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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개밥바라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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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 선생의 자전적 소설 ‘개밥바라기별’ 

출처-<문학동네>

 

 

전쟁터로 떠나기 전, 서울역 광장의 밤 

 

세상 만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 어두운 밤,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유독 밝게 빛나는 별이 하나 있다. 아름다운 그 별의 이름은 ‘샛별’. 빛나는 만큼이나 참으로 예쁜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샛별’이 아닐 수도 있다. 가난한 집에서는 개도 배가 고프다. 저녁 무렵 가난한 집 개가 애처롭게 밥을 바랄 때쯤 보이는 별이라 ‘개밥바라기’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살아내야 하는 누군가에게는 ‘샛별’이 아니고 ‘개밥바라기’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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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전 광장의 푸르스름한 가로등 밑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여행자처럼 잠시 서 있었다.

 

사흘 뒤, 베트남의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준’은 서울역 앞 광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도 알 수 없었고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준의 머릿속에서는 청춘의 입구를 맴돌던 과거가 떠오를 뿐이었다. 준은 과거를 떠올리며 광장을 맴돌았다. 자신의 흔적, 자신의 그림자가 광장 어디쯤엔가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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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서울역 풍경

출처-<국가기록원>

 

서울역 광장에 낯설게 서서 준이 떠올린 과거의 장면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었다. 계속되는 방황의 시간, 길 위를 떠돌던 방랑의 시간, 고통스러운 시간 속 장면들이었다. 그것들은 머릿속에서 카메라로 느리게 찍은 화면을 재생하는 것처럼 빠르게, 그리고 덧없이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화면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떠올랐고, 그를 스쳐 간 많은 낯선 사람들도 떠올랐다. 

 

마지막으로는 ‘미아’, 그녀가 떠올랐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한 번만 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준의 눈에 희미하게 불이 켜진 전화박스가 보였다. 준은 전화를 걸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준은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세당하지 않은 인호

 

쥐뿔도 없으면서 개화된 교육을 받았다는 자존심과 자산가의 흔적만을 간직한 준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준이 중산층이자 개화된 지식인의 아들로서 자라기를 원했고, 준이 의사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된 준은 교실 안의 몽상가였다. 준은 집과 학교를 수시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등산반에 가입했다. 그리고 등산반의 암벽등반 훈련장에서 ‘인호’를 처음 만났다. 인호는 준보다 한 학년 위 선배였다.

 

애매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냐? 

 

밤안개라는 노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별로 생각은 안 해봤어요.

 

너 글쓰냐?

 

학교가 좀 지루해지고 있지요.

 

첫 만남의 이 대화가 둘을 친구로 만들었다. 그날 이후 둘은 항상 어울려 다녔다. 같이 막걸리를 마셨고, 같이 담배를 피웠다. 매 주말에는 서울 주위 산과 암벽을 섭렵했고, 급기야 가을에는 무단결석을 하고 설악산에 잠겨 지내기도 했다. 그 행동에 대한 결과는 유급이었다. 둘은 유급을 당했다. 지금까지 자라면서 모범생으로 칭찬만 듣던 준이었다. 준은 약속된 줄 위에 서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준은 그 줄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급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둘이 학교 강당 공사장에서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다른 쪽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인호가 먼저 그쪽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다섯 명이 한 아이를 무릎 꿇려놓고 여유를 부리며 두들겨 패고 있었다. 주도하는 녀석은 체육반 주장 ‘용근’이었다. 녀석은 돈을 잔뜩 내고 들어온 기여입학생이었다. 

 

인호는 용근이에게 ‘한 놈을 다섯 명이 패고 있네, 얘가 그렇게 세냐?’고 말하며 피 흘리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용근이와 더불어 다섯 놈들의 주먹과 발이 인호에게 날아왔다. 준이 달려와 가세했다. 준이 가세하자 전세가 역전됐다. 그러자 놈들은 연장질을 시작했다. 블록과 각목이 난무했다. 난타전은 각목에 머리가 터진 인호의 기절로 끝났다. 인호는 용근이를 응징하기로 했다.

 

인호답게 응징은 곧바로 실현되었다. 다음날 인호는 반팔 길이의 짤막한 쇠파이프 하나를 구해 붕대를 두툼하게 감았다. 그리고 수업 중인 용근이의 반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강의 중인 선생님이 쳐다보았고 용근이 반 아이들이 쳐다보았다. 인호는 아이들 책상 위로 뛰어올라 뒷줄 중간쯤 앉아 있는 용근이에게로 달려갔다. 인호는 기겁해서 두 팔로 머리를 감싸는 용근이에게 쇠파이프를 내려쳤다. 인호는 퇴학이었다. 

 

차라리 잘됐지 뭐.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고향집에 내려가 어머니하고 꽃을 기르는 일이었어. 그래, 내 꿈은 별개 아니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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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아이들의 개성을 사회적으로 거세하는 임무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 것이지만, 인호의 사타구니 사이 물건은 그것보다 더 강했다. 인호는 거세당하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

 

그해 사월이었다. 이승만을 끌어내리기 위한 시위는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수업하는 중에도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상급생들은 반을 돌며 거리로 나가자고 외쳤다. 학교가 오후 수업을 하지 않기로 한 날, 준은 같은 반 친구인 중길, 영길과 거리로 나섰다. 광화문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었고, 부민관 건너편의 신문사는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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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파출소와 무술 경관들을 향해 돌팔매를 날릴 때였다. 총소리가 들렸다. 군중들은 일시에 상반신을 낮추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준이는 도망가지 않고 거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준은 중길이의 피로 가슴팍까지 벌겋게 물든 채 총알에 관통된 중길이의 머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준은 눈물범벅이 되어 영길이에게 울부짖었다. ‘얘가 총에 맞았어!’ 중길이가 죽었다. 애들한테 총질이나 하는 나쁜 새끼들이 권력을 잡은 세상이었다. 준은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저는 결국 제도와 학교가 공모한 틀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도 옆으로 비켜서서 저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자퇴 이유입니다.

 

 

방랑의 시작

 

준은 자퇴 이유서를 써 속달 등기로 학교로 보냈다. 그리고 그 길로 학교를 때려치운 뒤 퇴학당한 인호와 함께 북한산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 굴속에서 두 달을 살았다. 그리고 굴에서 나오자마자 빈털터리로 용산역에서 호남선 야간 완행열차에 올랐다. 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등짝에 짊어진 배낭은 묵직했다. 역무원의 검표가 시작되자, 기차에서 뛰어내렸고 걸었다. 밤새도록 걷다가 적당한 곳이 보이면 텐트를 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름밤을 걷노라니 배낭을 짊어진 등짝에 땀이 배었지만 목덜미는 서늘했다.

 

절에 들러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농부들이 베푸는 선의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 착한 사람들이 건네는 보리밥과 열무김치, 막걸리는 달디 달았다. 비가 내리면 판초 우의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어느 농부가 건넨 팔지 못하는 상처 난 참외는 어린아이 머리통만 했다. 주린 배에 내리는 축복이었다. 그렇게 둘은 호남 일대를 쏘다녔다.

 

인호의 낡은 군화는 드디어 뒤축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희미하게 불을 밝힌 창들이 보이면서 국도변의 작고 가난한 마을을 지나칠 때면 그 어슴푸레한 호롱불빛을 따라 걸어 들어가 아무데나 외양간의 짚더미에라도 쓰러져 눕고 싶었다.

 

둘의 방랑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합류했고,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이어졌다. 준은 한 달이 넘게 이어진 방랑을 일시적으로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오자 이제 다시는 소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첫사랑,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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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서울 픙경

 

서울은 한강을 둘러싼 자본주의 근대화가 무르익고 있었고, 준의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었다. 인호는 어머니가 홀로 지키고 있던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준은 혼자서 글을 썼다. 준의 어머니는 예전과 달랐다. 준의 소설 하나가 어느 월간지의 문학상에 당선되자, 어머니는 준에게 쓰고 있는 글을 읽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겨울, 처음에는 가늘게 흩날리던 눈이 차츰 허공이 빡빡한 흰 점으로 가득 차면서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리던 날, 준에게 ‘미아’가 다가왔다. 친구들과 모인 날이었다. 미아는 검정 외투에 검은 목도리를 휘감은 여고생 차림으로 나타났다. 술자리가 파한 뒤 어쩌다 보니 준과 미아만 남게 되었다. 미아는 낙산 산동네에 산다고 했다. 준은 그녀를 바래다주기로 했다.

 

해를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으면.......

 

미아의 집이 있는 산동네 목로 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더 걸쳤을 때 미아가 한 말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딸인 미아에게는 공부를 잘한 것도, 명문대에 합격한 것도 모두 슬픔일 뿐이었다. 첫 한 학기 등록금만 어떻게 해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다고 미아는 부모에게 사정했다. 그러나 미아의 아버지는 미아의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대답했다. 

 

방구석에 틀어박힌 미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미아는 시집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면, 그런 청년이 있다면 이 숨 막히는 집안에서 탈출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아는 대학을 포기하고 구청 임시직으로 취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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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대문구청 민원창구 모습 (당시에는 합동에 위치)

 

준과 미아 사이에 더 많은 술잔이 오고 갔다. 어느덧 둘은 서로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준은 이제 ‘해를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이라는 미아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혹시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자신이 그런 상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준은 미아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미아에게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바람 피해 오시는 이처럼 문득, 전화하면 누가 뭐래요?

 

이 엽서에는 그녀가 근무한다던 구청 사무실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준은 전화를 했다. 둘의 연애가 시작되었고, 어느덧 준도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생이 되었다. 어머니의 간절함 때문에 공고에 들어가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여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대학 강의는 시시했다. 차라리 집에서 책이나 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첫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창백한 미아의 얼굴을 보며 함께 휴가를 가자고 했다.

 

둘은 하인천 부두에서 연락선을 타고 한 시간 반이나 가야 닿는 섬으로 들어갔다. 휴가철이 끝난 섬은 민박집 구하기 쉬웠고, 인적은 드물었다. 둘은 같이 밥을 지어 먹었고 해변을 걸었다. 조개도 줍고 게도 잡았다. 어선이 들어오면 생선 몇 마리를 사거나 얻어 오기도 했다. 밤에 어둠이 짙어지면 남포등을 켜놓고 각자 책을 읽거나 아예 불을 끄고는 문 앞에 나란히 엎드려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가야 할 날이 되었다. 비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민박집 주인 여자는 선착장으로 향하는 준이와 미아에게 태풍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태풍이 지나가기 전까지 배는 오지 않을 것이라 했다. 둘은 민박집에 다시 주저앉았다.

 

배가 오지 않았던 첫째날 나는 처음으로 여자와 잤다. 그 처음은 실수처럼 싱겁게 아무것도 아니게 지나갔다. 어, 이게 그거야? 다음번에는 뜨거워져서 온몸이 땀에 젖었고 서두르기만 했다. 나는 미아의 몸을 기억하게 되었고 점점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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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랑과 자살 시도

 

섬에서 돌아온 이튿날부터 준은 미아가 보고 싶었다. 미아가 준의 무미건조한 삶을 금 가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이 덧없었고 모든 것이 지겨웠다. 불면증 때문에 먹기 시작한 약은 그 기운이 사라지면 준을 더욱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준은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 읽었던 책들, 어정쩡하게 진학한 대학. 어쩌면 자신이 쓴 글과 미아마저도 준에게는 벗어나야 할 대상일지 몰랐다. 준은 늘 허기졌고 평화롭지 못했다. 

 

준은 미아에 대한 간절함을 뒤로 두고 다시 떠나기로 했다. 준의 두 번째 방랑에 동행한 사람은 ‘대위’였다. 대위는 그의 별명이었다. 그는 해병 중사로 제대한 일용노동자였는데 공사판에서 의기도 있고 아는 게 많다고 동료 인부들이 우스개로 자기들끼리 진급을 시켰다. 그래서 ‘대위’가 되었고, 별명이 되었다. 

 

준은 대위를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났다. 세상은 이승만의 것에서 군바리의 것으로 바뀌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준은 유치장에 갇혔다. 대위는 전표 장난하는 십장을 두들겨 패고 끌려온 터였다. 전국의 공사판을 떠돌며 살아온 대위는 준과 합이 맞았다. 그는 봄에는 바닷가 간척 공사장에서 일했고, 오월에 보리가 팰 무렵이면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에서 일거리를 찾았고, 늦여름부터는 동해안에 가서 오징어배를 탔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다시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에게는 산다는 게 두렵거나 고생스러운 것도 아니고 저 하늘에 날아가는 멧새처럼 자유롭다.

 

유치장을 나온 준은 대위와 함께 길을 떠났다. 대위를 따라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 시커먼 밤바다에서 뱃멀미에 시달리며 펄떡거리는 오징어들을 잡았다. 배가 고파지면 어부들은 따라 양은 그릇에 찰찰 넘치게 소주를 부어 단숨에 마시곤 했다. 안주는 살아 꿈틀거리는 오징어를 식칼로 썰어 초장에 찍은 것이었다. 확 올라온 술기운은 고된 노동 속에서 금방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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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울릉군>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 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길을 나설 때마다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둘은 오징어잡이를 끝내고 트럭 화물칸에 얹혀 천안으로 갔고 다시 신탄진 공사장으로 갔다. 연초공장 건립 공사장이었다. 함바 삼호방에 짐을 풀고 일을 시작했다. 건물 골조 외벽에 아시바를 치고 합판 반네루를 얹어 이동길을 만들었다. 준은 그 휘청대는 반네루 길을 디디며 시멘트를 져 날랐다. 온 삭신이 아팠고 입술은 터지고 혓바늘은 돋았다. 준은 그것에 적응해 나갔다.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

 

대위는 거친 노동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늘 생생했다. 그에게는 건강하게 일한 후 앞에 놓인 오늘의 밥과 소주가 생생한 기쁨일 뿐이었다. 신탄진은 아름다운 강변이었다. 저녁 무렵의 강변이 더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일을 마친 후 준과 대위는 그 강변에서 하루의 노동을 씻어 내었다. 대위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어라, 저놈 나왔네’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준이 두리번거리자 대위는 손가락으로 저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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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와 헤어진 후 준은 ‘세코날’을 모았다. 그는 자신이 쓴 글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은 모두 덧없는 것들이었다. 속세의 삶을 끊어내고 싶어 중이 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그날 준은 노량진 고갯마루 초입의 주점에서 홀로 소주를 마셨다. 천천히 아껴가며 마셨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준은 그 얼굴을 향해 ‘내가 오늘 널 보내버릴 거다.’라고 말했다.

 

오십 알 정도의 세코날을 입에 털어 넣었으나 준은 죽지 않았다. 준은 오 일 뒤에 깨어났다. 그 후 준은 입대했고, 베트남 파견 병사로 차출되었다. 

 

 

방황을 뒤로 하고 전쟁터로 떠나다

 

준은 부대로 돌아가는 군용열차를 타기 전 공원 앞에서 미아를 만나기로 했다. 이틀 전 서울역 광장에서 용기를 내어 미아에게 전화했을 때, 미아는 배웅나오겠다고 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도로 위의 차들이 엉켰고 준이 탄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준은 연신 손목시계를 보다가 아예 버스에서 내려 뛰었다. 준이 공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삼십 분 지난 후였다. 준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미아는 없었다. 그때 준은 다시는 미아를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실 같은 것이 툭, 하고 끊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군용열차가 떠나는 플랫폼에 선 준은 선뜻 기차를 타지 못하고 쓸데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아는 공원에 나오기는 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은 승강구 난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기차가 움직일수록 도심지의 불빛은 멀어져 갔다. 준은 자신이 베트남으로 떠나는 여정에서 문득 이제야말로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출발점에 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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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대위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든지 오늘 사는 거니까. 기차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궤도를 벗어난 모난 인생들을 위해

 

“청춘이라는 새는 날아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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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1952년 1월, 아르헨티나의 두 청년이 무작정 남미 여행을 떠납니다. 한 명은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국립대학교 의대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생화학을 전공하는 생화학 학도였습니다. 두 청년은 여행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를 가로지르는 길고 긴 여행을 했습니다. 스물셋과 스물아홉의 철없는 두 청년의 여행에는 ‘포데로사’라고 이름 붙인 구식 모터사이클이 함께 했습니다.

 

이 여행은 청년들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특히 의대생이었던 청년은 정해진 인생 궤도를 거부하고 총을 잡습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정글로 들어가 목숨을 내놓고 게릴라 투쟁을 벌입니다. 평생을 가난과 착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가 여행을 통해 직접 눈으로 본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서였습니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그는 또다시 부와 명예 대신 볼리비아의 정글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CIA의 총을 맞고 죽습니다. 궤도를 벗어난 삶을 산 이 청년은 현재 우리에게 ‘체 게바라’라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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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청춘의 입구에 들어선 사람 앞에는 몇 가지 인생길이 제시됩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님이나 학교를 통해 대부분 기성세대가 살아본 길이 제시됩니다. 경험을 통해 얻은,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며 안락함이 장점인 길입니다. 인생이 간단해집니다. 눈앞에 놓인 이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해 충실히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일종의 객관식입니다. 객관식으로 교육받고 자라 청년이 되면 객관식으로 인생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러면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마치 궤도에 튼튼히 결합한 열차처럼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문제는 ‘인생은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이란 것입니다. 인생은 그 누구도 대신 책임져 줄 수 없습니다. 또한 행복은 표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 대한 선택과 그것에 대한 책임과 보람, 그리고 그 길을 걸음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 이 모두가 각 개인의 것이기에 인생은 단언코 주관식인 것입니다. 인생은 주관적임에도 세상은 인생을 몇 개의 선택지로 만들어 하나를 고르도록 강요합니다. 대부분은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해 살아갑니다.

 

어떤 청춘들은 그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자기의 판단과 의지대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즉시 세상과, 그가 속한 현실과 싸움이 시작됩니다. 웬만해서는 개인이 이기기 힘든 싸움입니다. 사회가 정해준 궤도를 벗어난 삶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한국) 사회에서는 더 힘듭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문화가 오랜 시간 암묵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순응을 요구하는 사회입니다. 둥글둥글한 돌들 사이에서 도드라지게 솟아 있는 모난 돌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정을 대고 망치로 때려 다른 돌들처럼 둥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입니다. 

 

나는 말야, 세월이 좀 지체되겠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거다.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 거야.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입니다. 남의 인생을 정해놓고 그 길을 가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 왜 정해준 궤도를 벗어나느냐고 젊은이들을 타박하는 것, 이 모두가 일종의 사회적 폭력입니다. 원래 모난 돌은 자신의 모양대로 살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순리입니다(물론, 원래 둥근 돌이 억지로 모난 돌로 살아가려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꿋꿋하게 자신이 원했던 인생을 살아가려는 젊은이들, 기성세대가 만들어준 궤도를 버리고 자신이 직접 한 치 한 치 느리지만 자기 의지대로 자신만의 궤도를 만들어가는 청춘들, 남의 꽃길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갈길을 걷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오늘 하루를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용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 이것은 청춘만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만들어진 길로 만족한다면, 그 숫자와 관계없이 늙은이일 것이고 새로운 길을 만들려고 한다면 젊은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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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야겠습니다. 유명 관광지의 호텔이나 펜션을 예약하고 맛집을 검색하는 그런 여행이 아닌 바람처럼 자유롭게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무작정 떠나는, 그런 여행을 떠나야겠습니다.

 

오랜만에 예전에 썼던 큰 배낭과 침낭, 그리고 코펠과 버너 등을 주섬주섬 챙기며 스물다섯 번째 인생 탐구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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