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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푸집 터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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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2021년, 한 어르신이 영정 사진 앞에서 경례하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그는 구멍난 양말을 신고 나타나 품에서 전투모를 꺼내 썼다. 군복을 입거나 태극기 뱃지를 단 조문객, 육사 동창회 회원들이 줄을 이었다. 난 이런 사람들이 낯설지 않다. 건설 현장에는 보수 성향의 어르신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무 기술이 없고 언제든 밥줄이 끊길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찾는다. 힘센 '오야지'를 모시면 밥은 굶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내 앞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런 경험이 점차 쌓이다 보면 현장에서 태극기 부대 어르신을 만나도 그냥 그러려니. 무념무상 상태로 지나친다. 이런 분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적용하려고 하면 나만 힘들어진다.

 

아침마다 인력 사무소는, 어르신들이 재생한 극우 유튜브 채널 방송 소리로 가득했다. 채널은 다양하지만 문재인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걸로 논쟁할 바엔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분들과 딱히 부딪힐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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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터진 현장

 

현장에서는 달랐다. 그분들이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무조건 거푸집이 터졌다. 장화를 신고 터진 콘크리트를 어르신들이 운반할 양으로 퍼 담고 나면, 하루의 반나절이 지났다. 쉬는 시간에는 유튜브로 고문하더니, 근무 시간까지 혹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문재인을 찍은 젊은이에 대해 분노하던 어르신들은 심심하면 사상 검증에 나섰다. 당시 정부 욕을 하면서 내 반응을 살폈다. 나중에는 누구를 찍었냐고 대놓고 추궁했다. 그런 질문을 하던 사람들이 바로, 내가 차 운전한다고 몇천 원 더 받는 것을 시샘하던 그분들이다.

 

형틀 목수의 일당

 

동탄에서 어르신 팀을 태우고 숙소로 돌아가던 2019년 7월8일. 47만 킬로미터를 달렸던 스타렉스 브레이크가 터졌다. 터널 두 개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일단 가속해서 터널을 벗어났다. 차가 고장 났다는 신호를 다른 차에 보내면서 내리막길을 달렸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클랙슨을 울리면서 길 끄트머리에 가까스로 정지했다. 나무를 살짝 받으면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하게 좌회전했고 약간의 흔들림 이후 차는 완전히 정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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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사람들이 없는지 확인하고 바로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보험사 견인차를 타고 오라고 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운전하지 않은 잘못으로 널 고발하겠다고. 그 꼴을 보니 뚜껑이 열렸다. 나도 참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냐고 화를 냈더니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전형적으로 강약약강 모드를 장착한 사람이었다.

 

가끔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언젠가 길을 잃었을 때, 형틀 목수라는 길이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것도 어르신들이었다. 차 사고가 난 며칠 뒤, 근처 맥도날드에서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를 사 들고 사무실 계단을 올랐다. 어르신 두 분이 계단 중턱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동조합 소속 형틀 목수 뒷담화였다. 어르신들이 노조 싫어하는 거야 이상할 게 없지 하며 지나치던 중, 한 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일당을 우리 몇 배로 가져가는 것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음 주, 오산 건설 현장의 반장으로 가게 됐다. 안전 교육과 작업 지시를 받고 위층으로 이동했다. 지게차가 드리프트를 하면서 거푸집이 쌓인 다이를 던졌다. 지게차가 워낙 빠르게 움직여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운전자가 여자라는 건 한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보니 전국에 세 분 정도 있다는 여자 해체 팀장 중 한 분이었다. 1.2mX0.6m인 20kg짜리 거푸집을 손목 힘으로 올렸다. 그녀에 대해 궁금해하니 목수 반장이 말했다. 인천에 오픈한 양꼬치 식당이 잘 안 되어서 주말에도 돈을 벌러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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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폼 설치하는 여성 기술자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여자분들이 꽤 늘었다. 하지만 대부분 힘을 쓰는 직종이 아니다. 그래서 이날 만난 팀장님은 나에게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내심 기대감도 생겼다. 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후에 폼을 정리하다가 목수 반장님께 폼 좀 다룬다는 칭찬을 들었다. 반장님과 아주 우연히 친해지게 되어, 시간이 날 때마다 형틀 목수 대우에 대해 조금씩 물었다. 현장에서 이것저것 물으면, 인력 사무소를 통하지 않고 직고용 청탁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던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간식 시간에 자연스럽게 하나씩 질문했다.

 

형틀 목수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맞았다. 일이 많은 봄부터 장마 직전까지 거의 월 천만 원씩 벌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건 두 가지. 한 가지는 숙소 생활을 해야 그만큼 번다고 했다. 일이 시작되는 7시보다 두 시간 일찍, 5시 정도에 도착하고 세 시간 정도 늦게 일을 끝내는 일정이었다. 일한 시간만큼 돈을 번다고. 하루 2공수씩 찍으면서 숙소 생활을 해야 했다. 외국인 아내를 둔 나로서는, 한국에 친구도 없는 배우자가 혼자 집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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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스메끼리(지급유예, 즉, 돈이 나오기 전까지 벽을 긁다 보면 손톱깎이로 손톱을 자를 필요가 없다고 해서 부르는 말)가 45일이었다. 그러니까 월말까지 일을 한 다음, 그달 월급을 45일 후에 받는 체제였다. 이 경우, 적어도 넉 달 정도의 생활비가 통장에 있어야 시도할 만했다.

 

물론 형틀 목수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콘크리트가 굳으면서 내는 열, 수하 열을 제대로 겪고, 그렇게 뜯은 거푸집을 손으로 들어 올리는 일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도면 읽는 법도 인도 대륙을 돌 때, 이미 배워 알고 있었다. 사채업자 일을 하던 한 녀석은 목수들은 계산해야 할 것이 많아 머리가 아프다고 투덜댔다. 근데 그 계산이라는 것이 중학교 언저리 수준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나에게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틈새 자랑해서 미안하다. 자랑할 것도 없으니까 이런 거라도 좀 하자...).

 

회사 소속 목수 VS 조합 소속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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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틀 목수 작업 모습

<출처 - 경향신문>

 

위 내용은 회사 소속 목수들의 이야기다. 조합 소속은 대부분 숙소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월급도 15일 유예라 해당 달에 일한 수당은 다음 달 15일에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기능 학교에 다니고, 현장 배치까지 받는다면 두 달 치 생활비만 있어도 됐다. 그 당시,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없는 귀한 정보였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능 학교 관련한 내용은 검색하기 쉬워졌지만, 기능 학교를 졸업한 후에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대해서 영양가 있는 정보가 없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안산 건설 기능학교는 민주노총 경기중서부 지부에서 건설근로자공제회의 위탁을 받아 운영된다. 상근 인원은 세 명. 두 사람은 학교 선생님, 한 사람은 행정 담당이다. 행정을 맡고 있는 분은 조합 상근자로 다른 일도 겸직하고 있다. 선생님들은 기능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팀 반장 양성 교육까지 책임지고 있다. 여러 가지 맡은 일이 많다 보니 전체 교육 과정을 소개하는 글을 쓸 시간이 없다.

 

한 달 교육 후, 현장에 배치되고 그 다음 달 15일에 월급을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자차로 출퇴근한다. 이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바로 기능 학교를 알아봤을 것이다. 물론 숙소 생활을 하는 목수들보다 노동 시간이 적은 만큼 돈을 적게 받지만, 그게 어디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당 11만 원보다 생활 수준이 훨씬 나아질 기회였다.

 

그렇게 해서 내 생활 수준이 나아졌냐고? 잘난 척하며 쓰고 있지만 정작 내가 이 사실을 안 건, 내가 알았어야 할 때(?!)로부터 거의 1년 반이 지난 뒤의 일이다(...). 시작하기에 때는 너무 늦었다.

 

물론, 이런 무수한 무지와 바보짓으로 놓쳐버린 일들이 너무 많기에 지금 '삽질 연대기' 연재를 쓸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추신: 육체노동을 한 후, 집에 돌아와 가족을 챙기고 집중해 글을 쓴다는 게 생각보다 좀 힘이 부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리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적어지고 목소리도 더 작아져 때때로 없는 사람 취급 받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깊이 있게 쓰고 싶은 주제도 많지만 항상 주제가 이래 저래 튀는 점, 독자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명절과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