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지난 기사

   

(25) 개밥바라기별 : 세상이 답답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이들에게 

 

(26) 삶의 한가운데 : 소녀를 사랑한 중년 남자의 인생

 

(27) 아내가 결혼했다 : 두 남자와 결혼한 여자

 

(28) 변신 : 버러지가 된 가장의 비극적 인생

 

(29) 폭풍의 언덕 : 현명한 복수란 무엇일까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책 사진.jpg

출처 - <창비>

 

 

한국 빨치산과 그 역사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의 우리말식 발음이다. 뜻은 비정규군 게릴라. 조국이 점령당했을 때 지리상의 이점을 무기로, 적의 후방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30만 독일 군은 발칸 반도 산악지대를 무대로 활동한 ‘티토’의 파르티잔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하기사 그 시절에 똑똑흐다 싶으면 죄 뽈갱이였응게.”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임무는 ‘반제투쟁’이었다. 한국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치열하게 활동했다. 해방 이후 분단 과정에서는,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을 무대로 반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다. 조선의 노동조합, 언론계, 군대에는 수많은 사회주의자가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조선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때 조선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란, 조그맣고 낙후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비친 하나의 희망이었다.

 

SSI_20191219111906_O2.jpg

<출처 -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서북 청년단’의 극우 백색 테러에 맞서 제주 4.3 항쟁이 터졌다. 이승만은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좌파 계열의 14연대는 ‘동족상잔’을 이유로 그 명령을 거부했다. 

 

여수 일대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진압 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은, 지역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하여 지리산 일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에 맞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 대부분 전사하고 나머지는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20년에서 많게는 40년 이상의 세월을 감옥에 갇혀 살았다. 세계 그 어느 독재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긴 수감 기간이다. 43년 10개월의 시간을 복역한 사람도 있다. 이름은 김선명. 세계 최장기 복역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가난한 빨갱이의 딸

 

20140821105906783688.jpg

1952년 3월, 광주 빨치산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출처 - 국가기록원>

 

만약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누가 빨갱이 딸로 태어나길 바랄까. 나는 당연히 삼성가 이부진이나 배우 김태희의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 전직 빨치산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내 아버지 이름은 고상욱.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전직 빨치산이자, 시골에 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주의자였다. 평생을 정색한 얼굴로 진지 일색의 삶을 살았다. 나는 서울에서 이 대학 저 대학 떠도는 보따리 장사(시간 강사)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황급히 고향, 전라도 구례로 향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

 

이제 더 이상 실물로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영정 사진에 담겼다. 나는 가만히 사진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왼쪽 눈동자는 정면을, 오른쪽 눈동자는 45도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사시였다. 아버지는 1948년 초, 5.10 단선 반대 유인물을 살포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아버지 성기에 전선을 꽂고 전기 고문을 했다.

 

"고문 중에 젤 쉬운 것이 전기고문이다. 금방 기절해붕게.”

 

아버지는 물고문이 전기 고문보다 훨씬 죽을 맛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시가 된 눈으로 고등학생이었던 나를 쳐다봤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전기 고문을 받은 이후, 아버지 정자는 활동성을 잃었고, 병원에서 임신 불가 판정을 내렸다. 그래서 내가 더 귀한 존재라고 했다.

 

아버지가 장터 주막에 들린 날, 우연히 지리산에서 죽은 동지의 형을 만났다. 그는 한의사였고, 그가 지어준 약을 먹고 내가 태어났다고 했다. 나를 통해 검증된, 진정한 지리산의 명의였다. 내 이름은 ‘아리’.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땄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숱한 홍역을 치렀다. 여리여리한 느낌의 이름 ‘고아리’와 어울리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에 소도 잡을 듯한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요놈만 있으면 돼라. 아들 필요 읎당게 징허게 말도 많소이. 아리야, 니가 아들 노릇꺼정 다 헐 거제이?”

 

5.10 총선.JPG

1948년, 5.10 총선거 현장

<출처 - SBNNEWS>

 

아버지와 함께한 유년 시절

 

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했다. 함께 어딘가 갈 때면 항상 무등을 태워 땅을 밟아 본 기억이 없다. 큰고모부가 아들 하나 필요하지 않겠냐고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무등 태우고 웃으며 내달렸다. 나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아버지를 안고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었다. 그렇게 위를 올려다보면, 새파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고, 우물가 근처 코를 찌르는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혔다.

 

아버지는 이십여 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는 위장 자수를 하고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아버지는 나를 낳고 유년기를 함께 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1980년 8월15일, 광주 교도소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출소를 기다리던 때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던 사이, 나는 브래지어를 하고 생리를 시작한 성숙한 여학생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으나, 나는 그 느낌이 낯설었다. 사실은 아버지도 갑자기 훌쩍 커서 나타난 딸이 어렵고 낯설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딸이 빼앗긴 6년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았다.

 

 

동네 머슴을 자처한 아버지

 

“글먼 고향 놥두고 워디로 간다냐?”

 

아버지는 인구 이만 오천의 구례에서도, 궁벽한 깡촌 반내골로 돌아갔다. 구례는 아버지 고향이자, 전장이기도 했다. 친척과 친구들이 있고, 동시에 아버지를 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곳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사는데 거리낌 없었다. 몇 년에 한 번씩 바뀌는 아버지 담당형사와도 허물 없이 농을 했다. “순겡은 사램 아니다냐?”라고 말하며 그들과 술잔도 곧잘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고향 마을 머슴 노릇을 자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와 의논했고, 오지랖 넓은 아버지는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며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모내기 철의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이 시기가 되면 동네 사람들은 품팔이를 하는데, 우리 집 다랑논은 맨 마지막에 모를 심기로 했다. 새벽 한 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한 씨였다. 한 씨 사위가 구례서 광주까지 출퇴근하는데, 회식 후 음주운전을 하다가 트럭에 깔려 즉사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택시를 불렀다. 내일 모내기를 걱정하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류했다. 모내기 품팔이라는 게 주인이 지키고 있어도 남 일이라 대충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모내기는 우리 가족 한 해 먹거리가 달린 일이었으며 소출 중 일부는 내 대학 등록금이 될 터였다.

 

“오죽흐먼 나헌티 전화를 했겠어, 이 밤중에!”

 

‘오죽흐먼’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어머니는 그 말 앞에서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사람들이 은혜를 잊는다 해도 굳이 뭘 바라고 도와준 것이 아니니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은 힘들 때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 법이고,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아버지는, 구급대원들조차 감히 손대지 못하는 산산이 조각난 한 씨 사위의 시체를 수습했다. 병원과 장례식장을 돌면서 동분서주 밤을 새웠다. 어머니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품팔이하러 온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다랑논 귀퉁이에 아예 모를 심지 않고 일을 대충 마무리했다. 밤늦은 시각까지, 어머니 혼자 별을 보며 스무 마지기 귀퉁이마다 모를 심어야 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 한 씨 아저씨는, 결국 아버지가 쓴 택시비조차 주지 않았다.

 

네발로 기어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까진 무릎에 아까징끼를 바르며 숨죽여 울었다.

 

 

장례식을 찾은 사람들, 작은아버지와 길수 오빠

 

동네 주민, 과거 동지, 가톨릭 농민회, 아버지 도움을 받았던 사람, 이래저래 아버지와 얽혔던 사람들, 내 서울 지인들, 그리고 친척까지. 많은 사람이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찾았다. 그날, 아버지의 담배 친구였던 베트남 혼혈 여자아이도 삼선 슬리퍼를 신고 찾아왔다. 하지만 장례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가장 가까운 핏줄인, 작은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작은아버지는 자신이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친척 집을 전전하게 된 것을 모두 아버지 탓으로 여겼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 고향 반내골로 돌아왔을 때도, 작은아버지는 고개를 외로 꼰 채 말을 섞지 않았다. 할머니는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술에 취해 쓰러지거나 시장에 간 사이, 고구마나 수수 같은 작물을 망태에 담아 아버지에게 몰래 가져다주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허리가 기역으로 꺾여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니 망태에 새끼줄을 연결했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에 질끈 묶은 채 우리 집에 질질 끌고 왔다. 할머니는 이가 하나도 없는 합죽이였다. 허리끈을 풀지도 못한 채 마루에 주저앉으며 나를 보고 합죽합죽 자주 웃었다. 작은아버지 알면 뭐라 한다고 할머니를 핀잔주는 아버지에게,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 귀헌 새끼 묶으라고 가꼬 왔제.”

 

큰집 ‘길수’ 오빠가 위암 말기의 몸을 이끌고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오빠는 친척 중에서 나를 가장 예뻐했고 나도 그를 가장 잘 따랐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공부를 잘하던 오빠는 꿈에 그리던 육사에 합격했다. 하지만 빨갱이 작은아버지를 둔 덕에 신원 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했다. 연좌제가 풀리고 나서야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이내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길수 오빠야말로 우리 아버지 탓을 해야 하는, 진짜 피해자였다.

 

오빠는 피부가 어린아이처럼 가늘었다. 그런 그를 보고, 어머니는 “워째야 쓰까.... 워째야 쓰까이.”하며 어깨와 팔을 자꾸 쓸어내렸다. 곧 죽을 몸으로 자신의 인생을 막아선 작은 아버지를 조문하는 마음이 어떨지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오빠는 아버지 영정 앞에서 무덤덤하게 절을 했다. 처음 왔을 때처럼 휘적휘적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오빠의 몸에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sdsda.jpg

출처 -<KBS광주:기억을 기억하라. 연좌제의 굴레>

 

 

나를 쫓아 온 자전거

 

단 한 번, 작은아버지와 내가 인생의 어느 순간을 공유한 날이 있었다. 고3 여름 방학 어느 날, 학교 성적은 바닥을 쳤고 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연좌제가 적용된다는 걸 알고 난 뒤였다. 아침 밥을 먹고 소설책 몇 권을 들고 밤밭 너럭바위로 향했다. 그곳은 나의 도피처로, 책을 읽다 단잠에 빠지기 좋은 장소였다. 책 속으로 푹 빠질 무렵, 내 얼굴 위로 쏟아지던 햇빛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아버지였다. 나는 그때까지 그토록 노기에 찬 아버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인두껍을 썼으면 니도 밥값을 해야제!”하고 소리쳤다. 나는 뉘 집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소설책을 다시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아버지가 들고 있던 낫이 책 귀퉁이를 베었다. 사실 그때 베인 것은, 책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연결된 내 마음의 끈이었다. 아버지는 내 책을 썰기 전에 먼저, 빨치산의 딸로 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빨치산의 딸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바위에서 일어나 집 떠나는 홍길동처럼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넋 나간 아버지를 뒤로하고, 읍내로 걸어갔다. 반내골에서 멀어질수록 내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서울로 가 직업소개소를 찾을 생각이었다. 더운 줄도 모르고 땡볕 속을 한참 걸었다.

 

”아리야!”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서 끼익-하고 자전거를 세운 뜻밖의 사람은 작은아버지였다. 작은아버지를 발견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전거는 계속 나를 따라왔다. 삼촌과 조카의 어색한 동행은 면 소재지를 지나 저수지를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섬진강이 보일 때쯤, 작은아버지가 다시 나를 불렀다. 수박이나 먹고 가자고 했다. 목이 찢어질 듯 말랐던 나는 작은 아버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읍내가 보이는 원두막에 앉아 둘이 수박 한 통을 다 먹었다. 작은아버지는 독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저 길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떠나고 싶었구나. 그래서 이 길을 걸었구나.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끝내 떠나지 못한 작은 아버지의 심정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작은아버지 자전거 뒤에 앉아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갔다.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작은아버지의 등을 꼭 붙잡았다. 땀에 푹 젖은 티셔츠에서 쉰내가 느껴졌다.

 

 

두 형제의 화해

 

“아매 짝은아배도 모리셨을 것잉마. 나가 누구헌티도 말을 안 했응게. 나 말고는 암도 모리는 야그다.”

 

큰 아버지의 딸인 사촌 언니(큰 언니)와 함께 장례식장을 지켰다. 그때 비로소 작은 아버지 가슴속 응어리를 알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막내 삼촌)는 형들과 나이 차가 많이 났다. 큰 언니는 막내 삼촌보다 한 살이 어렸다. 여순 사건 당시 막내 삼촌과 큰 언니는 삼성 분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는 두 학년이 합반이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SSI_20191219111931_O2.jpg

<출처 -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수배 중이었던 아버지가 14연대를 이끌고 보무도 당당히 나타났다. 14연대는 반내골에 일주일 남짓 머물렀다. 난생처음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네를 보고, 큰 언니는 잔칫집 같다고 좋아했다. 아버지와 군인들이 모두 사라진 어느 새벽, 다른 군인들이 기다린 총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교실로 들이닥쳤다. 아이들에게 “고상욱이 본 사람 손들어!”라고 소리쳤다. 큰 언니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가 작은 아버지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작은 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당위원장잉마요.”

 

“동네서 돼야지를 시마리나 잡아가꼬 군인들허고 한 대엿새 잔치를 치렀는디요. 오늘 새복에 눈 떠봉게 가불고 없든디요.”

 

면당위원장인 형은, 아홉 살 어린아이에게 자랑이었다. 그 아이는 사라진 군인과 새로 등장한 군인의 차이를 몰랐다. 할아버지는 그 군인들에게 총 세 방을 맞고,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었다.

 

아버지는 알았을까? 어린 동생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했고,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일이 작은아버지의 평생 한이 되어 자기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작은 아버지의 분노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아이고, 짝은아배! 잘 오셨네. 잘 오셨어. 하모. 와야제!”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워졌다. 큰집 언니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작은 아버지가 나타났다. 오랜 세월, 보지 못했던 작은 아버지의 몸피는 언니들처럼 가녀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소주를 다섯 병씩 마셨다고 했다. 섬진강이 보이는 곳에서 작은아버지 자전거를 타던 때를 떠올렸다. 생존 중인 아버지의 유일한 형제를 위해, 나는 소주병을 꺼내 들었다. 

 

 

빨치산 인생

 

SSI_20191219111956_O2.jpg

<출처 -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던 가톨릭농민회 ‘김상욱’ 씨가 도착했다. 아버지가 곡성군 당 위원장이던 시절, 그는 나이 스물셋의 순경이었다. 외진 곳에 숨어 있던 김상욱 씨가 보급 투쟁 중이던 빨치산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놓아줬다고 한다. 이후 본인도 빨치산이 되겠다고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아버지는 그를 매몰차게 쫓아버렸다.

 

나는 그를 기억해 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 반내골로 돌아왔을 때 찾아온 사람이었다. 삼십여 년이 지난 후,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는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왔다. 사람 머리통 만한 수박을 들고 구례에서 두 시간을 걸어왔다고 했다. 나는 옆 방에서 둘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때 왜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질 줄 알았응게.”

 

질 걸 뻔히 아는 싸움에서 목숨을 걸었던 이십 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그런 그의 인생에 노상 투덜대기만 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를 향해 비아냥 거릴 자격이 있었던 걸까. 나는 생전 처음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유언처럼 말했다. 

 

“꼬실라서 니 펜한 대로 암 디나 뿌레삐레라. 고기밥이 되든동 밭에 거름이 되든동. 기왕지사 죽은 몸, 뭣이라도 도움이 되야제.”

 

아버지의 말대로 이제 그를 화장터에 보내야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을 봤다. 차갑게 식은 아버지 얼굴은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죽음 이후, 드디어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재가 된 아버지가 유골함에 담겨 나왔다. 아버지는 따스했다. 작은아버지가 앙상한 팔을 내밀었다. 그 팔에 아버지를 안겨주었다. 작은아버지는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근 칠십 년의 세월 동안 굳어 있었던 작은 아버지의 마음은, 유골함의 온기로 조금씩 녹고 있었다.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 아버지가 자주 지나간 중앙교, 오거리 슈퍼 앞. 반내골 여기저기에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리기로 했다. 나는 이제는 식어버린 유골함을 품에 안고, 자수하러 가던 아버지처럼 세상을 향해 걸었다.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이유

 

우리 사회는 자신의 힘으로 봉건의 틀을 깨고 근현대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식민지가 되었으며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전범국이 아닌 피해국임에도 분단, 내전, 독재와 이데올로기 사냥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나야 했으며, 견뎌내기 힘든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삶 중 하나가 윗글에서 소개한 아버지의 삶이고, 이러한 역사는 그의 인생에 고통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아버지’가 원했던 사회주의는 사실 별것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 여자나 남자 모두 똑같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48979_88954_3918.jpg

정지아 작가 인터뷰(링크)

<출처 - 시사인>

 

아버지의 죄라면,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누군들 이렇게 살고 싶었겠냐, 억울할 법도 하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 그리고 개척해내야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합니다.

 

운명이라 인지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리가 기역으로 꺾일지라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출생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은 살인 누명을 쓰고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종신형을 살게 됩니다. 몇 번의 탈옥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그는 생존을 위해 바퀴벌레도 잡아먹습니다. 꿈속에서조차 재판이 열리고,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준엄하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유죄의 이유는 바로 살인이 아닌, 인생을 낭비한 죄였습니다.

 

주어진 인생을 포기하는 일은, 자신에게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평생 고통에 시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부진이나 김태희가 아닌 ‘빨치산’의 딸로 태어났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수세력에 정권을 빼앗겼니 어쩌니 해도 세상은 꾸준히 앞으로 달려 가농 출신이 군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사회는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동시에 개인의 삶이 모여 사회를 규정합니다. 즉 살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가 모이면, 그것은 사회적 의지가 되고, 그렇게 모인 의지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분해도, 억울해도, 힘들어도 살아내야 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무채색의 크고 작은 파문을 서로에게 일으키며 한 시대를 함께 건너온 이들에게서, 이념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국엔 나약하고 또 강인한 우리 인생이 보인다.

 

- 박혜진(아나운서, 다람출판사 대표)의 서평 중에서

 

혼자서는 벅찰 때, 누군가 도움을 주고. 도움받은 사람이 다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살아내다 보면 우리네 인생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인간의 따스함을 잃지 않고 연대한다면 지켜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소개하며 서른 번째 인생 탐구를 마무리합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에서

 
Profi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