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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필자의 개인 사정 때문에 원고를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글을 기다려 주신 독자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에는 당시 인기 절정이던 프로레슬링과 재일교포의 관계, 그리고 그 배경에 야쿠자가 관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봤다. 이번에는 티비시대가 본격 막을 열면서 프로레슬링을 포함한 연예계가 변천해 가는 계기가 된 이야기다.

 

티비 시대의 개막

 

역도산이 일본프로레스(日本プロレス)를 설립한 1953년은 일본방송협회(NHK)와 일본텔레비(日本テレビ)가 티비 본 방송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같은 해 2월 1일 도쿄 우치사이와이쵸(内幸町) 소재 도쿄방송회관에세 송출된

 

"JOAK-TV, 저희는 NHK 도쿄텔레비전입니다"

 

라는 구절이 바로 일본 티비 방송의 고고지성(聲, 어린아이가 세상에 처음 나올 때 우는 소리)이 된 것이다. 당시 방송 시간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고작 4시간이었으며 티비 수신기 수는 866대밖에 안 되었다. 새내기 월급쟁이들이 처음 손에 쥐는 월급이 5천엔 내지 1만엔 정도였던 시대에 티비 한 대가 17만 5,000엔이나 했다. 평범한 회사원들에게 티비는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고 내가 소유할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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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TV 광고 

사진 출처

 

그런데 말이다. 티비는 냉장고나 세탁기, 자동차 등과 달리 "그저 보기만" 할 수 있으면 최소한 그 기능을 누릴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프로레슬링 공연은 티비의 그런 특성과 맞물려 한층 더 많은 인기를 끌게 되고,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있어서도 프로레슬링은 중요한 콘텐츠가 되었다.

 

NHK가 도쿄에 이어 나고야, 오사카에도 지국을 열었을 때, 시험방송으로 타오카 카즈오 등이 창립한 전일본프로레스(全日本プロレス)가 주최하는 국제 경기를 방영했다. 이때 프로레슬링의 매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프로레스 주최 국제 경기에서도 공연장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티비의 보급과 프로레슬링

 

티비 방송이 시작된 당시 일본텔레비 초대 사장을 맡던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의 아이디어로 길거리 여기저기에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설치되었다. 설치 비용을 부담한 만큼 채널은 일본텔레비에 고정되었고 수상기 밑에는 "NTV 日本テレビ放送網(일본텔레비 방송망)"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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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느낌...! 

사진 출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일본어로 "가이토(街頭 ; 가두)"라고 한다. 이 때문에 거리에 설치된 티비 수상기를 가이토(가두) 텔레비라고 불러졌다. 프로레슬링이 생중계될 때면 프로레슬링 경기를 구경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티비 앞 길거리는 열기와 광기가 지배했다.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 특히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역도산 대 샤프 형제의 대전이 방영되는 날에는 신바시(新橋)역 앞 광장에 무려 2만 명의 군중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정도 많은 사람들이 넓지 않은 장소에 모이게 되면 싸움이나 사고가 자주 났다. 가이토 텔레비 관리 책임자였던 오오모리 시게루(大森茂) 일본텔레비 사원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관할 경찰서에 사죄를 올려야 했다. 그렇다고 경찰들이 관중들을 마냥 막아세울 수 없었다. 프로레슬링 경기는, 패전으로 상실했던 일본인들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프로레슬링을 프로모팅하던 주체가 야마구치구미를 비롯한 야쿠자들이었고, 프로레슬링계의 중심에 서 있던 선수가 재일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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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식의 인기!

사진 출처

 

어쨌건 1953년에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할 당시 텔레비 수상기 보유 대수는 1,000대 정도였다. 이것 역시 아이러니한 역사다. 6.25 전쟁에 따른 수요 증대를 계기로 시작된 호황, 이른바 "신무경기(神武景気)"에 힘입어 1957년 6월에는 60만 대,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70만 대를 기록했다. 그리고 당시 "미츠비시 파이트 맨 아워"라는 프로레슬링 중계 프로에서 역도산이 "철인" 루 테즈를 상대로 가라테 찹을 작렬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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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역도산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문장

 

티비 보유 대수는 그 후에도 계속 늘어난다. 1959년도에는 민간인 여성으로서 사상 처음 자유연애(로 일단 간주돼 있죠 뭐)를 통해 황태자와 결혼하게 된 "밋찌"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 여사가 일반 국민들의 어마어마하게 주목받으면서 티비 수상기 보급 대수도 300만 대를 기록했다. 이제 티비 수상기는 전기냉장고, 세탁기와 함께 "삼종신기(三種の神器) : 각 가정에 꼭 갖춰져야 될 세 가지 가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1,500만 대까지 증가했다. 티비가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주목을 받던 시대는 갔고 "안방극장"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티비 미디어의 등장과 연예, 그리고 야쿠자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인터넷의 보급과 동영상 플랫폼이 연예 생태계를 크게 변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의 보급은 연예의 존재 방식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로쿄쿠(浪曲)라고 불리는 일본식 창(唱)이 인기를 끌었다가 티비가 보급되자, 티비 방송에서 더 돋보이는 대중가요가 인기를 얻게 된다.

 

프로레슬링은 여전히 인기를 자랑했다. 종전 "하꼬"로 불리는 조그마한 공연장에 땀 냄새나는 듯한 분위기는 사라져가고, 깔끔하고 대본대로 진행되는 드라마로서의 성격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의 주도권을 방송국과 대형 연예 사무소가 쥐게 되었다. 즉 배후에 야쿠자 조직이 있는 토속적 시스템이 사라져갔다.

 

때는 1955년 봄. 민간방송연맹(민방연)이 창립 5주년을 기념하여 "십대(大) 가수에 의한 민방제"를 기획했다. 가요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투표하는 방식으로 10명을 뽑아서, 행사 이름 그대로 당대를 대표하는 가수를 모아 화려하게 치르려고 했던 일대 행사였다. 동시에 민방연으로서는 NHK의 홍백노래대항전(紅白歌合戦)에 맞설 만한 가요쇼 기획이었던 것.

 

그런데 말이다. 연예 기획사나 음반사 등이 자신이 밀어 주는 가수에게 조직적으로 투표하는 일을 벌였다. 혼란은 불 보듯 뻔한 일. 당연히 선출될 것으로 지목된 가수가 뽑히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중 하나가 미하시 미치야(三橋美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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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그는 야마구치구미 3대째 두목인 타오카 카즈오가 연예 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모셔온 연예 프로모터, 야마오키 카즈오(山沖一雄)가 발글한 신인 가수로, 타오카가 특별히 보살펴 주던 젊은이였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 지는 분명치 않으나, 민방연이 주최하는 가요제의 출연자 명단에 미하시 미치야가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하자 타오카는 민방연이 잡은 날짜와 똑같은 날에 “십대 가수 경연(競演) 가요쇼”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연예계에 영향력이 있었던 타오카에게는 민방연 주최 가요제 따위는 손쉽게 망하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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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 3대 두목, 타오카 카즈오 

사진 출처

 

“미하시 군, 그럼 우리는 우리대로 따로 하자고. 누가 봐도 어색하지 않은 십대 가수를 내가 모으겠어.”

 

타오카가 미하시 미치야한테 했던 말. 헛소리가 아니었다. 타오카는 전광석화의 속도로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카스가 하치로(春日八郎), 타바타 요시오(田端義夫), 에리 치에미(江利チエミ), 유키무라 이즈미(雪村いづみ), 오오미 토시로(近江俊郎)의 출연을 확보하고 이에 더해 츠루타 코지(鶴田浩二), 타카다 코키치(高田浩吉)의 스케줄까지 잡아 버렸다. 민방연 측 체면은 산산조각 난 꼴이다.

 

결국 나가타 사다오(永田貞雄)가 중재에 나섰다. 타오카가 기획한 십대 가수 경연 가요쇼를 중지하는 대신에 민방연에 의한 행사를 “이십대(20大) 가수에 의한 민방제”로 개편하고 타오카를 공동 주최자로 참여한다는 타협점에 도달했다. 당연히 타오카가 원하는 타협점 있었을 것이다.

 

타오카 카즈오의 탁견

 

타오카 카즈오의 문제해결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보자. 타오카는 민방연이 기획했던 가요제를 무산시킬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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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카 카즈오 

 

당장 가오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타오카의 균형감각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타오카는 민방연이 기획했던 가요제를 완전히 좌절시키지 않음으로써 여명기에 있던 방송국들에게, 말하자면, 빚을 지게 한 것이다. 티비 보급 대수가 5만 대에 불과했던, 방송국으로부터 어떤 형태로 그 빚을 환수 받을 만한 구체적 대목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때 말이다.

 

타오카는 티비가 가진 잠재력을 직감, 가까운 미래에 연예계에서 방송국의 힘이 커질 것으로 예감했을 지도 모르겠다. 2차대전 직후 혼란한 일본 사회에서 경찰이 치안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시절, 야쿠자가 그 역할을 함으로써 경찰이 빚을 지게 했던 경험이 다시 연예계에서 재현된 것이다.

 

한편 일본이 갑작스러운 경제 성장을 맞이하면서 야마구치구미도, 그 산하 기업들도, 변화를 피하지 못하게 된다.

(계속)

 

【오늘의 야쿠자 용어(17)...영화소개1】

 

당초 기사 본문을 능가하는 폭발적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됐던 "오늘의 야쿠자 용어"코너. 하지만, 소문에 듣는 바에 의하면 기사 본문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코너는 눈길도 주지 않는 분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시무룩...)그래서!! 자체적 노력이 안 통하는 경우의 정석. 그렇습니다, 남이 만든 콘텐츠에 무임승차. 그래서 이번에는 본문에 나온 내용과 관련이 있는 영화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일본 야쿠자 영화하면 독자분들은 어떤 것을 떠올리는지…필자는 역시 “仁義なき戦い”, 한국에서는 “의리없는 전쟁”으로 번역된 일련의 시리즈입니다. 이번 글하고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는 시리즈 제3편, “대리전쟁(代理戦争)”이 있죠. 이 작품에 프로레슬링 공연을 주최하는 야쿠자가 나옵니다. 작품의 주인공, 히로노 쇼죠(広野昌三, 배우 스가와라 분타(菅原文太))인데 그가 선수 대기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은 본문에서 언급한 프로레슬링 흥행업에 종사하는 야쿠자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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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좋아지니 4K 버전도 나옵니다 

 

그 장면에 반칙패를 당했다며 히로노의 대기실에 돌아오는 레슬러가 나오는데요. 히로노가 눈앞에 있던 맥주병을 잡았다 그 레슬러 대가리를 때리고 “있다가 미스 히로시마 안게 해줄 테니 빨리 가서 해치우고 와!!”라고 외칩니다. 그 대사는 “의리없는” 시리즈 중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죠. 아마 당시 야쿠자가 연예계나 흥행업에서 가지던 영향력을 상징하는 대사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단 히로노가 그 레슬러한테 '대어 준' 여자는 꼬붕의 애인이었습니다. 단 1분 동안만 봐도 오늘날의 PC, 즉 정치적 올바름적 문제점을 바로 지적할 수 있는 "의리 없는" 시리즈입니다.... 아, 앞으로 "의리없는" 시리즈에 나오는 "입에 담기 어려운 반PC 대사"도 오늘의 야쿠자 용어 응용 편으로 소개해 볼까 하니 조금만 기대해 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