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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기 4시간 전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딘가와 용무상 통화해야 하고 그 통화는 높은 확률로 좋지 않게 끝날 터란 예감이 들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손발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심리적인 문제가 신체적인 발현으로 나오는 것은 예감이 좋지 않다. 당장 주치의를 찾아갔다.

 

회사 근처 정신과 병원의 주치의 선생님. 난 내 몸 상태를 ‘인정’하고 나서 내 생활반경 근처 정신과 두 곳을 뚫어 놓았다. 다니는 회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주치의 선생님이 있는 병원이다. 또 다른 한 곳은 사는 동네 근처에 주로 ‘비상약’을 처방받고자 뚫어놓은 응급용 병원이다.

 

『나는 불안장애다.』

 

불안장애와 1+1 혹은 세트 메뉴로 따라오는 게 우울증이다. 우울해서 불안해지는 건지, 불안해서 우울해지는 건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난 정식으로 아프다.』

 

이걸 인정하고 정신과를 뻔질나게 찾아갔다. 이제는 상투적인,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란 말, 지겹다만 사실이다. 근데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노인 사망률 1위가 폐렴이다."

 

란 거다. 마음의 감기인 줄 알고 방치한 게 마음의 폐렴일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염을 달고 살았다. 코를 훌쩍거렸고, 축농증으로 발전시키지 않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결국 축농증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환절기만 되면 코를 훌쩍거렸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인 게 맞긴 한데 흔하다는 뜻에서 그렇지, 감기처럼 놔둬도 거개 알아서 낫는다는 뜻에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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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힐팁>

 

나는 그 ‘경험’이 있다. 정말로 우울의 극단까지 내려가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몸으로 체험했다. 그 뒤로 정신과를 정형외과 다니듯이 들락날락거린다. 난 통풍 환자이기도 하다. 통풍 환자가 정형외과를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는 더 설명 안 해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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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장애 때문에 몇 차례 방송을 쉰 방송인 정형돈

출처-<SBS>

 

미치기 3시간 40분 전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갔다. 얼굴이 익은 간호사는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바로 진료실로 안내했다. 상태를 설명했다.

 

"오늘... 심상치 않을 거 같아요. 선생님."

 

선생님은 뚫어져라 날 바라본다. 때 묻은 차트와 지난 2달간 집중적으로 거론됐던 지금의 사안. 이미 3주 전에 발작 직전까지 갔던 상태. 흔들리는 내 눈동자. 언제부터인가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 게 두려워서 미팅 자리에 가기 전에 신경안정제를 먹기 시작했다(지방 출장을 갔다가 너무 긴장해 신경안정제를 2봉 먹고, 미팅 중에 졸았던 적도 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선생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상약을 처방해 줄 테니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거 같으면 이거 먹어요."

 

비상약을 받아 들고는 병원을 나섰다.

 

미치기 2주 전

 

약을 바꿨다. 그동안 먹던 약보다 강도가 좀 더 센 약이었다. 주치의 선생 왈,

 

"좀 센 걸로 바꿉시다."

 

내 멘탈이 많이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한 주치의 선생이 약을 다른 걸로 바꿨다. 좀 많이 졸리고, 나른해질 거란 언질을 받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첫’ 정신과 약들은 지랄 맞다. 정신과 문을 처음 두드렸을 때 의사 선생님 말이 지금도 또렷하다.

 

"약을 찾을 때까지 고생 좀 해야 할 겁니다."

 

내 몸에 맞는 약을 찾으면 몸에 별 탈이 없다.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수많은 부작용(?!)에 시달려야 한다. 작게는 가벼운 울렁거림부터 시작해서 구역질까지 다양한 부작용들이 날 기다렸다. 그나마 지금은 내가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됐고, 그 약명을 외우고 있다. 그 센 약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다 멍하니 벤치에 주저앉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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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설 힘이 없었다. 멍하니 10분간 벤치에 앉아 있다. 이래선 안 될 거 같아 회사 동료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동료가 찾아와 조퇴를 권했다. 됐다고, 옆에만 있어 달라고, 이야기만 계속하자고 말했다. 이거 정말 중요하다. 내 몸 상태가 정말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옆에 누가 있어 주는 거다. 아니, 누가 없더라도 대화를 할 수만 있어도 된다. 이거 정말 중요하다. 1393 자살 예방 상담 전화를 걸든, 그게 안 되면 112를 걸든 다산 콜센터를 걸든 무조건 누군가와 대화해라. 누가 됐던 붙잡고 전화하든 대화해라.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내 몸에 각인하는 거다. 몸소 습득한 경험칙이다.

 

동료를 만난 뒤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안정이 찾아왔다. 동료를 보냈다. 10분 정도 더 있다가 회사로 가서 일 처리를 하고, 그날을 무사히 넘어갔다. 그날 이후로 난 ‘쎈 약’을 계속 복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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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기 10분 전

 

심장이 요동쳤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뭔가 이상했기에 주치의 선생님이 처방해 준 비상약을 먹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정신과 약을 먹다 보면 목이 마른 경우가 많다. 리터 텀블러에 한가득 물을 따랐다. 약을 먹다 보면 금방 1리터를 다 마셔버린다.

 

일 터진 시각

 

시야가 흐릿하다. 기억은 또렷하다. 손에 잡히는 회사 물건을 붙잡고 박살 내고는 쌍욕을 했다(아주 큰 소리로, 무척 길게). 회사를 뛰쳐나갔다. 직원들이 달려와 날 붙잡았는데, 그걸 뿌리치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이 사건은 내 능력 부족이 원인이다. 누굴 탓하고 할 사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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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정신과

 

숨을 몰아쉬며 달려간 곳은 정신과였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 다른 곳으로 가면, 오늘 난 무슨 일을 낸다. 그 일은 안 좋은 일일 터이다.'

 

메타인지라고 해야 할까? 다른 일에선 모르지만, 정신병과 관련하여 난 객관화가 잘 돼 있는 듯하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경험칙 때문일 거다.

 

씩씩대며 정신과로 달려간 나. 간호사는 황급히 주치의 선생님을 불렀고, 주치의 선생님은 날 보자마자 진료실로 끌고 갔다. 내 상태를 설명하자 의사는 약을 두 봉 건넸다.

 

"하나는 지금 먹고, 나머지 하나는 2시간 뒤에 먹는 거야. 알았지?"

 

그 자리에서 약을 먹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만 줬지, 어떤 하소연도 들어주지 않았다. 병원비도 약값도 받지 않았다. 그냥 가라고만 하셨다. 그때 알았다. 난 회사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가방도, 지갑도,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덜렁 핸드폰 하나만 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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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어딘가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아닌 곳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전화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정확히 말하자면,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보통 이 상황에 몰리면, 판단력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이 경우에는 믿을만한, 상식이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물어봐야 한다. 단언하건대, 이 상태에서 뭔가를 판단한다는 건 거의 99.99% 나쁜 결정이 될 확률이 높다. 이때 신뢰할 수 있는, 내 사정을 아는 이에게 연락해서 내 다음 행동을 물어보는 게 좋다(이 역시도 내 경험칙이다).

 

"이럴 때 쓸려고 돈 버는 거 아냐? 돈은 이럴 때 써야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나온 답이다. 지갑은 없지만, 다행히 핸드폰은 있었다. 핸드폰에는 카카오T가 깔려 있었다. 이걸로 난 김포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가는 길에 계속 통화를 했다. 내려서 소주를 몇 병 샀으며, 배달의 민족을 통해 뭔가를 배달시켰다(현금이 없어도 되는 세상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