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근육병아리는
요리에 관한 어떤 정식 교육도 받은 적 없으며
오직 유튜브와 만화책으로만 수련 중인 야매 수산인으로,
기사에 담긴 그 어떤 레시피도 성공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
새벽 4시.
바다가 살아 숨 쉬는,
여기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수산시장.
딴지 부족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딴지 회식추진맨 근육병아리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
지하1층 작업장. 근병 등장에 신경도 안 쓰는 엉클마린 크루들.
비키셈. 바빠요, 바빠.
오랜만에 대목을 맞은 노량진. 바야흐로 방어의 계절이 돌아왔다.
나도 작업장 구석에 짱박아 둔 절대 장화로 갈아 신고, 주섬주섬 출근 준비를 해보자.
간만에 들어온 사이즈 좋은 강담돔. 검정우럭목 돌돔과 가문인 이 녀석은,
노량진 일진, 돌돔과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레오파드 간지쩌는 무늬 빼고는 모양이나 맛이 거의 흡사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가격도 당연히 돌돔과 같은 노량진 탑급.
근병 : 오 빵 좋네, 이거.
마도로스김 : (방어 목 치며) ㅇㅇ 오늘 들어온 거.
근병 : 하우 머치?
마도로스김 : @만원~
간담이 서늘해지는 럭키 시세. 나도 모르게 뜰채에 손이 갔지만 꾹 참아본다. 물건 좋다고 덮어놓고 사다 보면 그지 꼴을 당하기 십상.
오늘은 오늘의 생선을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보자.
자지복의 슬픈 전설
경매장 입장.
상큼한 겨울 새벽 시장 냄새.
막 도착한 초코징어. 박스당 10만 원까지 육박했던 금징어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하다. 수온이 차가워지면서 어획량이 많이 회복된 모양.
좀처럼 만나기 힘든 횟감 전갱이. 예전보다는 덜 하지만, 아직도 좋은 물건은 죄다 일본으로 수출되는 어종들이 많다. 대표적인 게 전갱이. 왜 그 크레용 신짱도 고독한 미식가도 아지후라이를 좋아하지 않던가. 그만큼 바다 건너 사람들이 여기보다 전갱이를 더 좋아한다는 말이고 값을 더 잘 치러 준다는 뜻.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아귀. 수육 해서 고추냉이 듬뿍 발라먹으면 그만이겠다.
소주 날강도 겨울 양미리.
오늘따라 좋은 물건이 너무 많다. 배가 딴딴한 게 초절임 기가 막히게 먹힐 듯.
달그락달그락 소리 내는 대합.
풍미대장 매쉥이.
겨울 시즌의 센터 포지션, 깐 굴.
바다의 산삼, 해삼.
압도적, 코끼리조개.
바다에서 갓 올라온 신선한 멍게를 회 처먹으면, 지금까지 먹은 멍게는 멍게인 척하는 축축한 노란 섬유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도에 드라마틱 하게 영향받는 횟감.
오! 성대.
배 위에선 잡어 취급을 받았지만, 시장에선 귀한 대접을 받는다. 장소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 수산물의 오묘한 법칙. 모든 건 수요와 공급의 크로스에 달려있다.
복어. 무늬를 보아하니,
자주복인 듯.
지역에 따라 참복, 점복으로 불리는 자주복은, 먹을 수 있는 복어 중에 가장 크게 자라며 맛이 좋다. 참돔, 참다랑어처럼 '참'이라는 접두사는 괜히 붙는 게 아니다. 요고시 진짜 찐탱이라는 뜻. 그런데 이 찐탱이 복에는 한 가지 슬픈 전설이 내려오는데...
한때 상당히 거시기한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
진짜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꽤나 있는 법.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들 양반 기질이 있었는지, 자지복의 거시기한 어감 때문에 자지복을 차마 자지복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주복, 참복이라 에둘러 칭하다가, 드디어 어류 박사님들이 정리에 나선다.
1990년 전북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에서 발간된 논문 <한국산 참복아목 어류>에서 자지복에 대한 개명이 처음 제안되었다. 이후 수많은 어류학자들의 논의 끝에, 1997년 <한국동물명집>에서 자지복은 그 엄한 사용 역사를 끝내고 마침내 표준명 '자주복'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상 어느 자지복의 슬픈 개명 이야기.
자지.. 아니, 자주복 옆에 장어가 마치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 힘차게 꿈틀대며 뭔가 절묘한 미장센을 연출한다.
열중쉬어 중인 문어. 가격이 상당하다. 장 보러 나온 셰프님께 듣자 하니, 명절이 가까워지면 문어 같은 제수용 수산물은 산지에서 쟁여두고 공급을 조절한다고.
꼴뚜기. 시장에서는 호래기라고 부른다. 호래기는 경상도 사투리. 겨울 제철로, 매니아층이 상당히 두터운 술안주.
시장 형님들이 하도 맛있다고 그래서 한번 츄라이 해본 적이 있는데,
막상 손질하고 보니, 조그만 게 한 마리 한 마리 구체적으로 생긴 데다 각각 매우 또렷한 시선이 느껴지고 아기공룡 둘리의 꼴뚜기 왕자들이 생각나서 어린 시절 친구들을 씹어 먹는 것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달큰하고 쫄깃한 게 맛있긴 맛있음.
믿을 구석
새벽 5시. A급 물량은 제주인을 찾아 이미 다 시장을 빠져나갔을 시간. 아직 빈손인 근육병아리는 뭘 믿고 이렇게 탱자탱자 구경이나 하고 다니는 걸까.
시장 건물 5층 믿을 구석 도착.
경매를 마치고 정산 중인 엉클보스.
프로틴 조공.
영하 11도의 날씨에 반바지 입고 프로틴을 조지는 동작구 해적왕.
근병 : 햄요. 제 방어 잘있슴니꺼?
엉클보스 : ㅇㅇ 한길(엉클 보스 절친 업체)에 걸어놨다.
근병 : 다마(크기, 중량을 의미하는 업장 용어)가 어케 됩니꺼?
엉클보스 : 10kg 오버.
근병 : 와따매~ 진또베기네요?
엉클보스 : 암만, 촬영에 쓴다 그래서 특별히 골라서 샀다. 요즘 느그 회사 난리드라?
근병 : 아 사장님이 돌아왔죠 뭐 ㅎㅎ
엉클보스 : 가져가서 맛나게 썰어드려라 ㅎㅎ
근병 : 감삽니데이~
엉클보스 : 오야.
사실 며칠 전부터 예약 주문을 걸어 두었던 것.
귀하신 몸
경쾌한 투스텝을 밟으며 도착한 엉클보스 친구 형님 가게.
딱 보이까네.
니놈이 딴지행이로구나.
희고 아름다운 뱃가죽.
완벽한 방혈의 흔적.
여지없는 오늘 장원 특대돼지방어 당첨.
바빠서 알은체 못 한 게 맘에 걸렸는지 픽업 서비스 나온 마도로스김.
이런 거 호기롭게 들고 다니다간 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손목 나가기 십상.
귀한 몸 잘 모셔서 지하 작업장으로 이동.
그분, 영접
작업장에 도착하자, 묘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직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
목소리만 듣고 바로 알아본 이 남자. 수산물 콘텐츠계의 방탄소년단. 유튜버 '푸드박스'님 되시겠다. 섬세한 음성과 달리 상남자 풍채.
관심사 최애 유튜버를 우연히 만나디니, 홍대에서 전지현 본 것보다 더 떨림. 이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스트리머에게 슈퍼챗쏘고 별풍선을 수놓고 그른가 보다.
시메사바용 고등어를 보러 오신 모양.
푸드박스 : 배가 요 정도는 단단해야 시메가 잘 먹더라고요.
잠깐만 대화 속에서도, 눈이 띄이고 귀가 열리는 성수 같은 지식들 대방출.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장화에 사인받을까 하다가 너무 주접떠는 것 같아 꾹 참아본다. 다음에 또 봬요~ 젭알.
배운대로
영접의 떨림은 뒤로하고, 골든타임이 지나기 전에 우리의 돼지 방어를 손질해 보자.
크기가 크기인 만큼 대작업이 예상, 오늘은 특별히 마도로스김 투입으로 2인 1조 방어손질단.
방어는 크기에 비해 비늘이 좁쌀만 하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업. 횟감의 비늘 제거는 위생상으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대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다. 회 먹다가 미처 손질이 안된 비늘이 씹히면 그 얼마나 실례인가. 아무리 근육병아리가 근본 없는 야매 요리사라지만, 지킬 것은 지킬 줄 아는 병아리다. 나에게 오로시(필렛작업)를 사사한 수많은 유튜버 랜선 스승님들에게 난 그렇게 배웠다.
그렇기에, 이 정도면 된 거 아니냐고 궁시렁대는 마도로스김에게, 옆에서 물을 뿌리며 정근우 선수에게 펑고볼 날리는 김성근 감독처럼 채근한다.
근병 : 아 쫌~ 턱 밑까지 구석구석 샅샅이 긁어주셈.
마도로스김 : (벅벅벅) 으이구 하여튼 성가셔.
근병 : (아랑곳) 에헤이~ 거기 거기 지느러미 밑에도.
개복 작업 돌입. 항문에 칼을 대고,
턱밑까지 곧게 1자로 나가야 한다.
다른 생선도 마찬가지지만 방어는 이 작업이 특히 중요한데,
칼을 너무 깊이 넣어서 쓸개 같은 몹쓸 것을 건드려 터트리면, 이 귀한 횟감을 한방에 골로 보내게 될 뿐만 아니라.
정확히 센타를 가르지 못하면, 방어의 생명인 뱃살의 단면이 엉망진창 와진창이 되기 때문이다.
하트 오브 방어.
신선한 대방어는 먹을 게 많다. 위장을 잘 씻어서,
사악 갈라,
깨끗하게 잘 씻어내면,
곱창이 한 접시 나옴. 요건 나중에 데쳐 먹을 예정.
복막 안쪽 굳은 피 제거.
근병 : 옳지 옳지 잘한다 잘해!!
마도로스김 : 형 이제 다른 데서도 좀 사.
손질 완료. 매달아서 물기를 좀 빼자.
캬...
뱃살 두께 미침. 근사하다.
자 이제 이걸 회사까지 가져가려면 잘 싸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난다.
아무튼 극락왕생하렴...
일단 해동지로 물기를 잘 닦아낸 다음. 살이 무너지지 않게, 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완충제를 잘 넣어준 후. 산소와 물기가 닿지 않게 래핑을...
해야 하는데... 육중한 몸을 힘으로 굴리려니 각이 안 선다.
당황하지 말자. 그래봐야 얘도 생선이니까. 다시 처음부터.
미.. 미안하다...
수많은 시도 끝에 바구니 롤링 스킬을 깨달음.
엄마 제가 해냈어요.
이제는 박스가 문제. 작업장에 있는 것 중 제일 큰 연어 박스를 가져와도 기장이 안 맞음.
별수 없다, 방어군. 미안한 김에 좀 더 미안하자.
신라 전기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아이스팩을 쌓아 올려 딴지 패밀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선사한 거룩한 방어의 생애에 경의를 표하며,
패킹 완료.
노량진 지하 식자재 마트에 들러,
오늘 코스에 필요한 이런저런 부재료들까지 싹 다 포장해서,
충정로행 퀵 배달 접수 완료.
회사로 보낼 거대한 방어 박스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택시도 지하철도 타기 뭐 해서 방어 한 마리를 꽃다발처럼 끌어안고 도보로 양화대교를 건넜던, 수산물 덕질 초기의 무모한 열정이 생각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진다.
다신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그땐 왜 퀵으로 보낼 생각을 못 했을까...
다음 화
<계속>
최강 슈퍼 대방어 확보와 작업장 사용을 허락해주신,
노량진 수산시장 90번 중도매인 엉클마린(링크) 일동 여러분께 압도적 감사드립니다.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는 검색이 금지된 단어입니다.
저작권보호 혹은 청소년보호에 의해 검색보호조치 및 내부규정에 따라 검색 제한을 진행하고 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소지한 자는「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제11조에 따라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