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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덕통사고

 

살다 보면 반드시 그런 순간이 있다. 사는 게 외롭고, 내 인생이 싫을 때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여느 먹방과 달랐다.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체구에 비해 다소) 많은 양의 음식을 맛있게 그리고 깔끔하게 먹는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생면부지 사람이 밥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화면에 왜 나는 빠져들었을까. 아무튼 그날부터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 앞에서 밥을 먹으면서, 그녀가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로또가 당첨되면 얼마나 좋을지, 돈이 생기면 여행은 어디로 가고 싶으며,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지. 그녀는 뭔가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한 그녀의 고민들은 뜻밖이다. 내가 그의 나이 때 고민하고 몸부림쳤던 것들과 많이 닮아있었다. 묘한 동질감이 든다.

 

내가 왜 그녀와 그녀의 방송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말과 글로 그 마음을 도무지 담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한 스트리머에게 심각한 덕통사고를 당했다는 것과(지난 몇 달간 기사를 전혀 못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나는 덕후가 되었다는 점이다.

 

모니터 너머의 위안

 

속절없이 상대가 좋아져서 내 마음을 내가 어찌 못하는 상태. 오랜만이었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니터 너머의 사람에게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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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만나러 가는 입장문

 

그녀의 방송 시간에 맞춰 잠을 자고, 방송을 시청하기 위해 재택근무를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때때로 현타가 오긴 했다. 하지만 그따위 것은 방송으로 얻는 위안과 즐거움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미약한 것이었다. 직장인의 스트리머 덕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과 여유라는 깨달음만이 뼈저리게 다가올 뿐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 자체는 황홀한 경험이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과 정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설렘과 기쁨이 존재한다. 덕후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몸은 피곤해졌지만, 일상에는 오히려 활력이 생겨났다. 휴방일에는 다음 방송 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밀린 일과 앞으로의 일을 미리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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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방송의 매력은, 스트리머와 시청자 간의 쌍방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친 채팅에 상대방이 웃어주거나 공감해 줄 때, 시청자는 스트리머와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을 받는다. 현실 친구가 많은 인싸들은 그게 왜 대단한 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아싸에게는 인터넷방송은 소중한 소통 창구이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니터 너머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살아있다는 기분마저 든다.

 

덕후의 딜레마

 

덕후생활이 아름답지 못할 때는 상대방에게 과몰입하거나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게 되는 순간이다. 스트리머와 시청자 간의 정서적 거리가 가깝다는 것은 인터넷방송만의 장점임과 동시에 엄청난 위험 요소다. 영화나 TV에서는, 작품과 창작자 간의 거리 유지가 어렵지 않다.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수지에게 푹 빠질 수도 있고, 입덕을 할 수도있다. 하지만, 수지를 현실 여친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여간해선 없다. 배우와 관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안전유리 보호막 같은 것이 쳐져 있는 셈이다.

 

인터넷방송에서는 스트리머와 시청자 간의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는다. 과몰입이 벌어지기 쉬운 구조다. 시청자는 채팅, 도네이션 등을 통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실시간으로 스트리머에게 전달할 수 있다. 스트리머는 방송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최대한 시청자들의 의견에 공감해 주거나 관심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시청자가 방송에서 보여지는 스트리머의 모습과 현실의 스트리머의 모습을 구분하지 못할 때이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스트리머에게 유사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누구 못지않은 덕후가 된 나. 선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응원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 부담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정말 그러길 바랐다. 그럼에도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실제로 내가 그녀로부터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이런 이성적 호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녀의 방송을 챙겨봤을까? 그녀가 나중에 공개 연애를 선언하게 되더라도, 지금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응원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방송인으로서의 그녀일까 아니면 자연인으로서의 그녀일까? 나에겐 정말로 사심이 없을까? 이런 불편한 질문들이 스스로에게 돌아왔다. 

 

슬기로운 덕후생활

 

명확한 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고민 끝에 그녀의 팬으로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할 수 있었다. 팬으로서 중요한 건, 내가 스타를 얼마나 진정성 있게 좋아하고,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스타를 정말로 좋아하고 그 사람이 자기 커리어를 계속 쌓아가길 원한다면, 팬으로서 해야 할 것은, 스타가 방송으로 성공하는 것을 응원하는 것뿐이다. 나의 스타가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방송을 해나가길 바라고 북돋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무리를 해서라도 본방을 사수하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친숙한 사람이 채팅창에 있고 우호적인 채팅이 있어야, 방송하는 사람 마음이 편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축구나 야구로 치면, 홈 팬들이 관중석에 든든히 버텨주는 그런 마음에서다.

 

물론 방송이 잘 되려면, 나 같은 고정 시청자가 계속 방송을 보는 것보다는 지속적인 신규 시청자가 유입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런 경우엔 친목질이 발목을 잡기 십상이다. 오래 방송을 봐온 고인물들이 대화를 장악하면, 새로 유입된 시청자들은 방송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동네 단골들에 의존해 지인 장사를 하는 식당의 매출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당장 방송일을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은, 고정 시청자들이다. 하지만, 신규 시청자가 유입되지 않는 방송에는 미래가 없다. 방송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새로 유입되는 시청자들을 위해 친목 위주의 대화를 금하고 신규 시청자 위주로 방송을 이끌다 보면 기존 시청자들은 와락 섭섭함을 느끼고 떠나가는 경우, 종종 있다. 그나마 조용히 떠나면 다행이다. 감정이 상한 코어 팬이 안티로 돌변하는 일도 발생한다. 이를 덕후가 흑화한다고 한다.

 

덕질생활에서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 스타와 스타의 방송에 대해 자의식을 발동시키지 않는 것이다. 모든 후원과 응원은 자발적인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그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거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것. 그런 마음가짐. 그녀의 방송 시간에 맞춰 경건한 마음으로 모니터 앞에 앉을 때마다 되뇌고, 또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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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시간

 

나는 행복합니다

 

안다. '이놈 뭐지?ㄷㄷㄷ' 싶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이 후욱후욱한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의 껄적지근한 마음. 경제 칼럼 끄적거리면서 온갖 폼은 다 잡아놓고 실상 이런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다니, 세상에 멀쩡한 놈이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드신 분들의 마음도 완벽히 이해한다. 나도 얼마 전까진 당신들이 서 있는 그곳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다.

 

이렇게 딴지에 뜬금없이 나의 덕통사고를 커밍아웃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딴지일보 편집부 놈들 때문이다. 한미동맹과 환율과 금리의 역학관계에 관한 원고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잠깐 방심해서 요즘 일상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흘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편집부 근육병아리에게 걸려버린 것이다. 끝까지 저항했으나, 남들 허벅지만한 전완근에 사시미 칼를 움켜쥐고 원고를 추심하는 근병을 벗어날 방법을 도저히 찾지 못하고 이렇게 치욕적인 고백을 하는 바이다.

 

허나, 나의 일상은 즐겁다. 행복하다. 딴지일보의 폭압도 나의 행복을 앗아가진 못할 것이다. 나의 덕질생활은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 확실히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그녀를 응원하는 팬으로서, 건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내가 언제까지 덕질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덕질을 하는 동안은, 그 사람한테 좋거나 혹은 무해한 덕후로 남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원고를 기사로 걸겠다고 결정한 근육병아리도 못됐지만, 이걸 굳이 마빡에 걸어야겠다고 새벽 2시에 신나서 전화한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는 정말로 악질이다. 민들레도 압수수색 당했다는데, 딴지일보도 털리면 꼭 죽돌의 하드에 잠들어있는 수많은 동영상 목록이 만천하에 드러나길 우리 스타의 떡상과 같은 마음으로 빈다.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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