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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기였다. 내가 좌익인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있는지 나 스스로도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난 좌익이고 빨갱이였다. 그저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낙인찍혔고 빨간색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그들에게 내가 진짜 좌익인지 공산당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중요했다. 그들은 나를 공산당이자 반동분자로 여겼다. 

 

마을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문하고 죽이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이 이야기하는 빨갱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의 수는 극히 적었다. 빨갱이 딱지가 붙거나 덧씌워진 사람들이 빨갱이가 되었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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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위 이야기는 냉전 이후 제3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한 사건을 전형화한 것이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에서는 제주 4.3과 여순사건이 있었다. 두 사건 모두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희생당한 역사적 비극이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는 등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 바로 잡기를 위한 과정이 진행 중이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었다.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반미 성향이 강한 대통령으로 다양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훗날 인도네시아의 2대 대통령이 되는 수하르토와 군부는 수카르노와 달리 공산당 축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때마침 공산당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를 제압한 수하르토와 군부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공산주의자 제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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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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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2대 대통령 수하르토

 

1965년부터 1968년까지 군대와 반공단체(빤짜씰라 청년단)를 주축으로 한 세력들은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로 의심되거나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예를 들어, 중국계 화인)을 탄압하고 학살했다. 그 수가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공산주의자를 죽인 자들에게는 금품이 수여되었고, 반공단체 회원들은 이 학살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자랑스러운 행위로 치장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 사회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명백한 학살 행위는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의 영화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 2012)과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 2014) 개봉과 함께 인도네시아에서도 서서히 이슈화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 얘기는 아직도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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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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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선

 

 

제3세계에서 자행됐던 국가 폭력의 공통점

 

제주와 여순,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학살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공산주의자를 처단한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을 학살했다는 점이다.

 

둘째, 극우 청년 조직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서북청년단, 빤짜씰라 청년단은 군인도 아닌 신분으로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비극적 학살을 주도했다. 

 

셋째, 미국의 개입이다. 시간이 흘러 미국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었다는 관련 증거가 제출되었다. 

 

이제 필자의 관심 지역인 태국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태국에서도 학살이 일어났었는데, 전술한 사건들과 개요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도 많은 태국인의 가슴에 가슴 아픈 사건으로 남아있는 사건의 이름은 ‘파오탕댕’(Phao Thang Daeng)이다. ‘파오’는 ‘태우다’, ‘탕’은 ‘통, 드럼통’, ‘댕’은 ‘붉다’라는 뜻으로, ‘붉은 드럼통에 태우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Red Drum Killings’ 혹은 ‘Red Drum Murders’ 정도로 통용된다. 문자 그대로 붉은 드럼통에 사람을 넣고 태워 죽인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하면 ‘붉은 드럼통 학살’ 사건으로 부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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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Prachatai English>

 

이 잔혹한 학살에 대해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보자. 

 

1975년 2월, 태국의 학생 운동 세력(NSCT, National Student Center of Thailand)은 약 2년 반 전 남부 파탈룽(Phatthalung)에서 일어난 잔인한 국가 폭력에 대해 폭로했다. 공산주의 진압작전사령부(CSOC, Communist Suppression Operations Command, 1965년 설립, 초창기에는 라오스 국경 지역인 동북부 반군 진압이 목적)와 태국군에 의한 폭력이었다.

 

살해 과정에서 붉은 드럼통이 사용되었기에 이 사건은 ‘붉은 드럼통 학살’이라 명명된다.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거나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은 무고한 많은 주민들을 최소 1천 명 이상 많게는 약 3천 명 이상 학살한 국가폭력이 자행된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태국 남부 파탈룽은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었을 뿐인데, 왜 이런 국가폭력이 발생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냉전 이후 태국의 정치안보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냉전 이후 태국의 정치·안보 상황

 

1932년 태국의 입헌혁명(군부 쿠데타)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피분 쏭크람(Phibun Songkhram)을 시작으로 군 출신 인사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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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분 쏭크람

 

이후 1944년 피분이 권좌에서 물러났고, 문민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문민정권은 약 3년 4개월 동안 네 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날 정도로 안정적 정국 운영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피분의)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태국 군부 정치 서막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이후 태국 정치에서는 군부가 원하면 언제든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현재까지 태국에선 일부 기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군부가 권력을 장악해왔다. 

 

1948년 피분이 다시 집권하면서 나타난 변화 중 중요한 점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피분은 한국전쟁 파병(1950년),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창설에의 참여 등 친미적 행보를 통해 대륙 동남아에서 자유진영 수호를 꿈꾸던 미국의 우방국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태국의 민족주의에 반공이 강력한 화두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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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지도

 

미국은, 중국은 물론이고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과 미얀마 등 태국의 주변국이 공산화되어감에 따라, 태국을 중심으로 도서 동남아 국가들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태국에 경제안보적 지원을 강화하였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피분은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태국 내 화인(중국인)과 반정부 인사들도 공산주의자와 동일시하여 탄압하였다. 이들을 더 탄압하기 위해 1952년엔 반공법을 통과시켜 이들을 체포·구금하였다. 

 

1957년에는 새로운 쿠데타가 일어났다. 싸릿 타나랏(Sarit Thanarat)이 주도한 쿠데타였다. 싸릿이 권력 전면에 등장하면서 피분은 권력에서 멀어져갔다. 새로운 권력이 된 싸릿은 왕실을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 피분과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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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릿 타나랏

 

무혈 쿠데타 당시 젊은 장교였던 피분이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왕실을 최대한 배제한 반면, 싸릿은 압제적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실을 끌어들였다. 

 

공통점으로는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싸릿은 공산주의자들을 왕실과 불교를 부정하는 자들로 규정했다. 사회에 큰 위협이 되는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했다. 이런 방향성의 일환으로 태국은, 1963년 동북부 국경지대의 공산주의 용의자를 대거 체포하였고,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참전국 중 지상군 투입 규모 3위, 미군의 태국 내 8개의 공군 기지 사용 허가 등 베트남 전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당시, 태국 국내의 공산주의 세력은 점차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들은 ①좌익 성향의 정치인 ②북부와 동북부의 라오스 국경지대 공산주의 세력 ③몽족(Hmong) 등 일부 고산지대 소수 종족 ④말레이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남부 세력과 연계해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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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경우는 세력 확장의 정도가 더 컸다. 남부의 경우, 나컨씨탐마랏(Nakhon Si Thammarat), 쑤랏타니(Surat Thani) 등과 같은 남부 중상부 지역까지 영향권이 커지며 군부와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때 미국은 태국 내 공산 세력 진압에 많은 지원을 했다. 많은 인권 유린에 대해 묵인했고, 자금과 정보 등을 지원해줬다. 군부는 이를 이용하여 실제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사상과 이념에 상관없이) 군부 체제에 반대하면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아 제거했다. 

 

그러던 중 태국 군부가 자신들의 안위를 우려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아시아 국가에 대한 개입을 줄이겠다는 ‘닉슨 독트린 선언’은 동남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를 가져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며, 태국 군부는 베트남의 공산화 저지보다는 자국 내 공산 세력 확산을 막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여기서 태국 역사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군부 독재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더 이상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하자, 1972년 싸릿의 후계자 타넘 낏띠까쩐(Thanom Kittikachorn)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타넘은 쿠데타를 통해 진영을 추스른 뒤, 신헌법을 공포했다. 신헌법은 의원의 2/3를 군과 경찰에서 선임할 수 있도록 했다. 태국 국민들은 이 악법에 분개하였고, 곳곳에서 반정부·민주화 시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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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넘 낏띠까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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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반정부·민주화 시위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1973년 10월 당시 국왕인 푸미폰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편에 서며 군부는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푸미폰 국왕은 민중의 편에 선 왕으로 기억되는 면이 있다. 반전이 있다면, 3년 후 국왕은 자신과 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국민들을 배신하고 군부와 다시 손을 맞잡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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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미폰 국왕 (라마 9세, 1927-2016)

 

 

가장 잔인한 학살이었던 ‘붉은 드럼통 학살’

 

전술했듯 냉전이 시작되며, 태국 군부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사회적 안전을 위협하는 ‘공통의 적’을 만들어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적이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때문에 태국 내 공산주의자들은 군부의 표적이 되었고, 군부는 그들(+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다. 그중 가장 잔악무도한 살육 사건이 1972년 말 태국 남부 팟타룽(Phatthalung) 주 람싸이(Lam Sai) 면에서 발생한 ‘붉은 드럼통 학살’(Red Drum Murders)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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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타룽 주

 

CSOC(공산주의 진압작전사령부)의 지휘하에 군대와 경찰, 자경단이 직접 수행한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200명 이상(공식 통계상)의 민간인들을 붉은 드럼통에 넣고 산 채로 태워 죽인 끔찍한 사건이다. 비공식 통계로는 팟타룽 주에서만 1,000-3,000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학살 외에도 군부는 1971~1973년 동안 공산주의 척결이란 기치 아래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희생자들은 태국 공산당과 함께 일했거나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용의자들을 총기로 살해하였으나, 나중에는 증거 인멸을 위해 붉은 드럼통에 살해하는 잔악한 수법이 사용되었다. 

 

 

붉은 드럼통 학살의 과정 

 

전술한 대로 태국어 ‘파오탕댕’은 붉은 드럼통에 기름을 부어서 죽은 사람을 태우거나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드럼통에 넣고 화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공산주의자로 내몰린 사람을 주둔지로 끌고 와 기절할 때까지 때리며 린치를 가한 후 이미 죽었거나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불태우는 아주 잔악한 형태의 살인이다. 

 

이 화형은 보통 저녁 8시에 진행되었다. 그래서 당시 저녁 8시만 되면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서 불에 태워진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함께 불에 탄 육신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시체가 불에 타는 동안 희생자의 비명을 가리기 위해 트럭 엔진을 켜 놓은 채 학살을 집행하였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가, 왜 끌려갔는가? 

 

“반정부 활동을 하는 공산주의자가 국가에 위협이 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끌려갔다.” 

 

“남부 지역의 공산 게릴라에 협조한 사람들이 끌려갔다.” 

 

가해자인 군의 설명이다. 

 

실제 그랬을까? 

 

일단 당시 태국 남부 지역에는 약 400여 명의 공산 게릴라가 중남부 산간 지대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남부를 종단으로 가로지르는 반탓 산맥은 험준한 자연 지형 탓에 은신하기에 적합해 남부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수는 고작 400여 명에 불과했다. 학살당한 약 3천여 명(비공식 통계)에 한참 못 미치는 인원이다.

 

당시 태국 중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5군 사령관인 싼 찌빳띠마 장군(General Sant Chipatima)은 붉은 드럼통 학살의 작전 책임자였는데, 그는 군부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철권통치에 경도된 군인이었다. 그의 지휘하에 부하들과 CSOC 멤버들은, 많은 마을 사람들이 공산 당원이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한 사람들이라고 세뇌되었다.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마을 주민들을 태국 공산당의 대리인으로 몰아세우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한 교사의 이야기 

 

그들은 마을에 침투해 의심되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공개된 예 중 하나는 한 교사의 이야기이다. 

 

당시 마을에 새로운 학교를 짓고 있었는데, 지역 유력자가 계약을 독점하려는 부패를 저지르려 하자 한 교사가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근데 그는 어느새 부패한 권력에 반대한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마을과 지역, 정부를 위협하는 공산주의 세력이 되어 있었다. 군인들과 CSOC는 그를 끌고 어디론가 갔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공산당 혹은 게릴라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그 교사와 함께 끌려갔다가 운 좋게 석방되어 살아남은 동료 교사는 범죄 사실, 즉 두 교사가 함께 공산주의 문서를 배포하고 정부 재산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했다. 두 교사들은 단지 지역 관리의 부패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었는데, 그것이 그들을 죽음이나 죽음에 가까운 고통으로 이끌었다. 

 

이는 공산주의와의 관련성이 문제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태국 남부의 평화로운 산골 마을은 범죄 자백 강요, 그 과정에서의 고문, 더 나아가 붉은 드럼통에 넣고 태워 죽이거나, 총살, 심지어 산 정상이나 헬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잔인한 국가폭력이 자행된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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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통에 태워 죽인 시체를 이 수로에 버렸다고 한다

 

국가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는 학살 방법의 잔혹성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용의자가 이미 숨어버려 소재 파악이 불가능할 경우 가족을 체포하였다. 더불어 마을 내 분열이나 갈등이 조장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누가 공산주의자인지 군과 경찰에게 고발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CSOC의 스파이가 되기도 했다. 간혹 마을 촌장이나 유력자에 의해 마을 주민 중 누군가가 공산 세력으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대상자는 실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지목한 사람과 이런저런 갈등 관계에 놓은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서 주민들 중엔 마을 이웃 누군가의 희생이 자신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희생된 자의 고무 농장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후엔 서로 간의 고발전이 이어졌고, 평화로운 마을은 갈등과 분쟁이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만든 주체는 다름 아닌 국가였다.  

 

 

극우 청년 조직 ‘CSOC’

 

붉은 드럼통 학살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조직이 있었다. 극우 청년 조직 CSOC(공산주의 진압작전사령부)이다. CSOC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북청년단, 인도네시아로 치면 빤짜씰라 청년단과 같은 조직이다. 이 조직은 196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창설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민간 조직이라 했지만, 사실상 준-국가, 준-군사 조직이었다. (군부가 생각하는) 유사시에 공권력이 주어졌고, 그들의 임무는 민간 조직의 영역이 아니었다.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을 억제하고, 왕정을 수호하고, 단결을 촉진하고, 국민들을 위해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당시 학살에서 군, 경찰과 학살의 트로이카를 이룬 이 조직은 이후 1974년 이름을 바꾸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ISOC(Internal Security Operations Command)라 불리는 현 태국 보안작전사령부가 그것이다.

 

현재 보안사령부.jpg

2011년 ISOC 회의 모습

중앙 자리에 당시 총리였던 ‘아피싯 웨차치와’의

모습이 보인다

 

 

미국도 학살의 책임자 중 하나

 

CSOC의 창설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 자체가 이 학살과 미국과의 관련성을 뗄래야 뗄 수 없다는 증거다. 당시 미국은 대륙 동남아에서 공산화가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동남아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공산 세력을 절멸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은 동남아에서 이 도미노 이론을 차단하는 중추 국가로 태국을 선택했으며, 이러한 미국과 태국 군부의 결탁으로 태국 내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제거되었다. 물론 미국이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태국 내 수많은 학살에 미국은 암묵적으로 동조했고, 간접적 지원을 더했다. 붉은 드럼통 학살뿐 아니라 다른 학살 사건에서도 말이다. 미국은 스스로 무고한 척하면서 대리인인 태국 군부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 했고, 그렇게 했다.  

 

 

진실을 규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

 

붉은 드럼통 학살에 있어서 공산주의 반군의 실체와 규모 여부는 크게 중요치 않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 장본인이었고, 그 과정에서 절대다수의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는데도 어떻게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는지, 아직 오지도 않은 다가올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들의 경계를 특정한 근거 하나 없이 단지 국가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악의적으로 규정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명이 이루어질 때 다시는 없어야 할 이 비극의 되돌이표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드럼통 학살의 처리 과정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학살이 일어났고, 그 학살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살이 폭로되었고, 국가에 의해 조사되고 확인되었음에도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1975년 학생 조직에 의해 처음 밝혀져 세상에 알려진 이후 잠깐 동안의 학살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으나, 곧 붉은 드럼통 학살의 진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진상 조사 과정에서 증언자들은 수많은 회유와 압박에 시달렸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용기를 내 증언하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

 

붉은 드럼통 학살 2년 뒤에 일어났던 1976년의 ‘탐마쌋 학살’ 이후, 푸미폰 국왕이 군부의 손을 다시 잡아줌에 따라 진상 규명은 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최악의 학살임에도 아직도 우리의 제주 4.3 사건처럼 전 국민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사람들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알고 있다 해도 아직까지 서슬 시퍼런 군부 정권인 탓에 공개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다. 언젠가는 오겠지만, 태국에서 과거 군부의 잘못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날이 가까운 날에 오기란 아직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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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싸이 마을에 설치된 위령탑

 

위령탑 지역이 탕댕 학살이 자행된 군부대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조형물.jpg

위령탑이 있는 지역이 붉은 드럼통 학살이

자행된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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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탑과 표지판 전체 사진

 

2004년 붉은 드럼통 학살이 있었던 파탈룽주 람싸이 마을에 붉은 드럼통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이 세워졌다. 태국 국영 방송 PBS에서 제작된 고발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희생자 가족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 다음 세대들이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위령탑, 즉 상징물을 만들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곳을 지방의 아픈 역사를 넘어서 태국의 비극의 역사의 한 장소로 인식해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은 진영 간 대립으로 항상 진흙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비극적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과거를 극복할 수 없다. 

 

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의 말처럼, 진실은 반복해 이야기하면 된다.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가치판단을 멈추고 진실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때 그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Mattew Zipple, 2014, “Thailand’s Red Drum Murders Through an Analysis of Declassified Documents,” Southeast Review of Asian Studies, Vol. 36. 

-Tyrell Haberkorn, 2013, “Getting Away with Murder in Thailand: State Violence and Impunity in Phatthalung,” State Violence in East Asia,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쾀찡마이따이): “무반 탕댕”(붉은 드럼통 마을) 편, 2018년 7월 17일 Thai PBS(태국 공영 방송사)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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