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새 일을 찾아서

 

2019년 3월, 처음으로 거푸집 해체(엽계 용어로 바라시)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겨우내, 바빴던 우리 팀과 달리 일이 없던 다른 팀들은 '지원'을 받았다. 노가다 현장에서 ‘지원’이라고 하면, 사람이 많이 필요한 팀이 소개료를 받고 일할 현장이 없는 팀원들을 데려다 쓰는 것을 말한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팀장은 어려운 일들은 모두 지원 온 팀에게 떠맡기라고 지시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팀은 평이 좋지 않았다. 지원하러 왔다고 얼마나 뺑뺑이를 돌리는지, 지원자들은 우리 팀 이야기만 꺼내면 이를 갈았다.

 

현장이 부족한 상황이 계속되던 시기. 새벽에 문자를 받았다. 팀장이었다. 일이 없으니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날은 근무 전날 전화가 와, 다음날 스케줄을 공지했다. 해체 업무 인원을 부를 때, 하루 전날 전화하는 경우는 없다.

01.jpg

 

형틀 목수들은 언제까지 일을 마무리하라는 업무 기한 일정을 받고, 이후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타설 일정이 따라온다. 그에 맞춰, 누구를 어느 현장으로 파견할지 결정한다. 파견 업무가 확정된 단계에서, 누가 어디로 갈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문자로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이 말인즉, 애초에 받아 놓은 일이 적었다는 거다. 한 달간 인력을 파견할 만큼의 일도 없었다.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모두 다른 인력 사무소나 해체 팀을 알아보게 되니까 그걸 숨겼다. 그리고 새 모이 주듯 얼마 되지 않는 일을 조금씩 배분했다. 특히 초보와 준 기공 언저리에 있는, 나 같은 이들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 기공이 빠지는 것보다 더 타격이 컸다. 일을 받을 때, 기공 일당 수준으로 돈이 팀장 통장에 꽂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케줄을 꼭 저 시간에 보냈다. 다른 팀이나 인력 사무소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3월 말이 다가오자, 다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진작에 짐을 쌌다. 팀이 해체되기 시작하자, 팀장은 이리저리 일을 찾았다. 4월 중순이 되자, 뜬금없이 먼 지방까지 가게 됐다. 오산, 평택, 천안까지. 수원 인근엔 현장이 없으니 단가 후려치기로 다른 지역 업체들과 계약했다. 우리는 팀장의 가마우지 신세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거푸집 해체 준 기공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02.jpg

 

그즈음, @덕 형님이 현장에서 추락했다. 발뒤꿈치가 박살이 났다. 그런데도 산재 처리를 하지 않기 위해 사고를 은폐하는 꼴을 보면서 마지막 남아 있던 정도 떨어져 나갔다. 화가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 실력으로 가 볼 만한 곳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전에 있던 곳에서 체불 임금을 받아내는 모습을 팀장에게 보인 적 있다. 그리고 그만두면서 연장을 모두 놔두고 나갔기 때문인지, 주급은 정상적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받은 돈을 들고 공구 상가에 가서 해체 정리 연장들을 새로 구매했다.

 

저는 바라시 일을 했습니다.

 

오후 3시, 네이버 앱으로 집 근처 인력 사무소를 방문했다. 주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골랐다. 바쁜 새벽에 가는 것보다 여유 있게 낮에 방문해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무실 소장은 아래위로 나를 훑었다. 신분증을 요구했다. 운전면허증을 보여주니 무슨 일을 해봤냐고 물었다. 당시 꼬마 목수님의 연재물, 노가다 칸타빌레 시리즈(링크)를 접했다. 몇 꼭지 읽으니, 나 같이 해체 정리 일을 일 년 이상 했으면 어디 가서도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바라시 하다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바라시라는 말에 소장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소장: “@덕이 아냐?”

 

나: “저에게 빠루 질을 가르친 분입니다.”

 

소장: “그런데 왜 계속 안 하고?”

 

나: “@덕 형님 산재 처리 안 하려고 용쓰는 것 보고 나니 그 팀에서 일 못하겠다 생각 들었습니다.”

 

소장: “그래? 그럼, 일단 새벽에 나와봐.”

 

질문의 의도는 없어 보였다. 별생각 없이 연장을 가방에 넣고, 다음 날 새벽 일찍 사무실에 나갔다. 내 일자리는 없었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사람들도 배치되는데, 이상하다 싶었다. 낮에 @덕 형님을 만나 인력 사무소 소장 이야기를 했다. @덕 형님은 왜 하필 거기 갔냐고 타박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 대기해야 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형님 말대로, 이틀 대기 후 현장에 배치받았다. 첫날 근무 시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직영 잡부들에게 별일이 없는 것은, 무탈한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문제는 퇴근할 때 터졌다. 연장만 챙기고 갈아입을 옷을 안 가져왔다. 차에서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다. 현장에서 굴러다니던 자루 두 개를 엮어서 몸을 감쌌다. 그 꼴로 차에 탑승했다. 소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 노가다 1년 이상 한 거 맞니?”

 

거푸집 해체 일을 하던 시기, 대부분이 숙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퇴근할 때, 집 근처까지 차로 태워다 주기 때문에 따로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첫날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갔다가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았다. 사무실 차를 깨끗하게 세차할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일단 본인 돈으로 넣고, 팀장에게 청구했다. 그렇게 빨리 기름 넣고 달리기 바빴다.

 

땀에 젖은 안전모와 연장들. 현장의 흙먼지, 음식물, 담배꽁초가 합쳐져 차 안은 항상 오묘한 냄새가 났다. 그런 공간에서 누가 옷을 따로 갈아입을 수 있었을까. 작업복 입고 출근했다가 그 옷 그대로 입고 퇴근했다.

 

무엇보다 해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조금이라도 기술자 취급을 받는지라, 자신들이 건설 노동자라는 것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용역 아저씨들은 어떻게 해서든 신분을 감추려 했다.

 

이전과 다른 분위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변에서 “노가다 한 거 맞니?”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의심이 많았던 소장은 2주 동안, 나를 이 현장, 저 현장 던졌다. 3주 차가 되어서야 정리 현장으로 배치됐다. 해체 팀 일을 하던 사람과 용역 온 사람의 정리 속도는 차원이 다르다. 그날 거의 2명 몫을 해냈다. 그 모습을 본 소장은 @덕 형님과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알려줬다.

 

@덕 형님과 해체 일꾼들이 갑자기 팀 이탈을 한 적이 있다 한다. 우르르 나가는 걸 보고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아예 거푸집 해체 인원들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너한테 해체 일을 맡길 일은 없을 거야.”

 

괜히 연장 값만 날렸다.

 

03.JPG

 

별것 아닌 것 같아도

 

1년 넘도록 한 일이지만, 거푸집 해체를 고급 기술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훌륭한 사부 덕분에 일주일 만에 일을 배우고, 준 기공 대접을 받을 만큼의 일을 했다. 그래서 그다지 어려운 일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시간을 들이면 실력이 붙는, 숙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력 사무소를 찾는 사람들에겐 그것도 고급 기술이었다. 인력 사무소는 한국인 20, 한국계 중국인 80의 비율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나이 60 언저리였다. 십 킬로그램이 넘는 연장을 매고, 20킬로그램 자재를 다루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물리적으로. 사람들은 ‘고급 기술’을 가진 내가 얼마 일 하지 않고 사라질 것을 확신했다. 소장도 마찬가지다. 

 

지난달에 있었던 일이다. 시스템 폼 연결 작업을 하던 때. 전문건설업체 공사 과장은 시스템 폼 연결 부분을 도면보다 작게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예상보다 연결 부분이 많이 떴다. 콘크리트를 붓기 전에 우레탄 폼을 충분히 쏴야 했다. 우레탄 폼을 말리던 중, 용역 아저씨 한 분이 블로어(Blower, 현장 용어 ‘앵앵이’)를 가지고 올라와 근처에서 먼지 털기를 시작했다.

 

04.JPG

 

사진처럼 현장은 엉망이 됐다. 꽤 예쁘게 해서 뿌듯했는데. 지나가던 목수들은 “아이씨” 한마디 하고 만다. 마음이 넓어서 그런 게 아니다. 용역 노동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모르고 한 일이 분명하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심지어 1종 보통 운전면허도 현장에선 고급 스킬 중 하나였다. 면허 소지자도 많지 않고, 기껏해야 2종 보통 면허, 장롱 면허가 대부분이었다. 현장에서 수동 포터 운전할 일이 있었다. 몇 분 헤매다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그 소식이 소장 귀에 들어갔다. 소장은 다음 날 그 차를 나에게 줬다. 무려 47만 킬로미터를 달린 스타렉스 초기형. 차를 받은 날, 동탄에 몇 명 내려주고, 나머지는 오산 외곽 현장으로 향했다. 일하고 돌아오니 오천 원 정도 손에 더 쥐여줬다.

 

05.JPG

 

지방 건설 현장을 가는 날이면 특히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노가다 현장에서 들리는 수위 높은 욕지거리는 물론이고, 간간이 사회적 이슈도 출현한다. 나와 다른 정치적 성향의 전형적인 한국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랜만에 생경함을 느낀다. 혹여나 운전자가 심심할까, 오디오를 가득 채우는 용역 아저씨들. 그렇게 시끌시끌한 차를 몰고, 다음 건설 현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