전 세계는 개인의 삶을 포기한 채, 전통을 지켜 내기 위한 도구로서, 온몸을 바쳐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 여인의 숭고한 삶과 마지막 길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여왕의 숭배자인 것으로 오해하진 마시라. 나는 군주제를 지지하지 않는다. 의회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고 표현되는 영국의 의회가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며 왕을 섬긴다는 건 모순이라 생각한다. 

 

수평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적 사고와 인간이라면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공화정에서 자란 나에게 귀족이니 왕이니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존재하는 건, 세상의 중심에서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지었던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국가를 위해 자유를 포기한 여인

 

인간이라면 나름의 꿈과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고, 계획대로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라지만, 자신의 앞길을 계획하고 언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지는 스스로 결정하곤 한다. 때로는 여유를 갖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늦게까지 딴짓을 하다가 퍼지도록 늦잠 자기도 한다. 치맥을 사다 놓고 한강변에 친구들과 모여 한참 수다를 떨고, 야밤에 영화 한 편 보는 등의 자유, 누구에게나 있지 않겠는가? 

 

이런 당연한 일들이 사치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그랬다. 재산 많고, 평생 먹고살 걱정 없이, 유유자적하게 인생 즐기가다 생을 마감한 건데 뭐 그리 치적을 치켜세우느냐며 아니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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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BBC>

 

얼핏 보면 팔자 좋은 노인네가 100년 동안 편안하게 살아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무조건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지지와 응원이 있더라도, 자그마한 실수 하나로 신문과 뉴스를 장악하게 된다면, 과연 누가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평생 군인과 같은 지위 – 자유와는 거리가 먼 – 를 가지며 국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야만 했다. 전통과 전례를 지켜내는 것을 평생의 임무로 생각하고 사는 인생, 이를 감당하며 평생을 바치는 자리였기에 영국인들에게 여왕은 존경과 고마움의 대상이다. 

 

또한 영국인들에게 여왕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오작교로서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왕실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그럼에도 그런 의문들이 그동안 영국 사회에서 큰 흐름이 되지 못했던 건 갈수록 급변하는 사회에서 여왕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변하고, 달라져도 늘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 

 

여왕 엘리자베스는 “변하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상수(The One Constant in an Inconstant)”였고, 때문에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영국 왕실의 전통이 지금도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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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Netflix>

 

번외로, 한때 넷플릭스를 강타했던 ‘브리저튼’을 기억할 것이다. 이외에도 ‘엘리자베스 1세 골든 에이지(Elizabeth I, Golden Age)’나 ‘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Mary, Queen of Scot)’과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소품 등은 별도의 고증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도 영국 황실에서 그 시대 때 사용했던 관련 기구, 소품 들을 그대로 보존 중이고, 지금까지 사용하는 용품들도 다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 여전히 군주제를 유지하는 국가 중에서도 영국 왕실처럼 왕실 물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실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숭례문이 하루아침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수 백 년간 지속되어온 무형이든 유형이든 전통을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엘리자베스의 역할은 영국에게도, 영국인들에게도 남다르게 다가왔을게다. 

 

 

영국 사람들은 정말 여왕을 사랑하고 존경할까

 

여왕의 서거 후, 각 언론사는 그동안 준비해왔던 부고 관련 기사들을 보도했다. 사실 즉위 60주년이 지났을 즈음부터 여왕의 죽음이 10년 안에 올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측해 왔던 터라, 그간 그녀가 어떻게 즉위, 통치해왔는지에 관한 자료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영국 왕실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고 난 후, 수도 없이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여왕이 누군지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은 이들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령 70년 동안 왕위에 있었네, 16명의 총리를 거쳤네 등의 내용을 줄줄 외울 정도로 듣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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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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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런던 중심부에 여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광고판

출처-<AP>

 

하지만 한참 추모 분위기인 지금, 실제 영국인들의 마음이 정말 어떤지에 대한 기사가 영국 언론에서 나오기란 쉽지 않다. 좋은 방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현재 영국으로부터 나오는 뉴스로는 영국인들의 생각이 어떤지 담아내기는 어렵다. 

 

간혹 타국의 언론을 통해 각양각색의 목소리들이 귓가에 들려오긴 하지만, 충분치 않다. 그래서 알아봤다. 

 

“영국 사람들은 정말 여왕을 사랑하고 존경할까?” 

 

그렇다면 얼마나 그렇고, 아니라면 왜일까. 

 

 

사랑받았던 여왕, 왜?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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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민

출처-<AP>

 

다른 건 몰라도 여왕의 뚝심 하나는 제대로였다. 지난 기사(영국 정치썰을 풀어본다 : 1975년생 신임 총리는 왜 기대감 ZERO일까-링크)에서, 새롭게 영국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에 대해 국민들이 반신반의하는 가장 요인이 카멜레온같이 권력 구도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옮겨왔다는 점 때문이라 언급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중심이 없어 보이는 혹은 기준이 애매모호한 정치인이 신뢰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엘리자베스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있었다. 그것이 영국인들이 70년 동안 그녀에게 한결같은 응원을 보낸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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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남긴 마지막 사진 중 하나인 이 사진의 뒷모습이 

리즈 트러스 총리다. 여왕 서거 이틀 전 사진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상수’였던 엘리자베스의 뚝심은 정치적인 사안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삶 속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왕위를 물려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에드워드의 자녀들이 상속권에 우선순위를 부여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혼한 경력이 있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왕위를 내려놓고 떠났다. 왕이고 뭐고 필요 없고, 난 이 여자와 함께 살아야겠다는 애절한 사랑. 결국 에드워드 8세는 ‘전통을 지켜내느냐, 개인의 자유를 누리느냐’는 갈림길에서 자유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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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8세(우)와 윌리스 심슨(좌)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심슨은 에드워드 8세와

결혼하기 전, 두 번의 이혼을 했었다.

출처-<보그 코리아>

 

그로 인해 에드워드의 동생인 조지 6세 –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 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수줍어하고, 말주변도 없는 소심한 남자였다. 그런 성격의 영향일까. 그는 세계대전을 거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일찍 명을 다했다. 이런 상황을 거치며, 원래 전혀 왕권을 물려받을 위치가 아니었던 조지 6세의 맏딸 엘리자베스는 25세의 어린 나이에 여왕에 즉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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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의 가족사진. 

오른쪽 여자아이가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는 원래부터 영국 왕실의 공주로서의 삶은 살았지만, 전술했듯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나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영국 사람들이야 알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찰스 동생이 누구고, 엘리자베스 동생이 누군지 누가 알겠는가. 엘리자베스도 그런 관심 밖 인물이었다. 

 

하지만 왕위상속자가 된 후, 강인하고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조지 6세가 왕이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녀는 전장에 직접 참여하여 영국군을 위해 일했는데,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감안해보면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 자유로우며 강인하고 진취적이었던 그녀에겐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두 가지 선택길이 주어지게 된다. 

 

그 선택길에서 그녀는 에드워드 8세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국가적 소명을 받아들이고, 여왕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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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즉위식

출처-<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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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70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즉위할 당시, 어린 여자아이가 무슨 국왕이냐며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던 영국 의회와 여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것이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는데, 말하고자 하는 요는 간단하다. 애초부터 왕권과 거리가 멀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녀가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전통을 지켜내기 위한 도구로 기꺼이 자신을 헌신했다는 것이다. 

 

 

여왕의 뚝심과 외교 업적

 

나는 여왕에 대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철저히 지키고 살아냈다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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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Wanted in Rome>

 

“군림하는 것 자체가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통치를 안 하겠다는 다짐이 뭐 그리 대단한가?” 

 

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권력이 쥐어졌을 경우 더욱 그러하다. 주지하다시피, 영국 여왕에게는 영국의 총리를 임명할 권한이 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기 위해 여왕을 찾았을 때, (혹시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부할 수 있다. 법이 그렇다. 여왕이 거절하면 영원히 총리를 할 수 없다. 법을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싶겠지만, 해당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귀족원인 상원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귀족 중심으로 형성된 상원에서 해당 법안이 통과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이러한 권한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누구나 정치적인 의견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이 사람은 이런 이유 때문에, 저 사람은 저런 이유 때문에 자격이 되지 않겠다는 판단, 여왕은 왜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총리 임명권자임에도 끝까지 의회를 존중했고, 법으로 명시된 여왕의 권한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리이니만큼 여왕의 자리에 앉아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는 원칙, 즉 ‘군림하되 통치하진 않겠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쉬운 일 같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여 있다면, 질문 하나 하겠다. 본인이 국왕으로 있는데, 윤석열이 다수당 대표가 되어 총리로 임명해달라고 찾아왔다.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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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해 주실거죠~? 하핫~ 

출처-<국회사진취재단>

 

또한 영연방 국가(관련 연재 기사 ‘영연방 유지의 비밀’ 링크)들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현재 영국의 영향력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통치 행위는 총리가 담당하지만, 외교적인 부분에서 여왕이 맡은 업무 범위는 굉장히 넓다. 

 

지난 70년 간 여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연방 국가들을 순회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 힘써왔다. 특히 2011년에는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지난 역사 속에서 영국이 했던 과오들을 인정하며 아일랜드에 과도한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에 슬프고 미안하다는 메세지를 전하며 해묵은 갈등을 봉합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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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일랜드에 방문해 아일랜드 대통령과 함께

더블린의 ‘기억의 정원’에서

화환을 헌화하는 엘리자베스 2세

출처-<BBC>

 

물론, 그렇다하여 600여 년간 지배받았던 아일랜드의 분노가 쉽게 사그라들 수는 없겠다. 그러나 아일랜드(IRA)의 무장투쟁으로 친척인 마운트배튼 경을 잃었음에도 아일랜드에 사과를 했던 건 큰 외교적 성과였고, 이는 아일랜드의 무장투쟁이 종결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식민 지배를 당했던 우리 입장에서는 아일랜드의 무장투쟁 입장에서 더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다만 내가 속한 그룹이 먼저 잘못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으로 인해 나의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면,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기가 쉽지 않나. 위 내용에선 그런 관점에서 개인보다는 국가적 차원의 행동을 했던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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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만나 20살인 1947년, 여성 편력이 남달랐던 필립과 결혼한 엘리자베스는 2021년 99세의 나이로 죽은 필립을 그리워하며 죽을 때까지 한 남자만 사랑했던 애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인데, 이것 또한 그녀의 뚝심을 볼 수 있는 단면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여느 역사적 인물들이 그러듯, 그녀도 사랑스러운 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