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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항우와 유방의 대결 이야기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은 긴 머릿말을 떠들 테니, 독자제위께서는 너무 짜증내지 마시라.



intro 1


장이모우(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영웅>이라는 중국 영화가 있다. 여러모로 이중적인 영화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정이모우 감독은 중국 정부의 총애를 받고, 이후 북경 올림픽 총감독직을 맡는다. 그러나 이 영화로 대륙의 영화시장에 선택받기 위해 예술적 사명감을 내던졌다는 악평도 듣는다. 장이모우를 변절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양심을 버리면서 그의 예술적 심미안도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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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진시황을 암살하려다가 실패(사실상 포기)하는 사람을 다룬다. 사실 진짜 영웅은 진시황이었다는 이야기로, 제목의 ‘영웅’은 진시황을 뜻한다.


원래 장이모우 감독은 중국 민중의 한과 에너지를 그리는 예술가였다. 그는 시대의 격변에 휘말린 중국 민중을 쉽게 밟히고 때론 뽑히지만, 어느 틈에 위를 향해 솟아나는 풀뿌리로 보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다른 황제도 아니고 진시황이라니? 언제 장이모우가 ‘영웅’의 편을 드는 사람이었던가?


<영웅>은 중국 정부가 근 20년째 진행해온 역사 해석 작업과 맞닿아 있다. 동북공정은 사실 모택동 시절부터 기획되었다. 이걸 막은 사람은 중국인들의 ‘영원한 총리’ 주은래였다. 그는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당과 학계의 움직임을 “제발 그런 짓 좀 마라”며 틀어막았다. 그러나 주은래는 서거한 지 오래고, 중국의 역사 해석은 되돌리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한족’이란 건 혈통개념이 아니라 문화개념이다. 이민족이 한족과 만나면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한족이 된다. 이렇게 한족은 머릿수를 점점 불려나갔다. 중국 역사는 그래서 팽창적이지만, 현재 중국 공산당의 팽창주의는 이를 넘어선다. 한족은 물론이고 한족과 관련을 맺어온 이민족까지도 ‘전통적인’ 중국인이라는 게 공산당의 입장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 소속된 민족의 역사는 물론이고 관련 민족의 역사까지도 집어삼키려는 심산이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중국인(중국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도 ‘한족’도 아닌, ‘중화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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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중화민국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량치차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중화민족은 서양의 근대 민족주의를 따라잡기 위한 개념으로,

영어로 치면 ‘chinese people’에 해당한다.

그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관(史觀)에 충실했다. 따라서 량치차오의 중화민족은 ‘근대화된 한족’에 다름 아니다.

지금 중국은 중화민족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 욕망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 <칭기즈칸>이라는 중국 드라마에서 테무진을 ‘중화민족적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대목에서 내 뒷목이 몹시 뻐근해졌다. 중국의 북한 붕괴 시나리오, 즉, 북한이 무주공산이 되면 인민해방군이 진입해 한반도 북부를 ‘조선성’으로 편제하려는 시나리오는,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욕구와 맞닿아 있다. 중국이라는 테두리를 한없이 팽창시키는 동시에 테두리 안을 ‘하나의 중국’으로 갈무리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중국’을 처음 창조한 사람은 누구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중국의 창조자이자, 중원 문명이 단일한 시스템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인물이다. 진시황 이후 ‘천하통일’은 중국 권력자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의 꿈이 되었다. 대만 흡수통합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욕망 역시 거시적으로는 진시황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은 한 번도 분열된 적이 없다. 한몸으로 통일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200여개의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시황 이후 중국은 통일국가가 되거나 ‘분열’된다. 천하통일은 백성들의 민생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할 숙원이 된다. 천하통일이란 사필귀정(事必歸正), 세상 일 결국은 바로 잡히는 것이다.


원래 진나라는 서양 오랑캐인 서융(西戎)이 중원에 진입해 세운 나라다. 키르기즈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계열 민족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진시황의 외모를 서구적으로 묘사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병마용을 보다 보면 ‘이거 순수한 동양인 맞아?’하는 병사가 보일 때가 있다. 물론 중화민족이든 한족이든 혈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사에 편입된 순간부터 그들은 중국인이다. 중요한 것은 서쪽에서 나타나 마지막 남은 6개 국가를 멸망시킨 진 제국이 ‘최초의 중국’이라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영웅>이 뛰어난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프로파간다 선전물로 욕을 먹는지, 왜 장이모우가 정치와 거래한 타락한 예술가라고 비판 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중국의 사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



intro 2


진시황에 의해 중원 문명은 통일제국이라는 하나의 그릇이 되었다. 그러나 그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진시황에게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통치의 철학 자체가 ‘지배’였던 것이다. 이런 지도자 밑에서 백성은 신음하기 마련이다. 아방궁과 진시황릉 공사에 수많은 백성을 희생시킨 이유는 딱 잘라 두 가지다.


1) 그럴 수 있으니까
2) 그래도 되니까


진시황의 착취행위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리장성 공사에 착수해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만리장성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중화문명이고 어디서부터가 야만인지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진시황은 세계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안’과 ‘밖’으로 구분하려고 했다(비슷하게도 현재 중국은 중국 내 몽골족자치구를 ‘내몽고’, 몽골인민공화국을 ‘외몽고’라고 부른다).


‘안’은 보다 정밀하고 세련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너월드(inner world)’의 교통수준과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운하사업을 단행했다. 그가 시작한 운하계획은 수나라 때에 완성되어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다. 운하는 중국문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러나 진시황의 사업은 애국심이나 애민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중화문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해당 문명의 소유주가 되고자 했다.


간단히 말해, 천하를 대상으로 <심시티>를 즐긴 것이다. 하나의 중국이 창조되었으되 한 사람만을 위한 중국이었다. 그릇 안에 내용물,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신이어야 할까?


간단하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우리식으로는 ‘민생’이다.


진 제국은 15년 만에 망한다. 산산이 깨진 그릇의 조각을 수습해 다시 하나로 만든 후 그 안에 정신을 채우는 위대한 작업 역시 금방 이루어진다. 시골 건달 유방이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한 제국을 창업한 결과다. 진시황은 물리적인 중국의 창시자고, 유방은 중국의 정신적인 시조다.


먹고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대단한 철학은 필요 없다. 본인의 인격이 성인군자일 필요도 없다. 그릇에 정신을 채워 그 안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그만이다. 유방은 영웅호걸도 철학자도 아니지만 이천년 중화문명, 더 나아가 동아시아 한자문명의 기초를 닦았다. 한 개인으로서 유방을 평가한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무뢰배’ 정도가 적당하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유방은 다르다. 그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유방의 천하통일은 진시황의 그것과 달리 민중의 입장에서 ‘쓸가 있었다.


역사는 무감정하고 야멸차다. 위대한 인물이 초라하게 몰락하기도 하고, 조잡한 인간이 시대발전의 선봉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 가도 역사는 발전한다. 그저 그런 인간이라도 결과를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다. MB의 ‘모두가 성공하는 국민성공시대’라는 슬로건은 임기 말이 되기도 전에 폐기되었다. 복지와 분배가 시대정신이 되자 독재자의 딸이 퍼주기 공약을 남발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 결과가 공약이행이 제로에 수렴하는 현 정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를 끼고 국민들은 점점 미쳐간다. 세계 최장 근로시간, 최악의 소득 대비 물가, 극단적인 자살률, 비상식적인 저출산 현상, 인간의 한계치를 넘은지 오래인 경쟁의 강도….


이대로 살 수는 없다. 한반도 남부에 반인반신이라도 강림하길 기다려야 하는 걸까?


싫다. 난 그런 거 믿지 않는다. 예술엔 천재적인 선구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정치엔 영웅이 없다.


유방의 성공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혼자서 황제가 되지 않았다. 그를 중국 문명의 비조(鼻祖: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또는 시초)로 만들어 준 인물들은 어떤가? 한마디로 가관이다. 농부, 개백정, 탈영병, 범죄자, 몰락 귀족, 거지, 제비, 지방의 하급 관리, 광대, 성격 나쁜 노인 따위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를 보라.


유방이 황제가 된 이후 중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민심이 천심이다”,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명제는 통치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적당한 인물이 없을 때, 시대는 아무리 불한당이라도 제 역할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지존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초한쟁패를 되도록 유물론에 입각해 풀어갈 것이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기 때문이다.



1


2200년 전의 중국으로 가 보자. 춘추전국시대, 마지막까지 남은 7개의 국가를 ‘전국칠웅’이라 부른다. 진나라, 한나라, 초나라, 제나라, 조나라, 연나라, 위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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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국가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왕 ‘영정’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원 문명을 연 전설적인 왕들. 원칙상 인간이지만 사실상 신이다. 삼황오제의 멤버들은 역사가들에 따라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다)에서 황(皇)자와 제(帝)자를 한데 묶어 황제가 되었다. 중국 최초의 황제는 진시황이다.


황제에 해당하는 서구의 단어는 라틴어 ‘임페라토르(Imperator)’다. 이 개념은 로마 제국에서 나왔다. 임페라토르는 원래 ‘군 총사령관’을 뜻하는 말로, 더 구체적으로는 ‘개선장군’을 의미한다. ‘카이사르’라는 명칭도 쓴다.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공화정을 사실상 종식시킨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나온 것으로, 황제란 카이사르의 후계자란 뜻이다. 최초로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를 가리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도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를 ‘제1시민’이란 뜻의 ‘프린켑스’로 정의했다. 그래서 프린켑스라는 말도 썼다. 서양에서 황제(임페라토르-엠퍼러)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의미가 확정된 개념이다. 저 중에 당사자가 인위적으로 만든 명칭은 프린켑스뿐이다.


그에 반해 한자문명권의 ‘황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진시황은 기존의 왕과는 차원이 다른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전설 속의 신들과 제왕을 뜻하는 삼황오제를 모티브로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다.


‘황’과 ‘제’는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 자연의 이치와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는 고귀하고 신적인 존재다. 부뚜막에 붙어 있는 귀신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며, 제사장만 만날 수가 있다. 물론 그냥 만날 수는 없고, 제사라는 의식을 거쳐야 한다. 또 제사장은 황과 제의 의견을 듣기 위해 술에 취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신성한 존재들이 계시를 내려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 정도로 먼 존재다.


진시황은 현실에 강림한 신중의 신이라는 뜻으로, 황과 제를 합친 존재인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라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죽을 수 있다.


기원전 218년, 진시황은 자신이 통일한 천하를 둘러보는 전국 순행 중이었다. 현재의 허난성 양장 동쪽, ‘박랑사’라는 지명에 다다랐을 때였다. 진시황의 마차 행렬은 화려하면서도 살벌했다. 청동제 무기를 든 진 제국의 도위(徒尉)들이 긴 행렬을 좌우로 지키며 발맞춰 걷고 있었다. 진나라 군대의 제식은 철저했다. 진나라는 무기 역시 표준에 맞춰 대량생산했다. 기계처럼 맞아떨어지는 금속제의 움직임은 2200년 전 사람들을 압도했으리라. 불쾌한 압도감이었을 게 분명하다. 마차 행렬을 보는 이들은 바로 그 안에 타고 있는 진시황이 멸망시킨 국가의 백성들이었다.


진시황의 전용 마차를 온량거(轀輬車)라고 부른다. ‘온량’이란 실내에서 몸을 눕힐 수 있도록 안락한 이동 공간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 ‘퍼스트클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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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에서 발굴된 청동제 온량거 모형.

청동제로, 진시황이 실제로 타고 다니던 온량거를 1/2크기로 축소해 재현했다.


그때 몸을 숨긴 채 진시황의 목숨을 노리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기묘한 조합이었다. 하나는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젊은 청년으로, ‘여자처럼 예쁘장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희고 가는 미소년이었다. 다른 한 명은 ‘역사(力士)’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 괴력의 사나이였다. 깨끗한 청년과 우락부락한 장사. 출신도 배경도 다른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만나 운명을 함께하게 된 걸까.



2


미청년은 진시황에게 멸망당한 한(韓)나라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은 ‘희(姬)’씨 가문. ‘근본’, ‘위엄’이라는 성씨의 뜻답게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 멀게는 한나라 왕실의 친척이고, 더 멀게는 춘추시대의 지존인 주나라 천자(天子)의 친척이었다. 대대로 상국(相國. 최고의 관직으로 재상보다 높다. 기업으로 따지면 왕은 오너, 상국은 파트너다)을 지낸 대귀족 집안이었다.


가문의 후계자였던 미청년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그가 관직생활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을 땐 그의 조국은 멸망당했다. 청년은 조국의 원수를 갚고 대대로 섬긴 왕가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 500명이 넘는 집안의 하인들을 적당한 재물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막대한 자산을 현금화했다. 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비용도 대주지 않았다. 상대는 진시황이다. 막대한 금액을 갖고 있었지만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왜 돈이 필요했을까? 청년에게는 돈과 사명감은 있었지만 튼튼한 몸과 무술 실력이 없었다. 공부만 한 서생이 무슨 수로 진시황을 죽인단 말인가. 그는 돈을 들고 진시황을 암살해줄 용병을 찾아 천하를 방랑했다. 그러다가 ‘창해군(滄海君)’이란 인물을 만났다(창해 출신의 귀족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아니라 명칭이다). 그에게 소개받은 ‘선수’가 지금 함께 있는 괴력의 거한이었다(그의 본명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창해에서 온 천하장사란 뜻으로 ‘창해역사’로 기록될 뿐이다).


당시 중국이 ‘창해’라고 부른 곳은 어디인가? 다름 아닌 고조선 지역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창해역사(滄海力士)는 흥미로운 떡밥이었다. 조선의 왕실과 학자들은 창해역사가 고조선 사람이었다고 확신했다. 실제 지명과 정황 등 믿을 만한 근거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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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암살에 쓰였다고 하는 창해역사의 철퇴.

물론 진짜 그 유물일리는 없고 위조품이었겠지만,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서 소중한 유물이 되었다.

조선왕실 소유였는데 1910년 전후 일본으로 불법 유출되고 나서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하여간 이 색히덜은...


비록 돈에 의해 소개받고 고용된 사람이지만 창해역사와 귀족 청년 사이에 우정이 싹튼 것으로 보인다. 둘은 진시황 암살을 계획하면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미청년이 역사를 ‘창해공’으로 높여 부른 걸 보면 그를 상당히 존중했으리라.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



3


진시황 살해계획은 크게 두 가지로 가능하다. 첫째, 진시황이 있는 곳인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 있는 황궁에 가서 살해한다. 이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형가(荊軻)가 한 번 실패했다.


아직 천하통일이 이뤄지기 전, 진시황(당시 진왕 영정)은 연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연나라 태자 ‘단’은 검객인 형가에게 연나라 지도를 쥐어주었다. 연나라를 팔아넘기는 척 하면서 진시황 앞에서 지도를 펼치면, 그 안에 숨겨두었던 특수 제작한 암살용 검인 ‘상절(霜切.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도 둘로 가를 정도로 날카로운 칼이라는 의미)’이 나타난다. 이것으로 재빨리 진시황을 찔러 죽인다는 계획이었다.


형가의 암살은 실패했다. 진시황은 궁전의 이 기둥 저 기둥 뒤로 몸을 숨기며 가까스로 상절의 가공할 절단력을 벗어났다. 진시황은 검이 뽑히지 않아 형가를 좀처럼 벨 수 없었다. (검이 뽑히지 않았다는 것은 오랫동안 미스테리였다. 당시 중국은 철기시대에 진입해 있었지만 제철기술은 정교하지 않았다. 따라서 무기는 청동제였는데, 청동검은 재료의 특성상 철검보다 짧다. 이후 고고학 연구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진나라의 청동검은 유난히 길었다고 한다. 진나라는 발전된 무기 제작 연구를 통해 길면서도 사용가능한 청동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진나라의 법률상 대전에서 무기를 소유할 수 없었던 신하들은 진시황에게 검을 등 뒤에서 뽑으라고 소리쳤다. 형가는 상절을 던졌지만, 진시황이 신속하게 피했고 상절은 기둥에 박혀버렸다. 마침내 등 뒤에서 검을 뽑는데 성공한 진시황은 형가를 참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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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을 암살하려는 형가>
한나라 벽돌 그림


형가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고점리’도 결국엔 진시황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진시황은 현악기의 명수였던 고점리의 생음악을 즐기기 위해 그의 눈을 멀게 하고 현을 켜게 했다. 비참한 처지가 된 고점리 역시 먼저 간 친구를 대신해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는 몰래 납덩이를 넣어 무겁게 만든 현악기[‘축(筑)’이라고 한다]를 진시황의 머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던졌으나, 그는 장님이었고, 축은 진시황을 가까스로 비켜갔다. 고점리는 사지가 찢겨 죽고 말았다.


이후 진시황이 궁 안을 철저하게 단속하면서 ‘둥지털기’는 불가능해졌다. 



4


형가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협객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체 ‘협(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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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을 당시 기록엔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방랑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진나라를 제외한 6개 국가의 귀족과 장수들은 중국이 통일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충성을 바쳐온 국가는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국가는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다. 이 고급 실업자들이 자연스레 협객이 된다.


이들은 단순한 범죄자나 도망자가 되기에는 너무 복잡한 존재들이다. 학식 있고 정의감도 있지만, 정의로워봐야 현 정부에 반항하는 한 공공의 이익에 봉사할 수는 없지, 자신이 소속됐던 왕조는 사라졌지, 손아귀에 고급 사치품인 청동제 무기는 있는데 집안은 망했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허락 받지 않은 정의’, 즉, 공적 정의가 아닌 사적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건다. 중국인들의 무협적 세계관은 이때 태동했다. 김용의 무협지에 갓 망하거나, 망해가는 왕조와 관련된 등장인물이 즐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미청년과 괴력의 장사는 형가와 고점리를 이어 중국 역사상 세 번째 협객이 된다. 이들에게 남은 방법은 ‘둥지 밖’에서 진시황을 암살하는 것. 그것은 진시황이 천하통일 기념으로 전국 순행을 할 때만 가능하다. 순행이 끝나면 언제 다시 궁 밖에 나올지 기약할 수 없다. 아마도 평생에 한 번뿐인 기회, 때는 바로 지금이었다. 하지만,


마차 행렬을 세우고 도위들에게,


“잠깐 황제폐하와 얘기 좀 합시다.”


라고 말한 후, 온량거를 두드려서는,


“폐하를 암살할 계획이니 잠시 밖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들어갈까요?”


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순간적으로 나타나 도위들이 어찌 해 볼 틈도 없이 온량거와 함께 진시황의 몸을 부숴버리는 수밖에 없다. 목재로 된 온량거를 부수는 동시에 진시황까지 죽일 수 있는 무기는 단 하나, 철퇴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크고 무거운 철퇴.


미청년이 거한의 장사를 고용한 것은 이러한 계획 때문이었다. 힘과 무게로 단숨에 해결하는 것. 그렇다면 그 직후, 장사의 운명은 뻔하다. 제정신을 차린 도위들의 창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는 수밖에 없다. 창해역사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유가 뭘까? 그도 진시황을 향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는 협객이었을까? 아니면 청년이 남은 가족들의 삶을 책임질 만한 금액을 지불하기로 했을까? 알 수 없다. 아무튼 목숨과 맞바꾼 계획이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청년은 청년대로 마차와 그 안의 사람을 한 번에 해치울 수 있는 철퇴를 제작해야만 했다. 크고 무거우면 되니 청동일 필요는 없었다. 철로 제작했으되, 창해역사가 딱 한 번 들고 휘두를 수 있는 ‘한계치’에 맞춰야 했다.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했을 때 대단한 돈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 온량거 모델을 구해 몇 번의 실험도 했을 것이다. 청년은 이미 많은 돈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제작되어 창해역사의 손에 들린 철퇴의 무게는 무려 120근, 지금의 단위로 약 70kg. 진시황의 행렬이 두 사람이 잠복한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권력자가 자신도 모른 채 죽음을 향해가는 그 순간.


온량거는 한 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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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처음 나타난 온량거 뒤를 몇 대의 다른 온량거가 뒤따르고 있었다. 진시황은 형가와 고점리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난 후 만반의 대비를 했던 것이다. 황제만 탈 수 있는 온량거가 여러 대. 그 중 한 대에 진짜 진시황이 있고, 나머지는 가짜였다.


상상도 못한 난관에 부딪힌 두 사람은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 공격하지 못하면 과연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언제 어디서 암살시도를 한다고 해도 성공률은 동일하다. 언제 시도한들 실패했을 경우엔 진시황이 다른 철저한 수를 쓸 테니 그 뒤론 암살이 아예 불가능해질 것이다.


기회는 한 번뿐. 오직 지금이었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정 중앙에 있지 않을까?’


창해역사는 철퇴를 들고 한 가운데에 있는 온량거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단 일격에 온량거를 파괴하고, 그 안의 인물을 격살했다.


... 그는 진시황이 아니었다.


창해역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사마천의 <사기>는 구태여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뻔하다. 그는 정신을 수습한 도위들에게 둘러싸여 그 자리에서 참살되었음이 분명하다.


혼자 남은 청년은 동지를 죽게 한 죄책감을 갖고 급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이름은 ‘희량(姬良)’. 분노와 공포로 광기에 휩싸인 진시황이 수색을 명령했다. 한 패가 없을 수 없다. 이미 변장술을 익혀두었던 희량은 가까스로 체포의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고강도 수사를 통해 조력자인 희량의 존재가 드러났다. 희량은 제국 정부에 의해 ‘공공의 적 1호’가 되고 만다. 중국 전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희량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도망자의 삶을 산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버려야 했다. 량(良)은 흔한 이름이었기에 명예로운 만큼이나 희소한 대귀족의 성씨를 바꿨다. 신분세탁을 위해 선택한 것은 흔하디 흔한 평민의 성, ‘장(張)’씨였다.


중국역사상 최고의 지략가, 장량(張良)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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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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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