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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혈연

 

우리는 살면서 많은 빌런을 만난다. 쉬는 날 카톡 보내는 상사, 꼭두새벽부터 쿵쾅 뛰어다니는 윗집, 내 플레이스테이션을 빌려 가 팔아먹은 친구. 이 정도는 소소하다. 문제는 지독한 빌런. 심지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인생이 상당히 고달프고 외로워진다.

 

아버지는 내 인생 최대 빌런이었다. 10대에는 두려웠고, 2-30대에는 증오했다. 그 무렵, 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후로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이제 내 나이 40줄. 원망의 감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대신 한 인간의 영역에서, 그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 그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쯤 되면 눈치채시겠지만 나는 관점에 따라 제법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불행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빈곤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아니다. 세상엔 많은 언론사가 있고 많은 정치인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켜주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으니까. 

 

나의 이 소박한 이야기가, 꽤나 독특한 근현대사를 가진 한국에서, 한국인의 가난과 불행을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위로받을 분이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는, 계속.      

 

 

#1. 나는 결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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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1> 

 

 

국민학교 시절, 참 많이 두들겨 맞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래도 졸업식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끝났다. 생전 처음으로 꽃다발을 받고, 가족들과 시내로 나가 저녁에 먹을 피자도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13세 인생이(고작 13세이지만), 오랜만에 잘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얼마 후 중학교 소집일이 되었다. 입학 전 전달 사항을 듣고, 교과서를 미리 받으러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무거운 교과서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동네 오락실로 들어갔다. 수중에 가진 200원어치 오락을 하고, 동네 형 옆에 붙어 앉아 게임을 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허기가 져 친구와 오렌지 맛 환타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배를 두드리며 집에 도착했다. 이제 저녁만 잘 넘기고 잠자리에 들면 완벽한 하루였다.

 

기분 좋게 현관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여느 때와 사뭇 다른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머니는 어디 갔다 이제 오냐고 물었다. 오락실 이야기는 빼고, 무거운 책을 들고 걸어오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대답했다. 어머니의 가벼운 잽 공격에 나름 잘 방어했다고 생각했다. 눈치 없이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갑에 돈이 비는데 암만 찾아도 없다."

 

친구와 게임을 할 때 사용한 200원은 합법적인 비자금이었다. 며칠 전 과자를 사 먹고 남은 돈이었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나: “얼마가 없는데. 나는 돈 안 가져갔는데?"

 

어머니: “2만 원이나 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쓴 데가 없는데.”

 

나: “근데 그걸 왜 내한테 말하노?”

 

어머니: “돈에 손이 달릿나, 발이 달릿나. 어디 갔겠노. 니 빨리 사실대로 말해라.”

 

실제로 난 지갑에 손을 대도, 큰돈은 챙기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지갑에 지폐가 보여도 동전 몇 개만 챙기면서, 그 규칙을 잘 지켜왔다. 그래서 이미 범인을 나로 단정하고 말하는 어머니의 불합리한 추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 어디서 흘맀겠지. 나는 모른다.”

 

“이제 더 안 물을끼다. 우쨌노? 다썼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어머니의 날 선 반응에 당황했다. 하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계속 혐의를 부인했다. 당시는 자식과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개념이 흔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예능 프로그램에 육아 전문가가 나와 '내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이야기하지만. 내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부모 자식 간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심증을 넘어 확증 단계에 넘어선 어머니. 아버지도 나를 고달프게 했지만, 어머니도 만만치 않게 막무가내라는 걸 그날, 새삼스레 느꼈다.

 

“말로 할 때 도로 내놔라. 다 써삤나? 니는 꼭 맞아야 말을 하제?”

 

“안 가져갔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노! 그냥 때리삐라!”

 

증거도 없이 설마 때리겠나 싶은 마음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회초리를 가지러 가셨다. 12시 하교 후,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어머니와 언쟁을 시작한 순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줄곧 맞았다.

 

 

#2. 난타의 기억, 곡선 훌라후프

 

어머니는 나무 회초리를 휘둘러 온몸 구석구석을 때렸다. 종아리에 피멍이 올라오던 찰나, 나무 회초리가 부서졌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허리띠로 맞은 걸 본 적도 있기에 이 정도 체벌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런 안일한 생각이 사라졌다. 어머니가 플라스틱 재질의 조립식 훌라후프 조각을 들고 와 2차전을 시작할 때부터.

 

훌라후프로 때리다니. 상상해보면 시트콤 같아 웃음이 피식 나온다. 하지만 그때 나는 심각했다. 직선으로 뻗은 나무 회초리는 타격점이 형성되어 살과 부딪혔을 때, 어느 정도 완충 작용이 있다. 잠깐 따가운 것만 참으면 된다. 반면에 곡선 훌라후프는 끝이 뭉툭하고 단단해서, 머리나 뼈마디에 맞았을 때 통증이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따악-! 하고 맞으면 10초가량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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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드라마 <미생>

 

창밖에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군가는 하루의 끝을 준비하고, 가족들과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기대하며 귀가했을 그 시간. 우리 집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한 치의 양보 없는 기 싸움이 계속됐다. 매질을 멈출 타이밍을 못 잡았던 것일까. 나중에는 어머니도 오기로 매질을 했던 것 같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우리 모습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참으로 가관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가져가지 않았지만, 그냥 거짓으로 인정하면 상황이 나아질까? 맞으면서 수없이 갈등했다. 맞는 것도 우는 것도 지치고, 그냥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맞고 또 맞았다.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거짓을 고백하려던 찰나, 왜 큰돈이 사라졌는지 기억났다. 나는 억울해서 울부짖었다.

 

"며칠 전에 피자 사 먹었잖아!!!"

 

어머니는 딱 한 마디 하셨다. 

 

“아 맞다.”

 

 

#3. 어머니의 빨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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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드라마 <응답하라1988>

 

울그락 불그락 터질 듯 독이 차 있던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사과? 그런 건 없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어머니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얻어맞은 기억이 꿈이었나 착각이 들었다.

 

매를 맞고 퉁퉁 부어 있는 자식을 두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아무리 민망하다 하더라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나마 남아있던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박살났다. 사실 몸보다 아픈 건 마음이었다. 그걸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매번 따뜻하지 않아도, 가끔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나를 불신하고, 나를 버리고 갈 수도 있겠다고 하는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훗날 친구를 만나고 이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두려움에 가슴을 졸였다. 이 행복도 언젠가 끝이 나겠지. 병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렸다. 상대가 나에게 주는 따뜻함이 클수록 불안함도 비례했다. 상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그 예감이 현실로 다가올 때면, 그 모든 원인이 나 때문이라 생각했고 점점 자기혐오가 깊은 사람이 되어갔다. 물론 이유를 이 사건 하나만 대기에는 너무 얄팍하지만 그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던 건 사실이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그 시각, 나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소리 내 울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빨간약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상처를 확인하는 어머니 손길을 거부했다. 어머니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뭘 잘했다고 소리치노!”

 

그리고 퍼렇게 피멍이 든 종아리에 빨간 약을 죽죽- 펴 발랐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조금 달라졌다. 잔소리는 해도 나를 때리지는 않으셨다. 물론 그날의 기억은, 장성한 후에도 나를 좀먹는 상처가 되긴 했다. 

 

어른이 된 지금, 어머니 입장에서 상황을 돌이켜봤다. 자식을 오해한 것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끄럽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미안한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표현력이 부족하고 사과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그리고 그 방식이 세련되지 않은 사람이라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약을 발라주러 방으로 들어온 것이 어머니의 사과 표현이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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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드라마 <응답하라1988>

 

 

#4. 표현이 어려운 사람들

 

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어머니는 ‘어른’의 지위를 지키고 싶었다. 당신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자식들에게 혹시 무시당할까, 자신이 틀린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버지와 분담해야 하는 가정 교육의 역할을 홀로 해내야 했기 때문에, 교육자로서 지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 자식은 절대 남편같은 망나니로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사람답게 키우겠다는 집념이 강했다. 어떤 때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도 강박이 작용했다. 간접적으로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줄 여지가 있는 일이라면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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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드라마 <응답하라1988>

 

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 아니었다. 당신께서도 어릴 적부터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지 못했기에, 당신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법도 몰랐다.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사랑을 베푼다. 나이가 들어서 억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쁜 표현을 사용하고, 숨 쉬듯 일상적으로 따뜻함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늦게라도 학습하려 했지만, 사랑을 주는 일은 지금도 낯설고 어렵다.

 

집에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내가 방황했듯. 장성한 자식들이 표현이 서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어머니도 외톨이 인생을 사셨다고 한다. 최근 들어 자주 하는 말씀이다.

 

“내가 표현을 잘 못해가꼬 니들이 못 느꼈겠지만은, 내 나름 표현할라꼬 노력했다.”

 

어머니께 장난을 치고 싶을 때, 이날 일을 이야기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매번 머쓱한 웃음을 지으신다. 어머니가 잘못 선택한 훈육 방식, '매질'은 나에게 큰 상처로 남았지만. 이제 와 좋게 생각하면, 가장 강력한 극약 처방이 이뤄진 날이기도 했다.

 

“더러워서 남의 돈 쓰나봐라.”

 

그날 이후로, 나는 지갑에 손 대는 습관을 한방에 치료했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