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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새벽 3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 괜찮나요.”

 

“이태원에 가지 않으셨죠.”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뉴스를 켰다. 속보가 이어진다. 큰 사고가 났다. 사망자 130. 실수로 0을 하나 더 붙인 거 아닌가. 다른 기사를 찾아봐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는 늘어났다.

 

작년 핼러윈 축제에서 입은 코스튬 사진을 자랑하던 a양이 생각났다. 전화를 걸었다. 제발 자다 깨서 받아 화를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결음은 결국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식은땀이 났다. 문자를 보면 바로 연락 달라고 문자를 남겼다. 새벽 4시 반경 답장이 왔다. a양은 밤 근무 중이었다.

 

a양을 처음 만난 건 광화문역 파이낸스 센터 앞이었다. 우리는 그때 서로 세월호 집회에 같이 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지인이 나 귀찮게 하지 말고 너희 둘이 가라며 우리를 연결해 줬다. 그해 추운 겨울을 함께 보낸 우리는 쉽게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a양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말만 서로 반복하다 전화를 끊었다. 어느덧 새벽 5시가 되어있는 휴대폰 화면 불빛이 꺼진다. 8년 전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뒤집힌 배, 그 주위를 배회하던 보트와 헬기, 전원 구조라는 속보 자막, 그리고 무기력함에 빠져들었던 그 이후의 날들. 촛불을 밝히는 것 외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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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9일 파이낸스 빌딩 앞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출처 - <연합뉴스>

 

광화문 광장에 세월호 합동 분향소가 설치됐을 무렵, 부산에서 오래된 친구가 올라왔다. 우린 시청역 앞 <십원집>에서 연탄 불고기와 계란찜을 먹었다. 대학 생활은 어떤지,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가벼운 주제로 흘러가던 대화는 결국 세월호에 닿았다. 친구는 말을 아꼈다. 우리의 대화엔 어딘가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광화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합동 분향소 앞을 지날 때, 우리 사이에 맴돌던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결국 터져버렸다.

 

"이제 이런 거 지겨워 죽겠어."

 

귀를 의심했다. 너무 당황해서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친구는 말을 덧붙였다. 자식으로 돈장사한다고.

 

친구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웃으면서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은, 분노보다는 좌절감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자라온 네가 어떻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을까. 너와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날, 나는 광화문 광장에서 십년지기를 잃었다.

 

 광화문 광장_세월호 기억공간_출처 한겨레21(김종오 사진가 제공).jpg

광화문 광장 기억의 공간

출처 - <한겨레21>

 

2008년 부산, 나의 10대

 

중학교에 입학한 그해,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고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배웠지만, 현실은 교과서와 달랐다.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국민을, 심지어 국가가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뉴스를 자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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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2011년 한미 FTA반대 집회, 2015년 민중총궐기대회

출처 - <민중의 소리>, <한국일보>

 

2009년, 경찰 특공대가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을 점거한 철거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모습을 봤다. 교과서에서 본 독재 시절, 거리에 나온 시민들이 두들겨 맞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2011년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이명박 정부의 경찰은 살수차를 끌고 나와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쐈다. 고막이 찢어지거나 뇌진탕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직사 살수의 위험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그때의 집회 현장에 살수차는 언제나 등장했다.

 

2015년, 경찰은 무방비 상태였던 한 시민에게 또 물을 쐈다. 백남기 농민은 얼굴 정면에 물대포를 맞았다. 과다출혈로 쓰러졌다. 국가는 그의 사망 원인을 ‘병사’로 기재했다.

 

내가 지켜본 국가는 그랬다.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보수 정권의 과도한 권력 행사는 나도 언제 어디서 그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거라는 두려움을 가르쳤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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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TV>

 

같은 해, 국정 교과서 논란이 있었다. 뉴라이트 학자들이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었다. 친일파 분량은 줄었고,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은 늘렸다. 박정희 산업화의 과실은 더 탐스럽게 설명했고, 그의 쿠데타는 더욱 당당하게 기술된 그런 교과서였다. 박근혜 정부는 그 책을 박정희 기념관이 아닌 학교에 일방적으로 배포했다.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쓰게 될 역사 교과서는 그것 하나였다. 1995년생. 나의 10대는 그랬다.

 

그나마, 내 마음이 시들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덕분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 거실엔 진보 신문지가 놓여 있었다. 매주 목요일, 대문 앞에 <시사인>이 놓여있었다. 야자를 빠지고 엄마와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을 보러 갔던 고2 어느 날도 기억난다. 부산에 상영하는 곳이 많지 않아 서면까지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갔다. 상영 시간도 늦은 저녁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좌석이 몇 개 없었던, 그날 영화관의 묵직한 공기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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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일보>

 

영화 속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 도심 한복판에서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매캐한 가스가 붉은 화염으로 가득한 스크린을 뚫고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잡음 가득한 무전기 소리에 진이 빠졌다. 대통령 이명박이 불법 집회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언급하자 당시 소병철 법무부 기조실장이 이렇게 말했다.

 

"정당한 공무 집행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면책을 보장하여 적극적인 공권력 행사를 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너머로 도심 속 불빛이 반짝였다. 예쁘다고 감탄했을 풍경이 평소와 다르게 다가왔다. 17년 동안 내가 알고 살던 세상은 일부에 불과했구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곧 부모님의 품을 떠나 영화 같은 현실을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에 엎어졌다. 영화만 보고 왔는데도 왜인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금방 잠이 들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으면 이 막연한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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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 김석기 2019년 발언(링크)

출처 - <경북신문>

 

2014년 서울, 나의 스무 살

 

2014년 4월 16일, 대학생 새내기로 상경해 기숙사에 머문 지 두 달 지났을 때였다. 매주 수요일은 오후 강의가 있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권을 내고 양식 코너에서 토스트, 계란 프라이, 크림수프를 차례대로 식판에 담았다. 식당 한 편에는 티비가 틀어져 있었다. 평소처럼 티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10시 반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티비 근처에 앉은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단원고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 중이라는 속보 자막이 떠 있었다. 카메라는 기울어진 배를 비췄다. 그 주변으로 해경선과 헬리콥터 여러 대가 떠 있었다.

 

“무슨 일 이래?”

 

“큰일이네.”

 

“어떡해…”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구조선이 도착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식당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랬을 것이다.

 

11시경, 탑승객 전원이 구조됐다는 뉴스 자막이 떴다. 앵커는 해당 내용을 반복해서 보도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뉴스에 집중했다. 모두 무사해 다행이다∙∙∙ 안도했다. 학생들 절반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나도 그제야 입에 물고 있던 토스트를 마저 삼켰다. 허겁지겁 일어나면서 마지막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탑승객 전원 구조를 알리는 멘트는 계속됐다. 그때까지는.

 

저녁 늦게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친구는 내가 본 뉴스와 다른 말을 했다. 전원 구조는 오보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뉴스를 다시 찾아보는 마음은 불안했다. 친구 말이 사실이었다. 내가 식당을 떠나고 나서 나온 뉴스는 정반대로 뒤집혀 있었다. 탑승객들이 배 안에 그대로 있었다. 배는 아침보다 더 많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그때 뉴스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진전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뉴스 중계 화면은 첫날과 같았다. 구조선과 헬기는 항상 같은 자리에 떠 있었다. 바뀌는 건 바닷속으로 점점 사라져 가는 배의 모습뿐. 어디선가 당연히 구조 중일 거라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배의 침몰을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당시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교과서와 현실은 다르다는 걸, 이미 <두 개의 문>을 봤던 10대 때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눈으로 본 현실은 더욱 처참했다. 그때 순진했던 나의 무의식은 아직도 국가라면 응당 국민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나 보다. 2014년, 나는 그렇게 씁쓸하고 텅 빈 마음으로 스무 살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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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해경 지휘부 전원 무죄판결

출처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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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경제> 

 

나의 첫 촛불

 

세월호의 학생들은 결국 구조되지 못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중에는 화를 낼 힘도 나지 않았다. 뉴스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밥 먹고 수업 듣고 돌아와 다시 뉴스를 보며 울다가 잠이 들었다. 무기력하고 우울한 날이 반복됐다. 그러던 중 중대본 회의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대통령의 일성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땅굴을 파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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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묻는 추모 집회가 시청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학교 친구 둘과 청계광장으로 나섰다. 일행이었던 C양의 부모님은 새누리당 강성 지지자였다.

 

“여기 나온 거 엄마가 알면 혼나는데. 집회 시위 이런데 나가지 말라고 했거든.”

 

C양은 걱정이 많았다. 경찰에 잡혀갈까 봐.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추모는 시위랑 다르다고 C양을 안심시켰지만 나도 생애 첫 집회였기에 긴장을 많이 했었다.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 또 구호는 언제 외쳐야 하는지 모든 것이 어색하고 어려웠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우리 셋은 뒤쪽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촛불을 켰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는 첫 집회였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은 함께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희생자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그들을 기억했다.

 

진행자는 촛불 행진의 시작을 알렸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청와대 길로 빠지면 경찰이 잡아갈 수 있으니 시청 방면으로 가는 행진 길을 따라 이동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C양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제 학교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또 다른 일행이었던 B군은 여기까지 온 거 행진까지 마무리하고 가자고 말했다. C양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끝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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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7일 청계광장

출처 - <뉴스원>

 

“행진하겠습니다. 모두 뒤로 돌아주세요.”

 

줄 맨 뒤에 앉았던 우리는 갑자기 행진의 선두가 되었다. 맨 앞 줄에는 백기완 선생님이 정부를 규탄하는 현수막을 들고 섰고 우린 그 뒤를 따랐다. 많은 기자들이 우리를 앞서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 얼굴도 기사에 담겼다.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기자와는 좀 다른 행색의 카메라를 든 사람이 내 앞을 막고 플래시를 터뜨렸다. 증명사진 찍듯이. 옆에 있던 아저씨가 말했다.

 

“아마 사복 경찰일 거예요.”

 

행진을 무사히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C양은 한결 평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먼저 돌아가지 않길 잘한 것 같아.”

 

그때의 캠퍼스, 그때의 우리들

 

C양의 귀가를 말렸던 B군은 또래 친구들보다 배려심이 깊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함께 수업을 듣는 1년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의견을 조곤조곤 물어봤다. 방학 때 친구들과 그가 나고 자란 광주에 놀러 간 적이 있다. B군은 518 역사공원, 김대중 컨벤션센터 그리고 떡갈비 골목에서의 식사까지 알차게 가이드 해줬다.

 

나는 서울에 와서도 거리낌 없이 부산말을 썼다. 당연했다. 난 부산 사람이니까. 사람들은 내 말씨를 좋아했다. 억양이 귀엽다며 가르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동향 사람을 만나면 ‘우리 친구 아이가’ 농담을 했다. 내 고향 부산은 언제나 자랑이었다.

 

처음 B군을 만났을 땐 그가 전라도 출신임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어디 가서 사투리를 쓰면 차별받을 수 있다고 표준어를 가르쳤다고 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대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부모님은 나를 불러 당부했다. 대학은 전국에서 다양한 학생들이 모일 테니, 분명히 문화가 달라 생기는 일들이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럴 때 알아서 잘 대처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생각보다 빨리 그 광경을 마주했다.

 

대구에서 온 친구가 광주에서 온 학생에게 ‘홍어’라는 말을 썼다.

 

“요즘은 홍어! 이런 말 쓰면 큰일 난다던데! (웃음)”

 

대구 친구는 문제가 되는 말이라는 건 아는데 뭐가 문제인지는 몰랐던 것 같다. 온라인에서 쓰는 타 지역을 비하하는 말이 일상의 농담에서도 거리낌 없이 끼어들었다. 그때 20대 대학생들의 언어는 자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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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노무현입니다>

 

추모 집회를 다녀온 뒤 첫 수업에서 할아버지 교수님은 손주 달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주에 세월호 집회에 다녀온 학생이 있나? 있으면 손 들어볼래?”

 

교수님은 장교 출신이었다. C양과 B군과 나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손을 들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집회는 하러 가는 거 아니라고 말했다. 손을 들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학기에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첫 번째 과제는 자유 주제로 칼럼 쓰기였다. 현 정권의 행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적어 냈다. 교수님은 글을 읽자마자 강의실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혼냈다. 어떤 문헌을 참고했으면 이런 글이 나오냐고. 눈치 없이 어릴 적부터 읽은 진보 신문지와 주간지 이름을 댔다. 교수님은 더 분노했다. 그래서 이렇게 편향적인 글이 나왔냐고 소리쳤다. 강의실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당황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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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중학생 때 만난 이명박, 고등학교와 스무 살을 함께한 박근혜. 그들이 내 친구들에게 알려줬던 것은 이기적으로 사는 법이었다. 돈과 권력 앞에 어떤 범죄도 부정도 처벌받지 않았다.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보다 순응하고 내면화하는 게 더 쉬웠다. 그게 세상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라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다.

 

곁에 있는 모두가 경쟁자였다.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서 모임은 인기가 없었다. 모든 활동의 전제는 스펙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났다. 달리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은 공포감이 캠퍼스를 감돌았다. 

 

2022년, 국가의 실종

 

11월 1일 아침, 동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언니 오빠들보다 한 살이 어렸던 동생이 지금은 대학을 졸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어. 너무 끔찍해서 뉴스를 볼 수가 없어. 정부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더 마음이 처참해.

 

토스트를 입에 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대학 기숙사 식당이 떠올랐다. 그 끔찍한 일이 내 20대에 두 번이나 일어났다. 마음속 깊은 곳에 애써 숨겨놨던 상처가 다시 만져졌다. 10.29. 참사 이후 정부의 대응을 볼수록 8년 전 그 상처가 하나도 아물지 않은 채 덧나는 기분이 든다. 누구 하나 사과하고 책임지는 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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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

 

사고가 아니라 현상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자랑스럽게 본인의 무능력을 자백한다. 외신 기자들 앞에서 농담을 던지고 본인의 유머가 통했다는 뿌듯함에 어깨를 으쓱했다.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고 현장에 방문한 대통령은 여기서 이렇게 많이 죽었냐고 물었다. 구명조끼 이야기를 하던 박근혜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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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TN>

 

2014년 이후 밤바다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지 못하게 됐고, 배를 다시 탈 수 있게 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 카톡 프로필엔 8년째 노란 리본이 걸려있다. 매년 4월 16일에는 마음껏 웃어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세월호는 아물지 않는 상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란 리본을 배낭에 달고, 4.16. 스티커를 붙인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챙겨 일상을 보낸다.

 

엄청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디서 어떻게 놀든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잘못한 건 사과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 교과서에서 배운 국가의 역할, 그 정도다. 2022년 지금에도, 상식이 뒤틀리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10.29. 참사를 지켜본 수많은 아이들이 나와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완연한 어른이 된 내가, 그 아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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