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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1.


연재를 마칠 무렵 한국에서 ‘집도 교회도 없는’ 생활을 한 지 두 달째 접어들었다. 다행이도 한국에 세금을 납부한 실적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때는 면세였고 교회를 떠난 다음에는 공식적으로는 무직이었음으로-국가의 혜택을 받아 지공거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고귀한 신분)가 되다 보니 한 때나마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던 것이 조금 쑥스러웠다.


12월 5일, 실로 오랜만에 시청 앞 광장에 나갔다. 그런데 내가 시위에 갈 예정이라 했더니 어떤 이가 폭력적인 시위 문화는 좋지 않다며 가지 말라고 했다. 그의 말은 1986년도에 겪었던 한 가지 사건을 되살리게 했다.


86년도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하와이대 한국학생회에서 최근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다. 이틀 후에나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서야 고국 소식을 알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사람이 왔다니, 리얼한 현장 소식을 듣고 싶은가 하는 생각으로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임 장소에서 당시 한국의 학생들과는 너무나 다른 자유분방한 30여 명 정도의 1.5세대 혹은 2세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나니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천국이라고 하는 하와이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에게 매일 같이 전투와 전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대학생들의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은 마치 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무엇이든 질문을 하는 대로 대답을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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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질문이 "왜 한국의 학생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시위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누가 발로 바닥에 쓰러진 당신의 목을 짓누르고 있다고 하자. 당신이 숨을 쉬기 위하여 그의 발가락을 물었다. 그것이 폭력이냐?"라고 되물었다. 그 학생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음 질문은 "국제 경쟁이 치열한 이 시대에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고 데모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 걱정 꽁꽁 붙들어 매어 두시라. 지금 이 시간에도 분신을 하고 고문을 받는 학우들이 있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답했다.


그 후 질문을 더 해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날 학생들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강의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포 학생들에게 설명이 아니라 충격을 주고 싶었다. 쪼금이라도 현실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효과가 얼마나 있었던지는 모르지만.


전직이 데모꾼인 내가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하고 보니 감회가 새로 왔다. 무엇이 영하의 날씨에 추위에 떨면서도 수만 명을 거리로 불러낸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나오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놀라운 것은 시위 현장에서 20여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다는 것, 인파 때문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가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내 소속부대(?)인 '부천민주시민연합'의 깃발이 멀리서 보이는데도 10만 인파를 헤치고 접근할 수 없었다. 슬픈 것은 엄동설한의 날씨에 수만 명이 모여도 여전히 소수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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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해 첫날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북한산에 올랐다. 옛날 일이 떠올랐다. 국회의원 비서 시절인 71년 겨울 어느 날에 고양군내 청년들을 모아서 북한산 등산으로 단합대회로 하기로 했다. 구파발에서 집합을 했는데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되지 못하고 전화조차도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된 탓에 청년들이 양복 차림으로 모였다. 평소에 양복을 별로 입을 일이 없었던 농촌 청년들이 지구당에서 행사를 한다고 하니 모처럼 떼 빼고 광을 내서 한껏 몸단장을 하고 온 것이다.


3호선 대화 방면 전철을 타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이라도 오르는 사람처럼 등산복과 장비를 갖춘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요즘처럼 전 국민이 등산복을 입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양복 입고 등산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로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등산을 별로 해본 일이 없는 농촌 청년들은 그냥 가자고 했다. 인솔자인 나로서는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양복 차림의 무리들을 이끌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니 난감했지만 행사를 취소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백운대 꼭대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보통 등산객들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농촌 청년들에게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정상에 올라온 등산객들은 양복 입은 우리들 일행을 보고 모두들 어이없어했지만.


끼리끼리 모이게 되어 있다고, 한국에 와서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구석구석에서 의미나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런 사람들을 엮어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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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가난한 사람이 왜 찌질 해지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한 소설로 기억된다. 돈이 없는 것이 가난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불편을 느낄 때 비로소 가난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장애인이 된 것이 장애가 아니라 장애 때문에 불편을 느낄 때 장애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장애를 가졌어도 전혀 불편하게 살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돈이 없어도 전혀 가난하지 않게 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40년 전 그 청년들이 양복을 하나도 불편해 하지 않았던 것처럼.


20년 만에 돌아와 보니 한국을 떠나기 전에 자주 만났던 사람들의 소식을 직접, 간접적으로 듣거나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일거리이었다. 8, 90년대 한국의 현대사를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6.25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다.


“목사님 때문에…….”


금년이면 60세로 중학교의 상담교사직에서 은퇴를 한다는 C가 말을 흐렸다. C가 30대 중반이던 시절, 나는 부천시민들이 돈을 모아 만든 시민신문의 편집국장이었다. 역곡의 한 소규모 아파트 공사장에서 주민들에 의해 공사가 중지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기자와 함께 현장에 출동해 보니 주민들은 없고 주부 한 사람이 불도저 앞에 서서 공사를 막고 있었다. 사연인 즉, 업자가 놀이터로 설계된 땅에 아파트 한 채를 더 건축하려고 해서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꼭 고등학교 여학생같이 생긴 앳된 주부가 불도저 앞에 서서 꼼짝도 않고 공사를 막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만난 C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가정주부이었지만 나의 조언을 잘 받아들여 학부모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아 차근차근 성장해서 나중에는 전국적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번도 나의 제안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몸을 사리지 않고 마치 따라주었다.


고질적인 악성 관절염을 몸에 달고 살아서 정기적으로 며칠 동안 심하게 고통을 받는 병약한 작은 체구에서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자기 맡은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을 보고 어떤 때는 그 '독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었다. 그래서 '저런 여자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동안 주변에서 시의원을 해보라는 권유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오로지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헌신적인 자세로 맡은 일만 성실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호주로 온 이후에 조직 내에 있었던 인간관계로 큰 상처를 받고 난 후에 단체를 떠나 상담 공부를 해서 지금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노련한 상담 교사가 되어 어느덧 은퇴를 앞두게 된 것이다.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에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시청에서 우연히 탈춤 공연을 보게 되었다. 실로 30여 년 만에 탈춤 구경을 하다가 불현듯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83년도 강원도 양구에서 목회를 할 때 부부가 교사인 집이 있었다. 강원대학교를 다니던 딸이 단지 탈춤을 춘다는 이유로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며칠 후에 돌아왔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육청으로부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도 없는 딸의 문제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압력을 받아 부부 중 한 사람은 사직을 해야 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어도 누구와 마음을 터놓고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딸이 그 사건 이후 마치 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 마냥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아서 부모의 가슴을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내가 교회에 부임을 했고 어머니는 다른 목사들과는 무엇인가 달라 보이는 나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 부모와 나는 딸이 보안대에 끌려가 무슨 일을 당했을지를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말로는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입으로 꺼내기에는 너무도 두려운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 두려운 것은 표현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


당시는 부천경찰서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기 훨씬 전이어서 그런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야만의 시절이었다.


그 후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있을까 해서 자진해서 서울에 올라가서 혼자 살고 있는 딸을 만나 보겠다고 했다. 나는 비록 어머니의 부탁에 의해서 그녀를 만나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뜬금없을 나의 출현이 조그만 몸집의 어린 그녀가 보안대에 끌려가 겪었을 공포를 떠올리게 할까 보아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나는 일단 그녀를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울에 올 때마다 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은폐생활을 하고 있는 딸을 데리고 외출을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딸은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수동적으로 따라오기만 할 뿐 끝내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나를 두렵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함께 연극을 보러 가기로 하고 데리러 갔더니 아파트 문을 열자 현관에 외출 준비를 마친 채로 문 앞에 서 있던 모습이었다.


나중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와서 어머니가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딸은 그 후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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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애달픈 사연이다.


86년도 막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소녀 같은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구로공단에 있는 중소기업의 사장 비서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대부분의 청년들처럼 사회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비서보다는 기독교 청년 단체의 간사로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길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버려서 결과적으로 인생의 가시밭길을 걷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직에서 남자를 만났고 남편은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운동판을 떠나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가정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했던 그녀는 급기야 병을 얻어 50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녀는 얼굴도 마음도 심지어는 목소리까지도 천사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대 출신이었지만 자기의 처지가 어려워서 지인을 만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장례식장을 찾은 대학 동창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20대에 활동을 했지만 그 동안 만남의 기회도 갖지 못했던 50대에 들어선 동지들이 원근 각지에서 찾아왔다. 그들 모두는 그녀의 사라짐에 대하여 애통하며 안타까워하며 가슴을 쳤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장애인 할당으로 몇 달을 다녔다는 두란노 서원의 200명의 직원들이 모두 장례식장을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마지막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말해 주었다. 아들과 딸들조차도 엄마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도 자기들이 클 때까지 살아 있어 준 것을 감사한다는 말에 마음이 뭉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례에 참여한 모두는 그녀가 5번이나 뇌수술을 받고 자신을 힘들게 만든 옛 동지인 남편에 대해서 한 번도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을 몰랐었다.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일터인 두란노서원 북카페를 찾아가 "미국에 너에게 딱 어울리는 일자리가 있는데 한번 가보지 않을래?"라고 권했을 때도 그녀는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는 외국에 나가 살만큼 건강에 자신이 없어요."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짧은 인생을 아주 잘 살다 갔다. 모두의 가슴에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다.



3.


국내 잠입을 해서 딴지의 소굴인 벙커를 방문해서 사슬 없는 노예처럼 보이는 딴지의 기자들이 노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일이 있었다.


출근 시간은 있어도 퇴근 시간은 없을 것 같은 노동 시간에,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실내에서도 두터운 잠바를 그대로 입고 근무를 하는 현장을 보면서 “선진 한국에 요즘도 이런 노동환경이 있나?” 싶을 정도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분위기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하니 편집장 너부리조차도 두꺼운 잠바를 걸치고 한쪽 구석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적어도 강제성은 없어 보였다.


마침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녹화하길레 방청을 했다. 그날 방송의 하이라이트는 ‘세월호의 퍼즐’이었다. 결론은 한 다큐제작 감독의 1년 6개월의 치밀한 퍼즐 맞추기 작업 끝에 정부의 발표가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 감독의 별명은 ‘미친 김 감독’라고 한다. 그렇다! 세상은 이런 미친 인간들 때문에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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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밤에는 또 다른 미친 인간들을 만나러 세월호 천막이 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비록 텐트를 쳤기는 하지만 영하의 날씨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단열재를 깔고서 바로 옆으로는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 속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문화제와 기도회를 하고 있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2년 가까이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 참석하는 나는 추운 날씨에 무릎이 시려워 한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이 힘들었지만 물속에서 죽어가던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참았다.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갈등과 대립, 반목이 있게 마련이다. 먹을 것이 있는 곳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춥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곳에서조차도, 안타깝지만 세월호의 투쟁 현장에서도 당연하게도 그런 일이 존재 했다. 기나긴 투쟁의 세월 속에서, 성과가 전혀 없을 것 같은 싸움 속에서도…….


한국에 장기체류를 하게 되면서 잠깐씩 왔다 갈 때는 만날 수 없었던 고교동창들을 고구마 줄기를 캐듯이 줄을 이어 만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교수, 의사, 교장 등 비교적 전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친구들이지만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두 비관적인 의견들일 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은퇴를 한 이들이 "이번 생은 글렀어."라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 자조적인 농담으로 이해를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젊은이들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물론 진지한 뜻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고 튀거나 자극적인 표현을 써야 먹히는 시대의 특징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섬뜩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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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했어.", 줄여서 ‘이생망’ 라는 말이 헬조선이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 스며들어온 절망감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오랫동안 애들을 가르쳤는데 요즘은 거리에서 애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묻는 질문에 "아무 생각이 없어."라고 대답을 했다. 내가 "야! 인마, 교장을 몇 년씩이나 한 녀석이 아무 생각이 없다니 말이 되냐?"고 했더니 "불쌍해서..... "라고 해서 마음이 찡했다.


그런가 하면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으로 50대 중반에 접어든 김 선생은 아들보다 더 어린 학생으로부터 폭언을 듣고 충격을 받고 1년간 공상장애로서 휴직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지나간 시절 동안 교사라는 감정노동자로서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 할 수 있었다. 김 선생은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어서 곱게 미쳐 살려고 성당에 나간단다.


교사들 자신은 민주적이지 못한 전근대적인 환경에서 살아왔는데 개판 5분 전이 아니라 5분 후인 학생들을 어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시드니에서 한국에서 얌전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호주에 와서 거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완전히 돌아버린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남들은 철밥통이라고 부러워하는 공립학교 교사의 생활조차도 도처에 지뢰밭이니 헬조선이라는 말은 청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오는 아픈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4.


헬조선의 시대를 탈출하는데 나의 경험과 지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제자들의 자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의 아이들이다.


김어준의 연애 상담은 '헤어져'로 결론을 내린다지만, 내 상담의 결론은 '조선을 떠나라' 이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영어가 문제가 되었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은 몸뚱이로 일하는 위킹홀러데이로 갈 수밖에 없다. 즉 탈북자가 아니라 탈남자의 길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한국인이 제 1 세계로 가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근면과 서비스 정신’ 이지만 제 3세계로 가면 ‘모험심과 창조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길로 가던지 몇 마디 영어는 필수다.


그래서 요즘 서산에 있는 폐교에 대안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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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려는 학교는 이런 학교다. 두둥!

새로운 대안학교 (가칭) RARUS (‘드문, 뛰어난, 아직 덜 여문’의 라틴어)


라루스는 세계를 학습의 현장으로, 일터로 삼는 학교로서


첫째, 의. 식. 주를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다.

둘째, 세계시민정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섯째. 여행을 통하여 길 위에서 배운다.

넷째. 운동과 예술을 통하여 배운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는 꿈만은 야무지게 꾼다.


여하튼 앞으로 우리가 시작하려는 대안학교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밥 벌어먹을 수 있는 영어 교육'을 시키려고 한다. 졸업을 하고 대학보다는 바로 일터로, 국내보다는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지만 쑤셔보면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조직이 받침이 되어야 하니, 동력을 모으기 위해 정규적인 모음을 갖기로 했다. 요즘 새로 당을 만드는 것이 유행인 시절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침묵의 길"(가칭)이라는 당명을 붙이고 새 인물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당의 구호는 "시끄럽다. 입 다물자."이다. 매주 오후 3시 홍대 입구에 있는 함석헌 기념사업회에서 모임을 가지려고 한다.


혹시 일요일에 할 일이 없다거나 조용히 명상을 하고 싶은 이들이나 기존 기독교에서 탈당하고 싶은 분들은 눈치들 보지 말고 탈당들 해서 합류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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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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