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시중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근무하기 전부터, 근무하면서도 노동조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침 주변에 노동조합 출신 선배님들이 계셨고 그분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활동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인연으로 21년 연말에 22년도 노동조합 선거에서 선거 캠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의 기록과 기억으로 대기업에 속하는 은행권 노동조합 선거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0. 은행의 노동조합 선거
은행은 한국노동조합 총연맹 산하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이라는 산별 조합입니다. 각 은행은 ㅇㅇ은행 지부로 불리며 각 지부의 지부위원장을 선출하는 선거입니다. 편하게 은행들에선 '위원장'으로 부르며,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정도로 팀을 꾸려서 출마하게 됩니다.
4명의 출마자는 위원장을 기준으로 '러닝메이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러닝메이트 외에 선거사무장을 필수로 둘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거사무장은 선거를 치르며 발생하는 각종 업무를 처리합니다. 그 외 명칭은 제각각이지만 운영위원들을 포함하여 선거캠프는 최소 10인 정도, 많으면 30인 이상으로 이뤄집니다. 당선 후 위원장이 함께 일할 팀(집행부라고 부릅니다)을 꾸릴 때 위에 언급한 선거 캠프 인물들이 주로 조합에서 직책을 맡습니다.
마치 대통령 선거나 지방선거처럼, 투표 인원 1만여 명의 작은 선거 세계 안에서도 다양한 선거 전략과 책략들이 이용되며, 승자독식 선거 룰에 따라 패자에겐 예상치 못한 정치적 복수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출처-<연합뉴스>
그 안에 있지 않으면 잘 모를 수 있는 노동조합 선거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은행의 노동조합은 겸업이 아니며, 규정에 따라 별도의 노동조합 사무실(은행 본점 내에 있습니다)에서 노동조합과 관련된 업무만 수행합니다. 재밌는 건 급여도 은행에서 받지 않고 조합원들에게 받은 조합비로 받는 터입니다.
1. 선거 주기
은행들은 대부분 3년에 한 번 노동조합 선거를 치를 터입니다. 선거 시기는 은행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할 텐데 연말에 선거를 치르고 다음 해에 취임을 하는 게 보통입니다. 연임에 제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통상 2회 위원장을 지내면 더 이상 출마하지 않는 게 관례 아닌 관례이지요. 대부분 한번 위원장을 지냈던 분들은 대부분 연임하고자 선거에 출마합니다. 그럴 경우 현 조합 출신을 '여당' 그 외 후보들을 '야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아직 관례를 깨고 3연임한 위원장은 없습니다. 이 직전 선거에서 전 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하고 이후 현업으로 돌아가면서 소위 말하는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때 후보들이 10여 명 가까이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당선이 안 되더라도 입후보하여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아서 차기·차차기를 노리기도 합니다.

금융노조 지부는 지방은행 등 다양하다
출처-<각 사>
2. 선거 준비의 시작 : 캐릭터 생성
선거 준비라고 하지만 거창할 건 없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노동조합 선거는 위원장이 그 중심이 됩니다. 위원장 이하 부위원장들도 나름대로 뛰어난 인물들이겠지만 지분율은 위원장이 9할입니다.
그 위원장이 출마를 마음먹고 주변에 사람을 모으는 게 첫 번째 준비입니다. 게임으로 치자면 캐릭터 생성입니다. 기간은 정해진 게 없습니다. 10년 전부터 일 수도 있고 1일 전일 수도 있습니다. 위원장이 되고자 하는 분께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맞는 인물들을 찾아서 영입하는 육성 게임입니다. 위원장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최소 본인 포함 6명을 모아야 합니다. 이제 퀘스트 시작이지요.
3. 퀘스트 : 동료를 찾아라
이제 위원장 캐릭터를 생성했으면 함께할 동료들을 모읍니다. 앞서 언급했듯 본인 포함 최소 6명입니다. 위원장 본인, 수석 부위원장, 부위원장 2명, 선거관리위원, 선거사무장은 선거관리 규정에 있는 최소 인원입니다. 이론적으론 이 인원으로도 선거가 가능하지만 실제 선거에선 이 외에도 운영위원들과 선거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줄 분들을 모으게 됩니다.
은행은 본점 외에 지역별로 수많은 지점이 있지요. 지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모두 선거인이기 때문에 지역들을 관리해줄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으는 게 위원장의 능력이며, 위원장이 모은 사람들을 보고 그 캠프에서 활동할지 말지를 정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직원은 노동조합에 큰 관심이 없을 터입니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한정적인데요. 주로 이전 집행부에서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던 인물들이 출마하게 되고, 그들이 영입하는 인물들도 직·간접적으로 노동조합에 참가했거나 발을 담갔던 인물들입니다.

출처-<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그러다 보니 내가 A라는 사람을 영입해서 참모로 쓰고 싶은데 B라는 출마자가 A를 먼저 영입하는 경우도 생기고, 내가 영입한 A가 나중에 통수를 치며 B의 참모가 되기도 합니다. 내 사람이라고 믿었던 A가 알고 보니 B의 첩자였다는… 작은 선거판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실제로 위원장으로 출마하겠다고 연락이 왔던 어떤 분은 인원을 모으지 못해서 출마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4.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가 시작되면 은행에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선거를 관리할 사람들을 뽑습니다. 위원장이 모아야 할 동료 중에 있는 선거관리위원은 후보자 측 선거관리 위원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회의가 열릴 경우 참여해서 후보를 대변하고 다른 후보들의 선관위+중앙선관위와 표결을 하는 등의 업무를 맡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은행의 인사부로부터 선거에 관련된 거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선거 유세 기간, 선거 홍보물 제작 기준 등 거의 모든 것을 선거관리 규정에 따라 관리합니다. 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후보선관위)는 홀수 인원으로 구성되어 추후 후보들 간의 다툼이나 선거관리 규정의 해석이 필요할 때 다수결로 안건을 결정합니다. 상당히 깨끗해(?) 보이지만 여기에도 암투가 존재합니다. 소위 '그 선관위는 누구누구 후보 사람이다'라는 것이지요.
잠시 다른 이야기지만 노동조합 위원장은 은행으로 비유하면 은행장과 동급입니다. 나름 그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으니 거의 모든 위원장은 연임을 노립니다. 연임을 위해 빠르면 3년 늦어도 1년 전부터는 다음 선거에 대한 구상에 들어가지요. 선관위에 누구를 추천할지도 함께 고민합니다. 이게 사실 문제입니다. 선거 유세 기간, 선거 홍보물 제작기준 등을 정할 때 중앙선관위에서 현 위원장 쪽에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기준을 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선거 유세를 대면, 비대면으로 할지, 홍보영상을 제작할지 말지, 선거 홍보물에 삭제되어야 하는 문구는 무엇인지… 이를 사전에 알고 있다면 대응하기가 훨씬 수월하고 비용도 적게 들겠지요.
제가 참여했던 선거가 딱 이랬습니다. 현 위원장 후보 측에선 선관위와 미리 말을 맞춘 듯 선거유세를 비대면으로 진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 직원은 노동조합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대면 유세를 할 경우 현 위원장과 이름 모를 후보 몇 명이 투표용지에 있을 때 아무래도 현 위원장에 투표할 확률이 높아지겠지요. 결국 이는 다른 선관위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야당' 후보들에겐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형국입니다.
5. 선거인 등록
위의 중앙선관위가 꾸려지고 선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나올 때 즈음 선거인 등록을 합니다. 선거인 등록에는 앞서 말씀드린 필수 인원과 선거 사무실 주소, 그리고 다른 직원들의 추천서가 첨부되어야 하고 공탁금으로 1천만 원이 필요합니다.
선거사무실은 선거기간에 위원장이 구합니다. 약 한 달여 소규모 사무실을 임차하여 모임·회의 등을 그곳에서 하게 됩니다. 추천서는 별도의 양식에 소속과 이름 그리고 서명이 들어간 추천서에 100여 명 추천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추천서를 작성해줄 직원들을 미리 포섭하는 건 위원장이나 지역을 관리해줄 캠프 인원들이지요. 공탁금은 99% 위원장이 부담합니다.
작은 선거지만 선거에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임차료, 공탁금, 홍보물 제작 등 공식적인 비용은 추후 선거가 끝난 뒤 기준 득표율을 달성하면 보전이 됩니다만 이런 공식 비용 외에 선거 캠프에서 사용하는 비용은 오롯이 위원장의 몫입니다. 돈 없으면 도전하기도 힘든 게 노동조합 위원장이지요.

출처-<SBS>
후보 간 번호 추첨도 이때 이뤄집니다. 후보들 선관위가 모여서 정해진 방식에 따라 기호를 부여받는데 이것도 캠프 내에서는 몇 번이 되었으면 좋겠다, 몇 번은 싫다 이러면서 원하는 번호가 나오길 기도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위원장 선거에서 기호별 색깔은 별도로 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갖춰지면 중앙선관위에서 선거인 등록이 확정됩니다.
6. 선거유세 PART 1
선거는 한 달 정도 시간을 소요합니다. 그중 약 2주간인 유세 기간에는 상당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은행은 전국에 지점들이 있기에 인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합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지점에 대면 유세를 계획합니다. 후보 4인이 각자 움직이지 않고 2인 1조로 움직입니다.
유세는 직원들이 출근하는 8시 30분 정도부터 6시까지 이뤄지는데 이를 위해 각 지점들의 위치와 거리, 지점의 컨택포인트(캠프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 등을 정리해서 효율적인 동선을 짠 뒤 차량과 기사를 구해 계약합니다. 후보들이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도 되지만 선거 유세라는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도와 지점 근처에 주차 공간이 없음으로 해서 생길 시간 손실을 감안했을 때 차량과 기사는 별도로 이용하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후보들이 대면 유세를 위한 동선을 짤 때 선거사무장 및 사무실에서는 각종 홍보자료를 제작합니다. 우선하여 홍보용 책자, 포스터, 명함을 제작하는데 홍보용 책자를 기본으로 제작하여 포스터와 명함에 요약된 내용을 싣습니다.

2019년 금융노조 위원장 선거 포스터
지부 위원장 선거는 금융노조 산하 각 은행별 위원장 선거이다
앞서 언급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이 홍보물의 기준을 정합니다. 크기부터 문구들을 모두 사전에 심의받고 심의가 통과된 홍보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심의받지 않은 불법 홍보물을 사용하는 후보는 징계받습니다. 징계 누적 또는 기타 사유에 따라 후보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 캠프는 홍보물 문구에 현 집행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고 두 번 정도 수정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세 동선을 짜고 홍보물을 제작한 뒤 유세를 시작합니다.
7. 선거유세 PART 2
선거 유세 기간에도 제법 다양한 해프닝들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A 지역은 a 후보 측 입김이 세고, B 지점에는 b 후보 측 캠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A 지역에서 유세하는 b 후보는 반응도 없는 밋밋한 유세를 펼치게 됩니다.
후보들의 유세는 지점 영업시간에 이뤄집니다. 옆에서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직원들은 업무를 하는 환경이지요. 직원들은 관심 두는 후보가 온다고 해서 온전히 집중하기 힘든 환경입니다. 그런 와중에 집중해주고 호응해주는 한 두 명이 후보들에게 힘을 줍니다. 반면 말 그대로 벽보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계속 연출되면 유세하는 후보들도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 B 지점에 b 후보 측 사람이 있으면 a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거나, 후보의 공약에 대해 공격하는 등 후보를 당황스럽게 하는 상황도 일어납니다.

출처-<금융위원회>
공식적으로 선거인에 등록된 6인(후보 4, 사무장, 선관위)은 규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유세 활동을 펼쳐야 합니다. 6인은 상대 후보 비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공식 선거인이 아닌 경우 후보를 비난한다고 해서 처벌할 규정이 없습니다. 저희 쪽 후보는 실제로 모 지점에서 과거 행적들이나 인신공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지점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보의 유세 멘트 중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 내용을 녹취해서 중앙선관위에 제보해 징계받기도 하는 등 선거 유세는 때에 따라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분위기입니다.
8. 투표
과거에는 지점별로 종이 용지에 투표해서 그것을 취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지요. 요새에는 사설업체나 정부 기관 등에 모바일 투표를 의뢰할 수 있어 대부분 투표는 모바일 투표로 진행됩니다.
투표 결과는 종료된 투표 시간 이후에 실시간으로 확인되며 후보가 3인 이상인 경우 한 후보가 투표율 대비 반수 이상의 득표를 하지 못할 시 상위 두 후보가 결선투표를 진행합니다. 저희는 최초 투표에서 약 30%를 득표했고 현 위원장 측이 절반을 넘기지 못해 결선투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선 투표가 발생하면 중앙선관위는 다시 결선 투표일을 정하고 유세 방법을 등을 정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결선투표가 발생하면 약 2주 뒤에 투표를 실시하고 1주일 정도 유세 기간을 주었다고 합니다. 제가 겪은 선거에서는 투표일은 3일 뒤, 추가적인 유세는 없이 바로 결선투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결선투표에서 100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9. 개표 후
투표는 전형적인 승자독식입니다. 1표 차이건 10,000표 차이건 패자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아직도 그날 저녁 술자리가 기억납니다. 6명이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몇 잔의 술을 비우고 겨우 입을 뗐었지요.
여담이지만 선거가 끝나면 캠프 내 후보 간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답니다. 누가 잘했네 못했네, 너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같은 매우 흔한 이유지요. 다행히 저희는 아무 문제 없이 선거를 마쳤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차기에 다시 출마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같은 분이 또 출마할지 알 수 없고, 제가 또 캠프에서 활동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사람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선거라는 세계에 뛰어들어본 경험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혹여라도 24년 말에 예정된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그리고 다른 결과, 다른 이야기가 생긴다면 2부를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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