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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Q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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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예출판사>

 

 

루쉰이 아Q정전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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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에는 꽁꽁 묶인 사람이 가운데에 있고 그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멍청하게만 보였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묶여 있는 사람은 러시아군을 위해 첩자 노릇을 한 자로서 일본군에게 잡혀 공개 처형을 당하는 것이며 주위에 있는 군중들은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루쉰의 ‘자서(自序)’ 中 -

 

이것이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에 유학 중이던 청년 ‘루쉰(魯迅)’이 타국의 영화관에서 만난 그리운 중국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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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는 기존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중국은 변화하지 못했다. 이 큰 나라는 단지 서구 열강들의 맛있고 거대한 먹잇감일 뿐이었다. 이러한 조국의 모습 앞에서 루쉰이 찾은 해결책은 ‘양무(洋務, 서양 학문에 힘씀)’였다. 루쉰은 의사가 되기로 했다. 서양 의학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유신이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3년 서리를 맞은 사탕수수, 귀뚜라미 한 쌍(그것도 본래의 짝)’ 등의 ‘귀한 약재’를 먹고도 죽어야 했던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타국 땅의 영화 속에서 만난 중국인의 모습이 그의 결심을 바꾸었다. 루쉰은 깨달은 것이다.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것 따위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무지몽매’라는 중국과 중국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은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이 우매하면 아무리 체격이 건장하고 우람해도 무의미한 공개 처형의 관중 노릇밖에는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 루쉰의 ‘자서(自序)’ 中 -

 

쇠로 된 방에 갇혀 있는 중국인들, 곧 죽을 예정이지만 혼수상태에 있어서 고통조차 못 느끼는 무지몽매한 사람들. ‘아Q정전’은 루쉰이 이러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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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1881-1936)

중국의 대문호로 근현대 중문학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근현대 중문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위대하게 평가받는다.

 

 

신비의 인물 아Q

 

성문 바깥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 ‘웨이쫭’이 ‘아Q’의 생활 터전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누구도 아Q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Q가 이름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최초로 누군가가 그를 아Q라 불렀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아Q에게 일을 시켜야 하거나 무료한 시간을 달래 줄 놀림감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그에게 어떤 관심도 없었다. 아Q 역시 자신의 과거나 행적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에 아Q라는 호칭을 빼고는 모든 것이 베일에 쌓여 있었다.

 

딱 한 번,  아Q가 자신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옛날에는 너희들보다 훨씬 나았다고! 네놈들이 도대체 뭐길래 이러는 거야!”

 

훨씬 잘 살았어.PNG

출처-<문학동네>

 

웨이짱의 촌놈들과 다툴 때 아Q가 내뱉은 말이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가 한때는 대단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돈 적도 있었으나, 오래가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아Q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한 사건 때문에 아Q의 성이 원래는 ‘짜오(趙, 조)’가 아닌가 하는 말이 돌았다. 사건은 이랬다.

 

웨이짱 마을 타이예(太爺태야, 지방 顯官현관의 존칭)의 성은 ‘짜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짜오타이예’라 불렀다. 어느 날 짜오타이예의 아들이 ‘수재(秀才)’에 급제했을 때였다. 마을이 징과 꽹과리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때 아Q는 취해 있었다.

 

그때 아Q는 황주(黃酒)를 두어 사발 마시고 있었는데 신이 난 그가 손짓 발짓까지 해가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즉 이번 일은 자신에게도 커다란 영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짜오타이예와는 사실 일가로서 엄밀히 따지면 자신이 수재보다 3대나 위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아Q의 옆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이 말에 숙연해졌고 아Q에게 존경심까지 표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Q가 짜오타이예 나리에게 뺨을 두들겨 맞고 자신을 끌고 온 ‘띠빠오(地保지보, 지방관리)’에게 2백 문의 돈을 뜯기고 나자, 아Q의 성이 ‘짜오’가 아닐까 하는 말들도 곧 사라졌다.

 

어쨌거나 이래서 아Q는 신비의 인물이었다.

 

 

아Q가 사는 법

 

아Q는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했다. 보리를 베거나 벼를 찧을 때 일손이 달릴 때나 짜오타이예 나리의 집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아Q는 직업을 얻었고 그 외에는 무직이었다. 그의 거처는 마을 밖 사당인 ‘토곡사(土谷祠, 토지신을 모신 사당)’였다. 비와 이슬만 피한다면, 그는 토곡사 안에서 편하게 잠을 잤다.

 

마을 사람들이 아Q에 대해 모르는 건 많았지만, 제일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자존심이다. 한때 대단했던 사람일 수도 있었고, 짜오타이예의 아들인 수재보다 3대 위일 수도 있는 아Q였다. 그리고 아Q는 마을 촌놈들과 달리 번화한 성내를 몇 번 들락거린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자존심은 매우 강했다.

 

그렇기에 아Q는 부스럼 때문에 생긴 머리 위 탈모 흉터에 대한 놀림만큼은 참지 않았다. 심지어는 ‘빛나는’이라는 뜻을 가진 문자들조차 신경질적으로 싫어했다. 이것이 웨이짱의 건달들에게는 참으로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건달들은 일부러 아Q만 보면 낄낄거리면서 ‘밝아졌는걸!’이라며 놀려댔다. 

 

‘째려보기’는 아Q가 개발한 마지막 무기였으나 건달들에게는 이조차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Q가 째려보면 오히려 아Q의 변발을 낚아채 담벼락에 쥐어박았다. 이때마다 아Q는 “아이들에게 맞은 거라고. 요즘은 정말 말세라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자신을 달랬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스스로가 만족스러워 득의양양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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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마저도 들통났다. 건달들은 “이건 애가 어른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것”이라 말하며 아Q를 두들겨 팼다. 아큐는 자신을 ‘버러지’라고 말하며 이 폭행으로부터 벗어나곤 했다. 아Q의 자존심 외에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 몰랐던 또 하나가 있었다. 아Q가 자신을 ‘버러지’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는 스스로를 자기 비하의 제1인자라 여겼다. ‘자기 비하’란 말만 빼면 어쨌든 ‘제1인자’가 된다. 장원급제도 ‘제1인자’ 아닌가!

 

그러하다. 정신 승리. 이것이 웨이짱 촌놈들 틈에서 아Q가 사는 법이었다. 아Q가 늘 이기기만 하며 살 수 있는 비법이었다.

 

 

아Q의 첫 연애

 

그날은 아Q가 유난히 운이 없던 날이었다. 평소 만만히 보았던 ‘왕후’에게도 두들겨 맞았고, 성내 양학당(洋學堂)에 다니는 치엔(錢전)가의 큰아들에게도 잊지 못할 만큼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아Q는 그를 ‘가짜 양귀신, 외국놈과 내통한 자’라며 경멸하고 있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그리했었는데, 그날은 왕후에게 맞은 것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했고, 그것을 치엔가의 장남이 들어 그에게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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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따위 일들이 아Q의 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절대 지지 않는 아Q가 아닌가. 아Q가 술 한 잔 들이키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망각’이라는 특효약에 힘입어 다시금 득의양양할 때였다. 저쪽에서 마을 비구니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Q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아Q는 비구니에게 시비를 걸고 희롱했다. 그 모습에 주점 안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자 아Q는 더욱 신이 났고, 왕후와 가짜 양귀신에게 두들겨 맞은 것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잔뜩 고조된 기분 탓에 아Q는 반항하는 비구니의 뺨을 꼬집기까지 했다. 그날 밤, 아Q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이 이상하게 느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아Q가 창극을 보며 슬쩍 여자 다리를 만져 본 이후 처음으로 느껴본 여성의 피부 촉감이었다. 그리고 아Q의 귀에는 ‘씨도 못 받을 놈 같으니라고......!’란 비구니의 외침이 맴돌았다.

 

“맞아! 여자가 있어야 해. 씨가 없다면 누가 밥을 먹여줄 것인가! 여자는 반드시 있어야 해. 불효 중에서도 가장 큰 불효는 자식이 없는 것이다. 귀신도 후손이 있어야 제사라도 받을 것 아닌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Q의 스승은 현명한 사람이었기에, 아Q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예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아Q는 생각이 바뀌었다. 예교(禮敎)보다 중요한 것이 ‘효(孝)’이며, 자손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효의 도리라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Q가 짜오타이예의 집에서 하루 종일 벼를 찧을 때였다. 그 집의 유일한 하녀 ‘우마’가 다가왔다. 순간 아Q의 머릿속에는 ‘여자!’란 단어가 떠올랐다. 아Q는 우마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너 때문에 미치겠어! 미치겠다고!”라 외쳤다. 잠시 적막이 흐르는가 싶더니 우마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그리곤 울음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아Q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머리를 찍어눌렀다. 아Q가 3대 후손이라 여겼던 수재가 휘두르는 몽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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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트앤스터디>

 

‘퍽퍽!’하고 연이어 몽둥이가 날아와 아Q의 머리통과 머리통을 감싼 손가락을 두들겨댔다. 수재는 표준어인 관화로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욕을 하며 계속 몽둥이를 휘둘렀다. 난생처음으로 표준어 욕을 들은 아Q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직도 그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이 말은 관가에 출입하는 사람들만이 사용하던 말로서 웨이쫭 같은 시골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그랬던 만큼 아Q로서는 훨씬 더 무서웠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여자’에 대한 생각도 싹 가셨다.

 

아Q의 첫 연애는 이렇게 끝났다. 무지막지한 구타와 함께 그나마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바치고서야(심지어 유일하게 값나가는 솜이불마저!) 소란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아Q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Q가 심지 굳세고 지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굶주림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Q는 구걸까지 했으나 굶주림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 굶주림이 아Q를 생애 처음으로 도전이란 것을 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아Q는 무서운 개에게 쫒기면서까지 훔친 무 세 개를 먹으며 결심했다. 

 

‘젠장 이곳은 별 볼 일 없어. 역시 성내보단 못하다고......’ 세 개의 무를 다 먹었을 무렵, 그는 이미 성내로 갈 것을 결심했다.

 

 

돌아온 아Q는 옛날과 달랐다

 

웨이쫭에  아Q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중추절을 갓 넘기고서였다. 사람들은 아Q가 돌아왔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들은 놀라움과 기이한 눈빛으로 과거 그의 행적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단 말인가?

 

다시 돌아온 아Q는 옛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허리춤에는 은전과 동전이 들어 있었고 그는 외상이 아닌 현금으로 술을 마셨다. 마을 사람들은 ‘선비는 사흘만 못 봐도 괄목상대해야 한다’는 옛 성인의 말을 되뇌이며 아Q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Q는 현금뿐만이 아니고 ‘남색 비단 치마’같은 값비싼 물건들도 갖고 있었다. 비록 중고였으나 통 큰 아Q가 워낙 헐값에 팔았기에 마을 여자들은 아Q를 만나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섰다. 짜오타이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들이 아Q를 보고 도망치던 것은 예전의 전설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Q가 마을 사람들과 품격이 다른 존재가 된 것은 그가 ‘혁명(신해혁명)’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아Q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혁명당의 처형을 직접 본 사람이 되었다. 아Q가 처형 장면을 흉내 내며 오른손을 들어 왕후의 목덜미를 후려쳤을 때, 왕후는 겁에 질려 며칠간이나 머리가 쑤셨다. 예전에 아Q를 두들겨 팼던 왕후였건만 이제는 감히 아Q 옆에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당시 웨이쫭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아Q의 지위는 짜오타이예를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의 대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엣헴.PNG

엣~헴!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은 가히 아Q를 위한 말이 되었다. 그러나 통 크고 솔직 담백한 아Q의 인격이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Q와 달리 소인배들이었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성안에서 ‘거인(擧人, 명청 때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 나으리 댁의 일을 봐주었다고 계속 뻥치면 될 것을, 아Q는 건달들에게 숨김없이 사실을 말하고야 말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막 꾸러미 하나를 건네주자마자 왕초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함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Q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성을 빠져나와 웨이쫭으로 도망쳐 왔다.

 

마을 사람들은 아Q가 큰도둑이 아닌 좀도둑이라는 사실 앞에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볕이 든 쥐구멍의 주인이 직접 훔친 쥐가 아닌 망 봐주다가 도망친 쥐라는 사실 앞에서 빠르게 아Q에 대한 존경심을 거두어들였다.

 

 

아Q의 최후

 

혁명당에 대해 어떤 자는 오늘 밤에 성내에 진격할 것이라고 했으며 흰 투구와 흰 갑옷을 입고 총쩡(崇正) 황제를 기린다는 뜻에서 소복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는 ‘웨이쫭’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마저도 외면하지 않았다. 백리 밖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성내 거인 나리가 혁명당을 피해 밤에 배를 몰고 짜오가의 부두로 피신해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렸고 웨이쫭의 민심도 흉흉해 질 때였다. 오직 한사람만 다른 반응이었다. 아Q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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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도 나쁘지는 않지.”

 

아Q는 요즘 궁했던 참이라 불만이 많았다. 더구나 거인 나리는 물론이고 짜오타이옌과 수재, 가짜 양귀신까지도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며 혁명당에 동경심마저 생겼다. 낮에 빈속에 마신 두어 사발의 술까지도 아Q를 부추겼다. 아Q는 “반역이다! 반역!”이라며 득의만만하게 외치고 다녔고 그런 아Q를 다들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짜오타이예마저 겁먹은 표정으로 아Q를 부를 때 ‘라오(老, 상대방을 공손히 부르는 말)Q’라고 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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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이다! 반역~

 

어느 날 밤, 아Q가 외상술을 두어 사발 마시고 신을 낼 때였다. 술기운에 아Q 마음속에서 흰 투구 조각들이 어른거릴 때였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아Q는 왁자지껄한 곳이나 (자기와 상관없는) 이것저것을 참견하기 좋아했다. 그래서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누군가가 ‘짜오 가’가 약탈당했다고 소리쳤다. 흰 투구에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짜오 가’에서 연신 상자와 가구들을 끌어내고 있는 것을 아Q는 보았다. 왠지 겁이 난 아Q는 도망쳐 토곡사로 돌아가 대문을 닫고 공상의 나래를 펴다가 잠이 들었다.

 

아Q가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일단의 군대와 경찰들이 웨이쫭을 덮쳤고 아Q는 성내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감옥 안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체포된 이유를 묻는 그들에게 아Q는 자신도 이유를 몰랐지만 모반을 꾀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뿌듯해했다.

 

그러자 긴 적삼을 입은 자가 종이와 붓을 갖고 와  아Q의 면전에 내밀고는 붓을 손에 쥐어주었다. 아Q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혼비백산’할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손으로 붓을 쥐기는 난생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대청으로 끌려온 아Q에게 대머리 영감이 패거리들은 어디 있냐고 물었지만 아Q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대머리 영감의 지시를 받은, 긴 적삼을 입은 자가 아Q에게 종이를 내밀며 서명하라고 했다. 아Q는 글을 모르기에 어쩔 줄 몰랐다. 적삼을 입은 자는 손으로 종이 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동그라미라도 그리라고 했다. 아Q는 최선을 다해 원을 그렸지만, 붓이 익숙하지 않아 그만 붓을 놓쳤고 동그라미는 호박씨 모양처럼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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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는 뚜껑 없는 수레에 실려 총을 맨 병정들과 함께 성내 거리를 돌았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짜오타이예의 하녀 ‘우마’도 있었다. 아Q는 노래 한 구절을 불렀고 구경꾼들은 박수를 쳤다. 아Q는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아Q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두 눈은 캄캄했고 귀에서는 육신이 먼지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웨이쫭의 사람들은 아Q가 나빴다고 말들을 했고, 성내의 여론은 그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이유는 총살이 머리를 치는 것보다 볼 만하지 않았다는 것과, 사형수가 거리를 돌며 창극의 노래 한 구절도 부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Q의 최후를 본 사람들은 헛걸음을 했다며 푸념했다.

 

 

죽어야 해결되는 무지몽매한 인생

 

“더 나아가 나는 자연 선택이 이 변화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주된 방법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찰스 다윈’의 명저 ‘종의 기원’ 서문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무지몽매한 인간의 마지막을 다룬 ‘아Q 정전’을 읽고 나서 ‘종의 기원’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신화, 전설, 종교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무지를 깨뜨린 최초의 책이 ‘종의 기원’이니 말입니다. ‘자연 선택’은 ‘종의 기원’의 핵심 개념입니다. 이것은 곧 ‘자연 도태’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종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적응에 성공한 종들만이 자연의 선택을 받아 살아남아 자손을 남긴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의 변화가 종들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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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종의 기원

 

인간사회라는 자연계 속을 살아가는 각각의 인생들에게도 이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인간사회는 스스로 노력해서 변화된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이들만 살아남는다는 적극성이 더 포함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사회에는 자연 선택이 오히려 더 냉정하고 준엄하게 적용됩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변화하는 시점의 중국이나 중국인 ‘아Q’의 운명이 그 증거입니다. 세계사적인 변화 속에서 중국은 과거의 영광에만 매몰되어 있다가 열강들에게 물어뜯기는 신세가 되었고, 불쌍한 아Q는 변화를 따르기는커녕 아예 정신승리와 자기위로라는 퇴행적 사고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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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시스>

 

국가 혹은 개인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무지’ 때문입니다.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해석하여 올바른 삶의 방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해 줄 지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자신의 생각과 지식에 대해 겸손해야 하며, 유튜브나 언론이 전하는 소식과 누군가의 말에 비판적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이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변화가 무지를 일깨울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겸손함이 없으니 자신의 낡은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조언에는 화를 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 생각합니다. 생각이 닫혀 있으니 자신의 판단과 인생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객관적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자기 합리화의 길로 들어갑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인정받는 듯한 말이라도 들으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열광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방법이 ‘정신 승리’이고 ‘노예 근성’입니다. 파멸과 몰락이라는 결과 앞에서 오직 ‘자위’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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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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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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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주기가 100년 단위에서 10년 단위로, 이제는 1년 단위로 바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한 인생의 해결책은 더욱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죽어야 끝나는 고질병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윗글의 ‘아Q’처럼 죽으면서도 알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열여덟 번째로 ‘아Q’의 인생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이 순간 제가 해야 할 일이 떠오릅니다. 우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을 동그랗게 그립니다. 이것이 ‘나의 집합’입니다. 그리고 윗글에 나온 아Q의 인생도 동그랗게 그립니다. 이것은 ‘아Q의 집합’입니다.

 

‘나의 집합’과 ‘아Q의 집합’, 두 집합 사이의 교집합을 살펴봅니다. 이 교집합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내 인생과 아Q의 인생은 닮은 꼴이 됩니다. 그럴수록 더 많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가련한 아Q를 생각하면서 눈물이 났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상대도 못 하는 중국인들을 묘사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디 중국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아Q는 수많은 현대인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아Q를 향한 ‘비구니의 저주’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아Q에게는 후손이 있었으며, 그 후손이 번창하여 많은 자손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아Q인가 아닌가’, ‘내가 아Q가 아니라면 얼마만큼이나 다른가.’ 이러한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지며 열여덟 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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