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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혈연

 

우리는 살면서 많은 빌런을 만난다. 쉬는 날 카톡 보내는 상사, 꼭두새벽부터 쿵쾅 뛰어다니는 윗집, 내 플레이스테이션을 빌려 가 팔아먹은 친구. 이 정도는 소소하다. 문제는 지독한 빌런. 심지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인생이 상당히 고달프고 외로워진다.

 

아버지는 내 인생 최대 빌런이었다. 10대에는 두려웠고, 2-30대에는 증오했다. 그 무렵, 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후로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이제 내 나이 40줄. 원망의 감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대신 한 인간의 영역에서, 그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 그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쯤 되면 눈치채시겠지만 나는 관점에 따라 제법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불행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빈곤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아니다. 세상엔 많은 언론사가 있고 많은 정치인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켜주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으니까. 

 

나의 이 소박한 이야기가, 꽤나 독특한 근현대사를 가진 한국에서, 한국인의 가난과 불행을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위로받을 분이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는, 계속.    

 

#1. 단 한 명의 힐러가 있었다면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유저들은 균형 잡힌 팀을 이뤄 사냥터로 향한다.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딜러, 적의 공격을 막는 탱커, 딜러와 탱커의 에너지 회복을 돕는 힐러까지. 보통 세 종류의 캐릭터가 함께 이동한다.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생활 방식, 성격 차이로 자연스럽게 다툼이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두 사람 모두 배려심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게임 속 힐러 역할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혹은 한 사람이라도 넓은 마음으로 상대를 위한다면,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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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령화 가족> 

 

하지만 단 한 명의 힐러도 없는 가족의 경우, 사소한 문제가 파국으로까지 이를 수 있다. 그게 우리 가족이었다. 공격수만 가득한 극단적인 밸런스 파티. 

 

어린 시절 부모님을 회상하면, 두 분 모두 타협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서로를 힐난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최근에 부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처럼 여과 없이 발언하는 분이 아니라, 유순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분이었다면, 그나마 덜 불행한 가정이 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전쟁 트라우마도 어느정도 극복되지 않았을까.

 

아니다. 어머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머니라고 양보만 할 수 없다. 하지만 원망의 감정이 조금씩 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원망은, 조금의 기대도 없는 아버지보단 어머니를 향했다.

 

우리 가족의 평소 대화 루틴은 이랬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의견 조율 없이 단독으로 일을 벌인다. 그 결과가 좋지 않다. 어머니는 그것을 책 잡아 지속적으로 공격한다. 이 세 단계를 반복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집 담보 대출을 받았다.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어머니에게 들켰다. 몇 달이 지나도록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디서 돈을 융통해오는지 몰랐다. 사실이 밝혀지고 부모님은 크게 다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몇 날 며칠이고 식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부: “이야- 오늘 오징어 상태 좋네. 술맛도 좋고!”

 

모: “집 잡아가 오징어 사 묵으니까 좋나? 그래, 마~~~~~이 잡솨.”

 

부: "에이 시팔, 니는 뭐가 그래 매사 불만이 많노!!!"

 

모: “내가 틀린 말 했나?”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날은 결국 살벌한 분위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불똥은 항상 나를 향했기에, 나는 이런 식사 자리가 너무 불안하고 힘들었다.

 

#2. 아니꼬우면 이혼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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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디포스트>

 

어머니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멀리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직원들을 데리고 어느 식당에 들어섰는데, 문을 열자 식당 아주머니가 뛰어나오며 “오빠~!”하고 아버지 품에 안겼다고 한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아버지. 사무실에 다방 종업원을 종종 불렀는데, 그럴 때마다 사무실 문 너머 음담패설이 흘러나왔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내용을 듣고 어머니에게 전해주곤 했다.

 

이렇게 뭔가 “아니꼬우면 이혼하던가”라는 느낌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감정 소모가 점점 심해졌고, 어느 순간 홀로서기를 결심한 듯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경력 없는 어머니는 이혼해서 먹고 살길이 없었다. 혼자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후 어머니가 자주 느낀 분노의 원천이 되었다.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두세 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옆에 조그만 간이침대를 펴고 24시간 아버지를 밀착 간호한다. 일단 병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선잠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시간도 없다. 

 

아무리 치매라지만, 그와중에 아버지는 병상에서 예전 버릇을 그대로 보였다. 어머니가 잠시 화장실에 가거나, 간호사를 만나러 병원 복도에 있으면, 옆 침대 간병인과 주변 할머니들에게 작업을 걸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자주 화를 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싸움의 굴레에서 일흔이 넘도록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 용감한 아기 공룡 둘리

 

어린 시절, 나에겐 텔레비전 채널 결정권이 없었다. 보통 아버지가 틀어 놓은 방송을 끝까지 봐야 했다. 나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다른 채널을 보자고 말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는 왜 그렇게 겁이 났는지. 재미없는 방송이라도 입을 꾹 다물고 억지로 시청했다. 그래서 부모님 두 분이 안 계실 때면, 내 마음대로 채널을 선택할 수 있었기에 혼자 집에 남는 것이 좋았다.

 

당시는 지금처럼 만화 전문 채널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틀면 랜덤으로 방송을 골라 봤다. 우리 집은 편성표가 적힌 신문을 구독하는 환경도 아니었기에, 오늘 무슨 만화를 보게 될지는 오로지 그날 내 운에 달려 있었다.

 

둘리.jpg

 

주로 하니, 둘리, 머털도사가 돌아가며 재방송되었다. 그중 하니는 항상 예민한 모습으로 짜증을 내서 오래 보지 못했다. 하니를 보면 집에서 짜증을 내던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털도사는 까불거리다 좌절을 겪게 되는 캐릭터라, 당시 조금이라도 우울한 내용을 보기 싫었던 나는 머털도사도 보기를 꺼렸다. 하지만 ‘둘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을 줬다. 길동이에게 혼 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씩씩하게 살아갔다. 그 모습이 대단해 보였고,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다짐 같은 상상을 했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둘리는, 나의 롤모델이었다. 둘리를 방송하는 날은, 무참히 짓밟힌 나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바로 세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심술 가득한 길동이가 있는 집을 떠나 모험을 떠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둘리에게 도우너, 또치가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자연과 순박한 친구들. 온몸에 도깨비 풀이 붙은 줄도 모르고 들에서 친구들과 병 깨기 놀이를 하거나, 강에서 물고기를 멍하게 보고 있거나, 매끈한 돌로 물수제비 대결을 하는 일은, 집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가끔 소독차를 따라 긴 골목을 뛸 때면, 내 머릿속을 헤집던 잡생각이 뿌연 연기에 녹아 사라지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대도시에 사는 또래 친구들은 경험하지 못할 놀이를 하며, 자연 속에 감정을 흘려보내는 법,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어렴풋이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4. 도벽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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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순박하고 담백한 나의 일상에 문화 혁명이 일어났다. 바로 비디오, 오락기,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의 등장이었다.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이 없음은 기본이고, 어머니는 만화를 보면 바보가 된다고 생각하셨다. 어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는 날은, 문화와 단절됐다. 그래서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싸우는 사람도, 큰 소리 내는 사람도, 짜증을 내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보고 싶은 비디오를 빌려 친구 집으로 갔다. 영화를 틀고 라면 하나를 친구와 나눠 먹었다. 텔레비전 옆에는 오락기도 놓여 있었다. 귀한 기계라, 내가 직접 만질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친구 형이 게임을 할 때면, 옆에 앉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주말이 되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해가 질 때까지 친구 집에서 놀다가, 아버지 식사가 끝날 때쯤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과 마주치는 시간을 줄이고 피했다. 이렇게 보낸 주말은 꽤 만족스러웠다. 걱정과 고민을 추가하지 않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게임의 달콤한 맛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하교 후 학원 가기 직전까지 오락실에 머물렀다. 사람들로 가득 한 비좁은 오락실은, 학교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제2의 사교의 장이었다.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오락실은 비행과 탈선의 온상이었지만, 나에겐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하나의 주체로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였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어머니는 내가 오락실을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후가 되면 이곳저곳 나를 찾기 위해 동네 오락실은 모두 뒤졌다. 아침 등교 전 어머니와 대화를 보면.

 

“니 오늘 학교 마치고 바로 학원 가라.”

 

“응, 알겠다.”

 

“오락실 가지 마라. 가지 말라 했다!

 

"알았다니까 그라네”

 

어머니는 갓난 동생까지 등에 업고 오락실로 매일 출근했다. 어머니 예상대로 난 항상 오락실에 숨어 있었고, 집에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오락실이 좋으면, 그 아저씨한테 아부지 하면서 살아라.”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 아저씨는 아버지처럼 술주정도 안 부릴 거고, 어머니처럼 신경질도 안 부릴 것 같은데.”

 

맞을수록 마음은 날카로워졌고, 반항심은 더욱 커졌다. 돈 없이 오락실에 앉아 구경만 해도 집에서 혼나는데. 이왕 혼날 거 돈이라도 가져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지갑에 손을 댔다. 몇 장 없는 지폐는 걸리기 쉬우니 동전 몇 개씩만 빼갔다. 치밀하지 못했던 난, 그마저도 검거당해 두들겨 맞고 또 맞았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전을 빼갔다.

 

그때 내 마음을 돌아보니, 돈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맞으면서 나는 지금 삐뚤어지고 있다고.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줬으면 했다. 나를 조금만 귀하게 여겨줬으면 하는 마음을, ‘절도’라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수십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한 응석으로 시작된 도벽이 아무런 목적 달성도 하지 못한 채, 그 끝엔 체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에겐 실낱같은 희망도 없구나.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굴렸다. 내가 삐뚤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고, 그건 당신들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하고 속을 썩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느낀 배신감을 돌려주는 방법. 기대를 저버릴 수 있는 방법.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치자. 

 

그런데 이 계획은, 생각보다 어이없는 한 사건을 계기로 엎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