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선을 만든다고 결정을 내렸지만, 결정권자가 철갑선을 만드는 건 아니었다. 당시 실무진이었던 해군들은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남부 놈들이야 햄튼 로드 봉쇄망을 뚫을 생각만 하면 되잖아? 근데 우린 이걸 막아야 하는데... 이거 골치 아프네.”
남부 연합이야 뚫을 생각만 하면 되니까 돌파에 최적화된 철갑선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북부는 이걸 막아야 했다. 막는 입장이다 보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부는 세 종류의 철갑선을 만들기로 결정하게 된다. 시티급, 아이언사이드급, 모니터, 이 세 종류의 함을 만든 거다. 이 중 모니터는 연안포함형으로 개발된 철갑함이다. 즉, 강이나 얕은 바다같이 수심이 얕아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곳을 찾아가 포격을 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배란 소리다.
북군의 철갑선 뉴아이언사이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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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호는 스웨덴의 괴짜 발명가인 존 에릭슨이 설계했다. 당대 최고의 기계 발명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에릭슨은 해군을 위해 외륜선보다 빠른 2축 스크류 추진 구조나, 강철 돔을 덮은 포탑 등을 개발한 전적이 있었다.
모니터 모델을 손에 들고 있는 뉴욕 배터리 파크의 존 에릭슨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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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존 에릭슨은 1840년에 큰 봉변을 겪는데, 해군이 시연하던 포가 폭발하는 바람에 장관 두 명을 포함해 여러 명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해군은 사고가 배 위에서 일어났다며 배 설계자인 에릭슨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려 했고, 해군과 에릭슨의 관계는 갈라진다.
1. 링컨의 결단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에릭슨은 링컨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선체를 철판으로 둘러싼 군함을 만들면 적군이 쏘는 포격에도 타격을 입지 않을 거다. 한 마디로 무적의 전함이 되는 거다!”
이 내용을 본 링컨은 에릭슨을 불렀고, 에릭슨은 해군 장성들 앞에서 신형 전함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됩니다. 100% 됩니다. 안 되면? 제 오른손을 걸겠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함께 있던 해군 장성들은 딴지를 걸었다.
“이거 무게가 너무 나가서 그냥 가라앉을 게 뻔합니다.”
“이 자식 사기꾼입니다. 이런 배가 뜨기나 하겠습니까?”
“철갑선이 아니라 잠수함을 만드는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에릭슨을 무시했고, 에릭슨이 설계한 철갑선을 폄하했다(이 배가 모니터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이 모니터 군함의 디자인을 살펴본 후.
“이거 나름 쓸모 있을 거 같은데?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만들어 볼까?”
해군 장성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계약 조항에는 부칙 조항이 하나 붙어 있었다.
“만약에 이 배가 제 몫을 하지 못하면 제작 경비를 모두 토해내야 해 알았지?”
이렇게 계약하고 나온 에릭슨은 그 길로 뉴욕으로 가 100일도 안 걸려 모니터호를 건조하게 된다.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은데, 북군의 철갑함 건조를 만지작거릴 때, 남부 연합이 버지니아를 건조하자 황급히 에릭슨을 찾아 모니터함의 건조를 승인한 건 사실이다)
모니터함의 전체 모습과 단면도
2. 박치기에 녹아내리다
어쨌든 전쟁은 시작됐고, 1861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북군은 버지니아 앞바다, 햄튼 로드 일대의 주요 항구와 만을 봉쇄해 버렸다. 당연한 전략이었고, 누구나 예상했으며, 가장 효과적이었다.
공업력이나 경제력, 인구에서 남부를 압도했던 북부가 보급로까지 끊어버린다면 남부가 이길 방법은 없었다(이게 이해가 안 가는 게 남부가 이런 악조건 속에서 4년 이상 버틴 게 신기한 거다). 남부는 전쟁을 이어 나가려면, 이 봉쇄망을 풀어야 했다.
시간은 북군 편이었다. 칼을 뽑아 든 건 남부 연합이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 남군의 버지니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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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3월 8일 버지니아호가 출격하게 된다. 북군은 최초, 3척의 전함이 버지니아호를 상대했다. 첫 희생자는 북군의 전함 콩그레스(Congress)호였다. 버지니아호를 발견하자마자 미친 듯이 함포를 발사했지만, 이 포탄들은 버지니아호를 뚫지 못했다. 반대로 버지니아호의 9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다.
콩그레스호는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됐다.
이다음 희생자는 그 옆에 있던 북군의 전함 컴버랜드(Cumberland)호. 충각(선박의 선수와 선미에 장착하여 선박과 충돌할 시 상대 선박을 부수는 데 쓰인 무기) 공격으로 격침했다. 컴버랜드를 격침한 버지니아는 도망가는 콩그레스를 쫓아가 마저 격침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북군은 전함 세척을 추가로 투입했지만, 이 중 한 척인 미네소타(Minnesota)호가 기동하던 중 모래톱에 좌초돼 버렸다. 등장하자마자 퇴장하게 된 상황이 된 거다.
3. 철의 전쟁
이날 해군 장관이었던 기드온 웰스(Gideon Welles)가 이 소식을 들고 백악관을 찾아갔다.
기드온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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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장관 말로는 우리 쪽 전함 2척이 격침됐고, 1척이 채 힘도 써보기 전에 좌초됐다는 소리네? 내가 잘 이해한 거 맞지?”
“네”
“철갑선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렇습니다.”
“상황이 심각한가?”
“만약 미네소타까지 마저 격파한 다음 포토맥강을 타고 올라와서 워싱턴을 포격하면...”
“여기가 위험하다는 소린가?”
“아니면, 북쪽으로 올라가 뉴욕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 방법은 없나?”
“모니터호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스탠턴은 모니터에 포 2문만이 달린 걸 알고는 노발대발했었다.
“아니, 버지니아는 9인치 포가 12문이나 달려있는데... 겨우 포 2문? 거기에 희망을 걸자고? 미친 거 아냐? 우린 우리끼리 플랜 B를 준비해!”
당시 스탠턴은 버지니아가 모니터를 격파할 걸로 예상하고, 포토맥강에 방어망을 치라고 길길이 날뛰었었다.
“버지니아호가 포토맥강을 거슬러 올라올 확률이 높으니까... 그래, 작은 배 60척 정도에 돌을 가득 채운 다음에 가라앉혀. 포토맥강 하구에다 배를 가라앉히면 버지니아호가 넘어오지 못할 거야.”
스탠턴은 당시 해군 제독이었던 존 달그렌(John A Dahlgren)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존 달그렌은,
“이 명령을 이행할 순 없습니다.”
“뭐야, 너 내 명령을 거부하는 거야? 명령 불복종이야 이건!”
“... 당신은 내 직속상관이 아니므로 명령을 이행할 수 없습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버지니아호를 어떻게 막을 건지에 대해 옥신각신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책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건 기드온 웰스의 말처럼 모니터호가 전부였다.
이 당시 모니터호는 버지니아호가 움직인다는 첩보를 듣자마자 출항을 한 상태였다. 버지니아 호가 북군을 공격하기 3일 전 뉴욕항을 떠나 두 번에 걸친 폭풍을 무사히 넘기며 햄튼 로즈 연해로 달려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당시 모니터호의 함장이었던 존 워든(John L. Worden)은 선원들을 굴려 가며 3일 만에 햄튼 로드까지 갈 수 있게 했다.
그렇게 1862년 3월 9일 모니터는 버지니아호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모래톱에 걸려 꼼짝할 수 없었던 미네소타를 잡기 위해 버지니아가 접근했으나 원체 수심이 얕고, 게다가 간조까지 겹치면서 미네소타에 접근하지 못해 빙 둘러서 가야 했던 버지니아. 겨우 미네소타 앞에 설 수 있었다고 좋아했는데, 그 앞에 모니터가 나타난 거다.
북군 모니터함과 남군 버지니아함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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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철갑선 대 철갑선의 전투가 시작된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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