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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내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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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학동네>

 

 

축구, 인류 최고의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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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축구가 생사의 문제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의견들에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왜냐하면, 축구는 생사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전 리버풀 FC 감독, 빌 샹클리 -

 

축구, 이 단순하고 과격한 스포츠 게임의 매력을 도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사막부터 지저분한 유럽 빈민가 골목을 지나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세상 그 어디에서나 약간의 공간과 둥근 공 하나만 있으면 축구를 한다. UN 가입국 수는 193국이지만 FIFA 가입국 수는 211국이다. 전 국제 축구 연맹에 가입된 선수 숫자만 2억 5천만 명이 넘는다. FIFA 주관의 국가 대항전인 월드컵의 시청자 수는 전 인류의 절반이 넘는 35억 명 이상이다. 나머지 절반의 인류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볼 환경이 안 될 뿐이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 알베르 카뮈 -

 

축구는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축구의 승패는 대부분 1골로 결정되며 골은 되돌릴 수 없다. 축구를 하거나 본다는 것은 80년 인생을 살면서 겪는 희로애락을 90분 동안에 모두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도 더 강렬하게. 

 

“인생 그 자체가 축구장에 지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시인&소설가이자 역사가인 ‘W. 스콧’이 한 말이다. 그래서 특히 ‘더비 매치(라이벌 팀 매치)’의 승패는 천국의 환희와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준다. 승리의 순간 심장마비로 죽기도 하고 패배의 순간 자살하기도 한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처럼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더비 중에서도 스페인 1부 리그인 프리메라 리가 소속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더비인 ‘엘 클라시코’가 최고로 손꼽힌다. 얼마나 심하면, 이 두 팀만의 더비에 붙는 ‘엘 클라시코’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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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를 사랑하는 ‘덕훈’과 ‘FC 바르셀로나’의 열혈 팬인 ‘인아’, 이 둘을 축구가 연인이 되게 했고 부부로 만들었다. 그리고 덕훈에게는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다. 친정 식구도 아니다. 전남편도 아니다. 그녀의 엄연한 현재 남편이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엘 클라시코’ 커플

 

그날은 ‘엘 클라시코’에서 FC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배한 날이었다. 그리고 덕훈이 담당했던 영업 관련 프로그램 개발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인아는 그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외부 업체의 계약직 프리랜서였다. 그날따라 그녀의 기분은 좋지 않아 보였다. 덕훈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인아에게 건네며 넌지시 이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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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선수였던 ‘클루이베르트’

 

인아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녀는 바르셀로나의 패배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클루이베르트’의 힐킥이 무산된 것, 그리고 ‘피구’를 놓친 것, 이 모두에 대해 아파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 축구를 사랑하는 이 귀한 여자의 모습이 덕훈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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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中

 

전광판의 시계는 멎었지만 인저리 타임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날의 회식자리였다. 1차, 2차, 3차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인저리 타임마저 끝나가는 시점. 상대방의 골대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마지막으로 한번은 내질러야 했다.

 

덕훈은 인아와의 인연을 이것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지만, 술집 주인은 냉정한 심판처럼 둘에게 타임 오버를 알렸다. 덕훈이 슛 한번 제대로 날려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인아가 단숨에 공을 골대 안으로 집어넣었다. “우리집에서 커피 한잔하고 가실래요?”라는 말에 덕훈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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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는 ‘섀도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이 있다. 처진 스트라이커로도 불리는 이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한다. 득점력뿐만이 아니고 플레이 메이커로서의 창조성까지 필요한 포지션이다. 본인이 직접 골을 넣거나 폭넓은 시야와 발군의 감각으로 어시스트를 해주는 아스날의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이 섀도 스트라이커의 대명사로 꼽히는 선수이다. 그러나 인아는 베르흐캄프를 능가하는 섀도 스트라이커였다.

 

그녀와의 섹스에 대해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녀는 최고의 섀도 스트라이커였다. 그녀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빈 공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천재적인 플레이 메이커였고 최적의 공간을 찾아 감각적인 터치로 절묘하게 패스해주는 탁월한 어시스턴트였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하는 여자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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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학도였던 프로그래머이자 FC 바르셀로나의 팬인 인아와 철학이 뭔지 모르는 철학도였다가 지금은 영업 관리 사원인 레알 마드리드의 팬인 덕훈은 이렇게 연인이 되었다. 둘은 참으로 궁합이 잘 맞는 ‘엘 클라시코 커플’이었다.

 

 

인아를 오직 나만의 여자로 만들 결정적 한 골

 

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남자, 천재 미드필더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공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아는 덕훈에게 축구공이었다. 인아를 제외한 세상 모든 여자는 유니폼 혹은 축구화 혹은 골대 같은 종류들이었으나 인아는 축구공이었다. 덕훈은 인아에게 완전히 빠졌다. 인아와의 섹스는 덕훈이 그동안 경험한 어떤 것보다도 황홀한 것이었다. 덕훈이 인아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인아는 아주 작은 백만 개의 부드러운 흡착판으로 그를 빨아들였다. 덕훈의 몸은 그 느낌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덕훈의 영혼은 항상 그녀에게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고통이 시작되고, 그 고통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었다. 덕훈이 인아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인아는 술을 좋아했고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불투명한 사생활은 달콤함 속에 숨겨진 쓰디쓴 독극물이었다. 인아는 같이 술을 마신 남자와 잤냐는 덕훈의 질문에 같이 잤다고 말하는 여자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도 같이 잘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이상해?”

  

여자야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모든 남자들은 섹스를 좋아하고 자꾸 하려고 들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도 섹스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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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하실래요?’는 덕훈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폴리아모리(다자간 자유연애)’라 말하는 여자였다. 참으로 지랄맞은 폴리 머시기였다. 영혼과 헤어질 수는 없었고 헤어질 자신도 없었다. 덕훈에게는 인아를 오직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결정적 한 골이 필요했다. 축구 역시 대부분 한 골로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가.

 

이탈리아의 자랑스러운 축구선수 ‘프란체스코 토티’가 한 말이다. 

 

그는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의 16강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한 골이면 충분하다.”

 

언제나 ‘스쿠데토(Scudetto, 이탈리아 리그 우승팀에게 주는 방패 문양)’는 ‘유벤투스’ 아니면 ‘AC밀란’의 차지였다. 토티는 스쿠데토를 소속팀 ‘AS로마’에 안긴 이탈리아의 자랑이었다. 결정적 한 골, 덕훈에게 그것은 결혼이었다. 그것만이 인아를 오직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덕훈은 인아에게 청혼하기로 했다. 

 

가만, 근데 토티의 이탈리아, 과연 한 골로 충분할까.

 

 

결혼 그리고 아내의 충격 선언

 

대한민국이 2002년 월드컵 8강에 오른 날이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날이었다. 덕훈은 인아에게 청혼했다. 조르고 졸랐다.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면 덕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인아를 무덤으로 데리고 가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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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는 인아가 쥐고 있었고, 칼날은 덕훈이 쥔 상황이었다. 인아는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이 결혼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덕훈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또한 결혼생활 중에 그녀의 사생활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설령 다른 남자와 잔다고 해도 말이다. (어려울 것 있겠나.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공은 둥글었다. 대한민국은 4강에 진출했고, 드디어 그녀는 결혼에 동의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간단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었다. 마트는 비싸다고 재래시장을 이용할 정도로 인아의 살림 솜씨는 훌륭했고, 덕분에 집안과 냉장고는 늘 번쩍거렸다. 요리는 훌륭했고 예상했던 대로 섹스는 더 훌륭했다. 이제 아이만 낳으면 되었다. 그러면 그녀의 날개옷은 영원히 덕훈의 것이 될 터였다. 덕훈은 아내를 믿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다.

 

인아가 1년간 경주에 가야 했다. 1년짜리 프로젝트를 맡았고 먼 지방이라 보수는 두 배라고 말했다. 덕훈은 반대했지만, 인아는 빨리 집을 장만해야 한다며 간다고 했다. 1년간 주말부부로 지내면 된다고 했다. 당연히 인아의 말이 맞았지만, 덕훈이 반대한 것은 아내의 유일한 단점 때문이었다. 인아가 가진 모든 장점을 뛰어넘는 유일한 단점, 그것은 ‘커피 한잔’이 남편인 자신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 무조건 인아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인아는 경주로 내려갔고 둘은 주말부부가 되었다.

 

“나는 섹스보다 태클을 더 사랑한다. 태클을 할 때 상대편 선수가 내지르는 비명이 너무 좋다.”

 

설기현과 함께 프리미어 리그 ‘울버햄튼’의 선수로 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최초의 흑인 선수인 ‘폴 인스’가 한 말이다. 

 

그러나 덕훈에겐 태클 따위보다 아내인 인아와의 섹스가 백만 배쯤 더 좋았다. 주말부부는 생각보다 괜찮은 것이었다. 둘은 주말마다 불타올랐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을 때, 덕훈이 행복을 느낄 때마다 그 반대편에서 꿈틀대던 불안감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인아가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인아가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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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당신과 결혼했어. 지금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과의 결혼을 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리고 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전부야.”

 

‘포드’라는 인류학자가 185곳의 인간 사회를 조사했다고 한다. 조사 결과 그 중 겨우 29곳만이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했다. 티베트에도 인도에도 아프리카에도 ‘폴리가미(일처다부)’가 여전히 있다고 했다. 남편에게 다른 남자와 또 결혼하겠다는 미친 여자가 있고 그걸 알면서도 결혼한다는 미친 남자가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덕훈이었다. 덕훈은 아내를 독점할 수 없다면, 반만이라도 갖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피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나만의 방식을 창조하고 싶다.”

 

유로 2000의 우승팀은 프랑스였지만, 최우수 선수는 포르투갈의 ‘피구’였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그 후 세 시즌 동안 바르셀로나는 우승컵을 안지 못했다. 지금 5,000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자신만의 황당무계한 사랑 방식을 창조하려는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덕훈의 마누라 인아이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폴리아모리, 다자간 사랑이라는 건데요. 독점욕이나 질투심을 버리고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한재경, 그놈의 이름이었다. 덕훈은 자기 아내의 샛서방을 경주로 가 만났다. 그를 만나 설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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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같은 유형의 인간들이었다. 빌어먹을 폴리아모리, 폴리아모리는 무슨 얼어 죽을 폴리아모리. 덕훈은 오른쪽 주먹을 날렸고, 그는 피하지 않았다. 나동그라진 그를 보며 덕훈은 카페를 나와 무작정 걸었다. 두 가지 후회가 들었다. 하나는 이러려고 온 것은 아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커피값을 내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이뤄진 아내의 두 집 살림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결혼식은 잘 끝났으며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고......

 

덕훈은 결국 아내의 결혼에 동의했다. 어디 한번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덕훈은 인아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인아는 꼭 그래야만 하느냐며 눈물을 흘렸고 결국 도장을 찍었다. 덕훈이 서류 접수를 망설이고 있는 동안 인아는 여전히 금요일마다 집으로 왔다. 

 

그녀는 이혼이 끝나기 전까지는 여기가 자기 집이고 덕훈은 아직 자기 남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야윈 얼굴과 풀 죽은 태도로 어질러진 집안을 깨끗이 치웠다.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덕훈의 영혼이 외치는 아우성,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반쪽만이라도 가지라는 심장의 떨림이 결국 인아의 결혼에 동의하게 만들었다.

 

카뮈는 이런 말도 남겼다.

  

“골키퍼 시절에 공은 어느 누군가가 오기를 바라는 쪽으로는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것은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니,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봐야 덕훈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인아의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받아들이고 나니 의외로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인아는 여전히 주말마다 내려와 성실하고 예쁘게 아내 역할을 했다. 주말이 지나면 집안은 반짝거렸고 냉장고엔 밑반찬이 가득 찼다. 그리고 장롱 속에는 깨끗하게 다림질되어 개켜진 덕훈의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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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것은 단 하나, 덕훈은 인아를 밤 침대에서 거칠게 다뤘다. 그는 키스도 하지 않았고 전희도 없이 인아의 몸속으로 거세게 돌진했다. 인아가 아프다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정을 잔뜩 실어 손찌검에 가깝게 그녀의 엉덩이를 때렸다. 치사한 복수였다. 사정한 후에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아내는 작아진 내 성기를 입에 물었다. 마치 위로라도 하듯 부드럽게.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언제인지 모르게 스르르 잠들어버렸으니.

 

 

아내의 임신, 아기의 아빠는 누구?

 

주말도 아니었는데, 덕훈이 퇴근해 집에 와보니 인아가 와 있었다. 그리고 거실 탁자 위에는 네 개의 초가 꽂힌 케이크가 있었다. 인아는 흥분해 있었다. 임신이었다. 인아는 5주가 되었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초가 네 개인 이유는 이제 우리 가족이 네 명이 된 것을 뜻한다고 했다. 축하 파티를 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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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이 같이 살 때는 그토록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했던 임신이었다. 인아가 두 번째 남편을 맞고 난 뒤에 임신을 한 것이다. 누구의 아이일까. 확률상 그놈의 아이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놈은 매일 컴퓨터 앞에서 열 시간 이상 전자파를 맞는 놈이니 내 아이일 수도 있다. 덕훈의 머리 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인아의 출산 날, 덕훈과 재경은 병원에서 초조하게 순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훈은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재경에게 담배가 있냐고 묻자 그는 자신도 끊었지만 사오겠다며 쏜살같이 달려가 담배와 라이터를 사왔다. 친절하고 착한 좋은 녀석이다. 그러나 덕훈에게는 여전히 인아의 절반을 뺏어간 나쁜 놈이었다. 더군다나 이 녀석도 바르셀로나 팬이었다. 둘은 오랜만에 피운 담배에 핑도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아이의 탄생을 기다렸다.

 

예쁜 여자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인아는 수척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했다. 덕훈은 두 손으로 몸 전체를 다 안을 정도로 작은 아이를 꼭 껴안아 봤다. 그리고 그놈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재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덕훈에게 재경은 나쁜 놈일 뿐이었다. 인아는 두 명의 남편 앞에서 의연했고 당당했으며 뿌듯해했다. 무엇보다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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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이름은 ‘지원’이라고 인아가 지었다. 뜻을 물었더니 인아는 ‘지단 넘버원’이라고 말하며 지단의 팬인 덕훈을 위해서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는 이뻤다. 그러나 아이가 이쁜 것과는 별도로 덕훈에게는 확인이 필요했다. 이 아이가 ‘이 씨’인지 ‘한 씨’인지는 알아야 했다. 사랑은 사랑이고, 핏줄은 핏줄이었다.

 

“축구는 본능적인 경기입니다. 피부색이 검든 희든 축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프랑스 ‘아트 사커’의 핵 ‘지단’은 알제리 출신이고, ‘티에리 앙리’는 아프리카의 후예이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의 우두머리인 ‘르펜’은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흑인들이 많은 프랑스 대표팀은 진정한 대표팀이 아니라고 했다. 위의 말은, 이때 감독인 ‘에메 자케’가 한 말이다. 그리고 인아의 생각이기도 했다.

 

친자 확인을 하겠다는 덕훈의 말에 인아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인아는 지원이가 그 누구의 아이도 아닌 자신의 아이라고 했다. 누구의 아이인지 확인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동의 없이 친자 확인 따위를 한다면 바로 이혼하겠다고도 했다. 

 

“그런 얘길 지금 꼭 해야 돼? 이제 막 출산한 산모한테 너무 심한 거 아냐? 나는 당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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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는 마법의 눈물을 떨구었고, 덕훈은 백기를 들었다. 사실 미역국 한 사발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인아에게 벌써 해야 할 말은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덕훈이 인아에게 앞으로도 친자 검사 같은 건 안 하겠다고 약속하고 절대로 아이를 구박하는 아빠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비로소 인아는 눈물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덕훈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한국을 떠나자는 아내, 하지만...

 

내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데도 딸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덕훈은 아이 생각에 회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다는 표현은 사실이었다. 아이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인아가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좀 쉬고 싶기도 하고 자신의 친부모에게 아이도 보여 주겠노라는 것이었다. 덕훈은 불안했다. 어쩌면 세 번째 남편으로 서양 놈을 데리고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커피 한잔하실래요?’만 한국에 놓고 가길 바랄 뿐이었다.

 

아내와 지원이가 미국으로 떠나자, 샛서방 그놈이 자꾸 찾아온다고 연락을 했다. 아무리 모질게 거절해도 녀석은 또다시 전화했다. 드디어 녀석의 방문을 허락했다. 녀석이 프랑스에서 한 ‘지단 특집’ 방송을 구했다고 하는데, 그것만큼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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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둘은 나란히 앉아 지단의 영상을 보았다. 이 치밀한 녀석은 덕훈이 영상만 받고 쫓아낼까봐 와인도 한 병 들고 왔다. 둘은 그렇게 모니터 앞에서 지단의 영상을 보며 와인을 홀짝거렸다. 그때 덕훈은 인아도 없는 집에 녀석이 자꾸 오려고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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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갈 데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자기 집으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덕훈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던 건, 덕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인아가 없을 때, 만나서 술 한잔하며 신세타령할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콩가루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대한민국 어디에 있겠는가.

 

인생이 괴로운 이유 하나. 내 고통을 아는 자는 친구가 아니라 적이다.

 

드디어 인아가 지원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지원이의 돌잔치가 진행되었다. 인아는 두 집안의 시부모들을 속여 가며 하루에 두 곳에서 돌잔치를 진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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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가 끝나고 인아는 완전히 지쳐 버렸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했다. 그것은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가는 것이었다. 인아는 네 가족이 뉴질랜드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 그것이 가족이라고 했다. 

 

덕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말속에 그놈이 포함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인아의 설득은 꾸준했다. 그녀는 덕훈의 몸에 바싹 붙어서 코맹맹이 소리로 같이 살자고 졸라댔다. 이층집을 구해서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지원이를 위해서도 맘 편히 그렇게 살자는 것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인아는 덕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더니 덕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인아의 입술이 덕훈의 눈꺼풀에 닿았다. 덕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인아는 그 감긴 두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덕훈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댔다. 살을 맞대고 여러 해를 살았지만, 뺨을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덕훈은 인아의 뺨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때, 인아는 또 한 번 다 같이 함께 살자고 속삭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

 

1990년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멘티스트, 아르헨티나의 ‘바티스투타’가 한 말이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법이다. 이제 덕훈은 인아와 지원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놈, 그놈은 2층에 처박아 놓으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밥도 따로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덕훈은 인아의 설득에 넘어갔다. 뉴질랜드로 가기로 했다.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올라섰다. 꿈은 또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까.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인아와 지원이를 데리고 셋이서 보러 가겠노라는 꿈이 덕훈에게 생겼다. 그때까지도 그놈을 떼어내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넷이 함께 독일로 가는 달갑지 않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축구는 계속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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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인생에는 몇 가지 색깔이 있을까

 

누군가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을 묻는다면 그 대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본능’일 것입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식욕과 종족 보존을 위한 성욕,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그것들을 쟁취한 경쟁자를 향한 질투라는 동물 고유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특히 질투는 그 대상이 성적 경쟁자일 때, 어떤 경우보다 격렬하게 불타오릅니다. 이 질투는 때로는 살인까지도 자행하게 합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남녀 간 애정 속에서 생겨난 질투가 원인이 된 비극이나 범죄의 예를 들자면 한없이 나올 것입니다. 

 

누군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묻는다면 ‘의지’라는 대답이 흔하게 나올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앞서 말한 본능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미생물부터 고등 동물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종족 보존의 본능까지도 자신의 의지로 조절하는, 어찌 보면 대단한 존재입니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 장 폴 사르트르 -

 

인간이 의지의 존재임을 표현한 말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본질이 존재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대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생명에 부여된 본질에 충실한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원래 살아가야 하는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만이 존재가 본질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의지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특히 현대인에게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사랑, 결혼, 출산, 육아, 자신의 죽음까지도 이 모든 것들이 현대인에게는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혼율이 높은 것,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는 것, 아예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 것 등이 모두 이 때문입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매우 유쾌한 문체로 쓰인 소설이었습니다. 곳곳에 은밀한 유머가 숨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읽는 내내 불쾌했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덕훈이 바보 같았고, 인아는 미웠으며 덕훈과 인아의 사랑 방식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발칙한 도발’이라고 했고 ‘놀이 같은 사랑 이야기’라 했으나 그와 비례해서 많이 불편했던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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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뭔 개소리야~!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따지고 보면 ‘아내가 결혼’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타고난 성(性)이라는 자연의 법칙까지도 선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동성 결혼’마저도 선택 가능한 시대입니다. 그냥 여자인 ‘인아’의 자리에 남자인 ‘덕훈’을 넣어보면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일부다처는 인류 역사에서 권장되기까지 했으며 아직까지도 인류 문화 여기저기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인생과 그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랑에는 몇 가지 색깔이 있을까요.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것입니다. 무한대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인생을 선택하면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색깔로 그것을 칠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빨간색으로 누군가는 노란색으로 또 누군가는 보라색으로. 

 

각자가 알아서 자신이 원하는 색깔의 사랑을 하고 인생을 살면 되는 일이지만, 한가지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보다 넓게 허용할수록 남과는 눈에 띄게 다른 선택을 할수록 그에 따른 책임과 고통이 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르트르의 의견을 인용하겠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어느 길을 가거나 가지 않거나 그건 자유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원하지 않는 선택이 주는 ‘편안한 오솔길’과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 주는 ‘고통스러운 돌길’ 중 어느 길을 걸을 것인지는 오직 자신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돌아보았을 때, 그 결과가 후회를 가져올지, 만족을 가져올지 역시 오직 자기 자신의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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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와 덕훈처럼 힘든 선택을 한 사람들, 그래서 힘든 사랑을 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 모두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두려움이 아닌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의 조건으로 삼은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남의 시선과 색깔이 아닌 자신만의 색깔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스물일곱 번째 인생을 소개하며 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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