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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더위가 아직 덜 가셨던 지난 9월의 어느 날 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그토록 예뻐하던 손주들도 모두 뒤로하고, 당신을 괴롭히던 병마도 자신의 육신과 함께 내버리고, 먼 길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긴 투병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때로는 아주 작은 희망에 들뜨기도 했고 때로는 날카로운 현실에 낙담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질수록, 아버지와 헤어질 날이 머지않아 찾아오리라는 느낌도 깊어졌다. 하지만 어리석게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상황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바라는 대로만 해석하려 애썼다.  ‘우리 아버지만큼은 다를 것’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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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나의 독재자>

 

혹시 큰일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차일피일 미루고 게으름만 피웠다. 그저 막연히 오늘은 아니기를,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시간은, 신은, 아버지는 감당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시간만 내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치렀다. 그로부터도 또 여러 날이 지났다. 장례에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 인사들 전하다가 문득 시간이 꽤 흐른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꿈을 꾼 듯 어제 일 같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

 

장례를 치르면서도 장례를 치른 후에도, 시간이 흐르는 것이 싫었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아버지가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손만 뻗으면 만져질 정도로 가까이 있던 아버지가, 마치 그를 태운 나룻배가 시간의 강을 흘러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안타깝고, 서글펐다.

 

그가 쓰러졌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큰누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실은 누구에게 전화를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늦기 전에 대전으로 내려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회의를 급히 마무리하고 아내에게 전화했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불러달라고. 다 같이 대전에 가야 할 것 같다고. 이번에는 모두 다 가야 할 것 같았다.

 

올여름에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 아버지는 보훈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식사를 잘 못하시고, 이유를 알 수 없이 열이 오르는 통에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수액으로라도 체력을 끌어 올려야했다. 호흡기내과, 소화기내과, 그리고 비뇨기과를 돌며 열이 오르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모든 것은 3년 전, 흉추 골절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그보다 2년여 전 발견된 전립선암에서부터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전립선암은 3기로, 꽤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담당 선생님은 전립선암이 다른 암보다 진행이 더디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수술보다는 약물과 주사 치료로 관리하자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배에 주사를 맞고 매일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치료를 시작했고 PSA(전립선특이항원) 지수가 드라마틱 하게 떨어졌다. 예후가 좋으니 잘 관리만 하면 되겠다고 안심했다. 그런데, 그 부작용으로 골다공증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항암 치료가 잘 되어 간다고 안심했던 몇 년 동안, 아무도 몰래 골다공증이 빠르게 진행되었나 보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급히 응급실에 모시고 갔다. 아버지의 흉추가 압박골절이 되어 있었다. 뼈에 시멘트를 채우는 시술을 했다. 매일 병원 복도를 몇 시간씩 보행기를 끌고 산책을 다녔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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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아버지, 임종을 맞이하는 우리의 경건한 자세>

 

어른들 일주일만 와병해도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는 이야기, 정말 그랬다. 조금만 근육이 붙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실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셨다. 몇 달, 아니 몇 주만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번 건강의 균형이 깨지니 여기저기 탈이 나기 시작했다. 정형외과, 신경과, 소화기내과, 호흡기내과, 피부과… 진료를 다녀와야 할 곳과 그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건강이 무너지니 아버지가 무너져가는 느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봄 코로나 이후 아버지는 더 급격히 나빠졌다. 

 

아부지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물과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치료를 버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무섭게 마르고 쇠약해져갔다. 한참을 검사한 결과, 열의 원인은 신장결석이라고 했다. 수술이 가능할 리 없었다. 결석을 녹여 노폐물 배출을 원활히 하고 열을 내려야 하는데 식사를 못 하시니 약을 쓸 수도 없었다. 코에 튜브를 끼우고 강제로 연명식과 약을 주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가족들은 무의미하게 환자만 힘들게 만드는 연명치료는 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막다른 길에 접어드니 어디서부터가 의미 없는 연명이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폭풍우 앞의 촛불을 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병원 그만 쫓아다니고 이제 준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화를 냈다. 그렇게 하면 믿고 싶지 않은 그 느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폐도 상태가 심각해졌다.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산소를 공급해도 산소포화도가 자꾸만 떨어졌다.

 

기도삽관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주렁주렁 튜브를 달고 혼자 병실에 누워 가냘픈 숨을 이어가는 괴로운 시간을 지속하는 것이 정말 아버지를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도 가족의 뜻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었다. 병원에서는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은 기어코 꾸역꾸역 찾아왔다.

 

마지막 대화

 

코로나 때문에 면회나 병실 방문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별도의 병실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특별히 가족 면회를 허용해 주었다. 온몸을 덮는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한 사람씩 교대로 들어가는 조건이었다.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다. 출입자 명부에 인적 사항을 적으며, 비고란에 간호사가 미리 써둔 ‘임종 면회’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듯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아버지는 산소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덮은 채 주무시듯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부지’ 하고 불러 묵묵부답. 평생 처음, 당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이 없으셨다. 의식이 없으셔도 귀는 열려있다고, 다 듣고 계실 테니 드리고 싶은 말씀 다 드리라고 간호사 선생님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한평생의 마침표를 찍는 시간, 아버지와 함께했던 내 인생의 한 토막을 마무리하는 지금. 아버지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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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하고 싶은 수많은 말 중에 걸러내고 골라보니 사랑한다는 말만 남았다. 우리를 키우며 그가 쏟았을 정성과 걱정과 고민을 생각하니 고맙다는 말밖에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한 소년으로, 한 청년으로, 또 노인으로, 모진 세상 풍파를 버텨 낸 내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 어떤 말이 울컥이며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당신이 그토록 예뻐했던 손주들,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잘 키워낼 테니 모든 염려 다 내려놓으시고 마음 편히 가시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드리며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들었는데, 큰손주의 인사를 받고 손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 막내 손녀딸의 목소리에 눈을 뜨려 하셨다는 것을 보니 아버지, 손주들 인사받고 좋으셨나 보다.

 

9호실에서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와주셨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혼자 준비해둔 상조 서비스 덕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모시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됐다. 참, 아버지답다고 생각했다.

 

태극기와 근조기가 들어왔다. 보훈처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예비역 어르신이 제단 위에 꽃을 올리고 향을 피운 뒤 아버지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낯설었다. 그 장면을 보고야 아버지가 군인으로 긴 세월을 보낸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낮에는 손님들의 문상을 받았다. 밤에는 향불을 지키며 빈소를 지켰다. 눈을 붙이려 누워도 온갖 생각에 잠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에 계속 눈이 갔다. ‘아버지’ 부르면 대답하실 것만 같고,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오는 길 막히지는 않았냐고,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실 것 같았다.

 

장례식은 나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이별의 의식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바삐 돌아가서, 일정대로 수행해야만 하는 버거운 과제처럼 느껴졌다. 손님들이 돌아간 새벽 시간이 차라리 향불 앞에서 온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9호실에서>

 

아버지의 빈소에 쪼그려 몸을 누인다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한 이곳

바로 어제 그처럼 말 없는 이곳

하염없이 초를 켜고 향을 피워도

사진 속의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보신다

꿈이라면 어떨까 빨리 깼으면

 

한없이 순하고 착해 빠져서

한평생 애만 쓰고 고생만 했던

외로웠던 그 사람 정 많던 사람

하나뿐인 내 아버지 보내겠다고

하얀 꽃단장한 제단 앞에서

까만색 양복 입고 넙죽넙죽 절이나 한다

 

사랑한다 한 번 더 말이나 할 걸

그리워진 그 얼굴 조금 더 만져 나 볼 걸

 

내일이면 영영 떠날 내 아버지가

가여워서 딱해서 보고 싶어서

어릴 적 안겨봤던 그의 품처럼

무뚝뚝한 그의 빈소 바닥에 누워

눈 못 감고 뒤척이다 한숨 뿌린다

 

2022.9.16

 

두분의 재회

 

26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셔 와 아버지와 합장하기로 했다. 이장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서 아버지 장례를 모신 후 따로 이장을 하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장례지도사께서는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난이도나 비용이나 시간의 측면에서나 훨씬 수월하다고, 도와줄 수 있으니 이번에 함께 모시자고 권했다.

 

장례식장을 비울 수 없어 사촌 형님께 파묘에서 화장까지 이장에 관련된 일체의 일들을 부탁했다. 가족관계증명서, 호적등본, 위임장 등등 수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사촌 형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 서류를 들고 시골 관공서와 파묘 현장, 화장장을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밤 10시가 다 되어 사촌 형님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빈소에 도착했다. 형님에게 넘겨받은 어머니의 유골함이 아직 따뜻했다. 아닌 줄 알지만, 엄마의 체온이려니 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 옆에 어머니의 유골함을 모시고 절을 올렸다. 이제 정말 양친을 여읜 고아가 되었구나 싶었다. 어머니가 안 계셨던 그 26년 긴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안쓰러웠다. 이제 두 분이 다시 만나 외롭지 않으실 테니 됐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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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국제시장>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화장장에서 지낸 몇 시간은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다녀온 듯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다 잠깐씩 멈추는 것 같았다. 시간이 정지되는 것 같은 그 순간들이 생경한 느낌으로 남았다.

 

영구차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따라왔다. 그때마다 그곳에는 헤어짐과 안타까움, 두려움과 슬픔과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이 소진되어 마른자리 위에 또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이 덧대지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 본 도시의 풍경은 전과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세상은 원래 그랬다는 듯 거리는 여전히 활기 넘쳤고, 차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 안에 섞여 들면, 나의 슬픔쯤은 수영장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순식간에 희석되어 버릴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26년 전 그때는 그런 세상이 참 많이도 미웠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화에 갇혀버린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어디든 미움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화를 내며 꽤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제는 나도 안다. 나의 슬픔이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이 조심스러웠던 것은 그만큼은 어른이 되었다는 얘기일 테다. 그저 답이 궁금했다. 그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 우리 아버지와 나는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로 만났을까. 어디로 가면, 언제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아버지를 정말 다시 만날 수는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때는 뭔가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많이도 헤맸던 것 같아. 화도 많이 났었는데…”

 

큰누나가 말했다. 나보다 훨씬 더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큰누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었구나 싶었다.

 

49재를 지내며 알 듯 말 듯 한 법문의 몇몇 구절이 귀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삶과 죽음은 가고 오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결국 우주 만물의 이치라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그저 변화일 뿐이며, 그 변화 속에서는 만났다가 헤어지지 않는 영원한 인연도 없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지 않는 인연도 없다고 했다.

 

또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잠이 들고 깨는 것이나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처럼 그저 변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사는 것은 곧 죽음의 근본이 되고, 죽는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삶과 죽음은 원래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49일 되는 날은 환생문을 열고 새 몸을 받아 새로 태어나는 날이라고 했다. 좋은 날이니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했다.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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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사탕>에서 처럼 어린 시절 난, 죽으면 다들 간다는 하늘나라라는 곳이 구름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죽으면 그곳에 가서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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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돌아가신 분들이 49일 만에 환생문을 열고 새로 태어난다면, 그분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설령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삶과 죽음에 따라 존재의 방식이 변하고 형태가 변한다면, 과연 누가 누구였는지 알아볼 수는 있을까 생각하니 헤어짐이 더욱 안타깝고 서러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몰라도, 헤어짐이 새로운 만남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우주 만물의 섭리라면,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니 다음엔 만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잘 가시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 미워했던 모든 것, 이루었던 모든 것, 이루지 못한 모든 것 훌훌 털고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다만, 다음 생에서는 아버지의 삶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더 많이 웃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꼭 그렇게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는 것이 섭리라면, 언제고 아버지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때 다시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하는 시간 웃음으로 채우며 지내리라 생각했다.

 

남은 자들의 시간

 

시간의 강은 계속 흐르고 흐른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에도. 그가 강을 따라 흘러가는 배를 타셨다면 지금쯤은 꽤 멀리 가고 계실 것이다. 어쩌면 벌써 어머니를 만나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옷가지와 신발을 정리했다. 그것들을 빨리 정리해야 세상에 애착 버리고 잘 떠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옷가지는 서둘러 정리했지만, 다른 유품 정리는 차일피일 미뤘다.

 

아버지와 함께 밥 먹던 식탁에서, 오늘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아버지와 함께 타고 병원에 다니던 차를 타고 출근하고, 아버지의 등을 밀던 욕실에서 샤워한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찾아오는 아버지 생각에 우두커니 서 있곤 한다. 내 인생에서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 이제 고작 49일 남짓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생각나지 않을 수 있을까. 말없이 나를 쳐다보던 그 얼굴도, 밥은 먹었느냐 말 붙이던 그 목소리도, 서걱 서걱 발꿈치를 끌며 마루를 걷던 그의 발소리도, 그의 베개에서 맡았던 그의 체취도 그립다.

 

한 번 더 그의 손과 발을 주물러 보고 싶고, 한 번 더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 고맙다 말해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떠나시던 그날처럼 햇살 좋은 가을날을 골라 단풍잎 곱게 물든 산책길을 아버지와 발맞추어 걷고 싶다.

 

아버지 생각을 하며 운전을 하다가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내를 보았다. 슬퍼하느라,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사람이 보였다. 나를 걱정하는 아내를 보며 언젠가 저 사람과도 헤어질 날이 온다면 그날은 또 얼마나 아프고 안타깝고 슬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물음에 법륜스님이 대답했다.

 

특별한 것 뭐 없다고. 사람이 사는 것이나 저 들판에 이름 없는 잡초가 사는 것이나 똑같다고.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이라 했다. 원대한 희망, 포부, 꿈, 목표.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고개가 끄떡여졌다.

 

장례를 치르고 아내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많은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헤어질 일만 생각나서 서글펐다.

 

하지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면, 함께 있는 동안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쓰고, 염려하며 하루하루를 웃음으로 채우다가 헤어져야겠다고. 그러고는 또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꼭 껴안고 등 쓰다듬으며 웃을 거다.

 

헤어지면 또다시 만나는 게 우주의 섭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