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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재인가  

 

교과서엔 나오진 않는, 조선시대 일기 속에 담긴 출근러들의 삶과 비애를 통해, 그들의 삶도 오늘날 여러분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호된 신고식을 당하는 신입사원, 왕비에게 탈탈 털리는 미관말직, 할 거 다 해 봐서 파직만 기다리는 만렙 고인물까지. 녹봉에 웃고 출근에 울었던 ‘조선 직딩’들의 숨 가쁜 이야기 속에서 어느덧 여러분의 하루가 떠오를 겁니다.

 

만원 지하철.jpg

 

 

목차 (연재 중 조금씩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1부

 

1. 만년 참봉 금난수의 현기증 나는 관직 생활(링크)

2. ‘영남의 1타 선비’ 김령의 신입사원 분투기

3. 최전방 GOP 삼수갑산 장교의 삶, 노상추

4. ‘소확횡’과 재테크를 동시에, 유희춘

5. 인서울 출근러 황윤석의 셋방살이

 

2부

 

6. 국제외교전의 현장에 던져진 외교관, 황중윤

7. “범인은 바로 너!” 수사관이자 재판관, 서유구

8. “나 도지삽니다.” 그런데 선정(善政)을 곁들인, 조재호

9. ‘기로소 고인물’ 권상일의 ‘파직은 거들뿐’

 


 

“첫 직장이 정말 중요하다.”

 

돌이켜 보면, 저의 첫 직장은 퇴근 직전에 불러서 1시간 동안 풍수지리에 대한 tmi를 방출하던 꼰대 그 잡채인 상사를 두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젊은 서비스직 종사자에 대한 사회구조적 착취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카페를 찾아오는 온갖 인간 군상까지 접하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현타에 빠졌죠. 덕분에 저의 성격은 조금 더 시니컬해졌고,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지속하는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범한 직장인을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첫 직장이 중요한 까닭은, 수십 년간 이어질 커리어와 연봉을 결정하는 첫 단추이면서 한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때 포텐이 넘치던 젊은 인재가 사회생활을 겪은 끝에 꼰대 부장님으로 진화하는 예도 적지 않습니다. 혁신, 창조, 에너지, 그런 것들은 매뉴얼과 부조리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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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조선의 직장인은 계암 김령(金坽, 1577~1641) 입니다. MZ 관료였던 그는 어느 날 사직서를 던진 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흘러 노년의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히키코모리가 되었는데, 그를 비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은 그를 ‘영남의 1타 선비’라고 칭했죠. 

 

왜 그는 사직서를 썼고, 히키코모리의 삶을 택했을까요? 그런 그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칭송했을까요?

 

 

MZ선비 김령의 첫 번째 현타, 과거 시험장

 

금난수 편에서도 소개했듯, 15~16세기는 선비들이 세상을 바꿀 큰 뜻을 품고 중앙정계에 진출하던 시기입니다. 김령 또한 그랬습니다. 일찍부터 동네방네 소문난 영재였던 그는, 부모님의 3년 상을 마친 27살(1603년)부터 과거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역시 과거시험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조차도 장기간 과거에 낙방합니다. 그는 훗날 14번의 과거시험을 치르고서야 합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그는 이미 글빨 좀 날린다고 소문이 쫙 나있던 터라, 현직 관리가 대필을 부탁하기도 했을 정도로 실력에는 의문이 없었습니다. 장기간 낙방했던 건 실력보다는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마인드 때문이었습니다.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과거 시험을 ‘공정하게’ 통과하려 했기 때문이었죠. 

 

눈치보지 말고 본인 능력.jpg

 

1606년 7월 4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이번 시험 장소는 처음에는 예천이랬다가, 다음에는 의성이라더니, 또 갑자기 비안으로 결정됐다. 게다가 감독관은 조즙(趙濈)이었다. 조즙은 가뜩이나 우리 지역에서 말이 많았던 자였다. 조즙은 상주와 함창 사람들을 이끌고 왔는데, 그들은 우리 지역에 거주하지도 않으면서 허위로 수험생으로 등록한 자들이었다. 이런 행태에 수험생의 의견은 벌써 들끓었다.

 

게다가 시험 전, 조즙은 자신과 안면이 있는 수험생들과 사적으로 만나 대화하고 있었다. 일부 수험생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조즙은

 

“그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고, 시험과는 무관하다!”

 

라며 외려 화를 냈다. 

 

하지만 수험생들의 항의는 계속되고, 혹자는 시험관의 행보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즙은,

 

“그렇다면 내가 나가고 말겠다! 어디 감독관 없이 시험을 잘 치러 보시오!”

 

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가 자리를 나서자 수험생들의 분노는 터졌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안동 사람 류득잠이 머리가 터져 피를 보았는데, 조즙이 데려온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상처는 경제적 타격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왕은 지방의 사족에게 정치적 빚을 지었고, 그 보상으로 관직을 뿌렸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시스템을 지탱하는 과거를 흔들게 되었습니다. 내가 공부할 때 밤새워 놀던 옆집 친구가 의병이었던 아빠 찬스로 관직을 받으니, 다들 실력으로 승부 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 합격 목걸이를 가지려고 했죠. 위 일기는 인맥 중심으로 진행되던 시험장의 모습을 고발하는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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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무서운 까닭은 그가 저지른 사건의 경중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 언론인만을 순방 비행기 안에서 따로 만나는 것이 뭐가 문제냐 되묻는 사람처럼 불공정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어서, 불공정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있죠. 조즙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조즙의 사례에서 당대에 맛이 가고 있는 과거시험의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시험의 최고 감독관이 사적 인연을 합격시켜서 경상도에 자신의 커넥션을 만들고자 시도했다는 것에서부터 그 사실을 알 수 있죠.

 

더 큰 문제는 불공정이 ‘개인의 일탈’에 그치지 않다는 데 있었습니다.

 

1606년 7월 20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지난 17일 시험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출제된 문제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많아 여러 차례 시험 문제를 바꾸게 되었는데, 화가 난 조즙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영남은 풍속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지금 선비들의 행태는 개판이구만.”

 

이 얘기에 수험생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오늘도 수험생들의 시험 문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그 후 나온 문제는 이랬다.

 

‘예조에서 전국의 시험장에 명령하니, 시험 문제를 바꾸는 일을 엄금하여 수험생들의 천박한 행태를 다스려야 한다.’라는 주제로 시를 지으시오.

 

누가 봐도 수험생들을 비웃는 게 분명해 다시 수험장은 들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도저히 이런 시험은 볼 수 없다며 집단으로 퇴장하자고 주장했고, 혹자는 그저 앉아만 있다가 나오자고 주장했다. 결국 모두가 약속대로 답지를 제출하지 않고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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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과 감독관의 기 싸움이 이어지다가 단체로 과거를 거부하는 이 사태. 도대체 이렇게까지 기 싸움하는 이유가 왜일까요? 

 

김령은 이를 정치적으로 판단합니다. 시험관으로 조즙을 꽂은 사람은 김상용이고, 김상용은 송강 정철의 무리였죠. 다시 말해, 남인 일파를 역모로 몰아 죽였던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역인 정철 무리에 의한 정파 싸움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반면, 김령을 비롯한 수험생 대부분은 퇴계학파와 남인으로서, 정치 활동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로 한껏 가득 찼던 집단입니다. 그들은 감독관과 수험생이 큰 차이가 없다고 여겼으며, 그래서 시험 문제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항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다시 말해, 당시 과거 시험장은 집단 간의 학문적 자부심과 현실정치의 알력 싸움이 펼쳐지는 ‘중앙 정치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려는 김령 같은 샌님이나 범생이 타입은 합격하기 힘든 사회생활 종합선물세트였죠. 아주 사소한 행정절차부터 시험장 안에서의 자리까지, 모두 게 돈과 인맥 아닌 게 없었습니다.

 

1603년~1606년 - 『계암일록(溪巖日錄)』

 

1603년 8월 12일 : 오늘 수험생 등록을 마쳤다. 그런데 감독관들이 개인 인맥으로 줄을 세우는 바람에 힘이 없는 자들은 온종일 문밖에 서 있어야만 했다.

 

1604년 9월 15일 : 이번에 내려온 감독관은 알고 보니 우리 집안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밤에 집안 모임을 열었고, 그는 기출 문제를 보여주면서 우리와 함께 술을 마셨다.

 

1606년 8월 23일 : 이번에 열린 시험은 갑자기 줄줄이 취소되기 시작했다. 답안지 분류에 실수가 있었다는 고발이 연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상의 자식들은 시험 취소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들이 줄줄이 합격 명단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수험생 등록 과정부터 불이익을 받지만, 고위 공직자를 배출한 집안의 사람은 경제적 문제에 시달리지 않고 과거시험을 보다 편하게 준비하는 것뿐 아니라 시험 과정에서 여러 가지 편법적 혜택을 받았습니다. 집안 모임을 통해 기출 문제를 접수한 일기처럼, 김령 또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굳이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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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기출문제란 말이지?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시험을 통한 관리 선발은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 조건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시험장에 들어선 사람을 키워낸 가문의 힘과 권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퇴계학파나 율곡학파라는 소속감은 그들을 치열하게 토론하고 공부하게 한 원동력이 됐지만, 동시에 퇴계나 율곡을 스승을 두지 않은 사람들을 박탈하고 배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맥과 같은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애쓴 가문을 포상하고, 그들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많은 권한을 쥐게 하는 것은 조선 사람들 모두가 동의한 사회적 합의였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권한은 부조리한 힘으로 작용했죠. 

 

김령은 타인보다 더 예민한 감각으로 과거 시험의 공정함을 일기에 빼곡히 기록했습니다만, 그의 응시도 누군가에겐 불공정일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경제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과거 응시 횟수를 제한했다면, 김령은 급제자가 못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이와 유사하게 조선 후기, 지역별 급제자 수의 균형을 맞추는 조치를 취하자, 집안 내에서 과거 응시를 두고 가족끼리 싸우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과거는 아무리 빨리 합격한다고 해도 수년 안에 결판을 내기 힘든 먼 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 문과 급제자는 총 5번의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1. 생원/진사시 1차

2. 생원/진사시 2차

3. 대과 1차 (1,400명 선발)

4. 대과 2차 (200명 선발)

5. 대과 3차 (33명 선발)

 

이 모든 걸 합격해야 전국에서 33명만 뽑는 고위 관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대과 초시만 붙어도 관직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과 초시를 붙는 것 자체도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사대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수험생 수가 수십만에 이르기 시작합니다. 정말 토 나오는 경쟁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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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김령은 결국 그 지옥 같은 경쟁률을 뚫고 대과 3차 시험까지 합격하여 33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됩니다. 허나, 김령의 일기엔 기쁨보다는 슬픔, 만족보다는 걱정이 담겨있습니다.

 

 

합격 뒤엔 신고식이 있다

 

1612년 8월 2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2일 :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종 청산이가 공무원 네다섯 명과 함께 왔다. 그들은 봉투를 들고 왔는데, 봉투를 보자마자 합격증임을 알았다. 선조들의 은덕으로 이러한 영광을 차지하였으나,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안 계시니 슬픈 마음이 더했다. 이 와중에 종 청산이는 공무원들에게 “빈손으로 돌아가란 말이냐”라며 갈굼을 받고 있어서 그들에게 무명 세 필을 줬다. 한편, 관노비 무리와 동네 아이들이 귀신같이 내가 급제자인 걸 알고 우르르 몰려왔기에 그들에게도 쌀을 몇 되씩 퍼줬다. 

 

한편으론 걱정이 앞선다. 선배들이 급제자에 대해 치루는 신고식이 있다. 이는 오래된 풍습이다. 그러나 나의 병든 몸으로는 신고식을 견딜 수 없을까 두려워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거짓말하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드디어 과거 급제를 통해 가문의 영광을 빛낼 수 있었지만, 기뻐하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사실은 효도에 목숨을 걸던 조선 사대부 김령에게는 매우 슬픈 일이었습니다. 

 

악명 높은 각종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걱정도 있었죠. 그가 더욱 걱정했던 이유는 그가 지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병약하게 태어났고, 부모님의 삼년상을 치르면서 더욱 몸은 쇠약해졌습니다. 이런 그가 여러 동네를 다니며 과거 코스를 밟아낸 건 보통의 의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의지의 사나이 김령에게도 신고식은 극복할 수 없는 공포로만 느껴졌습니다. 도대체 신고식이 어떻길래 과거 급제의 기쁨마저 뒤덮을 만큼 걱정했던 걸까요?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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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