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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76돌 한글날 맞이 연재는 오래전에 써 놓은 글을 정리해 두 편 정도 실을 생각이었다. ‘바이든’과 ‘날리면’이 날아다니고 한국인은 맞는 것 같은데 일본인이나 할 소리를 쏟아 내는 정치인이 되레 역사 공부하라 호통치고, 대학은 통째로 베낀 박사 논문이 문제없다고 촌극을 벌이는 와중에... 다섯 편으로 글이 늘었다. 

 

사실 지금부터 쓸 글에 포함된 서평 외의 내용으로 연재를 마감하려 했다. 그런데 일본인이 쓴 한글 창제 관련 서적이 나왔으니 서평을 한번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윌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일본인이 쓴 한글 관련 서적? 시큰둥하게 전화를 끊었... 으나 출판사가 돌베개였다는 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저자가 최우선이이다. 저자에 관한 정보가 마땅치 않은데 책이 다루는 분야와 제목이 좋으면 출판사를 본다. 인문·사회 분야 책인데 돌베개가 출판했다면 별 의심하지 않고 집어 든다. 그 돌베개가 일본인이 쓴 한글 관련 책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손에 들린 휴대전화 화면에는 이미 서점 구매 앱이 열려 있었고 엄지손가락은 구매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아, 이놈의 충동구매는... 이틀 뒤, 대단히 촌스러운 초록색 표지의 책이 배달되었다. 책 제목은 <한글의 탄생 - 인간에게 문자란 무엇인가> 촌스러운 표지에 걸맞게 책 제목도 촌스럽다. 일관되니 좋다.

 

저자는 노마 히데키. 한글을 독학으로 공부하다 매료되어 일본과 한국에서 언어학과 한국어를 전공했다. 비엔날레에도 참여하는 미술가라고 한다.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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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 히데키

출처-<링크>

 

2010년 발행한 <한글의 탄생> 초판이 공전의 성공을 거두고 명망 있는 상도 받았다고 한다. 나의 경우, 그 시기라면 훈민정음(한글)이 관심사 밖이었다. 훈민정음은 그보다 3년 전인 2007년에 ‘공부할 대상’에서 ‘어지간히 공부한 대상’으로 옮겨 간 터였다.

 

공부에 끝이 있을까마는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훈민정음이나 한글 관련 서적은 더 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근원적인 인간 사고와 언어의 물질적 기반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뇌가 궁금했고 신체의 작동이 궁금했고 그런 인간을 만들고 함께 공진화한 세계가 궁금했다. 그러니 노마 히데키가 노벨 물리학상이나 의학상을 받지 않는 한, 그의 책은 내 관심 밖에 있었다.

 

여하튼 2010년에 쓴 책으로 좋은 상을 받을 걸 봐서 매우 잘 쓴 책일 터이다. 교과서도 아닌 대중서를 10여 년이 지난 2022년에 개정 증보했으니 책임감 있고 성실한 학자라 짐작했다. 좋은 인상을 받고 첫 장을 넘겼다…. 그냥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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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과 증보판 표지

출처-<돌베개>

 

서평을 쓰지 않으려 했다. 지난 글에 미쳐 실어 보내지 못한 꼭지는 내년에 써먹어도 되니까. 그런데 책을 읽고 맘을 바꿔 서평을 쓰기로 했다. 서평을 독립적인 글로 할까 하다 지난 연재 글에서 미처 하지 못한 두 꼭지와 붙여 쓰면 좋겠다고 여겼다.

 

<한글의 탄생>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며 증언하는 책이다. 한글의 과학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서평과 묶어 한 편으로 쓰면 책 내용을 가늠할 수 있을 터이다. 독립된 서평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책이나 저자를 소홀히 다루는 것이라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그렇게 소홀히 다룰 책이 아니다.

 

1. 한글의 강력함, 모아쓰기

 

원판 불변의 법칙. 잘 생기고 아름다운 배우들을 보면 어떻게 저 미모는 감춰지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 앞에 나서기 전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원판을 소유한 이들의 미모는 감춰지지 않는다. 그냥 보인다.

 

훈민정음이 그렇다. 글을 써 놓으면 사람 말소리가 만드는 음소와 음절의 아름다운 조화가 그냥 눈에 들어온다.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원판이 가진 완벽함 때문이다. 원판의 완벽함은 훈민정음의 과학성에서 나온다. 모아쓰기는 훈민정음의 과학성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표기하는 방법이다. 낱글자를 모아쓰기를 하면서 말소리의 단위 성분이 가진 시공간의 위치와 서열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아쓰기는 한글을 기계화하고 전산화할 때 장애 요소였다. 성숙한 기술과 컴퓨터 자원(컴퓨터 저장 용량이나 중앙처리 장치의 연산속도)을 동원할 수 없었던 과거에 이를 해결할 방법이 풀어쓰기였다. 모아쓰기를 하면 한글 활자가 2,000자 이상 필요하지만 풀어쓰기를 하면 최소 낱글자 활자 24자만 가지고도 인쇄를 할 수 있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영문자 표기처럼 ‘ㅎ ㅏ ㄴ ㄱ ㅡ ㄹ’식으로 한 자 한 자 풀어 쓰면 서른 개 남짓한 활자만으로 기계화나 전산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보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시작된 이런 주장은 타자기가 사라지고 PC 보급이 확산한 2000년까지도 이어졌다.

 

암흑 같은 일제 강점기에 목숨 걸고 조선어와 한글 보호에 앞장서며 귀감이 되었던 주시경과 최현배도 같은 주장을 했다. 이들은 한글을 풀어 쓰면 타자기나 인쇄 산업에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모아쓰기로 생기는 표기와 실제 발음의 차이도 없앴을 수 있다고 보았다. 최현배는 한글 풀어쓰기를 위해 로마자를 닮은 인쇄체와 필기체 글자도 따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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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과 최현배

 

목숨 내놓고 조선어를 지키고자 애썼던 이들의 수고와 땀은 그 어떤 상찬과 존경으로도 부족하다. 하지만 한글의 과학성을 망가뜨리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한글을 풀어 쓰면 훈민정음의 과학성이 완전히 망가진다.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다른 문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게 된다. 세종대왕께서 시대를 앞서 만드신 첨단 문자를 그저 그런 문자로 퇴행하게 한다.

 

풀어쓰기의 특징은 초성의 ‘ㅇ’을 적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이’는 ‘바미’로 발음되니 풀어쓰기를 할 때 ‘ㅂㅏㅁㅣ’로 쓴다. 이렇게 풀어 쓰면 타자기 만들기는 쉬울지 몰라도 일단 한국어 어문법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정말 ‘밤이’를 ‘바미’로 발음할까? ‘바미’로 발음하라고 배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글의 소리 강제력 때문에 ‘밤’의 ‘ㅁ’을 뒷글자의 ‘ㅇ’ 초성 자리에 자연스럽고 매끈하게 밀어 넣어 발음하지 않는다. 더구나 ‘밤’의 ‘ㅁ’은 입술소리로 입술을 완전히 닫고 열어 발음하는 소리라서 ‘바미’보다 ‘밤이’에 더 가깝게 발음한다.

 

현대 음성학에 기반한 현대 한국어 맞춤법과 표준발음이라 학교에서 우리는 의심 없이 발음이 ‘바미’라고 배운다. 그러나 주의 깊게 혀의 움직임과 소리를 관찰하면 ‘밤’의 ‘ㅁ’ 받침이 매끄럽게 뒷글자 초성 ‘ㅇ’을 밀어내고 옮겨지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밤으로’와 ‘바므로’ 아니면 ‘국으로’와 ‘구그로’를 따로 써놓고 읽어 보면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ㅇ’은 비어 있는 듯하지만 다른 소리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큼 무기력하지 않다. 소리가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를 간파한 세종대왕께서는 ‘ㅇ’에 소리가 있다고 훈민정음에 써 놓으셨다.

 

한글은 모아쓰기를 하면서 각 낱글자의 소리가 지니는 시간과 공간 위치를 지정하고 표시한다.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한글의 소리 강제력은 다른 소리글자들의 강제력을 압도한다. 사람들은 한글 말소리를 임의로 바꿔낼 수 없다. 배운 대로, 보이는 대로 계속 읽게 된다. 기계화나 전산화 때문에 풀어 쓰자는 것이나 표기와 실제 발음의 일치를 핑계로 풀어 쓰자는 것은 밀림으로 돌아가 나무 위에서 살자는 소리나 같다. 시간 낭비하는 쓸데없는 주장이다.

 

2. 모아쓰기가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팩트체크

 

기계화와 전산화의 현실적인 문제가 해소되자 한정된 네모꼴 안에 여러 획이 모이다 보니 한글 모아쓰기가 글자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글자 모양을 만드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주장이다. 직관적으로 그럴싸하게 들려 관심을 두고 공부하지 않으면 이런 주장에 쉽게 동조하게 된다. 이 주장은 인간의 감각과 인지 과정에 대한 현대 뇌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모르고 하는,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한글 모아쓰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독성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의 망막에는 맹점이 존재한다. 뇌와 안구를 잇는 시신경 다발이 망막 중앙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망막이 빛을 감지하지 못한다. 현재 눈앞의 장면에서 화면 중앙에 까만 불량 화소가 있는 LCD처럼 까만 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흠집 하나 없는 광경을 본다.

 

없는 그림도 슬쩍 끼워 넣는 뇌는 시야에서 구체적인 형태도 사라지게 한다. 글자를 읽을 때 망막에서 가장 해상도가 높은 부분에 초점을 맞춘 글자 이외에는 글자들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심지어 시각으로 감지되는 대상도 형태·색·움직임이 비슷한 유형끼리 묶어 한 덩어리로 기억한다. 그 이미지와 비교해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면 세세히 따지지 않고 같은 부류로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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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한국어만 되는 건 아니다

 

뇌의 이런 작동 원리는 글자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중간중간에 철자가 틀린 글자가 있거나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 놓아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것은 익숙한 덩어리로 글자를 보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본문을 이런 활자보다 더 획을 굵게 해서 인쇄하면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통상 가독성은 글자 모양보다는 책을 너무 읽지 않는 독서량, 노안 같은 신체적 변화, 어두운 조도 같은 외부 조건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가독성도 풀어쓰기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소리다.

 

3. 풀어쓰기 주창자의 시대적 한계

 

일제 강점기 시대의 국어학자들이나 2000년 이전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국어학자들과 글자 디자이너들이 이런 주장을 했던 걸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 시절은 서구의 문명이 선진 문명이고 따라가야 하는 기준이었으니까.

 

탈아입구는 일본만 추구했던 지향점이 아니다. 힘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일제강점기에도, 개발 도상국의 지위에 있었던 최근까지도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열망을 쫓았다. 돈과 폭력으로 남의 것을 약탈했던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선진국이라 부르며 부러워하던 것도 사실이다. 학자라고 해서 열등감과 명분의 쓰나미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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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여전히 한글을 영문자처럼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망령의 끝자락에 매달려 자신을 2등 인종으로 타락하게 하는 문화적 만행이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음소와 음절이 조화를 이루며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춘 첨단 과학의 문자다.

 

4. 우리는 한글 자음을 순서대로 배우고 있지 않다

 

지금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한글 글자 순서는 제대로 된 순서가 아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100년 정도 지난 다음 최세진이라는 음운학자가 쓴 ‘훈몽자회’라는 책에 쓰인 순서다. ‘훈몽자회’는 어린이들에게 천자문(기초 한자)을 가르치려고 쓴 교과서다. 천자문의 발음을 가르치기에는 훈민정음이 딱이라 최세진도 가져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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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립국어원>

 

순서는 물론이거니와 ‘기역’ ‘니은’ 식으로 붙여 놓은 이름을 봐도 최세진이 훈몽자회를 쓸 때 훈민정음해례본이 수중에 없었던 것 같다. 그가 한자와 중국 운서에 능통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써 놓은 순서는 중국 운서의 순서와도 맞지 않는다. 아마 훈민정음 언해본 정도를 이리저리 필사한 쪼가리 정보를 참고해서 훈몽자회를 썼을 터이다. 훈민정음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세종대왕께서 말씀하신 훈민정음과는 동떨어진 순서와 이름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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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역, 니은 같은 이름은 그대로 두더라도 자음 글자 순서는 훈민정음의 순서에 맞게 꼭 바꾸어야 한다.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이 아니라 ‘ㄱㅋㄲㄴㄷㅌㄸㄹㅁㅂㅍㅃㅅㅈㅊㅆㅉㅇㅎ’이 원 순서다. 훈민정음해례본이나 언해본의 ‘아설순치후’ 분류와 순서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훈민정음의 과학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더불어 훈민정음 모방설 같은 유사 과학에 현혹되지 않는다.

 

국립국어원은 최세진의 순서가 이미 굳어졌으니 그대로 쓰자는 입장이다. 괜히 바꾸면 사회적 혼란만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틀린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틀린 것은 조금 수고가 들더라도 당연히 고쳐야 한다.

 

고치는 것이 수고스럽긴 한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된 한글 가르치기를 고치면 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모두 배우고 아이들이 취학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긴 하다. 누군가 멈추지 않고 바꿔 나가야 하니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공적인 독립 기관이 필요하다. 우리가 낸 세금을 쪼개 국립국어원을 둔 이유다. 

 

더불어 20세기 들어 쓰지 않는다고 선배 학자들이 지워 버린 ‘ᆞ,,,’도 비록 쓰지는 않더라도 그 글자들의 위치와 소용을 정확하게 가르치며 살려 놔야 한다. 국어 교육에서 고운 말과 아름다운 말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글(훈민정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심도를 더해가며 훈민정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수능에도 단골 문제로 출제해야 한다. 쓴 사람도 모르는 시의 주제를 묻거나 국어 선생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 법칙들을 설명한 아주 긴 예문으로 국어 수능 문제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니다.

 

5. 노모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은 눈부신 책이나..

 

책을 애써 골라 읽는 편이다. 공들이고 애써 만든 책을 읽을 때면 저자의 노력이 인쇄된 활자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느낀다. 그 책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책을 쥐고 있는 손을 통해 저자의 재미·열정·흥분과 신남이 찌릿찌릿 전해 오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끼니도 거르며 읽게 된다. <한글의 탄생>이 그런 책 중 하나다.

 

잘 쓴 책이다. 국경을 넘어 세계 시민을 지향하는 필자조차 한국 국어학자나 언어학자 손이 아닌 일본인 국적의 학자가 썼다는 사실에 화도 나고 부끄러워 낯이 붉어질 만큼 잘 쓴 책이다(저자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되긴 하지만). 현대 언어학이나 음성학에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훈민정음 언해본이나 해례본도 읽은 적 없이, 저자의 말에 그냥 끌려가도 위험하지 않다. 언제 읽을지 기약하지 못해도 보란 듯이 책꽂이에 꽂아 둘 수 있는 잘빠진 책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현대 음성학으로 훈민정음과 한국어를 분석한 내용들은 필자가 앞서 설명한 한글의 과학성을 생각하며 속도를 조금 늦추고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의 과학성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현대 음성학의 현 수준은 훈민정음을 평가하기에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잘라 버리는 프로크루스테스와 같다. 뉴턴의 눈으로는 양자 세계를 들여다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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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ㅇ’에 관한 저자의 평가와 처리는 필자에게는 거슬렸던 부분이다. 필자의 연재 네 번째 글 마지막 꼭지에서 설명한 것처럼 현대 음성학은 ‘ㅇ’을 소릿값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로 처리했다('576돌 된 한글과 그 루머 4 : 엑스레이 없이 찾아낸 소리의 최소값(feat.음성학 만랩)' 참조). 저자도 현대 음성학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한글의 ‘ㅇ’을 아무 소릿값을 갖지 않은 ‘제로 혹은 ∅’로 처리한다. 반면 세종대왕께서는 ‘ㅇ’도 고유한 소리가 있는 자음으로 처리하셨다. 

 

‘ㅇ’이 마치 숫자 ‘0’처럼 생각해서 더 과학적인 것 아니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현대 음성학의 소리 분해 능력이 세종대왕의 그것에 한참 못 미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과학의 첨단성은 대상을 얼마나 분해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한글은 완벽한 음소 글자이다. 한 글자에 딱 한 소리만 배정되어 있어 쓰는 사람이 한글이 설정한 소리의 경계를 임의로 넘나들지 못한다. 한글의 소리 강제력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따를 만큼 강력하다. 

 

서양 문자를 바탕으로 언어학과 음성학을 공부했던 전문가들은 한글에 이런 막강한 강제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서양 언어학과 음성학을 공부한 국내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강제력’이라는 표현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자연스러운 사람 말소리의 변화를 막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할 수 있다. 이 표현은 훈민정음이 ‘양자역학’이나 ‘일반 상대성 이론'처럼 소리가 만들어지는 보편적 소리 질서라는 의미에서 쓰는 표현이다. 개념의 경계가 뚜렷할 때, 사람은 그 안에서 또는 그다음 단계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글의 강제력을 생각하면 최근 들어 한 글 모음자 ‘ㅐ’와 ‘ㅔ’를 같은 발음으로 소리 내는 것도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다. 초성 자음에 비해 중성 모음 발음은 경계가 확실히 모호한 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 차원에서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린 일제 강점기이나 미군정처럼 우리의 말소리를 심하게 왜곡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특히 한글이 미처 모든 국민들에게 보급되기도 전에 맞게 된 일제 강점기는 우리 말소리가 가졌던 다양성과 변별성을 심하게 왜곡했다.

 

일본어는 모음 소리가 다섯 개밖에 없다. 음절의 받침도 거의 없는 개음절 말이라 발음이 매우 단순하다. 게다가 일본 글자인 가나는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지 않은 글자다. 가나로 음독한 영어가 한국 사람 눈에는 정말 희한하게 보이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한국어 발음이 정말 독특하게 들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이런 말과 글로 36년간 생활하고 교육받아 왔으니 우리는 자각하지도 못한 채 한국어 언어 습관에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변화는 발음의 다양성이 축소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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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미군정 이후 들어 온 영어도 한국어 말소리, 특히 모음 간 변별성을 희미하게 하는 원인이다. 요새는 유튜브까지 등장해서 영어 발음에 시공간 제약 없이 노출된다. 언어 습관을 부지불식간에 바꾸는 강한 자극이 되고 있다. 물론 영어를 배우고 쓰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나 영어를 소통 수단으로 배우는 것과 메이지 시대 탈아입구의 열망처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사태가 이런데도(또는 이렇기 때문에) 한글 표기대로 한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도록 배울 기회는 거의 사라졌다. 공교육 현장에서도 한글을 제대로 발음하도록 가르치는 국어 선생은 드물다. 요새는 어린이들이 취학하기 전에 배우기 쉬운 한글은 대충 배우고 영어에 몰입한다. 아이들은 한국어 발음보다 영어 발음에 더 익숙하다. 정인지 할아버지가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한글이 배우기 쉬운 글자지만 이 말이 한글을 대충 배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요즈음 한글은 대충, 부정확하게, 배운다.

 

6. 그럼에도 <한글의 탄생>이 좋은 책임은 확실하다

 

이 정도만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책은 한글에 관해 쓴 책 중에서 최고 수준에 있는 책이다. 단단한 학문적 준비와 바탕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다듬은 수고도 최고 수준에 있다.

 

무엇보다 학자들도 늘 혼돈해서 쓰는 말과 글을 제대로 분간하여 책을 썼다. 논문을 읽다 보면 국어학자, 언어학자라면서 글과 말을 막 섞어 쓰는 인간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저자는 아니다.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개념들은 엄격하게 나누어 설명하고 암호 같은 학술 용어는 역량껏 쉽게 풀어 썼다.

 

한국어와 한글의 역사적 맥락도 잘 정리했다. 현대 음성학과 음운학 이론으로 훈민정음을 맛깔나고 고급스럽게 설명했다. 중국어-한자, 일본어-일본자, 한국어-한글의 관계도 적절하게 비교해서 비슷함과 다름을 잘 대조하며 설명했다. 미술가답게 다른 국어학자들이 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훈민정음의 예술성도 잘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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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태어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 신비로움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일이다.···

한글의 구조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음이 문자가 되는' 놀라운 시스템을 발견하게 된다."

<한글의 탄생> 서문 中에서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여간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자유가 뭔지도 모르면서 자유를 외치고 국민들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는 대통령 때문에 부끄러움과 회한에 치를 떨며, 겨울의 한 가운데,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모여 목청을 돋우는 일 빼고는 만사가 귀찮은 시절이다. 하지만 그런 퍽퍽한 일상에서도 시간 쪼개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 가슴 한구석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