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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는 아세안 각국이 현재 미·중 사이에서 어떤 상황이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이번 기사는 ‘미얀마’를 다룬다. 이와 함께 아세안 각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도 간략하게 짚어본다. 이전 기사를 보신 분들은 기사를 쭉쭉 내려가 미얀마 부분부터 보시면 되겠다. 

 

이전 편을 못 보신 분들은 1편부터 차근차근 보시는 걸 추천드리지만,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시간 없으실 수 있겠다. 아래 요약 내용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시면 된다. 나중에 1, 2, 3, 4편도 읽어보시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을 통해 국제 정세를 느끼며, 좀 더 균형 있고 폭넓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 상황과 동남아시아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중국이 급격히 성장하며 어느덧 세계 2위 패권국이 되었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팍스 아메키라나’ 시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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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을 느낀 미국의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2018년 중국을 향해 대규모 관세를 때리며 패권 전쟁의 트리거를 당겼다. 이에 질세라 중국도 똑같은 수준의 관세 보복을 했다.

 

두 패권국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갔다. 세계사에 (거의) 유례없었던 30여 년 ‘평화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이 타이밍에 러시아가 결정적 펀치를 날렸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원조 서방 사회인 유럽의 바로 앞에서 1년이 다 되도록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다시금 도래한 어지러운 시대다. 지난 몇 년간 국제 정세는 하루가 멀다하고 가파르게 변했다. ‘신냉전(러시아는 열전 중이지만 아직 지엽적이기에)’이라 불리는 이 미·중(+러시아) 패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은 이 패권 세력으로부터 “나의 동료가 돼라”며 강요받고 있다.

 

본 연재는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도 자세히 모르지만) 이미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한 아세안(동남아시아)은 어떤 국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디벼본다. 국제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미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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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현재 이 10개국이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을 이루고 있다. 각 국가를 디벼보기 전, 아세안의 모든 국가가 지키는 원칙을 알아보고 가는 게 좋겠다. 아세안의 두 가지 기본 원칙만 간단히 짚고, 본 내용으로 넘어가겠다(가능하면 지난 편부터 봐주시는 게 가장 좋다). 

 

1. 아세안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뭐든지 아세안이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사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어야 한다. 이런 아세안의 방식을 ‘아세안 웨이(ASEAN WAY)’라고 한다. 

 

2. 외교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헤쳐 나갈 때, 항상 아세안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원칙이 ‘아세안 중심성’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미얀마와 러시아에 대한 각국 입장을 디벼보자. 

 

 

미·중 사이 아세안의 포지션

 

10.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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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는 ‘네피도’

 

Q : 미·중 사이 미얀마의 포지션은? 중국에 종속된 계기는?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명실상부 친중 국가다. 미얀마가 친중 국가가 된 데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군부 정권과 관련이 깊다. 이를 말하기 위해선, 미얀마와 중국의 관계를 중심으로 미얀마 역사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미얀마는 영국 식민지였다가 1948년 독립했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하며 그다음 해인 1949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탄생했다. 당시 미얀마는 공산국가가 아니었음에도 곧바로 중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50년엔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두 국가는 걸음마를 뗄 당시부터 사이가 괜찮았다.

 

하지만 당시 미얀마는 친중 국가가 아니었다. ‘당시 미얀마는 공산국가가 아니었다’고 전술했듯, 독립 후 미얀마는 철저한 비동맹 중립노선을 지향했다. 미얀마 독립 세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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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미얀마의 독립 과정에서 국부 ‘아웅 산’ 장군을 필두로 한 독립 세력은 온전한 미얀마(당시 이름 ‘버마 연방’)를 유지하면서 독립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이념 차이로 분열되면 안 될 일이었다. 당시 세계는 이념이 모든 걸 휩쓸던 시대다. 대표적으로 한반도와 베트남이 그 피해국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미얀마는 중국과 한배를 타거나 종속된 친중 국가가 아니라 그냥 “사이 좋은 관계였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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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직후 당시 수도 랑군(양곤)에서

미얀마군(왼)과 네 윈(오)

 

1960년대에 들어서며 미얀마 역사를 뒤집어 놓을 사건이 벌어졌다. 1962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가 정권을 잡았다. 군부의 지도자였던 네 윈 장군은 폐쇄주의와 자급자족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버마식 사회주의’를 시행했다. 사회주의라 해서 소련 혹은 중국과 같은 공산권 국가들과 한배를 타게 된 건 아니었다.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구하지만, 폐쇄주의를 내건 만큼 외교 노선은 여전히 ‘비동맹 중립노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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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반동분자로 몰린 인사들이 트럭에 태워진 채

군중 시위에 끌려다니고 있다

 

몇 년 뒤엔 중국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1966년). 이름하야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이 터진 중국의 외교정책은 ‘공산혁명의 수출’이었다. 미얀마는 중국과 영토가 붙어있다. 결국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국경을 넘어 미얀마까지 들어왔다. 미얀마인들은 중국식 강경 공산주의에 반감을 느꼈다. 반중 폭동까지 발생했다.  

 

반중 폭동이 터지며, 미얀마와 중국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이후 중국(중국공산당)은 미얀마 소수민족 공산 반군(버마공산당, BCP)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며 미얀마 중앙정부에 대항하게 했다. 나중에 공산반군은 진압되었지만,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76년이 되어서야 문화대혁명이 끝나며 양국 관계가 회복되었다. 새롭게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덩샤오핑은 첫 해외 방문지로 미얀마를 택하며 관계 회복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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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시간이 흘러, 이번엔 다시 미얀마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1988년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 미얀마 전역에서 일어났다. 이로 인해, 62년부터 권력을 이어온 네 윈이 권좌에서 내려오는 등 군부 정권은 혼란에 빠졌다. 군부 내 일부 세력은 이런 정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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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민주 항쟁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냉전 체제가 종결되었다(1991년). 미국과 유럽은 반민주적이며, 반인권적인 신군부에 비판 입장을 냈다. 1993년엔 경제제재를 포함한 포괄적 제재를 실시했다.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던 신군부는 이를 돌파할 방법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이때부터가 미얀마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의지하게 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군부는 비자유주의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등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수 있을 만한 국가들과 느슨한 연대를 도모하기도 했다. 

 

미얀마는 이때의 신군부가 지금까지도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신군부와 중국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다. 그러는 사이,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영향력도 급증했다. 이와 비례해서 미얀마는 중국에 종속되어갔다. 

 

Q : 미얀마에서 현재 중국의 영향력은? 미얀마와 가까워지려 한 미국과 더 멀어진 이유?

 

이제 미얀마는 중국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중국의 영향력이 국가 곳곳에 뻗어있다. 미얀마 내 각종 인프라도 중국이 건설했다. 미얀마 자체에 도움 되는 인프라도 있지만, 중국을 위한 인프라도 상당하다. 일대일로 정책의 일환이다.

 

대표적으로 미얀마의 항구부터 중국 남부(운남성)까지 이어지는 원유와 가스 파이프 라인이 있다. 2017년부터 개통되어 운영 중이다. 중국은 이 파이프 라인을 통해 미얀마 해안에서 채굴된 원유와 천연가스를 직접 가져간다(물론 일부 소수량은 미얀마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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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중국 파이프 라인

 

이 파이프 라인은 미얀마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와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중국의 안보에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동안 중국은 중동으로부터 수입하는 원유 대부분을 말라카 해협을 통해 들여왔다. 말라카 해협 길목에는 미군기지(in 싱가포르)가 있다. 때문에 중국은 약점 중에 하나였던 원유 수송에서의 ‘말라카 해협 의존성’을 줄이고자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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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원유 수송로

 

이 파이프 라인이 그중 하나다. 이를 이용하면, 말라카 해협을 통해 배가 지나지 않고도 미얀마를 통해 중동의 원유를 들여올 수 있다. 말레이시아 편에서 전술했던 말레이시아 내 일대일로 철도와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미얀마는 중국에게 굉장히 중요한 국가이다. 2020년에 시진핑 주석이 방문한 유일한 순방국이 미얀마라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것 중 하나다.

 

2020년 미얀마 방문 시진핑.PNG

2020년에 미얀마 방문한 시진핑

 

잘 생각해보면, 미얀마만이 중국에서 말라카 해협을 지나지 않고 바로 중동·아프리카·유럽으로 갈 수 있는 인도양과 이어진 유일한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친중 국가이긴 하나 위치적으로 말라카 해협 동쪽에 위치한다. 말레이시아는 말라카 해협을 지나지 않고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말레이시아로 가기 위해선 미국과 동맹국인 태국을 지나야 한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는 완전한 친중 국가도 아니다.

 

무섭게 미얀마를 장악해가는 중국을 막기 위해, 미국도 미얀마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파이프 라인이 완공되고 약 4개월이 지난, 2017년 8월, 미얀마에서 로힝자 족 학살사건이 터졌다. 

 

‘태국, 필리핀 편’에서 전술했듯, 자신들의 실상은 어떻든 미국은 대외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국가다. 미국은 로힝자 족 학살사건을 강력히 비난했고, 경제제재를 때렸다. 미얀마와 관계는 다시 멀어졌다(미국이 미얀마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력은 중국에 비해 게임이 안 된다. 때문에 경제 제재를 하더라도 효과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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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시아경제> 링크

 

2021년 2월 1일에는 미국과 완전히 파탄 나는 사건이 터졌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자유 진영 국가 전체와 관계가 끊어지는 사건이었다. 

 

민주 정권을 다 엎어버리는 군부 쿠데타가 터졌다. 이른 새벽, 군부는 대통령,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 그리고 국회의원들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 인사 등을 감금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현재 미얀마 최고 권력자) 최고 사령관과 군부 세력은 2008년도에 개정된 헌법을 근거하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쿠데타의 이유로는 2020년 11월 총선 이후 지속해서 제기되어 온 부정선거 의혹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음에 있다고 밝혔다(물론 헛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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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

출처-<Reuter>

 

2016년 들어선 문민정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며, 쿠데타 세력에 저항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무자비한 폭력뿐이었다. 국제 사회도 정치·경제적 제재만 할 뿐, 무력적인 도움은 없었다. 미얀마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제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물론 중국은 제재에 참여하지 않는다. 때문에 미얀마는 더욱 중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인 2019년의 경우만 보더라도 투자, 원조는 말할 것도 없고, 수출입에서만 중국이 차지한 비중이 약 3분의 1이었다. 

 

미얀마 10대 수출국.PNG

 

10대 수입국.PNG

출처-<미얀마 중앙통계청> 

자료 링크

 

현재 중국의 영향력이 훨씬 늘어난 상태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중국은 기존부터 하던 미얀마 내 도로, 철도, 가스화력발전소 등 각종 인프라 건설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전투기, 장갑차, 로켓, 대포 등의 무기도 미얀마 군부 정권에 꾸준히 공급하고 있다. 지금의 미얀마는 중국 없이는 살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아주경제 중러 미얀마 무기 제공.PNG

출처-<아주경제> 링크

 

연합뉴스 전투기 6대.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Q : 중국이 미얀마 제재에 참여하지 않는 논리?

 

중국의 외교 원칙 중 하나로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어느 나라의 내정에도 간섭하지 않는다.”

 

쿠데타가 터졌든 국민들이 학살당하든, 중국은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미얀마 군부 편을 드는 발언도 대외적으로 하지 않는다. 민주 세력 편드는 발언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누가 정권을 잡든, 미얀마 내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일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이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이다.

 

“우리 미국은 신장위구르,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인권 탄압을 강력히 비판한다. 국제 인권 의무를 준수하라! 대만을 위협하여 평화를 깨뜨리는 것도 멈춰라. 가만있지 않겠다!”

 

“우리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한다. 남의 나라일에 내정 간섭하지 마라.”

 

미국의 압박을 막아설 이 논리를 지키기 위해 중국은 절대 타국의 국내 문제에 발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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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국방 전문가들이 참석한 포럼에서도

같은 맥락의 대화가 전개된다

출처-<뉴스1> 링크

 

Q : 현재 미얀마 국내 상황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군부가 완전 장악한 상황이다. 쿠데타로 축출된 미얀마 민주 세력 중심으로 NUG(National Unity Government of Myanmar)라는 미얀마 국민통합정부(망명정부)를 만들어 대항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힘이 없다. 군부의 힘에는 상대가 안 된다. 

 

군부를 제외한 미얀마 모든 세력을 모아도 군부를 이기기 힘든데, 그 세력들이 통합되지도 않는다. NUG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버마족이다. 이들은 카렌, 카친, 로힝자, 샨족 등 여러 소수 종족들과 연합하여 힘을 합치려 했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고 감정이 좋지 않다. 따라서 지금 각자 따로 놀고 있다. 

 

국민들의 저항도 마찬가지다. 2년 동안 지속되는 탄압과 압도적인 무력 앞에 더 이상의 큰 저항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전망이지만, 미얀마의 상황은 이대로 쭉 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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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얀마 군사법원 마지막 재판에서

아웅산 수찌는 사실상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출처-<경향신문> 링크

 

Q : 미얀마 쿠데타에 대한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조치는?

 

별다른 조치는 없다. 최대한의 조치가 아세안 정상회의 때 미얀마를 초청 안 하는 정도다. 이 말은 아세안 내부에서도 미얀마에 대한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아세안의 기본 원칙 두 가지 중 하나가 ‘아세안 웨이’다. 아세안 단위로 공식적인 조치를 하려면 모든 국가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모아져야 한다. 그게 안 되고 있기 때문에 미얀마에 대한 별다른 조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아시아투데이 미얀마 군부 아세안 배제.PNG

출처-<아시아투데이> 링크

 

예를 들어, 현재 태국 정치 지도자들만 보더라도 201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세력이다. 미얀마에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나. 2017년에 일어났던 로힝자 족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아세안 내에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다들 태도가 어정쩡하다. 그나마 로힝자 족 사건에 대해 비판 발언을 한 국가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였다.

 

로힝자 족은 무슬림이다. 무슬림인 로힝자 족이 불교도인 버마족(미얀마 내 주류 종족)에게 학살당한 사건이니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선 굉장히 불쾌한 것이다. 하지만 두 국가도 비판 발언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아세안 내에서 회원국을 상대로 뭔가 조치를 하기 위해선 의견이 만창일치되어야 한다. 두 국가 외에는 태도가 어정쩡하니 실효성 있는 조치를 할 수가 없다. 

  

Q : 미얀마 군부는 어떻게 절대 권력자가 되었나?

 

전술했듯, 군부는 2020년 11월 총선에 대해 부정선거 의혹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았다며 20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2008년도 헌법’을 근거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쿠데타 당시, 아웅산 수찌의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민족민주동맹)는 2015년부터 2020년 총선까지 두 차례나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상태였다. 이로 인해, 1962년부터 계속되어온 군부의 직간접 통치에 마침표를 찍고 민주 정부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지만, 민주 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군부는 시대의 흐름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금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를 과거로 돌려놨다.

 

군부 독재 정권은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6개월 전부터 이미 예상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얀마는 1948년 1월, ‘민족의 영웅’이라 불리는 ‘아웅 산’ 장군이 중심이 된 AFPFL(Anti-Facist People’s Freedom League,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의 주도하에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독립의 순간, 민족의 영웅은 없었다. 아웅 산은 독립 6개월 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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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의 가족사진

맨 왼쪽의 아기가 아웅 산 수찌다.

 

이때부터였다. 미얀마의 역사에 군부 정권 출현이 예상된 건. 미얀마에서 아웅 산은 대체될 수 없는 지도자였다. 미얀마에는 여러 종족이 공존하는데,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이 종족들을 하나로 융합하며 이끌어갈 만한 지도자가 아웅 산 외엔 없었다. 

 

아웅 산이 암살당했을 당시, 그는 여러 종족을 융합하여 연방 정부 수립을 위한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이런 그가 사라지자 카렌, 샨, 카친족 등 소수 종족들은 버마족(미얀마 내 최대 종족)에게 독립을 요구했다. 아웅 산이 이끌던 AFPFL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며, 둘로 쪼개지게 되었다.

 

분열된 AFPFL의 파벌 싸움과 독립을 요구하는 여러 종족으로 인해, 여러 국지적 내전이 발생하며 정세는 혼란해져만 갔다. 독립 후, 1960년대가 되어도 혼란한 상황은 계속됐다.  

 

혼란이 지속되자 1962년 3월, 네 윈 장군은 미얀마군(공식 명칭: 땃마도)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 미얀마군은 아웅 산이 창설한 미얀마 독립군을 근간으로 한다. 때문에 자신들이 국가의 수호자, 국가 자체라는 멘탈리티(사고방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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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 

식민지 시절, 아웅 산과 네 윈은 독립운동 동지였다.  

 

정권을 장악한 네 윈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외세 배척 및 국가 단결이라는 정신을 근간으로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of Socialism)’를 추구했다. 그는 사유재산 국유화 및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의 지배 아래 미얀마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1974년엔 새 헌법을 만들어,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했다. 말이 정당이지 군인, 경찰, 공무원 등을 당원으로 한 군부 정권 친위조직에 가까웠다. 네 윈은 지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시장 경제 정책(큰 틀은 여전히 사회주의)으로 선회하기도 했다. 정통성 없는 정부를 보다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선 경제성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깐 회복하던 경제성장률은 이내 추락하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기까지 이르렀다.

 

미얀마 1인당 GDP 추이.PNG

미얀마 1인당 GDP 및 성장률 추이

출처-<UN National Accounts Main Aggregate Database>

 

그러던 중 앞부분에 언급했던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 전국적 규모가 된 건 1988년 8월 8일이라 하여 ‘8888항쟁’이라고 불린다. 8888 항쟁은 굉장히 사소한 사건에서 출발했다. 

 

랑군공업대학(현재의 양곤기술대학교)에서 학생끼리 시비가 붙었는데, 그중 한 명이 아버지가 정부 관리라는 이유로 처벌이 면죄되자, 학생들이 이에 항의했다. 나중에 지역 주민들까지 항의에 가담하며 규모가 커졌다. 경찰이 이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학생 두 명이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군부 정권의 실정에 분노하던 시민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전국 규모의 시위가 된 것이다.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그 과정에서 한 달여 만에 네 윈이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다음 지도자(군부)도 곧 자리에서 내려오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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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배우 양자경이 아웅산 수찌 역으로 출연한

<더 레이디>에서 8888항쟁의 한 장면

 

군부 내 일부 세력은 이런 정국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결국 이 신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신군부도 격화된 민심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래서 신군부 정권하인 1990년 5월, 드디어 다당제에 입각한 총선을 치르게 된다. 

 

당시 민심은 완전 기운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민족민주동맹)가 총 492석 중 392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둔다. 기존 군부 정당을 전신으로 한 신군부 정당 ‘국민통합당(National Unity Party, NUP)’은 단 10석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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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총선 모습

 

그러나 상황은 해피엔딩으로 흐르지 않았다. 그 후가 문제였다.

 

당시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며, 민심에 따라 ‘1974년도 사회주의 헌법’을 폐지했기 때문에 새 헌법이 필요했다. 아웅산 수찌의 민주 세력은 새 헌법은 당연히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만,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헌법 개정을 위한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향후 의회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게 되면 군부의 이익에 맞는 유리한 조항들을 헌법에 담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군부의 주장대로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새 헌법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엇도 이뤄지지 않은 채 신경전만 계속되었다. 군부가 정권은 잡은 채로 시간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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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1인자

쏘마웅 장군 (대통령 재임 1988-1992)

 

그렇게 2007년이 되었다. 다시 대규모 민주 항쟁이 터졌다. 처음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군부가 예고도 없이 천연가스를 약 5배, 휘발유/경유 가격을 약 2배 인상한 조치에 국민들이 불만을 표하는 시위였다. 시위엔 곧 승려들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승려들과 군인 사이 무력 충돌이 발생하며, 승려 4명이 체포됐다. 다른 승려들이 석방을 요구했지만, 군부는 거절했다. 이때부터 승려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뛰어들었다. 승려들을 주축으로 시위의 규모가 엄청 커졌다. 시위의 내용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 항쟁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 시위를 ‘샤프론 혁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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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론 혁명

출처-<AP>

 

샤프론 혁명은 결국 군부의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 반복되며 일어나자 군부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군부는 멈춰있던 헌법 개정을 강행했다. 독단적인 헌법 개정 추진에 수찌의 NLD가 항의했지만, 힘이 없었다. 군부 정권이 만든 헌법은 국민 투표를 통해 2008년 정식 헌법이 되었다.  

 

이 헌법이 지금까지 군부의 절대 권력을 지켜주고 있다. 2021년 군사 쿠데타 때도 군부는 이 ‘2008년 헌법’을 근거로 들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헌법으로 군사 쿠데타라는 비민주적 행위가 모순적이게도 합헌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Q : 군부를 위한 ‘2008년 헌법’ 내용은? 쿠데타도 합법?

 

‘2008년도 헌법’은 자유, 평등의 다당제 선거를 기반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삼권분립에 관해 규정하며, 무법 정치의 군부 정권에서 벗어나 법치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민주적 조항 이면에는 군부의 권력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들어 있다. 그중 가장 쟁점이 되는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1. 대통령 자격에 관한 조항 

 

가장 많이 알려진 불합리한 조항이다. 59조(d)항에 따르면 대통령 입후보 자격 중 하나의 조건으로 “외국인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입후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조항의 표면적 취지는 외부 세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은 국가의 원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사실 아웅산 수찌를 겨냥한 것이다. 그녀가 대통령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장치다. 그녀는 영국인과 결혼하였고, 두 자녀의 국적은 영국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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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찌(오른쪽)와 남편 아리스 교수,

첫아들 알렉산더를 안은 수찌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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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아웅산 수찌를 대신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남편과 두 아들.

 

그래서 2015년 총선에서 수찌의 NLD가 압승했음에도, 수찌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대신 ‘국가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실질적 대통령 역할을 수행했다. 수찌는 국가고문과 외무부 장관을 동시에 맡았다. 

 

2. 군부의 의석을 보장한 국회 구성에 관련된 조항 

 

헌법 14조에는 연방 의회, 상원, 하원, 지역 의회 모든 수준의 의회에 최고 사령관이 임명하는 군부 대표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각 단위별 의회에 최소 25%의 군부 대표가 있어야 한다(지역 의회는 1/3). 군부에 지정된 의석을 제외한 의석만 국민 투표로 대표를 선출한다. 

 

더 문제인 점은 군부의 의석 차지가 단순히 입법권을 행사하는 수준이 아니라 미얀마의 개혁 시도를 완전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석수는 각종 입법안, 특히 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가능하게 한다. 헌법 436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헌법 개정안은 의결정족수인 재적 의원 75%의 찬성 득표를 얻어야 하고, 그중 국가의 기본 바탕, 국민 권리, 국가 권력 구조에 관련된 조항들은 국민 투표 절차까지 거쳐 개정안을 확정해야 한다. 

 

이 조항을 근거로 지난 2013년과 2020년에 두 차례 있었던 헌법 개정(개혁)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3. 모든 무력은 군부만 소유한다는 조항 

 

헌법 20조는 미얀마군의 최고 사령관을 국군 통수권자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군관계를 규정하면서 대통령 혹은 국가 원수를 군 통수권자로 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다.

 

이뿐 아니다. 미얀마 2008년 헌법 232조는 최고 사령관이 국방부, 내무부, 국경부 세 개 부처의 장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국방부를 비롯해 내무부는 경찰력을 총괄하는 부처로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력은 최고 사령관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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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군을 사열하는 민 아웅 훌라잉 최고 사령관

 

4. 군부의 쿠데타가 합법이라는 조항

 

헌법 210조와 412조에는 국가안보회의 및 비상사태 선포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미얀마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단, 선포 전에 국가안보회의를 거쳐야 하며,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안보회의의 총 11명 구성원 중 과반수인 6명은 최고 사령관이 임명한다. 즉, 군부가 찬성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없다

 

군부는 대통령이 원치 않는 경우에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헌법상 최고 사령관, 최고 부사령관,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만 동의하면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치로 인해, 미얀마 군부의 비상식적 쿠데타는 헌법을 수호하는 합법적인 행위로 탈바꿈될 수 있는 것이다.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1962년 이후 약 50년 만에 아웅산 수찌를 중심으로 한 문민정부가 들어서며(미얀마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이 간접 선거하여 뽑음), 군부가 물러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지만, 군부는 이런 장치를 다 마련해두고 정권을 넘겨준 것이다. 이 말은 ‘2008년도 헌법’이 바뀌지 않는 한 미얀마는 군부의 독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

 

지금의 세계는 미·중 패권 경쟁 외에도 국익을 위해 불철주야 계산기 뚜드리며 짱구를 굴려야 할 사안이 많다. 과거보다 국가끼리 교류가 늘어났고, 교류가 늘다 보면 이해관계가 얽히기 마련이다. 각국의 이해관계는 과거보다 복잡해졌다. 

 

연재 서두에서 전술했듯, 현재 미·중 패권 전쟁 외에 많은 국가들을 괴롭히는 대표적 사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복잡해진 이해관계만큼이나 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입장도 제각각이다. 아세안 각국의 입장은 어떨까? 

 

이것도 깊게 들어가면, 무쟈게 길어진다. 대략적으로만 쓱 훑어보겠다. 참고로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은 민간 차원에서 나오는 입장인 아닌, 국제 사회에서 실효성을 갖는 정부 입장을 말한다. 민간 차원에서의 반응과 공식적인 정부의 반응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인도네시아 - 중립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지난 6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차례로 찾아간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중재 외교를 하려 한다. 

 

6월 29일 키이우에서 젤렌스키와 만난 조코 위도도.jpg

6월 29일 키이우에서 젤렌스키와 만난 조코 위도도

출처-<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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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모스크바에서 푸틴과 만난 조코 위도도

출처-<AFPBBNews>

 

원래 인도네시아가 ‘비동맹 중립 외교 노선’을 추구하기도 하고, 무기 등 군수품에 있어 러시아에 의존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미국으로부터 무기 수입도 많다). (출처 링크)

  

2. 싱가포르 – 서방측 입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직후부터 미국 주도의 제재에 동참했다. 아세안 국가 중 가장 적극적으로 서방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에 전부 찬성 입장이다.  

 

뉴시스 기사 싱가포르 제재.PNG

출처-<뉴시스> 링크

 

3. 브루나이 - 중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을 비판한다. 전쟁은 안 된다. 평화를 깨뜨리는 것에 반대한다.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러시아에 대한 이런 류의 비판 메시지는 냈지만, 그걸로 끝이다. 러시아 제재 결의안은 기권하는 등 실질적으로 러시아 제재에 대한 행동에는 동참하지 않고 있다. (관련 기사)

 

4. 말레이시아 - 중립

 

전통적으로 중립 외교를 추구하는 국가답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비동맹 노선’을 견지할 것이라 밝혔다.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경제 제재를 시행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들과 협력하겠다고 말하는 정도의 원론적인 입장이다(출처 링크).

 

말레이시아.PNG

제목: 말레이시아는 일방적인 제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비동맹 노선을 유지할 것이다

출처-<New Straits Times> 링크

 

인도네시아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원래 중립 외교를 추구하는 것도 있겠지만, 말레이시아도 무기 등 군수품에 있어 러시아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 때문에 더욱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5. 베트남 – 중립

 

중립이다. 유엔에서 러시아에 대한 여러 제재 결의안을 투표할 때, 기권했다. 베트남은 구소련 시절부터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러시아와 유대 관계를 쌓아왔다. 소련 시절엔 여러 지원을 받았고, 베트남의 도시 ‘냐짱’에는 소련 해군기지도 있었다(물론 지금은 없다). 소련 관광객도 많이 왔고,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인들도 베트남으로 많이 관광 온다. 현재도 남부 냐짱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산다. 

 

베트남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잘 유지해나간 다른 이유 중엔 러시아의 영향력을 베트남에 일부 묶어둬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측면도 있다. 이런 관계이다보니 러시아 제재엔 참여하지 않는다(출처 링크).

 

6. 태국 - 중립

 

중립을 표명했다(출처 링크). 역시 러시아에 대한 제재 결의안은 기권한다. 러시아로부터 관광객이 많아 관광 수입을 고려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최근 미국과 소원해진 만큼 중국, 러시아와 가까워진 측면이 있다. 러시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입장이다(출처 링크).

 

태국 관광객.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7. 필리핀 – 서방측 입장

 

처음엔 중립 입장을 표명했지만, 입장이 변화하여 서방측과 입장을 같이 한다. 두테르테 때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 있다 보니, 미국과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로 인해, 필리핀은 러시아와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필리핀이 러시아 헬기를 구매하기로 계약했었는데, 미국과 이해관계를 더 가까이하며 헬기 구매 계약을 파기했다. 근데 계약을 맺으며 필리핀이 미리 비용을 지불한 게 좀 있다. 열받은 러시아는 그 돈을 돌려주지 않겠다 선언했다. 이로 인해 두 국가의 관계가 좀 더 소원해졌다. 필리핀은 이후, 미국 헬기 구매를 추진했다.

 

필리핀 계약 파기 연합뉴스.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미국 헬기 구매 추진.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8. 캄보디아 – 중립

 

이상한 일이다. 캄보디아는 명실상부 친중 국가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입장도 중국과 궤를 같이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전쟁 초반에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찬성했고, 비판 성명도 적극적으로 냈다(출처 링크).

 

또한 러시아가 지난 10월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주 점령 후, 주민 투표를 진행하며 영토 병합을 할 때 강력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독재와 분리주의, 군사력 사용에 반대한다. 영토 주권은 보호받아야 한다.”

 

캄보디아 합병 반대.PNG

제목: 캄보디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합병 움직임에 반대한다

출처-<Khmer Times> 링크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센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여튼 이런 메시지를 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 중국과 입장이 다른 이유는 캄보디아가 역사적으로도 침략당한 적이 많고, 최근에도 2007-2008년에 태국이 캄보디아의 쁘레아 위히어(Preah Vihear) 사원 근처 땅을 점령했던 사건이 있었던 만큼, 그동안 캄보디아가 경험했던 외세 침략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작용하는 걸로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군사 행동에는 중립 입장을 표명했고, 지난 11월 유엔에서 이뤄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의안 투표에 기권하는 등, 어느 선 이상의 행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실질적 중립이라 볼 수 있다.

 

 러시아 결의안 찬반.PNG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의안 투표 결과

파란색-찬성 / 노란색-중립 / 빨간색-반대

출처 링크

 

9. 라오스 - 러시아 편

 

중국과 완전히 입장을 같이 한다. 최근에도 러시아와 합동군사훈련을 할 정도로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라오스 러시아와 훈련.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10. 미얀마 – 러시아 편

 

중국과 입장을 같이한다. 최근 미얀마 최고 권력자인 민 아웅 흘라잉이 러시아를 자주 방문하는 모습에서 보여주듯, 러시아와 사이가 좋다. 러시아로부터 무기, 연료 등을 수입한다. 경제 협력도 많이 한다.

 

러시아행.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연합뉴스 전투기 6대.PNG

출처-<연합뉴스> 링크

 

하지만 유엔에서 러시아 제재 관련 표결에선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최근(지난 11월)에 있었던 표결, 즉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의안 투표에서도 찬성을 했다. 현재 미얀마 정부의 입장과 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 이유로는 국제 사회에서 유엔 미얀마 대사로 현 미얀마 정부 사람을 인정하지 않기에,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지금까지도 이전 문민정부를 지지하는 대사가 유엔 미얀마 대사를 역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대한 아세안 각국 입장은 여기까지다. 아세안 전체 공식 입장으로는 만장일치제인 ‘아세안 웨이’ 원칙으로 인해 별다른 입장을 낼 수 없다. 아세안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입장이 없으므로 사실상 중립인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연재를 마치며

 

국가가 생존할 전략을 짜기 위해선 정보가 중요하다. 정보가 있어야 제대로 분석을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것에 실패하면, 막대한 희생은 국민 몫이다. 사례는 많다.

 

우선, 영국의 경우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8개월이 지날 때까지 영국 총리는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강제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도 위협을 뻗쳤을 때까지도 히틀러를 믿었다. 때문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같이 모인 뮌헨회담에서 히틀러에게 평화 약속을 받고, 영국으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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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회담에서 히틀러와 악수하는 체임벌린

 

당시 영국은 히틀러에게 약속을 받은 체임벌린을 크게 환영하며 칭송했다. 처칠은 이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봤다. 처칠은,

 

“히틀러는 믿을 수 없다. 협정은 완전한 패배다.”

 

라며 체임벌린을 비판했다. 처칠은 전쟁에 대비해 군비 증강도 주장했다. 하지만 주변 정치인들과 여론은 “전쟁광이 불안감을 조성한다”며 처칠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1년 뒤,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며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그로부터 8개월 뒤, 총리는 처칠로 바뀌었다.   

 

체임벌린과 처칠은 왜 다른 판단을 했을까?

 

당시 영국민과 체임벌린은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열망에만 사로잡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부분이 있겠다. 다음으로는 정보 차이다. 

 

처칠은 오래전부터 히틀러를 관찰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건 1933년인데, 처칠은 1930년부터 히틀러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처칠은 히틀러에 대해 체임벌린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정보 차이로 인해, 처칠은 히틀러를 믿지 않았고, 체임벌린은 믿었다.

 

(예전에 누군가 남북회담을 뮌헨회담에 비유하며 비판한 적이 있다. 그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분석이다. 현재의 남북은 당시의 영·독과 상황이 판이하게 다를 뿐더러 평화를 추구한다는 자체만으로 뮌헨회담에 비유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 점은 분명하게 짚어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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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처칠과 체임벌린

 

우리나라 역사에도 비슷한 일은 많았다. 임진왜란 전, 일본의 심상치 않은 조짐에 조선 조정은 김성일과 황윤길을 일본으로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칠 인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게 했다. 황윤길은 필시 전쟁이 일어난다 했고, 김성일은 황윤길이 쓸데없이 불안감을 조장한다 했다. 그 이상의 정보 없이 선조와 조선 조정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김성일 말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황윤길의 말대로였다. 당시 전쟁을 확신하고 제대로 준비한 사람은 이순신, 류성룡 외엔 거의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 세월이 흘렀을 때도 조선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광해군이 내려오고 인조가 왕이 되었던 ‘정묘·병자호란 전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부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뇌피셜을 써가며 회의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제대로 된 정보가 많지 않다 보니 이런 상황이 나온다. 

 

“후금이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저렇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다. 또 저렇게 하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각종 시나리오를 그리는데, 논리로만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없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정보가 없으니, 뇌피셜을 써가며 머리를 굴려봤자 두려움과 걱정만이 많아질 뿐 방향성을 잡을 수 없다. 제대로 된 대처가 나올 수 없다.

 

구한말의 조선도 똑같았다. 고종은 세계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만을 바라봤다. 미국이라면 조약대로 반드시 조선을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며,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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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

 

최근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몇 달 전 워싱턴포스트에서 거대 기획 기사를 냈다(링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각국 수장들과 정보기관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깊게 취재한 기사다. 총 6부작으로 분량도 길어 거의 책으로 봐야 할 정도다. 

 

세계적으로 굉장한 호평을 받은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과 프랑스의 정부, 정보기관 모두 푸틴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푸틴은 절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결과는 모두 아는 대로다. 

 

다시 한번 서두 문장을 반복한다. 우리가 살아갈 전략을 짜기 위해선 정보가 중요하다. 정보가 있어야 제대로 분석을 할 수 있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선 관심이 있어야 한다. 본 연재는 그런 마음에서 썼다. 필력이 대단하지 않아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분들이 아세안에 관심이 생기길 바랐다.  

 

국가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위해선 국민들이 많이 알아야 한다. 지금은 잠시 멈춰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외교 노선을 정할 때 국민 여론은 큰 역할을 한다. 각 개인으로서 국민은 정확한 정보로 주변 지인을 설득할 수도 있고, 정부를 향해 직접 말할 수도 있다. 선거는 물론이다. 외교의 향방을 국민이 만든다. 

 

다시금 어지러워지는 세계에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분석과 판단은 더욱 중요해졌다. 한 번 한 번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더 잘 생존하기 위해선, 우리 관심의 사각에 있는 세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곳에서도 세계 정세를 읽는 중요한 사건들이 수없이 벌어진다. 게다가 아세안은 더 이상 과거의 제3세계로 치부할 수 없는 곳이다. 국가의 외교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고려되는 지역이다.

 

아무쪼록 본 기자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길 바라본다. 연재는 여기서 마친다. 기회가 된다면, 추후 아세안에 관해 다른 이야기도 다뤄보겠다. 

 

그동안 긴 연재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같이 보면 좋은 미얀마 기사

 

1. 2021 미얀마 쿠데타 시리즈

 

2.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교양 시리즈

 

 

 

※딴지 기사 중엔 미얀마에 대해  잘 다룬 기사가 많다. 그래서 본 기사에서도 군부가 권력을 잡은 과정, 2008년 신 헌법에 대해 상당 부분 문기홍 박사(부경대학교 글로벌지역학연구소 전임연구원)가 쓴 '2021 미얀마 쿠데타' 시리즈를 인용했다. 미얀마 군부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  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께는 해당 기사를 추천한다. 

 

 

감사의 말

 

본 기사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취재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김동엽 교수(부산외대), 김형종 교수(연세대 미래캠퍼스), 김형준 교수(강원대), 윤진표 교수(성신여대), 이재현 박사(아산정책연구소), 한유석 박사(전북대), 그 외 많은 분들(국제 관계 관련 분야에 계시기에 본의 아니게 불이익을 받으실 수 있어 자신을 밝히길 원치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께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도와주셨습니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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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