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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9일, 인도군과 중국군이 맨주먹으로 난투극을 벌였다. 21세기 한복판에 핵무기 수십 발을 보유한 핵무장 국가 둘이 중세 시대 마냥 주먹다짐과 발길질을 했다. 외신에 따르면 중국군 300~400명이 실질통제선을 넘어 침범하자, 인도군이 막아서면서 난투극으로 이어졌다. 이번 충돌에서 최소한 사망자는 없는 듯하다.

 

이런 난투극이 처음도 아니다. 2020년 6월에도 두 나라 군인 수백 명이 맨몸 또는 몽둥이로 개싸움을 벌였다. 그때는 인도 군인 2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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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중국·인도 접경 지역에서

양국 군인들이 나란히 행군하고 있다

출처-<링크>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꾸 벌어지는 걸까? 답을 알기 위해 70년이 넘는 두 패권국의 국경분쟁 역사를, 핵심 맥락만 짚어보자.

 

3,000km짜리 국경분쟁

 

일단 중국·인도 간 국경분쟁을 이해하는 데 우선 기억해야 할 기본 지식은 핵무기로 무장한 두 개의 군사 대국이 접경하는 3,000km 국경선 대부분에 관해 현재까지도 양국이 합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으나 사실이다.

 

인도와 중국이 맞닿아 있는 국경선은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1)

 

① 인도 북서부의 카슈미르에서 네팔에 이르기까지 인도와 중국이 접경한 지역

② 네팔과 부탄이 중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지역 

③ 인도 북동부 다시 인도·중국이 접경하는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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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중국의 3,000km에 달하는 접경지역.

두 나라 정부는 국경선을 획정하지 않고 둔 채,

1996년부터 실질통제선(LAC, Line of Actual Control)이라

정한 곳에 군대를 나란히 배치했다

출처-<이코노미스트>

 

영토 분쟁의 시작점은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다. 1947년까지 영국은 서쪽으로 현재의 파키스탄, 동쪽으로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북서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식민 지배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1947년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독립 하면서 국경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2) 국제적으로 합의된 국경선이 부재했던 것이다.3) 

 

이 와중에 1949년 10월, 중국 본토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국가와 획정하지 않은 국경선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이어서 1950년 중국과 인도와의 국경분쟁의 본격적인 서막을 올리는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이은 강제 합병이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흡수 합병

 

UN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한창 정신이 팔려있을 1950년 10월 초.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한 국군과 유엔군이 한창 기세를 올리며 북진하고 있던 그때, 티베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밀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스러져버리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정신 팔린 국제사회가 자국의 티베트 침략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중국 건국 1년 만에 마오쩌둥은 서둘러 티베트를 침공했고 그의 전광석화 같은 행동은 성공을 거뒀다.

 

윈난성·쓰촨성과 접경하는 티베트 지역이 친인도 성향을 띄기라도 한다면 중국 북서부의 신장웨이우얼(신장위구르) 자치구는 물론이고 그 서쪽으로 뻗어나가고 싶은 중국 세력이 꼼짝없이 막힌다. 그런 중국 입장에서 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티베트는 중국 전체 면적의 1/8이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티베트는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신하의 나라'였다는 제국주의적 논리도 점령에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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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마오쩌둥이 인민해방군 4만여 명을

동원하여 점령한 티베트

출처-<위키피디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인도는 껄끄러운 상황에 놓인다. 티베트는 서쪽부터 파키스탄·인도·네팔·부탄·방글라데시·미얀마와 접경하거나 최소한 근접해 있는 기다란 국경선을 형성한다. 인도는 서남아시아에서 지역 패권국 행세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 세력을 떨치고 싶어 하는 터이다. 그런데 뒷덜미에 떡하니 중국의 칼날이 들어온 셈이다. 이런 국면속에서 시간이 흘러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의 주요한 이정표가 되는 두 번째 사건이 터진다. 1962년 중국·인도 국경전쟁이다.

 

인도가 명치를 돈나게 세게 맞은 1962년 중·인전쟁

 

중국이 티베트에 정치적 사회적 압박을 높여가자 티베트 불교 수장인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이 1959년 인도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한다. 인도는 1906년 대지진 이후 폐허로 방치돼 있던 옛 영국인들 휴양지 다람살라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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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14대 달라이 라마

출처-<링크>

 

티베트 불교의 상징이자 티베트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가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우자 중국 정부가 인도를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더불어 중국 정부는 인도·미국·영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쿵짝이 맞아서 중국을 압박하고자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립에 협력했다고 의심하기에 이른다.

 

1949년 중국이 건국되자마자 서구 선진국보다 훨씬 앞서 중국을 국가로 인정해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그때 급격하게 냉각하게 된다. 결국 1959년 이후 양국 간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국경분쟁은 1962년 인도 북서부 라다크 지역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로 비화하였다.

 

인도인들에게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을 꼽으라면 1962년 중국·인도 국경 충돌을 꼽을 테다. 인도 북서부의 라다크 지역과 인도 북동부의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인도는 무능력하게 참패한다. 중국은 침공을 시작하기 수개월 전부터 군에 산악지역 적응 훈련을 시키는 등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 정보 당국은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뉴델리에 편안하게 있던 인도 정치인들은 중국이 인도를 침략할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다.4)

 

전투에서 참패가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8만 명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정예 병력 앞에서 1만 명에 불과한 인도군은 추풍낙엽처럼 패배를 이어갔다. 제대로 된 전투는 약 4주간 지속되었는데, 중국군은 700여 명이 사망한 반면 인도군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쳐 약 3,000명을 기록했다. 산악 지역에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2차 대전 때나 쓰던 낡은 리-엔필드(Lee-Enfield) 소총을 들고 전장에 투입한 인도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펼치지 못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

 

전투에서 연전연패한 것도 쪽팔린데 더 쪽팔린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우려가 커지면서 국제사회는 중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도 인도양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분쟁의 양상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국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했다. 인도 북동부 지역 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점령했던 영토와 4,000여 명의 인도군 포로, 심지어 인도군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까지 대부분 조건 없이 돌려주고 중국 영토로 후퇴해 버렸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죽도록 얻어터지던 인도가 정신을 차려보니 중국이 '이제 그만 싸우자. 나 갈게. 잘 있어. 안녕..'하고 자기 집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모양새다. 인도만 열중쉬어 자세로 '명존쎄'를 당한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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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슈미르 및 라다크 지역. 2020년 6월, 중국과 인도 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난 세 곳이 붉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게다가 이때 인도 북서부 악사이친(Aksai Chin) 지역을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그 지역에 눌러앉아 버렸다. 인도는 버젓이 영토를 빼앗겼는데, 정작 복수 대상인 중국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인도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었다.

 

1962년 전쟁 이후로도 크고 작은 중국-인도 간 국경분쟁은 있었다. 현재 두 나라는 대표적인 분쟁지 두 곳을 하나씩 실효지배하고 있다. 인도의 북동부에서는 중국이 '내 땅이요'라고 주장하는 지역을 인도가 점령하고 있고(인도 행정구역명 아루나찰 프라데시주(州)로 중국은 이 지역을 '남티베트'라고 부른다), 인도의 북서부에서는 인도가 '내 땅이요'라고 주장하는 지역을 중국이 점령하고 있다(악사이친). 그게 오늘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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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주경제>

 

21세기 중국의 일대일로와 잠무-카슈미르 문제

 

수십 년간 중국과 인도가 국경에서는 으르렁거리는 한편, 양국의 경제 교류는 눈부신 속도로 발전했다. 교역규모가 2000년 30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2021년에는 무려 1,250억 달러 수준으로 커졌다(인도는 밀려 들어오는 값싼 중국제 수출품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대중국 무역적자를 겪고 있다). 양국 간에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없던 것이 아니다. 1992년부터 20여 차례 고위급 협상이 있었으나 큰 진전이 없었다.

 

이런 교착 상태 중에 중국이 국경 문제라는 연못에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 2013년을 전후하여 중국 지도부가 '일대일로' 계획을 밝힌 것이다(발표 당시에는 One Belt One Road라고 불렸으나 이후 Belt and Road Initiative로 개칭했다). 인도 입장에서 보자면,

 

'테러질이나 일삼는 파키스탄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밀착하겠다'

 

는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2015년에 중국은 일대일로 계획의 일환으로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CPEC, 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을 발표한다. 한마디로 줄이면, 현재 남중국해를 통해  주에 걸쳐 이동하는 물류 움직임을 중국 신장웨이우얼과 파키스탄 과다르(Gwadar) 항구를 연결하는 육로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동으로부터의 에너지 수입과 중동 및 유럽으로의 수출 통로를 확보하겠다는 셈이다. CPEC 발표 후 중국이 파키스탄에 투자한 금액은 어림잡아 270억 달러가 넘는다. 파키스탄을 '싼값에 인도를 억제할 수 있는 애완견'으로 여긴는 중국의 남아시아 정책으로 인해 인도는 중동으로 나아갈 길이 싹둑 잘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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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박영석·이재윤 기자/연합뉴스>

 

'일대일로' 정책으로 중국이 장군을 부르니 인도가 멍군을 부른다. 2019년 10월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인도·파키스탄간 영토 분쟁지에 인접한 잠무-카슈미르 자치령의 헌법상 지위를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변경한다. 다시 말해 이곳에 부여했던 자치권을 박탈했다. 

 

이전까지는 카슈미르 지역의 종교적·사회적 특수성을 인정하여 타지 사람의 카슈미르 이주를 제한하고 타지인이 집이나 땅을 사는 권한도 제한해 왔다. 이제 제한 없이 타지 사람들이 자유롭게 카슈미르 지역에 이주하고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인도가 중국이 신장웨이우얼(신장위구르) 지역에서 펼치는 '한족(漢族)을 이사시켜서 현지 주민 힘 빼기' 전략을 따라 한 셈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치·경제적인 함의가 있다. 개헌을 통해 회교도(이슬람교)와 불교도가 주를 이루는 이 지역에 힌두교도들이 자유롭게 이주하여 경제와 정치를 장악할 길을 보장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반발 시위가 일어나자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인터넷은 물론, 통신까지 차단하고 쥐 잡듯이 강경 진압에 나섰다. 힌두 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힌두스탄(힌두인들의 나라)'의 이익에 반한다면 언제든지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파키스탄과의 갈등이면서 동시에 '일대일로'를 추진하던 중국에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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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분쟁 지역

출처-<한겨레21>

 

몸의 대화는 이어질 전망이다

 

2020년 6월, 중국은 라다크 지역에서 다시 한 번 '선빵'을 날렸다. 양국 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여 인도군 20명이 사망했다(충돌이 있기 5주 전에 소규모 갈등이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 밝혀졌다). 2022년 12월 충돌은 사망자 없이 종료되었지만 인도 언론은 '2020년 6월처럼 몇 주 후에 더 큰 물리적 대결이 발생하지 않을까?'라고 추측하며 신경을 곤두세운 터이다.

 

양국의 국경분쟁은 해결될 수 있을까? 국제정치학자나 군사전문가들은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일단, 분쟁지역이 3,000km나 될 정도로 너무 광범위하다. 국경 분쟁을 한꺼번에 해결할 '패키지 딜'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낮다. 북서부 지역과 북동부 지역을 나눠서 국경 문제를 해결하자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더불어 그동안 중국이 커졌고 또 너무 느긋하다. 인도 다섯 배에 달하는 거대한 경제력과 약 세 배에 달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경 분쟁에서 인도를 압도하고 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중국은 자기들이 점령한 악사이친 지역에 목매달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땅인 신장웨이우얼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이제는 신장웨이우얼 지역을 '악사이친 대체재'로 확실히 변모시켜 놓았다. 자신들의 경제는 더 발전할 테고 신장웨이우얼 지역을 계속 활용하여 파키스탄 및 중동과 계속 교류를 하면 될 터이다. 악사이친이 예전만큼 긴요한 곳이 아니니 중국은 느긋하다. 더 시간이 지나면 지금 남중국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이 사용하는 방식 즉, 압도적인 군사·경제적 차이를 바탕으로 인접국을 굴복하게 하는 전략도 인도를 상대로 염두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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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YTN>

 

그렇다면 인도는 이 상황에서 조급해하고 있나?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내심 국경분쟁이 싫지 않은 분위기다. 약 1년 반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현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3연임을 목표로 하는 집권 인도인민당(BJP)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이든 중국이든 외부의 적이 뚜렷이 드러날 경우 '인도판 북풍'은 선거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자기네 내부 정치에서 국경 분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사태 등에서 보인 실정을 만회하는데 국경분쟁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표를 얻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결국 이래저래 양국 정부가 국경분쟁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관계는 쉽사리 끝나지 않으리라 본다. 앞으로 두 핵보유국 군인들의 맨주먹 싸움은 또 일어날 성싶다. 어쩌면 핵보유국들의 가장 평화로운 싸움인지도 모른다.

 


1) 인도 북서부의 카슈미르 지역은 파키스탄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북부의 길기트발티스탄[Gilgit Baltistan]과 남서부의 아자드카슈미르[Azad Kashmir]로 나뉜다)와 인도령 카슈미르(서부의 잠무-카슈미르[Jammu & Kashmir]와 동부의 라다크[Ladakh]로 나뉜다)로 구분된다. 중국은 라다크의 일부를 1962년 점령했는데 이 지역이 악사이친이다. 중국과 인도간의 국경분쟁은 당연하게도 양국이 직접 접경하고 있는 북서부 지역과 북동부 지역에서 주로 발생한다.

 

2)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당시 방글라데시는 서파키탄이었다. 1971년 방글라데시는 인도의 지원을 받아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독립을 쟁취했다.

 

3) 영국 식민정부와 청나라 사이에서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국경을 획정하기 위한 협의가 아예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1897년 영국 정부는 이른바 ‘아다그-존슨 라인(Ardagh–Johnson Line)’이라는 것을 청나라에 제인하는데 이 제안에서는 악사이친 지역이 인도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제정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최대한 북진해야 한다는 영국 정부의 공세적인 외교전략이 담겨 있었다. 청나라가 이 제안에 대해서 반감을 표하자 영국정부는 1899년 악사이친을 청나라 영토로 인정하는 ‘매카트니-맥도널드 라인(MacArtney–MacDonald Line)’을 제안한다. 하지만, 청나라는 영국측의 진전된 제안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는다. 의화단 운동(1899-1901)을 포함해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청나라 입장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청나라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영국은 결국 당초 자신들의 입장이었던 ‘아다그-존슨 라인’을 정책으로 확정하게 되고 이후 1947년 인도의 독립 이후 인도 역시 이를 계승하게 된다. 인도의 독립을 전후하여 영국은 짐 챙겨서 떠나는데 바빴다. 인도를 독립시키자는 최종 결정이 나고 영국의 핵심 인력과 군병력이 인도에서 다 빠져나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0여일 남짓이었다. 떠나는 사람들 입장에서 ‘미래에 독립국 인도가 중국이랑 국경분쟁에 휘말릴 수 있으니 국경 문제를 제대로 마무리 짓고 나가자’라는 생각이나 했겠는가? 제 몸 하나 챙겨서 나가기 바빴을 것이다. 게다가 1947년 당시 중국에는 제대로 된 정권도 수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카운터파트가 부재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꾸준하게 ‘중국-인도간 국경분쟁은 영국 식민지배의 잔재에서 비롯된 문제이다’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 주장 속에는 식민 지배자인 영국 정부의 주장을 계승한 인도 정부를 은근히 깔보는 중국의 시각도 당연히 담겨 있다. 

 

4) 참고로, 인도의 국가안전보장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National Security Advisory Board)을 지난 시암 사란(Shyam Saran)이 2017년 출간한 ‘How India Sees the World’를 보면 1962년 중인전쟁 직전 인도의 준비 부족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5) 치욕스런 1962년 전쟁이 끝난 후 인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중국에게 진짜로 중요한 지역은 악사이친 지역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동으로 통하는 전략적 통로이니까... 북동부(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이렇게 쉽게 퇴각한 것만 봐도 그런거 같다. 아마도 중국 정부는 북서부 지역 악사이친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북동부 지역을 일종의 바게닝 칩(bargaining chip)을 활용할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