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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이런 이유 때문이야. 우린 불가항력에는 굴복하지. 우린 밀이 아니라 메밀이니까. 폭풍이 불어오면 잘 영근 밀은 바짝 마르고 바람에 따라 휘지도 않기 때문에 쓰러지고 말아. 하지만 영근 메밀은 물기를 머금어서 잘 휘지.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메밀은 전과 거의 마찬가지로 곧고 튼튼하게 벌떡 일어서. 우린 목에다 힘이나 주는 족속이 아냐. 우린 유연하면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심한 바람이 불 때는 무척 잘 휘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린 그저 묵묵히 불가항력에 순종하고, 일하고, 미소를 짓고, 그러곤 기다려. 때문에 우린 훨씬 열등한 사람들하고도 어울리고, 그들에게서 받을 만한 도움을 얻어 내지. 그리고 힘을 충분히 얻게 되면 우린 신세를 졌던 사람들을 이용만 해 먹고 차버려. 그것이, 얘야, 바로 생존의 비결이란다. ···

-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中 발췌

 

중학교 시절이었을 거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별별 상상을 다 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 직전의 미국 남부는 ‘귀족’들이 사는 동네였고, 어쩌면 노예해방이 잘못된 일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했다(내가 오독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책을 읽다 보면 남부가 불쌍해 보인다). 북군은 야만적이란 생각(스칼렛의 집을 불태우려다가 결국 사령부로 사용하거나 하는 걸 보면) 까지 겹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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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레트와 스칼렛

출처-<링크>

 

소설의 기본 틀이 남부의 ‘재벌’들 간 로맨스다. 여기에 남북전쟁이란 시대상이 더해졌다고 보면 된다. 아침드라마 미국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스칼렛의 애슐리에 대한 로맨틱한 사랑.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현실적인 필요와 이끌림으로 레트를 두고 갈등하는 모습은... 따지고 보면 애슐리는 유부남이다. 스칼렛과 애슐리가 ‘육체적 관계’를 안 했다 뿐이지 이들은 이미 한참 전에 선을 넘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기에 선을 넘지 않은 거였지 애슐리는 일종의 썸을 탄 거고, 어장관리를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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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가 배경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에서 현재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작품이란

논란이 있기도 하다. 

출처-<링크>

 

1. 남북전쟁의 성격

 

한참 소설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된 남북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남북전쟁을 노예 해방전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이게 전쟁의 핵심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남과 북의 산업적 불균형에 의한 경제 전쟁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남북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라면, ‘노예해방’이란 숭고한 가치를 위해 60만이 넘어가는 백인들이 죽은 건 아니라고 본다. 물론, 흑인을 산업적으로 활용하거나 접촉하는 빈도가 남북이 엄청나게 차이 난 건 인정한다. 당시 흑인 전체 인구의 95%가 남부에 살고 있었고, 1%만이 북부에 살고 있었다. 흑인은 당시 남부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흑인이 없다면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업. 즉, 목화산업은 포기해야 했다. 만약 흑인 노예가 해방된다면? 남부 경제는 끝장나는 거였다.

 

남북전쟁은 최후의 근대전이며, 최초의 현대전이라 평하는 이들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나 나올 법한 라인 배틀(보병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 총질을 하는)을 했지만, 하늘에는 열기구가 날아올랐고, 바다에는 철갑선과 잠수함이 떠다녔다. 캐틀링 건이 등장해 분당 200발의 탄환을 쏟아 부었고(물론, 그 효용성에 대해선 말이 많았지만), 각각 저격 연대와 대대를 운영하며 저격전을 벌인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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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당시 미국. 

파란색-북부 연합, 빨간색-남부 연합

그 밖에 경계주들과 연합에 속하지 않았던 영토

출처-<링크>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기괴한 전쟁이었다고 해야 할까?

 

"구시대의 막내인가? 아니면 새 시대의 장남인가?"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해전에 있어서만은 새 시대를 열었던 것이 남북전쟁이다."

 

라는 거다.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고 해야 할까? 최초의 철갑선과 철갑선끼리의 전투. 바로 햄프턴 로드(Hampton Roads) 전투 한 번으로 전 세계 해군은 해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했다. 이후 항공모함이 등장하여 해전의 주역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 전함이 해전의 주역이 됐다. 이 전함의 효시가 되는 것이 바로 북군의 철갑선 ‘모니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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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프턴 로드 전투

 

2. 뚫느냐 뚫리느냐의 싸움

 

남북전쟁 해전의 양상은 아주 간단했다.

 

"남부 연합의 해상 수송 루트를 어디까지 막을 수 있느냐?"

 

"북군의 해상봉쇄망을 어디까지 뚫을 수 있느냐?"

 

이게 전략의 핵심이었고, 남북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주요한 전장이 됐다. 당시 남부는 공업 생산력에 있어서 확실히 북부에 뒤졌다. 남부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는 농업지대였다. 이들은 목화를 생산해 수출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들이 필요한 물자를 수입했다.

 

북군이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소총을 찍어낼 때 남군은 영국 엔필드 소총을 수입해 사용했다(명중률은 엔필드 쪽이 훨씬 더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해상 수출입 루트만 막아내면, 북부는 승리할 수 있는 거였다. 이 사실은 북군도, 남군도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해군을 모아서 해상루트 차단에 들어가게 된다. 너무도 당연한 거다.

 

"적의 보급로를 끊으면, 전쟁에 승리한다."

 

란 기본공식을 그대로 따라간 거다. 이렇게 되니 버지니아주의 햄프턴 로드 연해는 북군의 군함으로 가득 차게 됐다.

 

대서양을 넘어온 영국의 물자는 햄프턴 로드를 따라 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길목이 막혀버린 거였다(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는 원래 담배와 노예 거리의 중심지였다. 19세기 중반에 철도가 놓이면서부터는 상업과 산업이 발달 돼 남부 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노예 거래의 중심지가 남부 연합의 수도가 됐다는 게... 너무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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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연합이었던 버지니아주

 

북군이 이렇게 햄프턴 로드를 막아서자 남부의회는 즉각 이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게 된다.

 

"북부 놈들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서는 철갑선밖에 답이 없다. 해외에서 철갑선을 사 와라. 돈은 얼마든지 줄게!"

 

"해외에서 사 오는 건 사 오는 거고, 당장 지금 쓸 수 있는 철갑선이 필요해! 적당한 목선에다가 철갑을 두르도록 하자고... 그 예산도 따로 책정해 줄 테니까 어서 빨리 배 개조해! 지금 이대로 손 놓고 앉아있다간 북부 놈들한테 말라 죽게 생겼어!"

 

(거북선을 논외로 한다면) 최초의 철갑선은 1859년 프랑스 해군이 진수한 라 글루아르(La Gloire)였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861년 북군이 남부 연합의 해상봉쇄를 시도하자 남부가 서둘러 배를 찍어내게 됐으니, 바로 철갑선 버지니아 호(CSS Virginia)였다.

 

사족. 거북선이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거 같은데, 여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개인적으론 철갑을 두르진 않았을 것이란 판단이다. 잘해봐야 동판을 등에 둘러칠 정도? 철과 동은 당시엔 전략물자로 분류할 정도로 중요한 물자였다. 만약 거북선을 만들 때 철갑을 둘렀다면, 분명 난중일기나 다른 기록에 나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관한 기록이 없다.

 

3. 남부 연합이 철갑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부는 애초 목선이었던 메리멕호(Merrimack)에 장갑을 두르기 시작한다. 겉모습만 보면 기괴하게 보일 거다. 연안에서 날아오는 포격을 견디고, 북부의 봉쇄를 두들겨 부술 수 있도록 설계한 거라 지금 기준으론 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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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중인 메리멕호(Merrimack)

 

"뗏목 위에 다리미 얹은 거 같은데?"

 

이런 말이 나올 거다. 4인치 두께의 장갑판으로 온몸을 감쌌지만, 흘수선 아래는 목재 상태 그대로였고, 선체를 최대한 많이 물에 잠기게 했다(피탄 면적을 줄이기 위해서). 포를 설치할 포곽에는 두꺼운 장갑을 둘러쳐서 모든 포격을 다 튕겨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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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멕호를 개조해서 만든 남부의 CSS 버지니아.

참고로 CSS는 Confederate States Ship,

즉, 남부 연합 배를 뜻한다.

 

남부 연합이 이렇게 철갑선을 만들고 있을 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북부는 완전 패닉 상태에 돌입한다(당시에 북부의 스파이들이 이 소식을 전달해 줬다).

 

"어쩌지? 남부 놈들이 철갑선을 만든다는데? 이대로 해안 봉쇄선이 뚫리는 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저쪽이 철갑선을 만들면 우리도 철갑선을 만들어야지!"

 

남부 연합이 철갑선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북부도 바로 철갑선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