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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만화에 관해 추억이 있을 걸로 안다. <뱀>, <베라>, <베로>나 <타이거 마스크>, <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또는 <슬램덩크>나 <이나중 탁구부>, <은하철도 999>,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아니라면, <드래곤 볼>이나 허영만의 <날아라 슈퍼보드> 같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봤으리라. 아니라면 <진격의 거인>이나 <기생수>, 혹은 <세일러문>이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아키라> 같은 만화 가운데 하나 정도는 봤으리라 믿는다. 고우영의 <삼국지>, <수호지>, 이두호의 <머털도사>, <째마리>, <덩더꿍>, <임꺽정>, <객주>허영만의 <각시탈'>, <식객> 가운데 하나 정도는 보셨겠지? 안 봤다고? 19세기에서 오셨나? (...아니면 워낙 젊어서일 수도 있다).

 

만화는 현실 밖의 다양하고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준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가볍고 유쾌한 만화를 보려고 <이나중 탁구부>를 선택한 당신은 배꼽이 빠질 정도로 침을 흘리며 웃다가 이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가 찾아본다. 후루야 미노루 작가의 작품을 더 찾아보다 <두더지>를 보고는 도저히 같은 작가가 그린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어 충격에 빠질 테다.

 

이두호·이희재·최규석·윤태호·오세영·다니구치 지로·박흥용처럼 '리얼리즘'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이토 준지처럼 공포와 호러의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있다.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가는 독자의 취향이지만, 지금 소개하는 작가는 한국은 물론, 세계 그래픽 노블 작가 가운데서도 눈여겨봐야 할 작가가 분명하다.

 

그래픽 노블 작가 가운데는 한 가지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외국 작가로는 '조 사코'가 있는데, 그는 '코믹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가다. 주로 팔레스타인과 중동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보스니아 내전을 그린 '안전지대 고라즈데',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다룬 '팔레스타인', 1956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을 다룬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같은 작품은 어떤 역사책, 사회과학책보다 독자의 심장을 강하게 울린다.

 

한국에서는 그래픽 노블 작가는 물론, 만화가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의 근현대사를 깊게 파고드는 작가가 있다. 흑백 판화 이미지로 유명한 박건웅 작가다. 박건웅의 작품은 대개 충격적이고 놀랍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유독 한국 현대사의 핵심만을 다루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다(사족. 그는 박근헤 정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 3개 중 2개에 들어가서 2관왕이기도 하다).

 

박건웅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뛰어나고 훌륭하다. 그의 그림과 표현 방식은 많은 경우, 판화적 표현 기법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흑백 판화는 표현의 강렬함과 함께 이미지가 드러내는 상징성이 탁월한 기법이다. '흑과 백'은 '선과 악'의 구도이자 '적과 아군'을 상징한다. '생과 사'를 드러내는가 하면,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지옥과 천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백 그림은 잔혹하고 처참한 사실적 묘사를 지우는 대신, 역사와 진실에 더욱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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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슈피겔만 <쥐>, 조 사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이나 파올로 코시 <메즈 예게른>처럼 엄청난 학살을 다룬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 근현대사는 세계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투쟁과 비극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충격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여명의 눈동자>, <태백산맥>, <토지> 같은 작품들이 근현대사의 상황을 긴 호흡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만화는 박건웅 작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현대사를 깊이 파고들어 만화로 창작하는 작가가 없었다(고 알고 있다).

 

박건웅 작가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어두운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독자들도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게 힘들고 괴로울 정도의 내용을 박건웅 작가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한 컷, 한 컷 정성을 다해 완성도를 높이는데, 그가 이렇게 비극과 고통의 역사를 마주하는 힘에 관해 MANAGA 2호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고교 시절, 학교 옆의 통합병원에서 사망한 군인의 시신을 처리하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일을 하는 게 무섭지 않냐고 여쭈니, 불쌍한 젊은이들을 잘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데 뭐가 무섭냐며 이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할 거라고 무심히 말하더군요."

 

박건웅 작가가 지금까지 창작한 현대사를 다룬 만화(그래픽 노블)를 역사의 시간 순서로 다시 배치해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꽃 4부작

 

이 작품은 박건웅 작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4부작, 네 권으로 완성한 '꽃'은 그의 데뷔작이자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다. 데뷔작을 대하 역사 서사물로 완성한 것도 놀랍지만, 20대 후반에 시작해 30대 초반에 이르는 5년 동안 꼬박 이 작품에 매달려 1,1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완성한 노력과 정성은 작가의 재능과 함께 한국 만화 역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이다.

 

모두 네 권으로 구성한 '꽃'은 조금 독특한 구성이다. 1권은 대사가 전혀 없는 만화로, 감옥에 갇힌 한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독자는 이 노인의 회상으로 들어가 노인의 과거를 들여다본다. 대사, 지문이 없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근대, 일제강점기 직전과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 땅의 민중이 겪는 비극을 노인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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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삶에는 일제강점기에서의 핍박받는 민중의 삶·강제노역·학도병·종군위안부·해방·분단·이념 대립·빨치산 활동 등이 담겨있다. 이 작품은 창작이지만 노인이 기억하는 일들은 우리 역사에서 모두 발생했고 겪은 사람이 실제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결코 '픽션'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2권부터 4권까지는 그림도 컬러로 바뀌고, 대사와 지문이 들어간다. 1권에 나오는 노인의 이름이 '쟁초'라는 것도 나오고, 노인의 청년 시기, 사회주의자로 빨치산 투쟁에 참여하는 '쟁초'의 투쟁과 삶이 잘 드러난다.

 

'꽃'은 4부작 네 권이 하나의 패키지로 구성됐는데, 품절되어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헌책으로 구매할 수 있는데, 값이 비싸다. 초판을 500부만 찍어서 구하기 어렵다. 작가도 '꽃' 4부작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아리랑

 

님 웨일스(Nym Wales[1907년 9월 21일 ~ 1997년 1월 11일], 미국의 저널리스트. 남편 에드거 스노는 중국 공산당 관련 저작인 <중국의 붉은 별>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의 '아리랑'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지만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였다. 독재정권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장지락(김산)의 일생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과거의 혁명가를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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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과 님 웨일스의 책 <아리랑> 

 

박건웅 작가는 활자에 갇혀 있던 혁명가 김산을 깨웠다. 박건웅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흑백 판화 기법의 그림은 강렬한 내용처럼 강한 이미지로 당대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김산의 삶은 스스로 혁명가로서의 자각과 오랜 훈련으로,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지만, 늘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혁명가라도 인간적인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기회도 있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이미 결심한 김산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조차 부담스러워한다. 그 누구도 김산의 삶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높은 도덕성과 신념, 의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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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인터파크>

 

이 책은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하지만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혁명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의 자취까지 분단되는 부작용을 만들었으며, 역사에 기록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많다.

 

'아리랑'은 정부나 단체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다. 님 웨일스가 장지락을 만나 대화하며 기록한 내용이다. 개인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당대의 세밀한 묘사가 풍부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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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웨일스의 글을 읽기 부담스럽다면, 박건웅 작가가 그래픽 노블로 그린 이 작품을 권한다. 글만 읽을 때보다 훨씬 이해도 잘 되고 재미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과 중국의 혁명 과정까지 알 수 있어 독립운동사 자료로 꼭 읽어야 할 책이다.

 

경성을 쏘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어 7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당한 수난과 고통의 총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1945년에 해방은 되었지만 매국노를 처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 매국노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서, 현재 한국에는 친일 매국노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이 돈과 권력을 갖고 친일 매국노 청산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0여 년의 세월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확립해 나갈 시기였지만, 오히려 친일 매국노, 군부독재의 폭력으로 민족정기가 위축되고 기운을 펴지 못했다. 일본 특무 경찰이 해방되고도 독립운동가의 뺨을 때리는 처참하고 참담한 나라가 된 것은, 매국노들의 발호와 권력의 비호 때문이지만, 민중이 어리석고 정치적 상황이 성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한 매우 드문 독립운동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김상옥 열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를 다룬 책은 2014년에 '김상옥 평전'과 '경성을 쏘다' 두 권에 불과하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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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하자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권총 두 자루로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 군경 15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였다.영화 <밀정> 의 김장옥은 김상옥을 모티브로 하였다. 총격전을 재현하며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출처-<KBS 역사저널 그날, JTBC 방구석 1열>)

 

'경성을 쏘다'는 이성아 작가가 쓴 '경성을 쏘다'를 바탕으로 박건웅 작가가 재해석해 그렸다. 소설과 그래픽 노블은 형식과 내용에서 아주 다르지만, 상호보완의 관계다. 문자는 고도의 추상적 이미지다. 이성아 작가의 소설은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 작품 속 세계 역시 높은 추상적 밀도를 갖는다. 그래픽 노블에서는 공간을 분할해 각각의 칸이 소설의 문장을 이미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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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쏘다>는 서점에서 구입할 수 없다. 나도 이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내용의 책은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제시 이야기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귀한 자료를 박건웅 작가가 만화로 그렸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양우조, 최선화가 그들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훌륭한 인물들이 많지만, 이 젊은 부부는 임시정부에서도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아기를 출산해 육아하면서 임시정부의 일도 함께하던 흔치 않은 경우였다.

 

젊은 부부가 첫 번째 아이인 '제시'를 낳은 것이 1938년이었다. <제시의 일기>는 이때부터 조국이 광복되어 중국에서 부산에 도착할 때인 1945년까지의 육아 기록이다. 이 책이 특이한 것은, 나라를 빼앗겨 외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가 중국에서도 내전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부부가 함께 육아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결혼도 김구 선생님의 주례로 조촐하게 했으니, 이들 부부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부부임이 틀림없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항주에서 시작해 가홍·상해·진강·남경·장사·광주·유주·기강·중경까지 옮겨가는데, 중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깊숙한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중국을 전전한다. 일본군의 폭격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파괴되는 공포의 상황에서 갓난아이를 보살피며 물도, 음식도, 풍토도 맞지 않는 중국 땅을 돌아다닌다. 독립운동가들과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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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제시의 일기>와 

1941년 새해를 맞이한 세 식구의 가족 사진.

그 해에 둘째 딸 제니도 태어났다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자란다. 세계의 역사는 지금까지 한 세대 이상 평온한 때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별다를 게 없다. 혁명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은 많았지만, 마르크스도, 레닌도 결혼하고 자식을 두었다. 조선의 혁명가들도 인간이고, 조국의 운명이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살아갈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당연하다.

 

작품에서는 어린 제시를 아끼는 젊은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아이와 함께 중국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겪고 있는 중일전쟁의 참혹함과 중국 민중의 삶도 보인다. 나라를 가릴 것 없이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민중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 하물며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나라를 전전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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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렇게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남긴 기록이 있어 우리의 어른들이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던가를 알 수 있으니 기쁘고 반갑다.

 

옌안송

 

1914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본명이 '정부은'으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덜 알려졌으나 중국에서는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정율성의 형제 다섯 명이 모두 항일 독립운동을 한 명문 집안이며, '율성'이라는 이름은 의열단장이면서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이 지어주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정율성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조직의 배려로 이탈리아 음악 선생님에게 성악과 피아노를 배우고, 스스로 작곡도 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옌안으로 가는데, 여기서 '팔로군 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해 큰 인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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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의 일대기는 정동화·허성태·오만석 주연의 

영화 <경계인>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출처-<광주MBC>

 

정율성이 활동하던 시기에 님 웨일즈가 만났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의열단과 조선민족혁명당,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김학철과도 친구였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만난 정설송과 결혼해 딸 정소제를 두었고, 해방을 맞아 북한까지 어렵게 내려왔으나 김일성이 옌안파를 숙청하는 걸 보면서 위기를 느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 중국에서도 '문화혁명' 당시 엄청난 핍박을 받았으나 '사인방'이 권력을 잃으면서 정율성의 정치적 입지도 복원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문화혁명' 때 김학철도 그가 쓴 소설이 '반당, 반혁명'이라고 비판받으며 곤욕을 치렀는데, 한국(남한)에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김학철의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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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 '옌안송'은 정율성을 중심으로 항일 독립 무장투쟁 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인물의 면면과 그들의 투쟁을 담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조선 혁명가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으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그 역사를 우리는 잘 모르고 있어 안타깝다.

 

홍이 이야기

 

박건웅의 만화는 무겁다. 아니, 애당초 무거운 주제를 택한다. 그 무게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박건웅의 그림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다. 마치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무채색의 굵은 선은 언뜻 판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이 모두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늘 무겁고, 어둡고, 무채색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들 - 제주 4.3 항쟁·한국 전쟁·이념적 인간형 등 - 이 모두 무겁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만화의 한 컷, 한 컷이 마치 작품처럼 완성도를 높였고, 짧지만 강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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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짧은 이야기로, 본문이 불과 36쪽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소재는 작가의 후배(제주도가 고향인)가 제공했다. 후배가 쓴 이야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슬픈 내용이어서 이런 사건이 실제 벌어졌는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홍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홍이는 마을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마을 앞 작은 오름에 올라 바깥에서 노란 개(군인)나 검은 개(경찰)가 쳐들어오는지 온종일 지키고 있다. 이들이 오면 홍이는 깃대를 쓰러뜨리고, 나팔을 분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깊이 숨어 안전하다.

 

홍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미군정의 군인과 경찰이 좌익을 토벌한다고 자주 드나들었고, 죄 없는 홍이의 이웃 아저씨, 삼촌들이 잡혀가 죽어서 시체만 돌아오곤 했다. 드물게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깊은 밤을 도와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먹을 것을 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이가 동생 영이와 오름에 올랐고, 홍이는 배고픈 동생을 위해 먹을 것을 찾다 그만 노란 개와 검은 개가 마을로 들이닥치는 걸 놓치고 말았다. 노란 개와 검은 개는 닥치는 대로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영이도, 홍이의 부모도,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 삼촌과 어린아이들까지 그리고 홍이도 나팔을 불지 못하고 소리는 저 멀리 하늘로 퍼져나갔다.

 

이 작품은 김금숙 작가의 '지슬'(오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원작)과 맥을 같이한다. '지슬'에 등장하는 중산간 주민들도 정부군과 경찰 토벌대에 쫓겨 더 깊은 산의 동굴로 들어간다. 당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은 좌익 무장투쟁단이 아닌, 평범한 마을주민들도 모두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범죄이며, 동족 학살범죄였지만 아직도 제주민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이 만화는 최용탁의 단편소설을 원작이다. 보도연맹 학살사건(한국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한 걸로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을 다룬다. 남한에서 발생한 이 학살은 친일 극우 정권이 벌인 극악한 범죄의 일부일 뿐이다. 많은 사람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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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나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때로 고통이다. 그저 모르고 살거나, 되도록 기억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괴로운 역사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되풀이하고, 친일 매국노들과 수구반동 집단이 권력을 잡으면, 이런 양민학살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과 북한은 분단된 상태로 휴전 중이다. 사상 탄압은 변하지 않았고, 반대파를 '빨갱이'로, '좌익'으로 매도하고 그들을 폭력으로 단죄하는 것 역시 변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이 만화는 과거의 참혹함을 되새기자는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국 상황이 극단적으로 변할 것을 경계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정적(정치적 반대자)'이라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치 양민을 파리 보듯하는 세력은 여전하지 않은가.

 

악마의 일기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아직도 전체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최대 학살 사건이자 한국 현대사에 가장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벌어졌지만, 이 학살 사건과 한 줄로 연결되는 또 다른 학살 사건인 '제주 4.3'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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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이 학살당하는 장면

출처-<미국국립문서관>

 

1947년 3월부터 시작된 제주 4.3 봉기는 제주 경찰이 3.1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쏴 학살한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제주도에는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던 제주도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무렵 약 30만 명에 이르렀던 제주도민 가운데 당연히 다양한 정치 성향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고, 공산주의자, 남로당원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서 남로당을 '토벌'한다는 목적을 갖고 군대를 투입했고, 이건 다시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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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950년 6월 25일, 공식적으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한국전쟁과 그 직후 벌어졌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 이전에 이승만과 극우집단은 대구 10.1 사건(1946년), 제주 4.3(1947년), 여수·순천 사건(1948년) 등 일련의 조선노동당과 공산주의자,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노동자·지식인은 물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력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였다.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한다. 보도연맹을 기획·관리한 자들은 한때 좌익 활동을 하다 전향한 배신자들과 극우, 친일 매국노,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 주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해 감옥이나 큰 건물에 몰아넣었다.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악마의 일기'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그린 그래픽 노블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박만순 선생님의 저작 '기억전쟁'임을 작가가 밝히고 있다. 작품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이지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담았다.

 

노근리 이야기

 

'노근리 학살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철길 아래 굴다리에서 무려 400명 넘는 피난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노근리 이야기 1부>는 정은용의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바탕으로 그렸으며, <노근리 이야기 2부>는 정은용의 아들 정구도가 쓴 <노근리는 살아 있다>를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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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 현장.

아직도 총탄 자국 등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출처-<오마이뉴스>

 

정은용은 노근리 굴다리 아래에서 어린 딸과 아들을 잃었고, 겨우 목숨을 건진 피해 당사자이면서 목격자다. 미군은 굴다리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흘 동안 굴다리를 향해 총을 쐈다. 학살 현장은 아비규환, 생지옥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상 규명을 악의적으로 무시·왜곡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을 탄압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정은용, 정구도 부자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그나마 '노근리 학살사건'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54년이 지난 2004년이 되어서야 국회에서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노근리 학살사건'의 주범인 미국은 여전히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고 있다. 학살을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 이유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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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집단은 '미국'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지만, 미국이 죄 없는 한국 피난민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 척한다. 과연 '보수'인지, 기회주의자들인지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은 이념으로 발생한 사건도 아니고, 보수·진보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도 아니다. 역사에서 벌어진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양심이 있는 사람과 양심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인간의 양심을 흔들어 깨운다.

 

그해 봄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의 판사들은 죄 없는 시민 여덟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불과 열여덟 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다. '인혁당 사건'으로 알려진 이 끔찍한 권력의 학살 사건은 2013년이 되어서야 1차 인민혁명당, 2차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무죄가 확정되면서 피해자의 억울함이 밝혀졌지만, 피해보상금을 두고 아직도 유족들은 고통받고 있다.

 

이 작품은 억울하게 사형당한 우홍선·김용원·송상진·하재완·이수병·도예종·여정남·서도원의 가족들 증언을 담았다.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참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당한 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가족이 겪은 고통과 분노와 설움과 참담함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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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10 유신'을 선언한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중지하며, 집회와 시위·언론·출판의 자유를 금지했다. 이런 노골적 독재에 저항하는 진보 지식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박정희는 체제의 위기와 불안을 느꼈다. 이런 상황을 뒤집으려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었다.

 

'인혁당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박정희 독재 권력이 만든 조작 사건이다. 악랄한 고문, 가족들에게 연좌제,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갑작스러운 사형집행 등 박정희 독재의 민낯을 다 드러낸 범죄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가족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이야기를 전달한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한 가족들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정상의 생활조차 가능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이런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깝다. 박건웅 작가의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이 역사의 비극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짐승의 시간

 

전두환이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로 권력을 불법 장악한 이후, 1980년 5월 전국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 군부는 광주에 특수부대를 보내 광주시민을 학살했다. 1970년대 학생·청년운동을 하던 그룹과 구성원들은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만들어 군부독재 타도를 목표로 활동했다. 이때 가장 앞자리에 선 사람이 김근태 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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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승줄을 한 채 밝게 미소 짓는 김근태

출처-<오마이뉴스>

 

대학을 중심으로 전두환 독재 타도,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일당은 이들 민주 운동단체를 폭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김근태 의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인 남영동으로 끌려가 약 22일 동안 십여 차례 고문을 당했다. 김근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문하는 자들의 개인정보는 물론, 고문 방법, 과정, 증거까지 완벽하게 기억해서 재판을 통해 사실을 고발했다.

 

김근태의 초인적인 행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87년 6.10항쟁과 1988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씨는 김근태 의장의 고발로 시작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김근태 의장이 당한 고문 과정과 내용을 마치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독자는 칸 속의 그림을 보는 것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다. 칸과 칸으로 이어지는 고문의 현장에서 가해자들의 악마 같은 모습과 김근태 의장이 당하는 고문을 날것 그대로 느낄 정도로 만화는 실제 상황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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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으로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던 경험을 의지로 극복하는 과정은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독재와 불의에 항의하는 양심 있는 시민이 고문당하면서 극도로 피폐한 정신과 육체를 극복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면 충격과 고통을 견디고, 기억하고, 증언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김근태 의장은 불의에 항거해 총칼을 든 투사보다 더 투철한 민주주의자였다.

 

어느 혁명가의 삶

 

이 작품의 원작은 허영철이 쓴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바탕으로 했다. 허영철은 비전향 장기수로 감옥에서 36년을 살았다. 그는 1920년에 전라북도 부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노동자로 살았다. 일본의 탄광에서 일할 때, 일본인 관리자가 빌려준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공산당 선언' 등의 책을 읽으면서 각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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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허영철 

출처-<오마이뉴스>

 

해방되고 고향 부안에서 남로당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북으로 올라가 황해도 장풍군에서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전쟁 끝나고 1954년 8월, 공작원으로 남한에 파견되었다가 1955년 7월 체포되었다.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36년만인 1991년 2월 출소했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며 전향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끝내 전향하지 않았고, 양심과 사상을 지켰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사상'과 '신념'에 관한 이야기다. 

 

독자는 주인공의 삶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친일파·매국노가 아니라, 가난한 농민·노동자·서민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혁명가가 된 것에는 동의하리라. 36년을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가 출소할 때는 아내와 아들, 며느리, 손자가 반겨주었고, 감옥 밖에서 20년을 더 살다 2010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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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허영철과 같은 인간형은 다시 보기 어려울 걸로 안다.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만든 인간의 모습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스러졌다. 남북의 권력은 체제에 위협이 되는 민주주의자들을 폭력으로 제거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허영철은 그나마 살아남아 증언과 기록을 남겼으며, 이 기록은 역사의 소중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괴물들

 

박건웅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 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 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 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 경험까지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 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들은 한국 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 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 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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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더 큰 트라우마를 겪기도 한다.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 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들 그림은 외국 작가들과 분명 다르다. 나라마다 작가들의 그림 선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보이는데, 한국 그래픽 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듯, 자기 색깔이 분명한 그림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도드라져 보인다. 박건웅 작가의 작품은 형식미가 뛰어나고, 기법이 독특하며 개성 있다. 드로잉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판화처럼 그린 이미지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더욱 강렬하게 보인다. 판화 기법의 작화는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이런 형태의 그림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효과가 있다. 박건웅 작가가 줄곧 역사와 사회적 인물을 다루는 것은 자신의 그림과 잘 어울리는 소재라는 점에서, 작가의 작품성을 발휘하기 적합한 소재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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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웅 작가

출처-<채널예스>

 

나는 박건웅 작가의 작품을 초·중·고 역사 교재로 쓰면 효과가 크리라 본다. 역사책을 읽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픽 노블로 만든 작품들은 청소년이 읽기 쉽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정식 교재로 쓰지 못한다면, 보조 교재로 청소년들이 꼭 한 번씩은 읽을 수 있도록 학교 도서관에 배치하고, 선생님들이 추천해서 - 사실, 선생님들이 먼저 읽었으면 한다 - 청소년들이 이 일련의 작품들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한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들의 작품은 외국 작가와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작품성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 박건웅의 작품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작품 세계와 미학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와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적합한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한국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건 큰 자랑이자 희망이다.

 


 

작가 연보

아래 연보의 기록은 '사단법인 한국만화가협회' 블로그에 있는 '아픈 역사를 소환하는 기록자_박건웅'(한상정)을 바탕으로 필자가 수정, 추가한 내용임을 밝힌다.

 

1972년 7월 20일 서울생

 

단행본

2002년 <꽃> 1권, 새만화책

2004년 <꽃> 4권 완결, 새만화책

2006년 정은용, <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 >, 보리

2008년 이승민, <홍이이야기>, 새만화책

2010년 허영철, <나는 공산주의자다 1, 2 >, 보리

2011년 정은용, <노근리이야기 2부- 끝나지 않은 전쟁>, 보리.

2012년 <삽질의 시대>, 사계절

2014년 <짐승의 시간>, 보리

2014년 정은용, <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 보리(재판)

2015년 정구도, <노근리 이야기 2부 : 끝나지 않은 전쟁>, 보리(재판) .

2015년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 북멘토

2015년 허영철, <어느 혁명가의 삶 1920~2010>, 보리(원제 바꿔서 재판)

2016년 <제시 이야기>, 우리나비

2016년 이성아, <경성을 쏘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18년 <그해 봄>, 보리

2019년 <옌안송>, 우리나비

2020년 <괴물들>, 보리

2020년 님 웨일즈, 김산, <아리랑>, 동녘

2020년 <악마의 일기>, 우리나비

 

연재

2010년 10월 1일- 2012년 1월 28일 : 경향신문 웹매거진 크로스(KHross)에 칸 <삽질의 시대>

 

작화 담당 작품

2003년 김용택 글, <콩, 너는 죽었다>, 실천문학사

2005년 김용택 글, <내똥 내밥>, 실천문학사

2008년 한인현 글, <섬집 아기>, 섬아이.

2010년 박경리 글, 토지문학연구회(엮음), <동화 토지> 2-5부, 전 28권, 자음과 모음

2011년 조재도 글, <자전거 타는 대통령>, 북멘토

2012년 최용탁 글. <당신이 옳았습니다>, 북멘토

2012년 신지영 글, <넌 아직 몰라도 돼>, 북맨토

2013년 이정아 글, <섬소년>, 해와나무

2013년 보리 편집부 글, 박건웅, 임병국 그림, <호랑이>, 보리

2016년 이오덕 글, <이오덕 선생님>, 고인돌

2016년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수호믈린스키 글, 박미령 역, <생각의 뿌리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 - 수호믈린스키의 인성 동화집>, 고인돌

2016년 조재도 글, <자전거 타는 대통령>, 북멘토

2018년 이오덕 글, <우리 선생 뿔났다 - 이오덕 동시선집>, 고인돌

2018년 이호철 글, <똥 누다 뒷간귀신 만나다!>, 고인돌

2019년 김소월 글, <김소월 시화집>, 고인돌

2020년 이수복 글, <광릉숲의 요정>, 우리나비

2021년 개똥이 글, <생쥐의 손그림자 숲속 탐험>, 개똥이

2021년 이병승 글, <차일드 폴>, 서유재

2021년 이수복 글, <사랑의 솜사탕>, 우리나비

2022년 이수복 글, <주청공사관 일기>, 우리나비

 

공동작품

2017년 <문워킹 - 문재인과 함께 걷는 미래>, 은하등대

 

수상경력

2002년 <꽃>,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신인상 수상

2007년 <노근리 이야기 1>, 부천만화대상 일반만화상 수상

2011년 <노근리 이야기>,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2014년 <짐승의 시간>, 부천만화대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