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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목 혹은 염치

 

어린 시절, 툭하면 체벌하던 한 교사가 이상하리만치 전혀 아이들을 때리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 교사의 기준이면 당연히 손이 나갔어야 할 상황에도 어색하게 말로만 타이르는 교사를 보며 학생들 쪽이 오히려 이상해할 즈음, 교사가 우리 눈치를 보듯 한마디 했다.

 

"난 오늘 너희를 때릴 생각이 없다. 어른으로서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뉴스는 우리에겐 늘 두어 박자 늦게 전달됐다. 우린 그날 오후 늦게서야 성수대교가 붕괴한 사실을 알았다.

 

내가 자란 시골 동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 중년의 영어 교사는 성수대교 건설에 나사 하나만큼의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날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 대부분은 한강에 걸린 대교 같은 큰 다리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허락된 양심과 염치가 허용하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눈앞의 우리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추측건대 '백주에 다리가 무너지는 나라를 만들어 놓은' 어른 세대의 일원이 된 책임감이 그를 종일 짓눌렀을 것이다.

 

사람이 길을 걷다 150명 넘게 희생되는 나라를 만들어 놓은, 거의 30년이 지난 뒤의 나는, 그래서 지금 면목 없음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젊다기 보다는 어린 피해자가 특히 많이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보며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거창한 평화나 넘치는 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길을 걷다 사람이 죽지는 않는 사회를 만들 능력이 우리에겐 있었을 터였다. 우리는 실패했다.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던 까닭에 참사를 반복했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우리는,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나.

 

2. 행정안전부의 장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경찰과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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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기사캡쳐>

 

정부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언사다. 한강은 본 적도 없는 시골 아이들 앞에서 성수대교 붕괴를 사죄하던 무명 교사만큼의 양심도 염치도 없는 자에게 행정안전부의 장을 맡겼으니 시민의 생명과 재산이 멀쩡히 유지되는 걸 바라는 것이 과도한 기대라 할 만하다.

 

한편으로 의문도 든다. 이상민 장관은 흔히 말하는 율사 출신이다. 20대에 판사로 임관해 15년간 근무했고 퇴직 후에는 대형 로펌에서 승승장구했다. 그가 행안부 장관으로 발탁된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가 경찰과 소방 조직에 엄청난 애착이 있어서 내 이름 하나를 개천에 버릴지라도 이 두 조직의 구성원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굳게 결심해 저런 언행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 외부에서 '꽂아 준' 장관답게 경찰과 소방의 무능을 남 일처럼 질타하고 '내가 기강을 바로잡겠다'고 울분에 차 역설하는 것이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훨씬 좋은 선택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3. 대통령의 출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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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중앙일보 기사캡쳐>

 

이 한 장의 사진 말고 다른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천천히 복기해 보자. '당선한 대통령이 어디서 집무를 볼 것인가'는 20대 대선의 주요 쟁점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권자들은 2번을 찍으면서 '당선되면 청와대를 나오라'는 염원 따위 보낸 적이 없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하자마자 이것이 국가의 가장 시급한 현안인 것처럼 온갖 무리수를 두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청와대 밖으로 옮겨냈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 이유에 대해 주술과 관련된 풍문이 돈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행각이 이런 추측을 부추긴 면이 있다. 이것이 악의적인 프레임이라면, 지금이라도 좋으니 부디 누구든 합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이유를 말해 주시길 바란다. 대통령이 고작 반년, 아니 한달조차 청와대에 기거하며 집무 보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집무실 이전이 순리대로 돌아가도록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던 급박한 이유 말이다.

 

그런 이유 따위가 없기에 문제다. 주술과 관련한 풍문은 악의적인 프레임이고, 합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다면, 남은 것은 본인이 직접 말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추상적인 믿음밖에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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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기사캡쳐>

 

대통령 당선인이 보기에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 같으니, 청와대는 단 하루도 신임 대통령의 집무실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전시가 아님에도 야반도주하듯 청사에서 쫓겨났다. 국민의힘 캠프에 성우회 지부를 만들 기세로 모여들었던 국군 장성 출신자들은 그 꼴을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다. 보수 언론이 보기에도 나라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으니 점잖게 타이르는 사설이 몇 개 나왔지만, 단임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에 가장 기세가 등등한 법이다. 결국 윤 대통령의 '이사'는 성사됐다.

 

대통령이 움직이는 것은 그 자체로 경찰에게 엄중한 일이다. 평일 아침저녁으로 차도를 사용해 대통령이 서울 시내를 이동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경찰력 낭비인지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부에 닿지 않는 위험을 향한 이성적인 경고에 둔감하다. '시민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경찰력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게다가 큰 규모로 낭비하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사고가 날 것이다'라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글로만 읽을 때는 어딘가 남 일처럼 느껴진다. 또는 '좌파의 정치 공세다'라는 댓글이 달리기 딱 좋은, 식자층이 좋아하는 훈계조의 지적으로 들린다.

 

4. 예견된 참극

 

우려를 아득히 뛰어넘는 참사가 벌어졌을 때, 현 정부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을지 상상해보자. 미안함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행안부 장관 입에서 참사 직후에 

 

"경찰과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온 보도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건, 

 

'이 불길이 정권을 지탱하는 대통령 개인에게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는 단 한 줄이다.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단, '정권을 넘겨주는' 실마리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 나온 반응이겠지만 말이다.

 

참사 당시 이태원에는 평년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충분한 경찰·소방 인력이 배치돼 있었다고 주장하며 현 정권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행안부 장관이 직접 참사 직후에 저런 말을 한 이상 그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행안부가 이태원에 충분한 경찰·소방 인력을 배치했었다면 '우린 대비를 이렇게나 잘했는데 몇몇 개개인의 일탈이 참사를 일으켰다.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경찰·소방을 배치했어도 참사를 못 피했을 것이라는 기괴한 주장이 행안부 장관 입에서 나왔다는 건, 그날 경찰·소방 인력은 충분히 배치되지 않았다는 가장 강력한 반증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아도, 당장 지난해 이태원 안전대책과 비교만 해보아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희생자와 유가족들애 가슴에 못이 박히는 소리를 시민 안전의 최종책임자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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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bc 기사캡쳐>

 

하루에 10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 경찰·소방 인력이 충분히 배치되지 않았고, 150명 이상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참으로 우연히도, 이태원이 위치한 용산에는 최근 수 개월간 경찰력을 빨아들여 도로에 허비하고 있는 대통령이 있다. 용산 이사 등을 포함하여 그의 언행에 관한 합리적인 이유는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대통령과의 친분이 발탁의 중요한 이유라고 공히 인정받는 행안부 장관의 입장에선 '이게 꼭 경찰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올 만했다.

 

5.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지 않았다면 2022년 이태원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집무실을 옮긴 일에 관해서도 묻고 싶지만, 그 일에 앞서 물어야 할 질문들이 현재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점에 야당인 민주당이 '무리한 대통령실 이전으로 경찰력을 허비,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한 경찰력이 부족하게 되어, 대규모 인명사고가 난 것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책임 있는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 출퇴근에 동원된 경찰 중 2개 소대만 그날 이태원의 골목에 서 있었어도 몇 명이 그날 저녁 가족을 만날 수 있었을지를 떠올려 본다면, 이런 질문을 부당한 정치공세로 몰아가는 쪽이야말로 진영논리에 과도하게 몰입한 것이다. 그날 쓰러진 인파는 좌우를 구분하지 않았다. 안전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이태원 참사 이틀 전, 경찰은 그동안 공개하던 대통령실 관련 경비인력 자료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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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기사캡쳐>

 

경찰력 낭비에 관한 비판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선 이것부터 물어야 한다. 경찰력은 어디에서 누구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고, 그렇게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지. 

 

누구의 말처럼 그리고 정부가 원하는 대로 애도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몰상식한 언행을 일삼는 이들이 있다. 이 참극이 다시는, 제발,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진정한 애도와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더는 공직자들이 책임회피를 하지 않고 참사의 원인을 밝히기 바란다.

 

- 삼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모두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