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 한 편이 두 편 되고, 덤으로 한 편 더 얹게 된 전말

 

이 글은 원래 1회로 계획했다가 쓰다 보니 2회로 수정했다. 민족정론지 딴지일보에 걸맞은 매우 아카데믹하고 엘레강스한 글로 쓰고 있었는데 첫 번째 글을 본 윌 기자가 넘 어렵고 좀 더 임팩트 있게 한 편으로 압축하자는 흑마술을 걸어왔다. 그래… 그러지 뭐… 흑마술에 걸려 초점 잃은 눈으로 오백만 번째 퇴고를 하던 중, 어디선가 '이 새끼… 바이든… 쪽팔려…'라는 단어들이 귀에 익은 목소리로 실려 왔다. 그 단어들이 구마사의 부적처럼 날아와 마빡에 꽂혔다. 윌의 흑마술이 깨지자 총기를 잃었던 나의 안광에도 시퍼렇게 총기가 다시 불타올랐다.

 

누가 들어도 이 새끼와 바이든인데 죽어도 아니라고 우긴다.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이 새끼'는 미국 국회가 아니라 우리 국회의원을 지칭한 것이고 '바이든'은 '날리면'이었다고 우겼다. 시간이 흐르자 이 새끼도 없었다고 한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낫지, 영구도 아니고… 앵무새처럼 '영구 없다, 이 새끼 없다, 바이든 없다'만 외쳐 대는 걸 보고 있자니 측은지심마저 들었다. 저게 통한다고 믿으니까 저 지ㄹ…, 저러고 있을 텐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저런 '영구'들이 집단 서식하고 있다는 것도 정말 신기했다. 580여 년 전, 세종대왕 주위에 있었던 훈민정음이 옛 글자를 베꼈다고 생각했던 영구들과 지금도 한글이 발성기관이 아니라 옛 글자들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영구들도 떠올랐다. 분통을 참지 못하던 나는 두 편을 한 편으로 줄이는 대신, 두 편의 글에 한 편을 더 얹어서 세 편을 써보기로 했다.

 

2. 호시절은 가고

 

문재인 대통령 재임 동안 한국 문화와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고취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대유행하며 전 세계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대한민국은 가장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역 시스템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고도 효과적인 방역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의 방역체계는 전 세계 대유행 병의 대처 기준이 되었다.

 

코로나로 가속된 우리나라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은 한국 문화 전반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확산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전에도 한국 노래나 드라마가 일부 국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세계 문화의 본류이자 첨병이라 자처하는 서구 사회에서 한국 문화는 여전히 변방에 있었다. 그런데 지난 5년을 거치며 빌보드 차트, 칸과 아카데미 같은 대표적인 대중문화 예술상들을 휩쓸었다. 심지어 올해 영어를 전혀 쓰지 않은 한국 드라마가 미국의 에미상을 휩쓰는 이변을 연출했다.

 

30000789555.jpeg

출처-<SBS>

 

자연스럽게 세계인들의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어순이 달라 한국말을 어려워하는 외국인도 한글은 어려워하지 않는다. 한글이 소리 나는 대로 쉽게 쓰고 읽게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조선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 찍어 낸 판각 원본.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어제 서문(御製序文), 자음자와 모음자의 음가와 운용 방법을 설명한 예의[例義], 훈민정음을 해설한 해례, 정인지 서[序]로 되어 있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국보이다)에서 정인지(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1396~1478]. 대제학, 영의정을 지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안지·최항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가 한글은 똑똑하면 한나절, 좀 아둔해도 열흘이면 깨칠 글자라고 장담했다. 현대의 세계적인 언어학자들도 배우기 쉬운 한글의 우수성을 입 모아 칭찬한다. 이 정도 되면 한글에 관한 자부심은 국뽕이 아니다. 그건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며 논리적 귀결이다.

 

3. 조선시대부터 유구한 썰들

 

뜬금없이 법무부 장관이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덕분인지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하는 유령들이 아직도 한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고대 문자 모방설·범자(산스크리트) 모방설·창살 모방설·파스파 문자 기원설과 같은 각종 모방설과 기원설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훈민정음이 범자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현이 남긴 용재총화·이수광의 지봉유설·이익의 성호사설 등에서도 이런 소문은 실려 있다. 훈민정음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참 잘 만든 글자이긴 하지만 그대도 뭔가를 베꼈을 거라는 일말의 의심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정보가 부족하고 질투가 나서 한 번쯤 가질 수 있는 이런 의심은 일제 강점기에 들자 그 정도가 더욱 고약해졌다. 아침 햇살에 그림자가 진 문창살 모양을 베꼈다는 말 같지 않은 주장까지 등장했다. 문제는 이런 모방설들이나 기원설들이 학술이라는 탈을 쓰고 계속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초적 언어에 얹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반에 빠르게 확산하는 터이다. 몇 년 전 개봉했던 '나랏말싸미'라는 영화에 이런 모방설 혹은 기원설을 주장하는 노(老)학자의 생각을 감독이 담았다. 대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다운로드 (1).jpeg

출처-<메가박스중앙>

 

학자들의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겠거니 모방설과 기원설을 눈감아주려 해도, 이들이 쓴 책과 논문을 읽다 보면 배후에 세종대왕의 능력과 성과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거나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다른 한편, 자신들이 하는 현대의 학문 방법이 더 우수하다는 선입견과 자신들이 500년 전 인물보다는 더 많이 알 거라는 자만도 감지한다.

 

4. 의심의 불씨를 제공한 세종실록

 

'훈민정음'은 해방이 되기 전까지 전모가 파악되지 않은 글자였다. 핵심 내용은 세조 때 발간한 월인석보에 딸린 '훈민정음 언해본'으로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창제 원리와 방법, 운용법은 미궁 속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세세하게 설명된 것이 '훈민정음해례본'이다. 이 책은 1446년 9월 상순에 완성되었지만 안타깝게도 1940년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기 전까지 거의 500년간 실전(失傳)된 책이었다.

 

54cf871d-0087-4c94-ad0e-01f7689ce2e8.jpeg

훈민정음해례본

출처-<간송미술문화재단>

 

이런 사정이 모방설이나 기원설에 불을 붙이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불씨는 세종실록이 제공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

 

밑줄 그은 '자방고전(字倣古篆)'이 불씨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방(倣)'자를 지금은 '줏대 없이 남의 것을 따라 하다, 흉내 내다, 베낀다'는 뜻이 강한 용례인 '모방'으로 해석했다. 더불어 이 한자에는 '본받다, 따르다, 모범으로 삼다'라는 뜻도 있다.

 

세종실록에 실린 이 문장이 모방설에 불을 붙이는 불씨가 되었다. 함께 세종실록에 실린 최만리의 상소가 모방설에 기름을 부었다. 불씨, 기름 모두 세종실록이 제공한 셈이다.

 

5. 최만리의 헛발질

 

최만리(조선 세종 때의 문신ㆍ학자[?~1445]. 집현전 부제학,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는 동료들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에 대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대충 소문만 듣고 상소를 쓴 모양이다. 요새 같으면 가짜 뉴스를 만든 셈이다.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기사에 그의 상소가 실려 있다.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이 옛날 글자 모양(古之篆文)을 따라 했다는 것이다. 자방고전(字倣古篆)'과 문장이 아주 비슷하다(아래에 밑줄로 표기).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국사편찬위원회가 '형상'이라고 번역한 한자는 '형(形)'자다. 이 '형(形)'자는 훈민정음해례본에 자주 쓰이는데 구체적인 사물의 모양, 어떤 글자를 소리 낼 때 만들어지는 발성기관의 모양과 성리학에 기초한 철학적 도상(기호)을 본떴다고 할 때 주로 쓰였다.

 

최만리는 상소를 쓸 때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이 옛 한자의 모양(古之篆文)을 베꼈다고 소문만 들었지 훈민정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듯하다. 소문과는 달리 한자 모양을 베끼기는커녕 세상 처음 보는 간단한 기호들을 몇 개 이리저리 조합해서 글자를 만들고 읽어대니 기가 막혔던 것 같다. 최만리는 왕과 집현전 일부 무리가 근본도 없는 글자를 만들어 놓고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해서 저런 상소를 쓰게 된 것이다.

 

집현전 학자였던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는 것은 상소의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아니 우리 몰래, 갑자기 맘에 맞는 집현전 애송이들 열댓 명하고 쿵짝이 맞아 가르치고 익히게 하고, 옛 성현들이 이미 완성한 운서를 맘대로 뜯어고친다고요? 근본도 없는 언문을 돌려 보게 하고, 기술자 수십 명을 모아 서둘러 책을 찍어 돌려서 나중에 뭔 욕을 드시려 하십니까?"1)

 

왕이 총애하는 기구인 집현전에 속했으면서도 왕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에 참여하지 못한 질시 때문인지 그의 상소는 격앙되어 있다.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가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서 배제된 이유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집현전 학자로 발탁되어 세자의 선생이 되고, 세종대왕이 직접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아서는 학문 자질이 뛰어나고 조예도 깊었던 듯하다. 이 점은 세종대왕도 인정한 것 같다.

 

IE001841135_PHT.jpeg

출처-<김지현(오마이뉴스)>

 

6. 어라, 선비가 한 입으로 두말해?

 

세종대왕은 자신이 결정한 일에 신하들이 반대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만나서 의견을 듣고 설득했다. 영 맘에 들지 않을 때, 대꾸하지 않으면 않았지 화를 내거나 면박을 주진 않았다. 그런 세종대왕이 최만리와 그 일당에게 좀처럼 보기 힘든 짜증을 내고 면박을 준다. 짜증을 넘어 분노에 가깝다.

 

"야! 너희는 왜 똑같은 일을 했던 설총은 칭찬하면서 왜 나는 까는데? 너희가 운서라는 걸 알긴 아냐? 읽어는 봤어?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 갠 줄은 아냐고? 너희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왕인 내가 운서를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누가 할 건데?"2)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신하들이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거나 뚫린 입이라고 이 말 저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공부하지 않고서 아는 척하는 건 더 싫어했다. 언행이 다른 것, 여기저기서 하는 말이 다른 것, 아는 척하는 것 모두 거짓말이다. 세종대왕은 거짓말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유학자라면 일이관지(一以貫之), 곧고 솔직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 공자는 고기도 반듯하게 썰려 있지 않으면 먹지도 않았다. 그런 공자의 뒤를 잇는다는 선비들이 거짓말만 일삼으니 세종대왕은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세종.jpeg

 

훈민정음 사건보다 몇 배 더 짜증 내고, 화낸 경우가 있었다. 불교 신자였던 소헌왕후(세종의 비[1395~1446].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자리가 위태로웠으나, 세종에 대한 내조의 공을 인정받아 위기를 모면하였다)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대왕은 너무나 아꼈던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 자신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자 궁내에 불당을 하나 지으려 했다. 당연히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한 신료 집단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신하들 반대가 계속되자 세종대왕의 화가 화산처럼 터진다. 가장 총애하던 정인지까지 나서 세종대왕에서 불당 짓는 것을 그만두라고 간언하자 세종대왕은 이렇게 답변한다.

 

"너희가 불교가 나쁘다고 입을 모아 말해주는 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 착한 임금이면 너희 말을 들을 텐데 난 못된 왕이라 따르지 않을 거야. 너희와 상의하지 않고 맘대로 하는 건, 불교를 반대하는 너희가 겉과 속이 달라서 그래. 조정에서는 안 된다고 해 놓고서 밖에서는 자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하고, 왕한테는 안 된다고 해놓고는 제 발로 절을 찾거나 처자 따라서 절에 가는 애들이 있다는 거 다 알거든. 이렇게 말과 행동이 다른데 왜 너희하고 의논해야 할까? 지난번에 '치평요람(세종 27년 왕명에 따라 우리와 중국 역사에서 귀감이 될 만한 사례들을 모아 편찬한 책)' 만들 때 정인지가 불교를 언급하니까 옆에 있던 김문이 피식 웃더라.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뭔말하는지 인지는 알 거야"(필자 역)3)

 

세종대왕은 궐 안에서 하는 말과 궐 밖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신하들이 꼴 보기 싫었다. 궐 밖을 나서면 제 발로 절을 찾거나 마지못한 척 부인을 따라 절을 찾는 신하들이 미울 수밖에 없다. 한편 아버지 태종 때문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소헌왕후에 대한 세종대왕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신하들이 야속했을 것이다. 결국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당을 짓는다.

 

x9788965190547.jpeg

출처-<교보문고>

 

다시 최만리의 상소로 돌아오자. 세종대왕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신하들을 엄하게 나무라고 심지어 벌까지 준다. 최만리와 동조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세종대왕은 이들을 모조리 의금부에 투옥해 버린다.

 

자신에게 반대해서 벌을 준 게 아니라 집현전 학자답지 않게 모르는 걸 아는 척하고 선비답지 않게 한 입으로 두말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을 교화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 선비의 싹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정창손(조선 초기의 문신[1402~1487]. 한글 창제와 왕실의 불교 숭상을 반대하여 투옥되었으나, 후에 사육신의 단종 복위 음모를 고발하여 그 공으로 영의정에 올랐다)은 파직해 버렸다. 가장 뻔뻔하게 두말한 김문(조선 전기의 문신[?~1448]. 세종의 명을 받아 '의방유취'의 편찬에 종사하여, 김예몽[金禮蒙] 등과 함께 3년 동안 365권을 완성하였고, 뒤에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도 편찬하였다)은 따로 국문(鞠問)하라고 의금부에 지시했다.

 

20210610_60c1cdfd06c1c.gif

출처-<링크>

 

아직 한글 주변을 맴도는 각종 모방설은 제대로 공부도 안 하고 대충 넘겨짚는 학문적 자만과 중화사상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최만리의 오해와 맥을 같이 한다. 세종대왕이 살아 계셨다면, 훈민정음해례본을 두고도 여전히 모방설이나 기원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의금부로 직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된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이 모습을 감추는 바람에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언해본에 등장하는 '방(倣)'자 하나가 모방설의 불씨가 되었다. 인간이면 쉽게 빠지는, 게으름에 따른 무지와 억측, 열등감으로 인한 질투와 시기, 사회적 인정에 목말라 생기는 삐뚤어진 욕심과 자만이 기름을 부어 모방설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계속>

 


주)

 

1. 今不博採群議, 驟令吏輩十餘人訓習,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 附會無稽之諺文, 聚工匠數十人刻之, 劇欲廣布, 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기사)

 

2. 汝等以薛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기사).

 

3. 上曰: "卿等以佛道爲非, 合辭以諫, 予甚嘉之。 若賢君則必從卿等之言, 予則否德, 不能從也。 予今獨斷而不議於下者, 以今之諫者類非出於中心, 或有議於朝廷而退言曰: '此非予意也。' 或以君上爲不可而已則爲之, 或心雖不然, 而泥於妻子, 不能禁之者, 其言與行如此, 故予嘗不與之議也。 昔撰《治平要覽》時, 鄭麟趾以佛事上書, 金汶從傍笑之, 予至今不忘, 此意, 麟趾知之矣。
경들이 불도를 나쁘다고 하여 말을 합하여 간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만일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부덕(否德)하니까 따를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독단하고 아래에 의논하지 않는 것은, 지금의 간하는 자가 대개는 중심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혹은 조정에서 의논하고 물러가 말하기를, 이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고, 혹은 임금더러는 불가하다 하면서 자기는 하고, 혹은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처자에게 끌려서 금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그 말과 행동이 이와 같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의논하지 않은 것이다. 전날에 《치평요람(治平要覽)》을 만들 때에 정인지(鄭麟趾)가 불사(佛事)로 상서하니, 김문(金汶)이 옆에서 웃었다. 내가 지금까지 잊지 않았는데, 이 뜻을 인지는 알 것이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세종실록 30년 7월 19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