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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전이 끝났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기를 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만, 새벽의 감동을 다시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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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벤투, 약점을 극복하다.

 

파울루 벤투 감독의 장점은 플랜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뚝심에 있다. 우리는 4년, 그리고 월드컵을 거치면서, 이전에는 없던 ‘플랜 아래의 경기’를 펼쳤다. 원정 16강을 이뤘던 남아공 월드컵에도 없던 경기다. 후방 빌드업을 통한 볼 점유, 그리고 압박을 통해 볼을 탈취하는 축구를 기반으로, 세 경기 모두 각각의 컨셉을 갖추고 경기를 뛰었다. 상대가 어떤 팀이든, 상대가 어떤 스타일로 경기를 하든, 우리는 쫄지 않고 우리의 플레이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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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 늘 새로워... 짜릿해...  

 

 

그 결과, 우리는 월드컵에서 쉽게 볼 수 없던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다. 골키퍼–수비수–미드필더까지 패스 플레이를 통해 파이널 서드까지 이르는 공격 전개를 완성한 것이다. 비록 월드컵 무대에서 이러한 공격 전개로 골을 얻어낸 장면은 거의 없지만, 프레임의 완성을 통해 팀의 퀄리티는 한 단계 상승했다.

 

단점은 명확했다. 포르투갈 국대 감독 때부터 벤투에 대한 비판은 하나 같이, 이랬다.

 

‘유연성이 부족한 감독’

 

감독에게는 치명적인 비판이다. 벤투는 플랜 A를 명확하게 그려놓고, 전술에 가장 잘 녹아든 선수들 위주로 기용했다. 벤투와 코칭 스태프는 대표팀에 선발될 가능성이 있는 선수 풀을 70여 명 이상으로 꾸렸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뛸 선수는 우리가 모두 알았다. 특히, 권창훈의 폼 저하·이강인의 폼 상승과 얽혀서 비롯된 선발 논란에서 벤투는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선수 선발은 감독 고유한 권한이다. 따라서 결과에 따라 선수 선발에 대한 비판 또한 감독의 몫이다. 당연히, 가나전에서 권창훈과 작은 정우영을 선발로 쓰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비판 또한 정당하다. 이 부분은 오롯이 벤투의 몫으로 넘긴다.

 

그러나 한 가지 약점은 극복했다. 포르투갈 경기는 그동안의 큰 그림을 일부 포기했다. 우리 선수들은 우리가 하던 플레이를 시도했으나, 포르투갈의 수준 높은 압박·탈압박에 우리의 대전략을 수정했다. 대표팀의 축구는 김문환·김진수의 오버래핑 유무에 따라 그 색깔이 크게 달라진다. 김진수는 3경기 모두 매우 열심히 뛰어줬으나, 어쩔 수 없이 그 공간에서 위협적인 공격을 당했다. 이번 경기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자, 벤투는 양쪽 풀백의 오버래핑을 포기하고, 손흥민의 위치를 바꿨다. 덕분에 김진수는 보다 안전하게 수비에 가담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는 수비라인을 매우 높여서 경기했었는데, 옵사이드 트랩을 번번이 실패했다. 포르투갈의 디오구 달롯, 주앙 칸셀루 등은 우리의 옵사이드 라인을 너무나 쉽게 뚫었다. 계속해서 수비라인이 열리자, 한국은 수비라인을 뒤로 깊게 내린다. 만약 계속해서 김진수를 올리고 수비라인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전까지의 한국은 대량실점 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요런 느낌. 무서웠어...

 

이 두 가지 변화 끝에 나타난 대표팀은 지난 4년간의 대표팀이 아니었다. 후반 70분부터의 대표팀은 2022년의 대표팀이 아니라, 2018년의 대표팀이었다. 라인을 꽤 아래로 내려서 상대 선수들을 최대한 깊이 끌어들인 후, 단 한 번의 찬스를 위해서 애쓰는 그 모습, 그것은 우리가 지난 독일전에 본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 큰 변화는 곧 벤투의 포기다. 후방 빌드업과 조직적인 공격 전개는 우리 대표팀이 잘 할 수 없었던 영역이고, 벤투는 4년간 그 시스템을 이식했다. 그토록 애써서 만든 시스템을 포기한 덕분에 우리는 한국 축구가 가장 잘 하는, 압박과 스피드 그리고 롱 패스라는 장점을 되살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벤투의 시스템은 살아 있었고, 볼을 탈취한 후 전방의 선수들이 움직이면서 위협적인 역습 찬스를 만들어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유연성을 과감히 발휘한 벤투의 용감한 포기에 박수를 보낸다.

 

2. 김승규, 김문환, 그리고 손흥민 

 

일단 기분 좋은 거 한 번 보고... 

 

칼럼을 쓸때마다, 대표팀 선수들의 활약이나 부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나는 글쟁이에게는 불리한 믿음이 있는데, 때론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편이 더 좋을 때가 있다는 믿음이다. 예컨대, 지난 가나전이 끝난 후, 스포츠한국의 이정철 기자는

 

벤투 뿌리친 손흥민, 태도 논란에 인터넷 폭발 

‘최악의 경기력’ 손흥민, 그는 박지성이 아니었다.

’뭐해?’ 김진수의 심각한 부진....제 2의 ‘장현수’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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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라는 기사를 신나게 송고하면서 대표팀 역적 찾기에 열을 올렸다. 우리는 언제나 져도 된다. 최선을 다 하고 투지를 보여주는 모습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왔다. 가나전은 투지와 투혼이 한계까지 발휘된 경기였다. 그럼에도 역적 찾기 기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열심히 싸웠음에도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대표팀과 선수들의 현실에 안타까웠다. 16강 진출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포르투갈전은 선수들이 받았던 부당한 기사를 싹 지울 수 있는 통쾌한 복수였다.

 

김승규는 K리그 시절부터, 중요 경기에서 부진한 활약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발밑은 좋으나 선방 능력은 조현우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무엇보다 공중 장악력이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는데, 지난 가나전에 그러한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2실점에 큰 빌미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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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규, 땡큐...!

<사진 출처-링크

 

그러나 이번 경기는, 포루투갈을 상대로 연이은 선방을 보이면서 ‘쇼앤프루브’했다. 90분 간 가장 집중력 있게 경기한 선수였으며, 2:1이라는 스코어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어떻게 보면, 올드 축구팬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강팀을 상대로 수많은 선방을 보여주던 김병지·이운재의 활약이 김승규의 모습에서 오버랩되었다.

 

 

김문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문환은 K리그에서도 빠른 스피드와 활동량이 장점인 선수였지만, 수비 지능과 피지컬은 약점으로 지적받았다. 이번 경기에서도 초반, 상대 선수의 속임수에 벗겨지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 치욕의 순간 뒤로 경기장 안에서 급속히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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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 땡큐...!

<사진 출처-링크> 

 

김문환은 누구보다 많이 뛰면서도 상대의 속임수에 흔들리지 않았고, 위협적인 포루투갈의 측면을 잘 봉쇄해냈다. 항상 대표팀의 풀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은데, 김문환의 헌신은 김문환 자신이 가진 퀄리티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손흥민이다. 조별예선을 거치면서 많은 팬들이 손흥민에 대해 실망했을 것이다. 마치 우주가 억까하는 듯했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었는데, 왜 하필 월드컵을 앞두고 폼이 나락갔을까. 실제로 손흥민은 2경기에서 여전히 상대 수비수를 달고 다녔으나, 슈팅 찬스나 결정적 패스를 넣어줄 수 있는 장면에서 머뭇대면서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에이스는 에이스다. 손흥민의 마지막 질주, 그리고 쟁쟁한 포르투갈 수비수 다섯 명을 벗기는 킬패스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추가시간 9분에 보여줬던 그 모습과 다름 없었다. 에이스는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에,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모든 짐을 벗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더 자랑스럽게, ‘손흥민 보유국’임을 선언할 수 있다.

 

이 장면을 보고 눈가가 뜨겁지 않을 수 있으랴...!

 

또 한편으로는 두렵다. 다음 월드컵에서도 당연히 16강을 갈 것이라는 기대가. 우리의 16강은 노력과 운의 결과물이다. 여전히 월드컵에서는 언더독이며, 선수들에게 승리를 당연히 요구할 수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적 찾기와 정신력 부족과 같은 과거의 ‘응원 문화’로부터 이별하자.

 

3. 킹우의 수, 이래서 월드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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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 1무 1패는 한국의 전력을 상징하는 월드컵 결과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리는 1승 1무 1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도 한 번은 떨어졌고, 한 번은 간신히 올라갔다. 독일을 2:0으로 잡고 1승 2패로 진출할 수도 있었으나, 킹우의 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멕시코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은 페어플레이로도 올라가는데, 왜 한국만 이렇게 억까 당하는지 한편으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전반 5분, 히카르두 오르타의 선제골이 터지자, 이제는 킹우의 수고 뭐고 없어 보였다. 그런데 킹우의 수가 요동친다. 전반 26분과 전반 32분, 우루과이의 연속골이 터지자, 한국은 여전히 조4위였음에도 포르투갈을 1점 차로만 잡으면 16강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킹우의 수는 그렇게 한국과 밀당하고 있었다.

 

마침내 후반 91분, 황희찬의 득점으로 덕분에 우리는 조 2위로 올라갔다. 정말, 묘하지 않은가. 2골을 내리 때려 박은 우루과이가 한 골만 더 넣었어도 우리는 떨어졌다. 포르투갈이 선발 라인업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래서 포르투갈에게 있었던 수많은 찬스 중 한 골만 들어갔어도 우리는 떨어졌다. 호날두가 등 패스로 김영권에게 골을 주지 않았다면, 킹우의 수는 우리와 대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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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이후에 부활한 한국.

한국말도 끝까지 들어야 하지만

한국 축구도 끝까지 봐야 한다구!!

 

 

이 운명적이고도 잔인한 장난에 한국이 웃는 날이 왔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고 했던가. 하늘의 명이 불렀다. 이번엔 올라가라고. 그들의 손짓은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최선을 다해 뛴 대표팀의 모습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다. 세계 최고의 스포츠 대회, 가장 뜨거운 토너먼트에서만 볼 수 있는 운명적인 장면이다.

 

4. 16강전, 그 너머 

 

다시, 복기해보자. 현대 축구의 핵심은 빌드업이나 압박이 아니다. 현대 축구의 핵심은 ‘우리의 스타일로 경기를 얼마나 지배할 수 있는가’에 있다. 빌드업이나 압박은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빌드업과 압박을 통해 점유율을 높여야 경기를 지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러한 전술로 포르투갈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시 가장 잘 하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할까?

 

4년 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광래-홍명보-슈틸리케를 거치는 10년의 세월 동안 빌드업은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빌드업 기반의 축구를 할 수 있냐?’는 의심과 반문이 지당했다.

 

특히, 일본의 예가 있었다. 지난 20년 간 빌드업과 패스 기반의 축구를 구사하던 일본에는 명확한 철학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 대표팀이나 K리그 팀의 선수들이 슈팅을 하던 위치에서 슈팅하지 않았다. 끝까지 패스를 통해 가장 완벽한 찬스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그 결과 경기력은 괜찮은데 결과는 안 좋은 모습이 이어졌다. 축구에는 예술 점수가 없다. 일본 대표팀에게 늘 쏟아지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들이 만들어낸 스타일은 지난 월드컵에서 벨기에라는 강팀과 정면 승부를 펼치고 아쉽게 지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뒤이어 이번 월드컵은 달랐다. 독일과 스페인이라는 강팀을 상대로 일본은 낮은 수비 라인과 역습 위주의 축구를 펼쳤다. 스페인전, 일본의 패스맵은 일본 대표팀이나 J리그 팀들이 보여주던 패스 맵과 현저히 달랐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도 그들의 시스템은 빛을 발했다. 수십 년의 투자 덕분에 탄탄한 기본기를 보유한 선수들이 있었고, 오랫동안 시도해 온 끝에 위협적인 찬스를 만들 수 있는 공격 전개 루트가 있었다. 일본의 16강 진출은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유지해온 철학이 ‘유연성’이라는 무기까지 갖추면서 나온 결과물이다.

 

한국도 이 길을 걷고 있다. 총론에서는 옳았으나 각론에서는 실패했던 조광래-홍명보-슈틸리케 시절이 있었다. 그 역사를 딛고, 드디어 파이널 서드까지 조직적인 공격전개를 펼치는 팀을 갖췄다. 지금도 K리그 대부분의 팀은 쓰리백을 기반으로 한 역습 축구를 구사한다. 한국 선수들이 자라난 토양 자체가 빌드업을 통한 지배형 축구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 거친 토양을 이겨내고 단단한 경기력을 갖추게 된 벤투의 철학 위에서, 유연성이 막타를 쳤다.

 

그래서 이번 카타르 월드컵 조별예선은 한국의 모든 지도자와 선수들이 깊이 새겨야 할 경기이다. 한 나라의 주된 축구 스타일을 대표팀에서부터의 톱 다운 방식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실패했다면 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월드컵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다. 이제, 우리는 ‘지배하는 축구’를 유소년 단계의 경기에서부터 K리그까지 조금씩 이식해 나가야 한다. 볼 터치와 패스가 선수의 기본기라면, 빌드업과 수비 형태 및 공격 전개 방식은 팀의 기본기다. 그 기본기 위에서 역습이라는 무기까지 갖춰진다면, 비단 대표팀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축구 레벨이 월등히 상승할 것이다.

 

16강 전이 남았다. 모든 것을 쏟은 선수들의 땀 덕분에 우리는 축제를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초상집으로 끝났던 2014년,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던 2018년의 아픔은 이제 없다. 휘슬이 울릴 때 뜨거운 눈물과 감동을 쏟아내던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21세기 한국 축구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아가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남긴 유산, 그것으로써 한국의 모든 축구팀이 기본기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없이 희망적이다. 

 

 10번만 더 보자

 

 

이제 건투는 빌지 않는다. 대표팀도 축구팬도 축제를 즐기자.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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