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일찍부터 동네방네 소문난 영재였던 ‘영남 1타 선비’ 김령(1577~1641)이란 MZ 선비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영민했던 그였지만, 과거를 14번씩이나 치르고서야 합격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미 글빨 좀 날린다고 소문이 파다하여, 현직 관리조차도 대필을 부탁했을 정도의 실력자였던 김령인데, 왜 13번이나 낙방했던 걸까요?

 

이거 꿈이야.jpg

나 같은 인재가 왜...

 

이유를 알기 위해선, 그가 살았던 시대를 봐야 합니다. 당시엔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이 조선에 남긴 상처는 물리적 타격뿐이 아니었습니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왕은 지방의 사족에게 정치적 빚을 지었고, 그 보상으로 관직을 뿌렸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시스템을 지탱하는 과거를 흔들게 되었습니다. 공정함을 잃게 된 거죠.

 

남들은 돈과 빽을 총동원하여 시험에 합격하려 하는데, 김령은 실력으로 합격하겠다는 나이브(?)한 생각을 했으니, 낙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시대가 시대였으니만큼 그조차도 특혜를 받을 기회가 있다면 굳이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암튼, 각고의 시간 끝에 그는 과거 시험 최고 단계인 ‘대과 3차’까지 합격합니다. 최우등 33명에 들게 된 거죠. 그러나 김령은 과거 합격이라는 영광을 앞에 두고도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신임 관리들에게 치러지는 악명 높은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죠. 도대체 신고식이 어떻길래 과거 급제의 기쁨마저 뒤덮었던 걸까요?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부터 보시길 추천!

 

 

MZ선비 김령의 두 번째 현타, 신입사원 길들이기

 

1612년~1614년 - 『계암일록(溪巖日錄)』

 

1612년 12월 23일 : 자형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내게 면신례를 절대로 미루지 말라고 하며, 심지어 면신례 준비를 도와주겠다고까지 했다. 그 말이 참 고마웠다.

 

1613년 2월 2일 : 홍 찰방(察訪)이 면신례에 쓸 경비를 돕겠다며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에도 그리 말했는데, 이번에도 다시금 돕겠다는 뜻을 비쳤다.

 

1614년 2월 14일 : 저물녘에 선배 하성지가 찾아와 면신례 일을 상의하였다.

 

1614년 2월 25일 : 면신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너무나 걱정이다. 승문원의 직원이 우리 집 노비를 찾았다. 할 수 없이 노비를 보냈더니, 상전이 면신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곤장 50대를 맞았다.

 

김령은 애써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 주서(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실무자. 정7품)라는 관직을 받아놓고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때문에 1612년 말에 과거를 합격했음에도 1614년도 초까지 출근을 안 했죠. 

 

출근 싫어서 발악.jpg

 

그가 관직 임용을 미룬 첫 번째 이유는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면신례(免新禮) 때문이었는데요. 도대체 면신례가 뭐기에 이렇게 걱정하는 걸까요?

 

조선의 신입 관리들은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라는 신고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허참례는 선배 동료들과 처음 대면하면서 통 크게 접대하는 신고식이고, 면신례는 온갖 종류의 괴롭힘을 통해 신입 관리를 길들이는, 그야말로 ‘똥군기 잡는’ 신고식이었습니다. 

 

김령은 관직을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은 미루기가 힘들어 첫 출근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첫 출근날 혹독한 신고식을 당하게 되죠.

 

1614년 3월 2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오늘 아침, 승문원에 첫 출근을 했다. 보자마자 선배인 윤근이 공적인 일로 왔다가 나를 괴롭혔다. 오숙우도 나를 괴롭혔다. 오숙우는 승정원 소속으로 직속 선배도 아니면서 괴롭히니, 그가 너무 미웠다.

 

저녁에는 회자(回刺)를 했다. 먼저 말을 달려 도성 문밖에 사는 윤전, 김상, 윤근, 오숙 선배의 집을 돌았다. 이어 숭례문 안으로 들어가 김대성, 이진영, 민응형, 유백증, 임효달, 최래길, 임숙영, 권확, 이유달, 신천익 등 열 집을 돌았다. 14집이나 회차를 돌리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었다.

 

첫 출근을 한 관리가 해야 하는 일은 회자, 즉 명함 돌리기였습니다. 지금의 외교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승문원은 독특한 인사 제도가 있었는데요. 그것은 전임자가 후임자를 뽑아놓고 가는 자천제(自薦制)였습니다. 관원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성립된 제도지만, 그만큼 똥군기와 부조리가 자리 잡기 좋은 구조였죠. 그래서 다른 부서에서도 있었던 면신례 외에도, 승문원에는 회자(回刺)라는 독특한 부조리가 더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전임자와 함께 여러 부서에 인사를 다니죠. 그런데 만약 모든 선배의 자택을 일일이 방문해 인사를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회자는 그런 식의 인사법이었습니다. 신입 관리가 귀신 분장으로 말을 타고 모든 선배의 자택을 방문하여 명함을 돌리는 관습이었는데요. 이로써 승문원에 뉴비 관리가 왔음을 한양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한 선후배 간에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신 분장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치욕적이었고, 일부 선배는 뇌물을 내놓지 않으면 명함을 받아주지 않기도 했죠.

 

사진1.PNG

돈 없으면 꺼져

 

겨우 회자를 마치고 아직도 기진맥진한 김령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면신례의 날이 바로 다가와 버렸습니다.

 

1614년 3월 7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이른 새벽, 승문원에 출근했다. 곧 선배들이 모두 출근했고, 면신례가 시작됐다. 그들은 내게 말도 안 되는 시제를 주고 시를 지으라고 하더니, 머뭇거리면 술을 먹였다. 그다음, 그들이 시키는 대로 달려서 찍고 오기, 종종걸음 하기, 기와 위에서 책상다리하기, 활 자세로 버티기 등을 시켰다. 이 밖에도 온갖 곤욕스러운 일을 시켰다. 이미 오전에 기력이 떨어져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후의 허참례에서는 엎드려서 얼차려를 받았다. 고달픔과 피곤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간 뒤에야 숙소로 돌아왔는데, 피로가 너무 심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면신례와 허참례에서 그가 당한 부조리는 다양합니다. 일단 뭘 할 때마다 술을 강요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거기에 지금의 ‘선착순’과 유사했던 빨리 뛰어갔다 오기, 웃긴 자세로 걸어서 선배들 웃기기, ‘오토바이 자세’와 유사했던 ‘활 자세’, 거기에 엎드려뻗쳐로 받는 얼차려까지. 옛날 군대와 다름없는 온갖 형태의 부조리가 벌어졌죠. 괴롭히는 방식이 비슷한 것을 보면, 인간을 고문하기 위한 사고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유사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승문원에는 똥군기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업무 강도가 상당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고생하고 막대한 경비까지 들여 허참례와 면신례를 끝냈건만, 그에게 다가온 건 끊이지 않는 페이퍼였습니다.

 

 

기개 넘친 젊은 관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갔다

 

1614년 3월 19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근래 중국행 사신단이 떠날 때가 오자 처리해야 해야 할 문서 업무가 두 배나 많아졌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지만, 내가 떠나면 누군가 내 업무를 맡아야 할 테니 과연 어떤 동료가 나의 귀향을 반기겠는가? 귀향의 귀 자만 꺼내도 엄청난 욕을 먹을 것이다. 

 

게다가 신입 관리가 일이 싫어서 도망갔다는 얘기가 나오면 두고두고 불편해질 게 분명하다. 오숙우 선배한테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더니만, 선배는

 

“원래 신입 시절이 다 힘들고 그런 거지. 적응되면 다 괜찮은 것이네.”

 

라고 말해 그저 우울했다.

 

사진2.PNG

 

이 시기 김령의 일기는 우울 우울 그 잡채입니다. 임용 초기에는 “면신례도 고통스럽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승문원에 그저 앉아만 있는 게 더 고통스럽다”라고 말하는데요. 지금도 그렇듯, 신입사원에는 아무런 업무도 주지 않고 그저 대기시키죠. 드라마 <미생>의 장백기도 그랬던 것처럼요. 

 

그런데 3월 중순부터 업무량이 폭증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가 갑자기 업무량이 폭증한 것도 문제였지만, 김령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선배들에게 제대로 된 인수인계나 교육을 받지 못했던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짬처리’를 당한 거죠. 사원증 잉크도 마르지 않았건만, 김령은 벌써부터 사직서를 던질 고민을 합니다. 

 

집에 가고 싶다.PNG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업무를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고, 사직은 엄두도 내지 못하죠. 그렇게 기개와 재능이 넘치던 젊은 관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갑니다.

 

1614년 3월 18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몸이 너무나 안 좋았으나 새벽에 억지로 출근했다. 하지만 말단 관리의 피곤함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니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여러 선배 및 예조 판서와 함께 외교문서를 점검하느라 여기저기 정신없이 오갔고, 드디어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니 이미 해가 다 졌다. 내일 또 출근해야 한다니, 너무 싫다.

 

기어코 그의 입에서 우리네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아... 출근하기 싫다” 자신이 배운 바를 통해 세상을 좀 더 이롭게 바꿔보겠다는 부푼 다짐은 다 사라지고, 그저 출근하기 싫어도 억지로 출근하는 평범한 직장인만 남게 된 거죠. 

 

이때는 광해군 시기였습니다. 명-후금-조선 간의 긴장감이 날로 높아지던 때 외교부서에서 근무한다는 건 크나큰 영예와 막중한 책임감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 필요 없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죠.

 

사진3.PNG

 

그렇게 임용 3개월 차,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후임자가 들어옵니다.

 

1614년 6월 14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어제 드디어 후임 관리를 뽑았다. 오늘은 그 대면식이었다. 해 질 녘에 퇴근하여 신임 관리들의 신고식을 진행했다. 온종일 큰 비가 내려서 온통 진흙탕이었다. 신임 관리들이 신고식을 받으며 흙탕물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이래저래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웃음이 나왔다. 며칠 뒤 허참례와 면신례가 진행된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임용 3개월 차 만에 그는 자신이 받았던 부조리를 그대로 후임자에게 ‘내리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면신례 같은 부조리는 이따금 정치적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없어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율곡 이이 같은 사람이 나서도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면신례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졌죠. 그러니까 의기 있던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 뿌리박힌 악습이었던 겁니다. 부조리와 불공정에 예민한 감각을 가졌던 김령 또한 쉽게 가해자로 돌변해 버린 것처럼, 악습의 그물망을 벗어나는 건 사대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직서를 내던지고 단톡방에 사퇴짤을 뿌리겠다는 김령의 계획은 실패했는데요. 인사과에서 사직서를 아무리 내도 수리되지 않았고, 상사에게 사직하겠다고 찾아가도 오히려 더 큰 업무를 받아왔습니다. 그렇게 사직서를 갖고 밀당하다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 그는 승문원에서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으로 옮겨갑니다.

 

<계속>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입체_조선복지실록__띠지.png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