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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는 아세안 각국이 현재 미·중 사이에서 어떤 상황이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이번 기사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다룬다. 이전 기사를 보신 분들은 기사를 쭉쭉 내려가 캄보디아 부분부터 보시면 되겠다. 

 

이전 편을 못 보신 분들은 1편부터 차근차근 보시는 걸 추천드리지만,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시간 없으실 수 있겠다. 아래 요약 내용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시면 된다. 나중에 1, 2, 3편도 읽어보시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을 통해 국제 정세를 느끼며, 좀 더 균형 있고 폭넓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 상황과 동남아시아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중국이 급격히 성장하며 어느덧 세계 2위 패권국이 되었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팍스 아메키라나’ 시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미국의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2018년 중국을 향해 대규모 관세를 때리며 패권 전쟁의 트리거를 당겼다. 이에 질세라 중국도 똑같은 수준의 관세 보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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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패권국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갔다. 세계사에 (거의) 유례없었던 30여 년 ‘평화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이 타이밍에 러시아가 결정적 펀치를 날렸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원조 서방 사회인 유럽의 바로 앞에서 1년이 다 되도록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다시금 도래한 어지러운 시대다. 지난 몇 년간 국제 정세는 하루가 멀다하고 가파르게 변했다. ‘신냉전(러시아는 열전 중이지만 아직 지엽적이기에)’이라 불리는 이 미·중(+러시아) 패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은 이 패권 세력으로부터 “나의 동료가 돼라”며 강요받고 있다.

 

본 연재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도 자세히 모르지만) 이미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한 아세안(동남아시아)은 어떤 국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디벼본다. 국제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미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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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현재 이 10개국이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을 이루고 있다. 각 국가를 디벼보기 전, 아세안의 모든 국가가 지키는 원칙을 알아보고 가는 게 좋겠다. 아세안의 두 가지 기본 원칙만 간단히 짚고, 본 내용으로 넘어가겠다(가능하면 지난 편부터 봐주시는 게 가장 좋다). 

 

1. 아세안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뭐든지 아세안이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사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어야 한다. 이런 아세안의 방식을 ‘아세안 웨이(ASEAN WAY)’라고 한다. 

 

2. 외교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헤쳐 나갈 때, 항상 아세안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원칙이 ‘아세안 중심성’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들어가 보자. 

 

 

미·중 사이 아세안의 포지션

 

8. 캄보디아

 

캄보디아.jpg

수도는 ‘프놈펜’

 

Q : 미·중 사이 캄보디아의 포지션은?

 

안보며 경제 모두 완전한 친중이다. 중국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현재 캄보디아의 총리이자 독재자인 훈센 때문이다. 지금의 캄보디아는 “훈센의, 훈센을 위한, 훈센에 의한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훈센이 모든 것을 쥐고 있다. 그가 친중 노선을 타며, 캄보디아 전체가 중국에 종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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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센 (현) 캄보디아 총리

출처-<AFP>

 

훈센은 자신의 권력 유지 및 강화를 위한 뒷배로 중국을 택하며, 중국이 내민 투자(사실상 빚)와 원조 등을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그 덕분(?)에 20세기 후반 계속된 내전과 혼란한 정치로 인해, 경제 성장은 꿈도 못 꾸던 캄보디아의 국민소득은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캄보디아 쥐디피피피.PNG

캄보디아의 1인당 GDP 추이

출처-<The World Bank>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에 완전히 장악된 국가는 캄보디아뿐만 아니다. 라오스와 미얀마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선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국가인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동남아로 진출하기에 가장 쉬울 뿐 아니라, 동남아를 통해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제일 쉬운 방법이기도 하니 말이다.

 

역시나 중국의 일대일로도 추진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편에서 말했던 중국 남부(운남성)에서 라오스로 이어지는 철도(1년 전 개통)가 태국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연결되도록 건설 중이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잇는 철도도 마찬가지로 계획·건설 중이다. 

 

동남아 철도 출처명보.png

중국의 범아시아 고속철도 노선 계획

쿤밍은 운남성 성도다

출처-<명보>

 

이 외에도 캄보디아 내 도로, 다리, 수로, 보건, 교육 등 각종 사회 인프라에 중국의 손이 안 미친 곳이 없다. 대부분이 투자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빚을 진 것이지만, 캄보디아는 갚을 능력이 안 된다. 중국도 이를 안다. 중국도 처음부터 되돌려 받을 계산을 하진 않았을 거다. 캄보디아를 종속시킴으로써 더 큰 걸 가질 수 있으니까.    

 

Q : 캄보디아에 중국의 비밀 해군 기지 건설? 미·중 갈등 고조?  

 

올해 갑자기 캄보디아의 해군기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레암 해군기지'라는 곳이다. 캄보디아는 현재 해당 기지를 확장 공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공사에는 중국과 캄보디아 사이 비밀 계약이 있다고 한다. 중국이 기지의 확장 공사를 지원하는 대신 비밀리에 기지 바로 북쪽에 중국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하며,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공사 착공식은 올해(2022년) 여름에 했다. 지금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워싱턴포스트.PNG

제목: 서방 관리들은 중국이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고 했다

출처-<The Washington Post> 링크

 

레암 해군기지.PNG

 

캄보디아와 중국은 이를 적극 부인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레암 해군기지 북쪽에 중국의 비밀 해군기지는 건설되지 않는다. 공사가 완료되면, 중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접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해명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은 믿지 않는다. 여러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복수의 서방 언론이 들이미는 증거도 그렇고, 미국의 첩보에 의해서도 그렇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 의하면, 양국 정부는 레암 해군기지에서 중국군의 존재를 애써 감추기 위해 중국군은 기지 내에서 사복을 입거나 캄보디아군과 비슷한 군복을 착용한다고 한다. 또한 중국군만 접근하는 지역이 있다고 했다. 계속해서 나오는 정황들은 캄보디아와 중국의 말을 점점 믿을 수 없게 만든다. 

 

위성사진.PNG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레암 해군기지’ 위성사진

사진의 설명으론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1. 빨간 부분은 중국군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 A라고 표시된 곳에는

중국군 이동 위성 통신 차량인 것 같은 물체가 2대 보인다 

 

미국은,

 

“계속 관련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할 거다.”

 

“해군기지 건설 후, 복수의 국가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한댔다. 그 말 지켜야 할 거다.”

 

라며 캄보디아를 압박하고 있다.

 

미국 캄보디아 압박.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해군기지 공사가 끝나고, 중국이 이를 기지화한다면, 중국은 말라카 해협을 통해 인도양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확실한 전략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 작전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원유수송로.jpg

중국의 원유 수송로

 

캄보디아에 건설 중인 해군 기지는 중국의 두 번째 해외 해군기지다. 인도·태평양에선 첫 해외기지지만, 중국은 이미 동아프리카 국가 ‘지부티’에 해군기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반드시 부딪치는 전략적 거점 지역이 인도·태평양인만큼, 캄보디아의 바다에 중국이 해군기지를 확보하는 건 지부티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미·중 충돌이 기다리는 문제다.

 

Q : 중국이 확보한 첫 번째 해외 군사기지? 그리고 또 하나의 아프리카 군사기지?

 

중국의 첫 번째 해외 군사기지가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다고 했다. 지부티는 수에즈 운하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 정권이 안정적이다. 23년간 독재 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은 지부티에 많은 투자를 했고,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지부티 위치위치.PNG

지부티 위치

 

지부티 중국기지.PNG

빨간색 부분이 지부티에 건설된 중국 군사기지의 위치다.

그런데 지부티에는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미국 군사기지인 르모니에 기지가 있다.

그리고 중국 기지와 약 10k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다.

지부티가 미·중의 새로운 각축장이 되고 있다.

 

중국은 지부티에 상당한 투자를 하며 지부티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고 있다. 지부티를 군사 거점뿐 아니라,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뻗치기 위한 경제거점으로도 활용하려는 것이다. 일대일로의 중요 포인트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이미 지부티에서 에티오피아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고, 지부티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동부와 아라비아반도의 예멘을 잇는 인터넷 통신망도 연결하고 있다(출처 링크)

 

(중국이 해외에 투자 사업을 벌일 때는 주로 자국민을 데려가 사업을 진행한다. 지부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부티 내에서 중국의 투자가 과연 지부티 경제에 정말 도움이 되었냐는 여론도 존재한다)

 

중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적도기니에 아프리카 두 번째 군사기지 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중국은 아프리카 대륙 동서에 모두 군사기지를 확보하게 된다. 미국 입장에선 대서양 건너편으로 중국의 군사기지가 있는 굉장히 껄끄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부산일보 적도기니 사진.PNG

적도기니 위치

출처-<부산일보> 

 

(아프리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옆길로 새보자. 최근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미·중 패권 경쟁' 상황을 잠깐 살펴보겠다. 

 

중국은 2000년에 중국아프리카협력포럼(FOCAC)을 출범시키며,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은 아프리카에 어마하게 공을 들였다. 2000-2012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중국이 아프리카에 투자한 돈(FDI)은 OECD 모든 회원국이 아프리카에 투자·지원한 돈을 합친 것보다 약 5배나 많을 정도였다. 그 기간 동안 중국 정부가 아프리카에 공식 원조한 프로젝트만 1,666건에 달하며, 창출한 일자리만 10만 개가 넘는다. 이후로도 투자는 계속됐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아프리카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거지 소굴'이라며 비하 발언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었다. 아프리카의 중요성이 급상승했다. 세계적으로 자원 확보의 중요성이 급증한 덕분이었다. 아프리카에는 풍부한 자원이 넘쳐나니까. 그 아프리카에는 이미 중국이 막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상황은 또 바뀌었다. 최근 코로나와 미국의 압박 등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 사정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 규모를 줄이고 있다. 미국은 타이밍을 잡았다. 지금이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근 미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을 쏟고 있다) 

 

Q : 독재자 훈센은 38년간 어떻게 캄보디아를 장악했나?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센은 1985년에 처음 총리가 되었다. 그 후, 약 4개월 정도 기간만 빼고 지금까지 총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약 38년 세월이다. 지금의 ‘캄보디아 왕국’이 1993년에 세워졌으니, 그 이전부터 총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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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훈센

 

훈센이 캄보디아 역사 어디쯤부터 총리를 하고 있는 건지 말하기 위해선, 캄보디아 현대사의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간단하게만, 후딱 짚어보겠다.

 

1. 캄보디아 왕국 (1953-1970 / 비동맹·중립, 미·소 사이 서커스 외교)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 들어선 첫 국가 

 

캄보디아 왕국 초대왕 시아누트.PNG

캄보디아 왕국 초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

 

2. 크메르공화국 (1970-1975 / 친미) 

 

론 놀 장군이 쿠데타로 국왕 쫓아내고 친미 정권 세움

 

론 놀.PNG

론 놀

 

3. 민주캄푸치아 (1975-1979 / 친중)

 

론 놀의 폭정에 들고 일어난 크메르 루주(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당 자체를 지칭하기도 함)가 론 놀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며 세움. 그 유명한 폴 포트가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였음. 캄보디아가 ‘킬링필드’가 된 시기 

 

폴 포트.PNG

1985년 무렵의 폴 포트

출처-<UPI>

 

4. 캄푸치아인민공화국 (1979-1989 / 친베트남) 

 

폴 포트가 깝치다가 베트남이 침공해서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운 괴뢰 정권 

 

5. 캄보디아국 (1989-1993 / UN이 관리)

 

베트남이 물러가며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이 붕괴. 그 후 세워진 UN 관리하에 있던 과도기적 정부 

 

6. 캄보디아 왕국 (1993-현재)

 

지금의 캄보디아.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훈센에 의한 독재 상태의 국가. 형식적으로는 선거도 이뤄지는 등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재)권위주의 체제의 국가. 많은 이들이 중국, 베트남, 라오스처럼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로 알고 있지만, 현재의 캄보디아 왕국은 독재정권이 지배하고 있을 뿐 시스템적으로는 민주주의, 다당제 체제 국가임. 경제는 자본주의.  

 

1990년대 초 시아누트 훈센.jpg

노로돔 시아누크는 다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사진은 1990년대 초 시아누크와 훈센이다.

 

훈센은 여기서 캄푸치아인민공화국(4번) 시절부터 지금까지 총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 같은 권력이 있던 건 아니다. 게다가 두 번의 권력 위기도 있었다.

 

첫 번째 위기는, 현재의 캄보디아 왕국이 세워진 1993년에 있었다. UN의 중재 하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반복되던 내전이 종식되고, 캄보디아의 첫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에서 캄보디아 왕국 초대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의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가 이끄는 훈신펙(FUNCINPEC)이 총 120개 의석 중 58개를 차지하며 1당이 되었다.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인민당(Cambodia People’s Party, 이하 인민당)은 51석을 차지해 2위에 그쳤다. 

 

이때가 훈센이 총리 자리에서 내려왔던 유일한 시기다. 그러나 훈센은 갖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4개월 뒤, 라나리드와 연정 구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공동 총리라는 사상 초유의 시스템을 도입하여 라나리드와 함께 총리직을 수행했다. 허나, 두 사람의 불안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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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공동 총리 당시 라나리드와 훈센

 

1998년 총선을 1년 앞두고 훈센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라나리드를 포함, 그의 세력을 축출했다. 총선에선 당연히 인민당이 압승했다. 훈센은 단독 총리가 되었고, 남아있는 라니리드 세력을 하나씩 철저하게 제거했다. 경쟁 세력을 말끔히 제거한 훈센은 5년 뒤 열린 총선(2003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그때부터 지금 같은 권력이 구축되었다. 

  

하지만 이런 훈센 앞에 다신 한 번 강력한 상대가 나타났다. 두 번째 위기의 순간이었다. 2012년 캄보디아 구국당(Cambodia National Rescue Party, 이하 구국당)이라는 야당이 등장하며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돌풍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모든 조건에서 유리했던 훈센의 ‘인민당’은 2013년 총선에서 구국당을 상대로 간신히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훈센은 위협을 느꼈다. 위협에 대한 대답은 구국당 탄압이었다. 하지만 각종 탄압에도 불구하고, 구국당은 2017년 열린 지방선거에서도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득표율도 인민당 51%, 구국당 44%로 격차가 얼마 안 났다(출처 링크). 사실상 구국당의 승리로 볼 수 있는 선거였다. 

 

이제 1년 뒤가 총선이었다. 불안감이 고조된 훈센은 더욱 강도 높여 정적들을 탄압했다. 구국당 주요 인사들을 각종 부패 혐의로 걸어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도 탄압하거나 폐간했다. 훈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캄보디아 구국당’을 해산하기까지에 이르렀다(2017년 11월). 

 

캄보디아 대법원은 ‘캄보디아 구국당’이 외부 세력과 결탁해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정부 주장을 받아들이며 해산을 결정했다. 구국당 소속 정치인 118명에 대한 정치활동도 5년간 금지시키며 곧 열리는 총선 출마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훈센의 인민당은 경쟁력 있는 야당 하나 없이 2018년 총선을 치렀다. 그 결과, 캄보디아 국회 의석 전원을 인민당이 싹쓸이했다.

 

의석 싹쓸이.PNG

출처-<한겨레> 링크

 

독자들 중 이쯤에서 궁금증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 국명이 ‘캄보디아 왕국’이라고? 정치가 이 지경인데 왕은 뭐하고 있나? 

 

Q : 꼭두각시 국왕을 앉혀놓은 훈센? 

 

캄보디아에서 국왕은 아무런 실권이 없다. 브루나이 술탄(왕)처럼 전제왕권을 갖고 있지도 않고, 태국의 국왕처럼 입헌군주제 체제에서 상당한 권력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 외 입헌군주제 국가의 국왕과 비교해도 권력이 없다. 직설적으로 말해, 직책만 국왕인 허울 좋은 꼭두각시라 할 수 있다. 현재 국왕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것도 훈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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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시아누크(전 국왕)’와 아들 ‘시아모니(현재 국왕)’ 

출처-<시사IN>

 

현 국왕 '노로돔 시아모니'는 원래 평범한 예술가(특히, 발레를 잘했었다고 한다)로 활동하며 프랑스에서 20년 이상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노로돔 시아누크의 건강이 악화하자, 2004년 프랑스에 살고 있던 그를 훈센이 데려와 국왕직을 이어받게 했다. 시아모니는 시아누크의 6번째 왕자였다. 그 위에 형들이 있었음에도, 훈센은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평범한 예술가로 살며 캄보디아에 아무런 정치 기반이 없는 시아모니를 국왕으로 앉혀놓았다. 그래서 지금 국왕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허수아비 역할만 할 뿐, 할 수 있는 게 없다.

 

Q : 훈센 이후의 캄보디아, 그때의 외교 노선?

 

훈센에게 갑자기 병이 오거나, 사망해도 캄보디아의 상황이 크게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 훈센의 아들 ‘훈 마넷’이 훈센의 뒤를 이어 그대로 캄보디아를 이어 나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훈 마넷은 현재 캄보디아군 부사령관으로 있다. 사령관은 법적으로 국왕이다. 전술했듯 아무런 권력 없는 국왕이기 때문에, 군에 관한 모든 권력은 훈 마넷에게 있다. 훈센은 몇 년 전에 이미 훈 마넷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이변이 없는 한, 캄보디아 정치 상황이 바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중국과의 관계가 바뀔 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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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마넷

 

9. 라오스

 

라오스.jpg

수도는 ‘비엔티안

 

미·중 사이 라오스의 포지션을 살펴보기 전에, 현재 라오스의 건국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야 미·중 사이 라오스의 포지션이 더욱 잘 이해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최대한 쉽고 재밌게 다뤄보겠다.

 

Q :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 지금의 라오스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

 

타이계 일파인 라오족(68%)을 주종족으로 이뤄진 동남아시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이 국가는 중동의 몇 국가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다. 물론 란쌍 왕국이라고 현재 라오스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국가가 있었지만, 18세기 초에 멸망한 후 삼국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까지 지금의 라오스 영토에 통일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금 라오스를 통일시키며 하나의 국가로 탄생시킨 범인(?)은 프랑스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삼던 시절,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 동쪽을 노렸다. 1860년대에 들어서며 프랑스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1864년 캄보디아를 집어삼켰고, 1884년엔 베트남마저 집어삼켰다.

 

프랑스는 만족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목표는 중국이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그때 프랑스에게 캄보디아, 베트남 지역에서 보다 쉽게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수로를 이용한 길이었다. 그 길이 동남아시아의 젖줄 ‘메콩강’이었다. 그러나 메콩강을 차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메콩강 줄기.PNG

출처-<경향신문>

 

동남아 식민지.png

출처-<Diverse+Asia> 

 

당시 메콩강 주요 줄기는 태국 영토였다. 태국을 집어삼킬 순 없었다. 인도부터 시작해 인도차이나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미얀마, 말레이시아를 차지한 영국과 ‘태국은 건드리지 않기’로 협약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인도차이나반도 동쪽을 장악한 프랑스, 서쪽을 장악한 영국이 충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가운데 중립 지역을 두려 한 것이다. 

 

프랑스는 짱구를 굴렸다. 결국 프랑스는 태국을 점령하지 않으면서 메콩강을 장악할 방안을 고안해냈다. 태국의 땅을 빼앗는 것이다.

 

1893년 프랑스는 방콕 앞바다에 포함을 갖다 대고 태국을 협박했다. 태국은 굴복했고, 메콩강 동쪽 영토를 프랑스에 뺏겼다. 이것이 ‘시암조약’이다. 프랑스는 라오스 북쪽 지역에 있던 루앙프라방 왕국을 손 안에 두었고, 태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이 왕국과 통합해 1899년 통일 국가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라오스’다. 프랑스는 통일된 루앙프라방 왕국에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는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렇게 프랑스는 라오스 영토 전역을 완벽하게 식민지로 삼았다.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나고 프랑스가 물러가며 라오스도 독립을 맞이했다. 캄보디아와 같은 1953년이었다. 독립된 라오스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며 왕국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시대 제3세계 국가들이 그랬듯, 우익, 좌익이 나뉘며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라오스의 경우는 왕실파, 우익, 좌익 이렇게 셋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던 중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려왔다. 1964년 미국이 통킹만을 공격하며 본격적으로 국제 전쟁이 된 베트남 전쟁에 라오스도 전쟁터가 된 것이다. 라오스에서는 왕립정부군(왕실파+우익)과 좌익의 내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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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라오스 내전 외에 북베트남군, 남베트남군, 미군 등의

전투도 라오스 영토에서도 벌어졌다.

출처-<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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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출처-<PBS>

 

1970년대 들어서며 전쟁의 양상은, 좌익(파테트 라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베트남에서 북베트남이 선전하며, 라오스 좌익에 대한 지원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라오스 좌익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1973년 전쟁의 흐름을 매듭짓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파리협정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규모는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라오스 내에 미치는 영향도 적어졌음은 물론이다. 라오스의 왕립정부군과 좌익은 서로 장악한 영토를 인정하고 전쟁을 멈추자고 합의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1975년이 되자,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공산주의 국가로 통일했다. 캄보디아에는 폴 포트의 공산 정권(크메르 루주)이 들어섰다. 대세가 확실히 기울어진 라오스의 운명도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해 12월, 라오스 좌익들은 왕국을 폐지하고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 국가가 현재의 라오스다. 

 

(베트남 전쟁은 단순히 베트남에서만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이 세 국가의 영토에 걸쳐 일어난 이념 전쟁이었다. 베트남이 통일된 해, 캄보디아가 공산국가로 된 해, 라오스가 공산국가가 된 해 모두 1975년이다. 각자의 전쟁이 아니라 다 연결된 전쟁이었다)     

 

Q : 라오스의 국가 체제? 라오스 건국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라오스는 중국과 베트남처럼 공산당인 ‘라오인민혁명당’이 지배하는 일당독재체제다. 경제체제도 ‘시장사회주의’로 중국, 베트남과 같다. 하지만 중국이 1978년에, 베트남이 1986년에 개혁·개방을 실시하며 시장사회주의로 바꾼 것에 비해, 라오스는 2003년으로 굉장히 늦게 경제체제 전환을 했다.      

 

(라오스 권력의 핵심은 라오인민혁명당 정치국이다. 이 정치국원들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모든 주요 직을 동시에 몇 개씩 차지한다. 대통령도 정치국에서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라오스에선 전통적으로 라오인민혁명당의 서기장이 되면, 당에서 서기장을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으로도 선출한다. 그래서 당서기장은 곧 대통령이다. 임기는 5년이다. 보통 재임하여 10년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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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초대 대통령 ‘수파누봉’

 

라오스 건국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왕국이 폐지되고 세워진 현재 라오스의 초대 대통령이 왕족이던 ‘수파누봉’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라오스 왕국은 독립을 맞이하고 왕실파, 우익, 좌익으로 세력이 나뉘었다고 했다. 우익 지도자는 라오스 왕국 마지막 황태자 분콩의 아들 ‘수바나 푸마’였고, 좌익의 지도자는 분콩의 아들이자 푸마의 이복동생인 ‘수파누봉’이었다. 이 수파누봉이 왕국을 무너뜨리고, 현 라오스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Q : 미·중 사이 라오스의 포지션은?

 

캄보디아와 같다. 안보며 경제, 모두 완전한 친중이다. 중국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정도를 따지자면, 캄보디아보다 더 그렇다. 캄보디아가 훈센의 이익을 위해 친중 노선을 타게 된 것과 달리, 지금의 라오스는 태생부터 중국 공산당과 친밀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붙어있는 데다가 같은 공산 국가이니, 건국될 때와 이후로도 중국 지원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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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범아시아 고속철도 노선 계획

쿤밍은 운남성 성도다

출처-<명보>

 

역시 일대일로의 거점 중 하나이다. 많은 공사가 진행되었다. 중국-라오스 철도는 1년 전에 개통되었다. 태동부터 친중인 데다 중국과 붙어있고 가난하기까지 하니 일대일로 진행이 아주 수월했다.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철도, 도로 등 각종 인프라를 중국이 건설해줬다. 역시 다 빚이긴 하나, 돈을 갚을 능력은 안 된다.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아직 UN이 지정한 최빈국 중 하나다. 갚을 능력이 안 되니 계속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중국도 빚을 갚지 못할 것이라는 건 안다. 전술했듯 상관하지 않는다. 라오스가 종속됨으로 인해 더 큰 걸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시진핑과 라오스 대통령.PNG

라오스 대통령 분냥 보라칫과 시진핑 

 

Q : 아세안 국가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중국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완전한 친중인 캄보디아, 라오스의 국민들은 어떨까?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윤진표 교수가 그들을 대상으로 2021년 관련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조사는 19-29세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윤 교수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도 친중, 국민도 친중”

 

그들에겐 대체로 친중국적 정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특이한 점도 있었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한류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반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는 관심도가 낮았다. 

 

한국 호감도.PNG

윤 교수의 조사 결과 그래프

미얀마는 조사에서 제외.

다른 국가에 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유난히 낮은 걸 볼 수 있다.

출처-<한-아세안 센터> 링크

 

윤 교수의 결론으로는, 친중적인 국가 분위기와 SNS 접근성이 떨어진 탓이었다. 절대적 기준이든, 상대적 기준이든 동남아 내에서도 가난한 편이기에 타국에 비해 SNS를 이용할 기회가 현저히 떨어진다.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매체는 방송, 신문, 정부 선전물 등 레거시 매체다. 두 국가의 정부가 권위주의 정부인만큼, 레거시 매체는 정부에 장악되어 있다. 매체의 내용물은 당연히 친중적인 요소가 많다. 국민들은 친중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 편(링크) – 미얀마, 러시아와 아세안 각국의 관계>

 

 

※윤진표 교수는 동남아 전문가로서 쉽고 재밌게 동남아 이야기를 푸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동남아를 더욱 알고 싶은 독자들께  소개한다. 채널명은 <윤진표교수의 아세안 이야기(링크)>다.

 

그리고 기사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윤 교수의 조사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아세안 센터 → 자료실  발간자료'로 들어가 '2021 한-아세안 청년 상호 인식 조사 보고서 PDF 파일'을 다운로드하면 된다.

 

 

감사의 말

 

본 기사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취재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김동엽 교수(부산외대), 김형종 교수(연세대 미래캠퍼스), 김형준 교수(강원대), 윤진표 교수(성신여대), 이재현 박사(아산정책연구소), 한유석 박사(전북대), 그 외 많은 분들(국제 관계 관련 분야에 계시기에 본의 아니게 불이익을 받으실 수 있어 자신을 밝히길 원치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께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도와주셨습니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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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