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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8세의 포석

 

1936년 7월 29일, 영국 해군은 킹 조지 5세급이라 불리는 전함 3척의 발주를 몇 군데 조선사에 넣었다. 발주는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나머지 2척도 1936년 11월과 1937년 4월에 주문이 들어간다.

 

세 왕의 해(지난 편 참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3 : 형의 왕관을 받고 형의 약혼녀와 결혼하다-링크)에 새로운 전함을 만든 영국 해군. 문제는 그 이름이었다. 관례상이라면, 새로 즉위한 왕의 이름을 새로 건조한 전함의 네임쉽(Name Ship : 1번 함)으로 쓰는 게 정상이었다. 그렇다는 건, 

 

‘킹 에드워드 8세급’

 

이 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가 이 이름을 사용하는 걸 거부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그게... 아무래도 부왕의 이름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원래, 신왕의 이름을 신조 전함으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부왕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했잖은가?”

 

“조지 5세급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폐기됐지만...”

 

“... 내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러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킹 조지 5세급으로 가지?”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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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에드워드 8세는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 문제로 한참 이런저런 구설이 오갈 때였다. 에드워드 8세도 나름 계산기를 굴려봤던 것.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왕위를 내려놓아야 하겠고... 이렇게 되면 전함의 이름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오겠네??"

 

그럴 바에는 애초에 아버지 이름으로 가는 게 낫겠단 판단이었다.

 

이름 밀어내기 : 세 왕의 배

 

에드워드 8세로서는 그나마 현명한(!?) 한 처사였다. 만약 에드워드 8세가 그냥 자기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킹 조지 5세급의 전함 명은 뒤바뀌었을 거다.

 

원래라면, 

 

1번 함은 킹 에드워드 8세(King Edward Ⅷ)

 

2번 함은 듀크 오브 요크 (HMS Duke of York)

 

3번 함은 앤슨 (HMS Anson)

 

이 됐을 거다.

 

‘요크 공작’이란 건 영국 왕세자의 형제에게 주어지는 요크 공작이란 칭호이기도 하고, 대제독 요크 공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의적인 의미지만 실질적으로는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조지 6세를 기념하기 위한 이름으로 준비됐다. 3번 함의 앤슨은 영국의 유명한 해군 제독 조지 앤슨(George Anson)에서 따왔다. 이렇게 1, 2, 3번 함의 이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936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세 왕의 해’가 벌어졌다. 세 명의 왕이 한 해에 다 등장하고 사라진 거다. 

 

이렇게 되니 전함의 이름에 문제가 생겼다. 다행히 에드워드 8세가 나름 현명하게 처신해서 부왕 이름을 따 전함을 ‘킹 조지 5세’라고 명명하는 통에 네임쉽의 이름이 날아가 버리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이 되는 조지 6세의 생각이었다.

 

“아버지 이름을 기념하는 것 인정. 그런데... 형은? 퇴위하긴 했지만, 한때 왕이었는데... 그리고 왕세자의 형제도 이름을 넣어주는데...”

 

이렇게 해서 킹 조지 5세급의 2번 함 이름이 급하게 변하게 된다. 원래는 듀크 오브 요크 (HMS Duke of York)였지만, 왕세자를 의미하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로 바뀐 거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공식적인 영국 왕세자의 호칭이 되었다. 찰스 왕세자의 공식 명칭도 바로 이것. 그러나 사실 이건 왕위에서 물러난 에드워드 8세를 기념하기 위한 명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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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HMS Prince of Wales)

 

이렇게 2번 함의 이름이 바뀌니 3번 함의 이름도 바꾸게 됐다. 원래 3번 함의 이름은 앤슨 (HMS Anson)이었는데, 그 이름은 4번 함이 가져갔고, 원래 2번 함의 이름인 듀크 오브 요크 (HMS Duke of York)를 3번 함에 붙였다.

 

3번 함은 조지 6세를 상징했다. 즉, 삼부자가 1936년에 건조된 신조전함의 1, 2, 3번 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거다. 1936년 7월 29일 영국 해군이 동시에 발주 넣은 3척의 킹 조지 5세급 전함들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1936년을 상징하는 ‘세 왕의 해’를 거쳐 간 3명의 왕을 상징하게 되었다. 

 

불길한 이름 : 에드워드 8세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에드워드 8세 다. 그가 없었다면, 킹 조지 5세급이란 이름 대신 에드워드 8세급이란 이름이 쓰였을 거고, 2번 함의 이름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불운은 그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다. 

 

에드워드 8세는 친 나치 성향을 보였다. 영국의 외교 노선이 反 독일 쪽으로 흐르자,

 

“왜 독일과 대결 구도를 형성하는가? 독일과 우호 관계를 증진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질 않나, 나치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수차례 보여줬다. 나치식 경례를 한 사진이 발견될 정도. 1937년 왕위를 내려온 뒤에는 독일의 배를 타고, 독일에 방문해 나치 고위 간부들과 파티를 즐기고, 히틀러의 산장에 가서 만찬을 즐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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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23일 뭔헨에서 히틀러와 인사를 나누는

윈저 공작(에드워드 8세)와 공작부인

 

2차 대전 직전에는,

 

“영국과 독일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

 

라고 헛소리를 했었고, 시간이 흐른 뒤엔

 

“부왕이 독일 혈통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란 발언까지 하게 된다(조지 5세가 1차 대전 당시 작센코부르크고타를 버리고 윈저 가문을 개창한 것에 대한 걸 어쩔 수 없었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2차 대전 끝 무렵 바하마 총독을 사임할 때도,

 

“나치가 미국을 무찌를 때 복귀하겠다.”

 

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약 에드워드 8세가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아마 영국은 2차 대전 당시 상당히 어려웠을 거다. 왕위에 있었던 시절에도 기밀자료를 아무렇지 않게 방치해서 내각 총리가 계속 이러면 기밀 자료를 보내지 않을 거란 경고를 들을 정도였다. 왕으로서 처신이 엉망이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불운

 

이런 상황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칭호를 따와 명명한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에게 제대로 된 활약을 기대한다면 그게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불운했다.

 

취역하고, 첫 데뷔전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타격을 입었다. 당시 후드와 함께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비스마르크의 포격에 후드가 두 동강이 나자 순식간에 열세에 몰리게 된다.

 

당장 후드의 잔해를 피해야 했기에 이 잔해 때문에 제대로 포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연장 포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다시 말하지만, 4연장 포탑을 설치한다는 건 대단한 기술적 모험이다) 10문의 포 중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2연장 포탑 하나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가 계속해 포격을 날려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교가 피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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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월 24일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비스마르크에게 발포하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

 

이런 상황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비스마르크에 명중탄을 날렸다. 이 중 한 방이 비스마르크의 연료탱크를 때렸고, 비스마르크는 길게 기름을 흘리며 움직여야 했다(이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애초 목적인 통상 파괴전을 포기하고 독일로 복귀해야 했고, 영국 해군에게는 복수전을 할 기회가 생기게 됐다).

 

기묘한 이름, 기묘한 운명

 

비스마르크 추격전 이후 윈스턴 처칠 수상을 태우고 캐나다까지 갔다 온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지중해 지역의 호송 작전에 참여한 뒤 아시아로 파견된다. 일본의 동남아 침공이 가시화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게 Z 기동부대였고, 이 부대의 기함으로 낙점된 게 프린스 오브 웨일스였다. 

 

기동부대였기에 전함만 보낸 게 아니라 항공모함(인도미터블)과 수양함도 붙여주며 최대한 구색을 갖췄는데, 때마침 항공모함의 수리를 하게 된다. 영국 해군은 항공모함이 없더라도 동남아 이곳저곳에 있는 공군 기지의 항공지원을 받으면 된다고 판단했다(실제로 항공지원을 해준다는 약속도 받았다).

 

그리곤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가 일본 해군 항공대와 육상 공격기의 공격에 격침되고 만다. 역사에서 ‘말레이 해전’이라고 부르는 전투였다. 이틀 전 있었던 진주만 공습과 함께 해전의 주역이 전함에서 항공기로 뒤바뀐 걸 증명해 준 전투였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이 변화의 증거로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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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해전에서 회피 기동 중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

 

배의 운명은 그 이름을 딴 에드워드8세의 운명과 기묘하게 비슷했다. 에드워드 8세는 고작 11개월 재위했다. 1941년 1월 19일에 취역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1941년 12월 10일에 침몰했다. 에드워드 8세가 1936년 1월 20일, 왕위에 올랐다가 그해 12월 11일에 퇴위했다. 날짜를 꼽아보면 재위 기간과 취역 기간이 정확히 일치한다. 주말 <서프라이즈>에서나 볼법한, 가져다 맞춘 이야기일 수 있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스'란 이름은 ‘배’ 입장에서 보면 그리 달가운 이름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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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생존자를

구출하고 있는 구축함 익스프레스

 

이번에 영국 해군은, 간만에 도입한 퀸 엘리자베스급 항공모함 2번 함에 또 한 번 그 이름을 사용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

 

부디, 이름에 얽힌 기묘한 운명을 벗어나 건승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