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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의 리만 탈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219일 만인 지난 10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이 리만(Lyman) 지역을 탈환했다. 동부전선 도네츠크(우크라이나엔 '도네츠크 州', 러시아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이겠지만)의 주요 길목이자 돈바스 진출의 주요 진출로가 바로 리먼이다.

 

리먼의 탈환은 전략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우크라이나에 꽤 많은 의미를 가져다줬다. 우선 전략적인 이득을 말하자면, 이곳이 철도의 중심지란 걸 기억해야 한다. 인구는 별로 안 되지만 크로마토르스크·슬로반스크와 함께 동부지역의 진출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분리 독립을 말하는(러시아 점령지라고 말하자)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푸틴은 정치적으로도 꽤 크게 한 방 먹었다. 러시아가 4개 주 병합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리먼을 빼앗긴 거다. 그렇다고 대세에 크게 지장이 가는 건 아니다. 푸틴이 체면을 구긴 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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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2. 푸틴의 출구 전략

 

생각난 김에 이 4개 주 병합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 영토 통합에 관한 주민 투표 찬성률이 87~99%임을 보면 이건 좀...). 이건 각각의 '정치 주체'들이 어떤 발언을 했는지만 보면 대충 그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과 수단으로 우리의 땅을 지킬 것이다."

- 10월 2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 발언 중 발췌

 

"명백히 지금 러시아 대통령과는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는 존엄과 정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러시아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러시아의 다른 대통령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거다."

- 10월 2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발언 중 발췌

 

"이 점령은 불법이다. 나토 동맹국들은 이 지역 중 어떤 곳도 러시아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 10월 2일 나토 사무총장 옌스 스톨텐베르그 발언 중 발췌

 

푸틴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점령지를 러시아의 영토로 만들면, 법적으로 지금의 군사 충돌은 우크라이나의 '침략'에 의한 전쟁이 된다. 그러면 동원령 때리고, 계엄령 때리면서 총력전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물론, 그 명분을 국제사회가 인정하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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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젤렌스키 대통령은 9월의 성공에 힘입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젤렌스키,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지도부들도 안다. 이 전쟁을 '물리적'으로 끝내는 건 불가능함을. 러시아와 일대일 맞짱으로 싸워 이길 수는 없다. '대화'란 말을 꺼낸 이유다. 결국은 협상이다. 자존심과 명분은 나왔다.

 

"푸틴 저 새끼랑은 말 안 섞어!"

 

전쟁 발발의 실질적인 원흉인 푸틴만 아니라면, 대충 명분 챙겨서 협상할 수 있다는 거다. 나토 사무총장의 발언을 들으면서는...

 

"이게 유럽의 반응이구나."

 

라고 느낀다. 서유럽이 러시아에 반발하고 있다(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싸움'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첫머리로 떠올린 건,

 

"푸틴이 타협했구나."

 

이다. 올 2월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키이우를 먹고는 괴뢰정부를 세우든 뭘 하든 할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우크라이나 같은 건 그냥 한 입 거리지."

 

였다. 그런데, 1차 전략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후 러시아는 병력을 빼서 동부전선에 집중했다. 딱 봐도 노보로시야(Новороссия : 신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동부지역)를 먹겠다는 생각이 드러났다.

 

이게 나름 '명분'으로는... 괜찮다. 이게 이야기가 좀 긴데, 제정(帝政, 황제가 다스리는 군주 제도) 러시아 시절, 그러니까 예카테리나 2세 시절(재위 1762년 7월 9일-1796년 11월 17일)에 러시아가 여기 있던 크림 칸국(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에 형성된 킵차크 칸국에서 독립한 칸국)을 박살 내고 이 땅을 러시아가 먹어 버린다. 이 땅은 러시아에 새로 편입된 곳, '신러시아'란 이름의 노보로시야가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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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2세. 1745년 러시아 황태자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우크라이나를 점령한다는 목표가 불가능해지자, 푸틴이 나름 '명분'을 세운 게 바로 이거라는 느낌이다.

 

"헤르손주·자포리자주·도네츠크주·루한스크주... 이거 네 개 먹은 후에 대충 뭉개고, 노보로시야 분위기 살리면... 그래, 이건 옛날 우리 제정러시아 땅 확보한 거다 정도로 명분 만들면 전쟁 목표 달성한 게 되잖아?"

 

이런 계산인 거다. 푸틴이 모든 힘과 수단을 쓸 거라며 은근슬쩍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출구를 만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여기에 응할까?

 

3. 겨울이 온다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우크라이나군과 미군(미군은 이번 전쟁에서 꽤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 것이다)의 공통된 대명제가 하나 있었다.

 

"첫눈이 내리기 전에 반격 작전을 실행한다."

 

대반격이 9월에 시작된 이유다. 눈이 내리면, 곧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 rasputitsa. 비나 눈의 융해로 진흙이 생기는 현상)가 시작될 것이고, 이후에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 달은 개점휴업 상태가 된다는 거다.

 

"우선 가을(10월 중순~11월 초순)하고 봄(3월 중순~4월 하순)은 피하자고. 이때 잘못 움직이면 길바닥에 나앉아야 해."

 

최대한 밀어붙일 수 있을 때까지 밀어붙인 후에 눈이 내리면, 거기서 눌러앉아 방어를 굳히는 거다.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 culminating point. 보급 문제·방어 측의 완강한 저항·휴식의 필요 등으로 인해 공격 측이 더는 진격을 하지 못하는 시점)까지 내쳐 달린 후에 눈 내리면 멈추면 된다는 거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 3월 초만 해도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버틴다고?"

 

우크라이나를 사흘 안에 항복할지, 열흘 안에 항복할지에 대해 예측을 하던 게 올봄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우크라이나는 대반격에 나서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한 가지가 있을 거다.

 

"이 전쟁은 언제 끝날 건가?"

 

첫눈이 내린 뒤의 라스푸티차 그다음은 겨울이다. 푸틴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겨울이며, 우크라이나에 있어선 국운(國運)을 걸 첫 번째 겨울이 시작된다. 이번 겨울에 대규모 전투가 예상된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 대규모 전투가 끝난 뒤에 그 승패에 따라 전쟁이 끝이 날까? 아마 어려울 거다. (누가 됐든) 어지간한 수준의 대승이 몇 번 이어지더라도 전쟁을 끝내는 건 쉽지 않은 문제가 될 거 같다. 이제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싸움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서 이해 당사자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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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티차

출처-<링크>

 

4. 푸틴과 젤렌스키의 눈치 게임은 이제 끝나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아니, 콕 찍어서 푸틴과 젤렌스키는 절대 전쟁을 멈출 수가 없다. 멈추는 순간 둘의 정치생명은 끝이 날 수도 있다. 푸틴의 경우는 더 말할 게 없고, 젤렌스키도 위험하다. 얼마 전까지 지지율 90%를 찍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러시아 침공에 대한 정보를 미국으로부터 들었는데도, 민간인을 피난시키지 않았다! 이건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방기한 거다!"

 

라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솔솔 들리기 시작한다. 역시나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의 생각은 다른 건가 보다. 조금 전까지 구국의 영웅이었던 젤렌스키는 어느 순간부터,

 

"판단을 잘못한 거 아냐?"

 

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러시아 침공'에 대한 정보를 2021년 10월 말에 이미 접했다는 거다. 미국은 이때 러시아의 침공계획을 확인하고 우크라이나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이걸 100% 다 믿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를 믿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정보를 100% 믿을 수 없었다. 믿으려면 확실한 정보 소스와 출처를 건네야 하는데, 이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크라이나 정부 조직 여기저기에는 러시아 스파이들이 넘쳐났다(전쟁이 발발한 직후 휴전회담을 위해 꾸려진 우크라이나 협상 대표단 안에도 러시아 스파이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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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이 스파이들을 믿지 못해서 미국은 자신들의 정보 소스를 다 공개하지 못했다. 푸틴도 푸틴이지만, 젤렌스키도 나름 신경 써야 할 게 많다는 거다. 더 큰 문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생각이 바뀐 거다.

 

5. 우크라이나에 없던 국가 정체성이 생긴 가운데...

 

모처의 교수님이 지난 2월 24일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오늘부터 민족감정이란 게 생겼다."

 

그전까지 우크라이나에는 민족감정이란 개념이 희미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얼떨결에(?!) 나라가 만들어졌다. 비슷비슷한 언어를 썼고, 산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붙어 있었던 우크라이나였기에 러시아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이번 전쟁 와중에 러시아군에 있던 아들이 우크라이나에 사는 어머니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람이 러시아 친척에게 전화해서 욕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번 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제대로 된 '민족감정'이란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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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2014년 겨울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시위대의 모습.

EU 가입 협정을 철회하고 러시아 차관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정부에 저항코자 광장에 모였다

출처-<경향신문(윈터온파이어 화면캡처)>

 

이제 우크라이나는 물러설 수 없다.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물러나는 순간 초강대국의 위신은 물론이고, 국가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많이 흔들릴 거다. 러시아는 무슨 수를 쓰든 최대한 '모양새' 좋게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여기서 진다면 러시아는 꽤 큰 '후폭풍'을 맞게 될 거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싸워 이기는 건 어렵다. 그렇기에 '대화'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에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 명분을 얻기 위해서 우크라이나는 최대한 전투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압박해야 한다. 그렇게 얻은 명분으로 협상으로 끌고 가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럼 러시아는? 이미 4개 주를 편입하고, 이걸 러시아의 영토로 선언하면서 옛 기억... 그러니까 노보로시야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찌 됐든 대충 모양새를 맞춰나가긴 했다.

 

푸틴의 입장, 아니 러시아의 입장에선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 명분으로 4개 주 편입작업을 끝냈다. 이걸 명분으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4개 주를 편입하면서 푸틴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

 

러시아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첫 단계에 들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