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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삶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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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사랑에 빠진 사자 이야기

 

사자 한 마리가 아름다운 농부의 딸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농부는 무서운 사자의 청혼 앞에서 한가지 꾀를 냈다. 농부는 사자에게 자신의 딸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무서워하니 그것을 뽑고 온다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사자는 당장 그것들을 뽑고 다시 농부를 찾았다. 그러나 농부는 이빨과 발톱이 없어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자를 몽둥이로 때려 쫓아 버렸다.               

 

- 이솝우화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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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듀이>

 

 

20살 어린 소녀를 사랑하게 된 남자

 

내 인생에는 전혀 방해물이 없었다. 상처도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일은 잘되어 왔다. 분명히. 그러나 또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무것도. 나는 자기 배를 항구에 매어둔 상인과 같다. 배를 내보내야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배를 바다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했으며, 나는 본래 모험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었다.

 

의사이자 대학교수인 ‘슈타인 박사’의 삶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의 인생은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해있는 배와도 같았다. 인생이라는 드넓은 바다에는 폭풍이 일고 비가 내렸지만, 그것은 슈타인의 인생이 아니었다. 슈타인은 그런 인생들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이해하려 하거나 그럴 기회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1929년 9월 15일, 19살의 소녀 ‘니나 부슈만’이 운명처럼 나타났다. 깡마르고 갈색 피부를 가진, 비슷한 또래의 어린 처녀가 갖고 있는 부드러운 기품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소녀였다. 그녀는 패혈증을 앓고 있었고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쌀쌀맞게 말했고 슈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당찬 처녀였다. 그녀와 그녀의 그런 행동 모두가 슈타인으로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슈타인의 마음을 끌었다.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슈타인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벼웠고 열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슈타인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슈타인은 그녀가 죽는다면, 그래서 그녀를 잃는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성장하는 것과 그녀에게 잠재된 꿈과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상상은 무서운 고통이었다.

 

슈타인은 니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안정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맑고 차가운 가을밤 다섯 시간을 그녀의 집 맞은편 숲속 담벼락에 기대어 숨어 있었다. 니나의 방 창문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슈타인의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었다. 니나는 항구에 정박해 있던 슈타인을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었다.

 

운명이란 인간들을 옭아매고 있는 촘촘한 그물 같은 것이었다. 그물을 벗어날 순 없다. 간혹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눈을 아래로 향해보면 안다. 여전히 그물이 발치에 걸려 있다는 것을. 슈타인이 20살 어린 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에 걸린 것이었다.

 

 

소녀와 떠난 아름답지만 불행했던 여행

 

슈타인이 다시 니나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나쁜 숙명이었다. 슈타인은 니나가 어떤 남자와 함께 공원을 걷는 것을 보았다. 슈타인은 일부러 샛길로 그들을 앞지른 후 그들을 향해 걸어갔으나, 니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니나는 함께 걷고 있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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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 그들을 따라가던 슈타인은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끝없는 욕망, 질투, 의심, 시기, 복수......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감정 전부에 의해 슈타인은 지배당하고 있었다. 슈타인은 그런 자기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슈타인이 다시 니나를 만난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그날 이후 슈타인은 니나가 살고 있는 합스부르크 거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녔기 때문이다. 슈타인은 니나에게 대담한 용기를 내어 주말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말했다. 니나의 맑은 눈을 보며 자신이 밤마다 겪는 욕망이 부끄러웠다. 슈타인은 그녀가 가지 않겠다고 하길 원했다.

 

니나는 여행을 수락했다. 그녀는 수치심과 자존심을 함께 적절히 통제하며 1박 2일의 여행을 수락했다. 슈타인은 그녀를 자신이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저택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 집은 크고 아름다운 정원에 둘려싸여 있었고, 집안의 세간들은 온통 값진 것들이었다. 슈타인은 그녀가 이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날 밤, 니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으나 문을 잠그지는 않았다. 슈타인은 번뇌했다. 그는 자신이 니나의 안락한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나가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타인은 그 무엇도 실행하지 못했다.

 

나는 내 나이의 남자가 ‘삶의 의미’를 한 소녀 속에서 찾는 것이 가능한지를 자문해 보았다.

 

슈타인은 패배했다. 그는 아름다운 저택과 숲속에서 니나와 하룻밤을 보냈지만, 전혀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1주일 후,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슈타인에 대한 책망과 함께 앞으로 니나가 슈타인을 만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슈타인과 니나가 함께한 여행은 아름답고도 불행했다.  

 

 

니나를 찾아간 슈타인이 섹스하지 않은 이유

 

슈타인이 출강하는 대학의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니나는 보이지 않았다. 슈타인이 받은 학생 명부에 니나는 없었다. 슈타인은 니나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걸 알았다. 니나를 찾아야 했다. 슈타인에게 이미 염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금 그녀와 연결될 수 있는 끈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슈타인은 니나의 친구였던 여학생을 찾아갔다.

 

니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벤하임’에 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죽었기 때문에, 니나는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니나는 죽어가는 고모할머니의 병수발을 하며 그 노인의 작은 상점을 운영하기로 했다. 병수발의 대가로 고모할머니가 죽은 후 상점을 상속받기로 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나와 니나의 관계를 분명히 가늠해 보고 싶었으며, 그래서 거기에 몰두했다.

 

슈타인은 니나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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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는 초라한 상점에서 죽어가는 노인을 돌보며 담배와 사탕을 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슈타인은 니나를 가질 수 있다는 강렬한 희망을 품었으나, 니나는 슈타인에게 투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행한 운명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슈타인은 간신히 비굴하게 주말을 함께 보내자는 제안을 할 뿐이었다. 이 우중충한 공간에서 하루 정도 벗어나는 것은 니나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니나를 태운 자동차는 추웠다. 그녀는 낡고 얇은 외투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는 슈타인이 호텔 방을 잡는 것을 니나가 받아들이게 했다. 호텔 방에 들어선 니나는 방 모퉁이로 가 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슈타인은 방을 나갔다. 

 

슈타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불은 꺼져 있었다. 니나는 자는 것처럼 보였다. 슈타인은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니나가 쳐다보았고, 슈타인은 용기를 내었다. 니나에게 키스를 했다. 슈타인은 이번만은 동물이 되고 싶었다. 니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었다. 그 순간이었다. 슈타인은 니나의 눈에서 동정심을 보았다. 슈타인은 그녀를 밀쳤다. 눈물이 흘렀다.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기쁨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나는 그녀에게 단지 좋은 친구, 편안한 친구일 뿐이었다.

  

 

니나의 위험한 부탁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무기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커다란 각성이 나를 뒤흔들었다. 니나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아니,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슈타인의 냉철한 이성은 모든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그러나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뻔히 예상되는 결말 앞에서도 슈타인은 니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성은 늘 사랑 앞에 패배했다. 폐결핵을 의심하며 다시 슈타인의 병원에 나타난 니나는 슈타인의 그 어떤 안락하고 풍족한 제안에도 응하지 않았다. 슈타인은 싸구려 장갑을 끼고 있는 니나를 위해 사둔 털장갑을 주지도 못했으며 그녀가 폐병에 걸린 신학과 학생과 나누는 키스에 대해 쓴 편지를 고통스럽게 읽어야 했다. 

 

니나는 자유로워야 살 수 있는 여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겪고 있는 가난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었다. 그녀의 의지가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녀는 모든 삶의 고통을 그것보다 더 큰 열정으로 이겨내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지금 나도 당신에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죠.

 

다시는 니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슈타인의 결심은 니나가 보낸 편지 한 장에 무너져버렸다. 슈타인은 니나가 일하는 상점을 한번 방문해주지 않겠냐는 편지를 읽으며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그 편지를 찢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슈타인의 마음은 니나를 만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슈타인은 행복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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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의해 체포된 유태인들

 

니나가 슈타인을 보자고 한 것은 위험한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점점 노골적이 되어가는 나치의 유태인 탄압 속에서 니나는 유태인들이 스위스로 탈출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니나는 슈타인에게 그들을 자동차에 태워 국경 근처에 내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슈타인은 니나의 키스 앞에서 그것을 승낙했다.

 

니나는 슈타인이 2년에 걸친 열대 원주민 치료 경험을 쓴 책을 보고 그가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슈타인에게 보낸 키스의 의미였다. 하지만 슈타인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려 노력한다고 추측하며 그 위험한 임무를 수락했다.

 

그녀와 함께 하나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생각, 비밀스럽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은 나를 행복하게 했고 내 인생에 일시적이나마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니나의 남자들

 

니나는 강했다. 니나는 죽어가는 노인을 돌보며 우중충한 상점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버텼다. 엄청난 의지력이었다. 결국 노인은 죽었고, 니나는 대학으로 돌아왔다. 니나는 더욱 성숙해졌고 건강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그녀는 가끔 슈타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고는 진심으로 기쁨의 감정을 보이곤 했다. 약속대로 상속받은 노인의 유산을 처분해 이제 안정적으로 학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니나는 그간 자신에게 보여준 슈타인의 진심에 대해 감사의 포옹을 하기도 했다. 슈타인은 감동했다. 그는 니나와 결혼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과 니나가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슈타인은 니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 준 행복감이었다. 니나는 다시 대학을 떠났고, 슈타인은 서점에서 근무하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요.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 구속받지 않고 싶다는 거죠. 나는 자유로워야 해요.

 

니나가 슈타인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녀의 약혼자 ‘퍼시’와 함께였다. 니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퍼시에게 반하여 인연을 맺게 됐다. 퍼시는 금발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쾌활한 남자였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좋아할 남성미를 갖춘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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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슈타인을 약혼자에게 소개하고 싶었다고 했다. 슈타인은 니나를 축복 해주었다. 그러나 축복의 말속에는 슈타인의 절망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숨이 막혔다.

 

그날 이후 슈타인은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고 얼음처럼 숨을 쉬었다. 슈타인은 자신을 위로하지도 않으며 2년을 버텼다. 어느 날 그가 깬 채로 누워있을 때였다. 그는 고통이 생명의 샘이 있는 심층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통이 뚫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의 샘물이 솟아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방식으로 니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니나를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슈타인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고통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생각했다.

 

“곧 아이를 갖게 돼요.” 

 

내가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라보는 사이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퍼시의 아이가 아녜요.

 

슈타인은 도움을 요청하는 니나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왔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니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라며 슈타인에게 고백했다. 슈타인은 그녀의 침울한 시선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슈타인이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슈타인은 꼭 아이를 낳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니나의 눈에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빛이 떠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슈타인은 니나에게 내일 오후에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고 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슈타인은 알지 못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유일한 오랜 친구인 ‘알렉산더’라는 것을. 알렉산더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니나는 결혼을 앞둔 채 충동적으로 알렉산더와 하룻밤 불장난을 벌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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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랴, 누가 되든 어떠랴,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 아버지가 알렉산더라는 것을 그 당시 알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니나는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 밤새 고민하던 그녀는 퍼시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한 시간 넘게 방안을 서성이던 퍼시는 결단을 내렸다. 퍼시는 뱃속의 아이가 자신들의 아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니나를 포기할 수 없다며 아이를 낳자고 말했다. 

 

 

슈타인의 첫 거절과 니나의 선택

 

내가 만약 때로 그녀의 뻔뻔한 요청을 거절했더라면 나는 수천 배 더 강한 인상을 주었을지도. 나는 그녀를 인간으로 대했다. 나는 그녀가 여자라는 것, 여자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잊었다.

 

니나는 계속 슈타인을 필요로 했다. 어쩌면 니나는 슈타인을 자기 인생의 지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원하면 불렀고, 원하지 않으면 쫒아냈다. 가끔 슈타인은 그녀를 찾지 않겠다고 독하게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슈타인의 잔인한 지배자였고, 슈타인은 주인이 휘파람을 불면 달려가는 개였다.

 

퍼시의 질투는 그가 니나를 사랑하는 정도보다 더 컸다. 퍼시는 알렉산더의 아이를 견뎌내지 못했다. 어느 날 퍼시는 자고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7주 된 아이였다. 퍼시의 얼굴을 본 니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런 니나를 보며 퍼시는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니나는 저항 했지만 퍼시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니나는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침범한 퍼시에게 복수를 결심했다. 니나는 퍼시의 아이를 지우기로 했다. 그녀는 돈이 없었지만, 슈타인이 있었다.

 

슈타인은 처음으로 니나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가 처음 니나에게 중절을 권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퍼시의 아이를 지우며 마치 그 애가 퍼시인 것처럼 느껴져 자신이 복수의 쾌감이라도 느끼게 되는 것, 의사로서 그것이 두려웠다. 그는 니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친애하는 벗에게. 나는 왜 당신이 내가 당신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이 순간에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죽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해주신 모든 일에 감사드려요.

 

니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실행을 앞두고 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니나의 편지를 보자마자 슈타인은 차고에서 차를 꺼내 니나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생애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다. 슈타인이 발견한 니나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슈타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니나를 차에 태우고 자신의 집으로 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니나는 살아났다.

 

 

감사한 인생을 끝낸 슈타인

 

살아난 니나는 조산이었지만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퍼시와 이혼했다. 니나는 반 나치 활동을 벌였고 1944년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년 뒤 전쟁은 끝났고, 니나는 풀려났다. 풀려난 니나는 제일 먼저 슈타인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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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고 국가의회 의사당에

국기를 게양하는 소련군

 

니나는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편집자로 또 작가로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슈타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슈타인은 늙었고 암이 그를 덮쳤다. 이제 슈타인은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는 죽음을 결심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낼 자유를 선택했다.

 

니나가 꽃을 들고 슈타인의 병실을 방문했다. 슈타인은 감동했다. 그녀와 함께했던, 그녀를 지켜보았던 18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니나는 슈타인에게 말했다. 왜 마지막까지 항상 문을 닫아 버린 자신(니나)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를 부드럽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슈타인은 마지막까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슈타인은 니나를 다시는 못 만난다는 생각에 슬픔이 북받쳤다. 니나가 병실을 나간 후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니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에게는 니나의 음성이 자신이 들은 마지막 음성이었고, 니나의 눈이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눈이 될 것이었다. 시간이 되었다. 슈타인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맞이했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을 선사한 인생에 감사한다.

 

 

사랑 앞에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한 조건

 

셰익스피어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눈이 머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어리석은 짓,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도 가능하게 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치명적이고 맹목적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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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인의 사랑이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의사이자 대학교수인 슈타인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39살의 나이에 우연히 인연이 닿은 19살 소녀를 사랑하게 되며, 그는 그가 몰랐던 인생의 잔혹한 이면들을 직접 경험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가장 친한 친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의 일들을 18년의 세월 동안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슈타인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녀를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헌신을 다했습니다. 

 

슈타인의 선택에는 다음 두 측면의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일 터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사랑이 정작 자신의 인생은 돌보지 못한 파괴적 행동이라는 안타까움일 것입니다. 둘 중 어떤 평가를 내리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인간의 특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자아(自我)입니다. 자아란 외부 세계를 대하는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란 존재에게 세계란 결국 자신이 해석하고 이해한 것일 뿐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각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세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 즉 자아실현을 위해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이 하루하루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 모든 생각, 그 과정에서 맺어지는 모든 인간 관계가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것으로 귀결됩니다. 특히나 사랑은 그것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성공한 사랑이 인생의 큰 행복이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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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

 

타인에 대한 사랑은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은 자아실현의 과정입니다. 

 

다시 슈타인의 사랑에 대한 평가로 돌아가 봅니다. 니나에 대한 슈타인의 사랑이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나 슈타인은 자신의 인생에 감사하며 생을 마감했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슈타인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각자의 선택은 다르겠지만, 선택을 위한 과정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선택이 결국 내 인생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선택의 결과는 다르더라도, 고민의 과정에서 이 질문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삶의 한가운데’는 태풍이 불고 비가 내리는 바다 한가운데와 같을 것입니다. 인생은 순탄하지 않고 늘 고비가 닥치며 자주 흔들리기도 하고 멀미가 나는 것이니까요. 내 인생이라는 배도 그 바다에 떠 힘겹게 항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배를 돕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배가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내 배가 위험에 빠졌는데 다른 배를 도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 인생부터 흔들리지 않게 꽉 움켜쥐기” 

 

이것이 슈타인의 사랑을 보며 들었던 생각입니다. 슈타인의 사랑에 대한 평가, 그리고 나라면 했어야 할 선택들. 이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해야 할, 해내야 할 일입니다. 지나간 사랑, 지금 하고 있는 사랑, 앞으로 다가올 사랑 이 모두에 대한 각자의 선택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며 스물여섯 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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