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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희생자 158명 중에는 중학생이 하나 있다. 희생된 분들 중 제일 어리다. 이 학생은 할로윈을 맞아 어머니, 이모, 그리고 이종사촌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세 분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이 가족의 이야기 말고도 마음 저며지는 사연이 국회 회관 복도에 돌고 있다. 누군가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올 때마다, 마음이 무참해진다. 두렵다. 들은 이야기보다 못 들은 이야기가 아직 더 많기 때문이다.

 

<더탐사>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5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일부 유족들은 항의했고 삭제 의사를 전달했다. 외국인 희생자들도 대사관을 통해 국적과 이름 공개를 항의했다.

 

누군가와 슬픔을 나눌 때, 그 방식의 결정권은 슬픔의 당사자가 가져야 한다. 희생된 가족의 이름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이 또 다른 아픔이 된다면, 간과해선 안 된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선후관계가 있다. 왜 가족의 이름이 남들 앞에 보여지는 것마저도 그들에게 이토록 아픔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들의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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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16일 이태원 사고 관련 중대본 브리핑에서 이렇게 밝혔다.

 

"과거에는 신원 확인이 오래 걸리면서 실종자 명단을 먼저 작성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는 희생자 신원 확인이 단기간에 끝나면서 실종자 명단이 오랫동안 관리될 필요가 없었다."

 

같은 사람이 사고 직후 했던 브리핑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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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안부 '시·도 부단체장 영상회의 자료'

 

"가해자와 책임 부분이 객관적으로 확인되거나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립적 용어가 필요해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를 이태원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피해자'를 '부상자'로.

 

신속하게 작성된 명단의 이름들을, 정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해석되도록 '결정' 했다.

 

어느 유가족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가족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서울 한복판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명을 달리했다. 현장으로,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듣는 뉴스에서, '주최자 없는 행사'에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소리가 나온다.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도 전에, 정부는 당신의 가족이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다음날 잠이 덜 깬 얼굴로 나타난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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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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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이것이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다. 여기까지가 유가족들이 겪어 온 시간이다.

 

정부가 설정한 공허한 애도 기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은 아직도 참사 당일, 경찰 경비 병력이 왜 이전처럼 배치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경찰서도 모자라 이태원역과 헤밀턴 호텔까지 온갖 곳을 다 압수수색하고 있지만, 왜 하필 2022년 할로윈에만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참사 18일째. 유족들의 마음은 어떠할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뒤늦은 명단 공개와 진상 규명에 대한 어떤 기대도 희망도 생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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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

분노한 유족에 의해 쓰러진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근조화환

 

그저 아플 뿐.

 

애도의 익명화

 

이번 명단 공개를 두고, 정치권의 반응은 정부 브리핑보다 좀 더 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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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페이스북 캡쳐

 

이분은 2019년 4월 16일에 이런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다. 현재는 삭제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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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비대위원장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3년 전보다 이토록 급성장한 건 좋은 일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공감 능력 급성장 현상이 정진석 위원장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이전에 없던 국민의힘의 휴머니즘이 명단 공개 이전부터 발휘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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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링크

 

특이한 증상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 이들은 왜 애도에서 이름을 감추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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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링크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3일, 희생자들의 사연을 공개했다. 그들의 취미, 관심사, 직업,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158'이라는 숫자 속에 잠들어 있던, 10월 29일까지 그들의 삶이다. 스러진 짧은 삶을 기리는 먹먹한 애도의 기사다.

 

이 기사의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South Korea's collective trauma is just begining.

 

한국의 집단적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158명. 참사가 보름이 훌쩍 넘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숫자 앞에 숙연해지는 것뿐이다. 숫자는 힘이 약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158'이라는 숫자가 모든 것을 대신하는 것은, 사안을 실제보다 작게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서사는 힘이 강하다. 사람들이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삶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커다란 동력을 모으게 해준다. 숫자에 봉인해두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참사와 달리 신원확인이 신속하게 끝나 굳이 명단을 공개할 필요가 없었다는 정부 발표를 다시 생각해 보자.

 

이는 그럴싸한 개소리다. 정부는 애도 기간 동안 합동 분향소를 설치했다. 정부는 유가족들에게 위패와 영정사진을 모셔도 되겠는지 의사를 알아볼 기회가 있었다. 정부만 할 수 있었고 정부이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심각한 직무유기다. 그토록 신속하게 명단이 확보되었다면, 더더욱 희생자들의 조문과 애도 절차에 대해 유가족들과 협의할 시간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정부가 한 일이 무엇인가. 용어를 '피해자'가 아닌 '사망자'로 통일하라는 공문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휴머니즘인가. 무엇이 패륜인가. 누가 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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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도 사진도 상주도 유가족도 없는 텅 빈 분향소를 꾸린 이유. 명징하다.

 

'애도의 익명화'

 

희생자들을 숫자에 봉인시켜 그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던 언니, 오빠, 누나, 형, 동생, 조카, 아들, 딸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애도가 분노로 번지는 길목을 필사적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희생자 유가족들은 슬픔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연대하고 모임을 만들게 된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동지애를 느낀다. 서로를 위로하며 상실의 아픔을 견딘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누군가 희생의 의미를 변질시키는 시도를 할 때, 이러한 연대는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힘이 된다. 희생자들의 서사와 그들의 사정에 감정 이입된 시민들의 응원은 그다음이다. 하루 빨리 이태원 참사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바라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가장 두려운 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명단"이다.

 

섬뜩한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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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나 위험지역도 아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이었다. 매년 아무 사고 없었던 이태원 골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압사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의 안전대책 책임을 묻는 소송이 시작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부가 국가배상 청구 소송의 당사자가 되면 정부의 소송대리인은 ‘법무부’가 된다. 그렇다. 한동훈 장관이 있는 그곳이 정부를 대리해서 유가족과 소송을 하게 된다.

 

참사가 일어나고 사흘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법무부는 법률구조공단을 통해 피해자들의 법률 지원단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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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모순이 있다. 법무부가 자신들에게 소송을 거는 사람들에게 법률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이다. 법무부 산하 법률구조공단은 유가족들에게 어떤 법률 지원을 하고 있을까. 정부가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손쉽게 치를 수 있는 교묘한 법률 조언이 있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다. 10・29참사 사고대책본부는 대검찰청에 있고 유가족들의 법률 지원은 법무부가 하고 있다.

 

섬뜩한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는 언론은 현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