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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어느 날, 모두가 잠든 새벽. 한 도굴꾼 일당이 대마도(이하 쓰시마)에 위치한 타쿠즈다마 신사(多久頭魂神社), 가이진 신사(海神神社) 그리고 간논지(觀音寺)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각 장소 별로, 보물을 하나씩 훔친다. 순서대로 대장경 1점(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 동조여래입상(일본 중요문화재), 금동관음보살좌상(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 대마도 곳곳을 돌면서 딱 1점씩만 도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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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일찍이 일본으로의 환수가 결정된 동조여래입상

<출처 - 오마이뉴스>

 

이중으로 잠긴 가이진 신사의 보물고를 뚫어, 불상 하나만 들고 간 그들의 의도는 이랬다.

 

“일본이 약탈한 우리 문화재를 훔쳐 와 팔아보자.”

 

도굴에 성공한 그들은, 유유히 부산항으로 들어왔고 ‘아마추어’처럼 겁 없이 이곳저곳 접선한다. 그 모습을 수상쩍게 여긴 사람들은 장물 냄새를 맡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이내 경찰은 도굴꾼을 검거하고 훔친 문화재를 회수한다. 이 과정에서 대장경 1점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대장경의 행방을 묻자 도굴꾼은 이렇게 답한다.

 

“가치가 없어 보여서 대장경 1점은 오는 길에 버렸다.”

 

진작에 팔아먹고 ‘꺼-억’했다는 소리다. 뭐 어쨌든, 범인을 잡고 아쉬운 대로 장물도 회수했으니 이제 쓰시마에 돌려주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그거, 원래 우리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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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권 소송 중인 금동관음보살좌상

<출처 - 연합뉴스>

 

도난당한 문화재를 회수하면 반드시 ‘제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원칙이다. 일반적으로는 쓰시마 사찰과 신사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약탈당한 문화재를 다시 훔친 ‘이중 도난’ 상태라면, ‘제 자리’는 어디를 뜻하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있던 곳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 도굴단이 훔친 세 점의 문화재 중, 금동관음보살좌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국내 사찰이 있었다. 바로 서산의 부석사(浮石寺)다(의상이 세운 영주 부석사와 다른 곳이다).

 

서산은 조운선과 무역선이 지나는 루트에 위치해, 당시 왜구가 약탈을 위해 자주 드나들던 지역이었다. 부석사의 주장에 따르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1330년경, 고려시대 부석사 봉안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 왜구가 화려한 고려 사찰 예술품을 훔치던 시기, 함께 약탈해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쓰시마 간논지에서 보살상을 봉안한 건 1526년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부석사는, 2013년 ‘불상을 간논지에 반환하지 말아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했다. 그리고 불상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제기한다. 2017년 1심 재판부는 

 

“부석사가 약탈당한 거 맞으니 얼른 돌려주셈”

 

이라는 판결을 한다. 이렇게 도굴꾼이 쏘아 올린 ‘약탈당한 문화재 반환’ 이슈 덕분에,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서산 부석사로 다시 돌아오는 줄 알았으나. 2023년 2월1일, 1심 선고를 뒤집는 판결이 나왔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쓰시마의 간논지 소유가 맞음. 간논지에 돌려주셈”

 

관음보살좌상이 한국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넘었고, 1심 판결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이러한 판결이 나온 이유가 궁금하다. 1심과 2심 판결을 토대로 양측 쟁점을 정리해보자.

 

부석사 주장: 1330년 2월 환치본처(還至本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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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석사 전경

 

현재 서산 부석사 건물 중 다수는, 조선 중기에 중수하고 현대에 들어와 재보수하거나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즉, 서산 부석사에는 고려시대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 사료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부석사는 관음보살상이 약탈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불교에는 복장(服藏)이라는 개념이 있다. 불상을 조성하고 나서, 불상 내부에 여러 부장품을 넣고 봉인하는 것을 말한다. 수백 년간 대웅전에 있던 불상 내부에서, 옛 기록이 나오는 예가 적지 않다. 간논지 관음보살상도 그랬다. 1951년, 간논지 관음보살상의 복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성 조성 배경을 밝힌 글이 발견됐다.

 

<남섬부주고려국서주부석사당주관음주성결연문> (고려국 서산 부석사에서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는 이유를 밝힌 글)

 

무릇 듣기에 모든 불보살들이 큰 서원을 내어 중생 제도에 너와 나를 떠나 평등하게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인연이 없는 중생은 교화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부처님 말씀에 따라 제자 등이 함께 대서원을 내어 관음 1존을 만들고 부석사에 봉안하고 영충공양하는 까닭은 현세에서는 재앙을 소멸하고 복을 부르는 것이며 후세에서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바람 때문이다. 

 

-천력 3년(1330년) 2월.

 

서른 명이 넘는 백성의 후원을 받아 조성된 관음보살상의 장소(서주, 고려 때 서산을 일컫는 지명)와 시간(1330년)이 담겨있다. 즉, ‘고려 부석사’의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1526년, 간논지가 창건될 때 봉안된 관음보살상은 어떤 경위로 넘어가게 되었을까.

 

불상 조성 후, 법당에 안치할 때 ‘점안식’이라는 의례가 있다. 이때 불상의 복장에 불상 조성 이유를 써 넣는다. 그리고 불상이 ‘공식적인 절차’로 다른 절로 옮겨질 때는 ‘이운식’이라는 의례를 거친다. 이때는 불상 이전 이유와 어디서 어디로 옮기는지 써넣는다. 즉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면, 관음보살상에는 ‘언제, 어떤 이유로 부석사에 있던 관음보살상을 대마도 관음사로 이운하였다.’ 와 같은 글이 복장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틈만 나면 서산 일대를 들쑤셨던 왜구의 약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불상 조성(1330년) 이후, 1352년부터 1381년까지 5회가량 왜구가 서산 일대를 약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성 연대, 조성 장소 기록이 없는 문화재에 비하면, 관음보살상 약탈 가능성은 충분한 역사적 타당성을 갖는다.

 

또한 관음보살상에는 불에 탄 흔적이 있다. 불상 일부인 보관(寶冠)과 대좌(臺座)가 존재하지 않는 등 일부 손상된 상태다. 이를 통해 불상이 정상적인 경로로 이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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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논지 사찰 전경

<출처 - 어나더 교토>

 

 

간논지 창건자에 대한 기록에서도 약탈 가능성이 드러난다. 아랫글은 일본 모 교수가 기고한 「쓰시마의 미술」의 일부로, 불상이 정상적인 반입 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관음사는 코노헤이사에몬 모리치카라는 사람이 창건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악행을 저지르다가 불교를 수양하여 귀국해 관음사를 열었다.

 

이렇게 약탈 가능성을 시사하는 간접 증거와 기록을 바탕으로, 1심 재판부는 관음보살상이 약탈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부석사에 돌려주라는 판결을 한다. 

 

유네스코 국제협약에 따르면, 밀반출된 문화재의 경우 원래 소재지에 돌려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해당 문화재가 불법적으로 반출된 것이라면 반환을 거부할 수도 있다. 따라서 관음보살상이 약탈당한 문화재라면, 원래 소재지 부석사에 불상을 돌려주는 것은 국제협약에 반하지 않다.

 

그래서 약탈당한 문화재라는 것이 밝혀지면, 법리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간논지 주장: 들어는 봤나? 점유취득시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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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고법 재판에 참석한 간논지 다나카 주지

<출처 - 연합뉴스>

 

1심 선고 후 5년의 세월 동안, 간논지는 적극적인 대응을 준비했다. 주요 주장은 세 가지다.

 

첫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약탈해온 문화재가 아니다.

 

1527년, 종간이라는 자가 조선에서 불상을 양도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 전기는, 왜인이 조선에 들어와 대장경판을 비롯한 불교 유물을 달라고 드러눕던 시절이다. 당시 쓰시마 사람들이 이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이 역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재판장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다는 건 간논지 측도 알았을 터. 위 주장은, “우리 보살님이 약탈당해서 왔을 리 없잖아!” 같은 우격다짐 논거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판결의 향방을 가른 건, 간논지 측의 두 번째 주장이었다. 그들은 한국 민법과 일본 민법을 들고나왔다.

 

한국 민법에 의하면,

‘법인’이 10년 동안 소유의 의사를 가지고 아무런 문제 없이 불상을 점유했으므로 소유권은 간논지에 있다. 

 

일본 민법(1898년 제정)에 의하면, 

만약 불상이 약탈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실 있는 선의’로 20년을 점유했으니 소유권은 간논지에 있다.

 

취득시효란, 내 소유가 아닌 물건이라도 일정 기간 점유하면 내 것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몇 가지 전제 조건(자주, 평온, 공연 점유, 선의, 무과실 등)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400년 동안 불상을 봉안한 간논지 측에게 유리한 논거였다.

 

이에 대해 부석사는, 간논지의 법인 설립이 언제든 관계없이, 장물에 대한 점유를 이어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선의의 점유’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 주장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간논지: “약탈한 거 아니다. 그리고 만약 약탈이 맞더라도, ‘점유취득시효’ 20년이 지나서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

 

부석사: “법인 만들 때부터 점유했다고 하지만, 장물이니까 시효 성립이 안 된다. 문화재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

 

여기서 다시 부석사 측에 불리한, 검찰 측 논거가 추가됐다. 

 

“1330년의 부석사와 지금 부석사는 이름만 같을 뿐, 같은 뿌리라는 근거가 없다.”

 

이에 부석사는 극락전 상량문의 내용을 근거로, 부석사가 의상 대사 시절부터 이어져 온 사찰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만한 고문헌 근거가 희박했다.

 

예를 들어, 보통 절터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절은 신라시대 절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절은 고려시대 부석사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하다. 따라서 소유권 다툼에 있어서, 21세기 부석사는 14세기 부석사의 소유권 문제를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뒤집힌 1심 판결, 2심 재판부 논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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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2심 재판부 판결은 세 줄로 요약 할 수 있다.

 

1. 약탈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종간 취득설은 터무니없다.

 

2. 법인 설립 이후 10년 이상(약 60년간) 평온, 공연하게 불상을 점유한 간논지, 민법 제246조에 근거해 간논지에게 소유권이 있다.

 

3. 고려 부석사와 현 부석사는 다른 종교 단체로 보인다.

 

2심 판결에서 핵심 근거가 된 ‘점유취득시효’. 만약 간논지가 창건될 때, 해당 불상이 약탈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수했거나, 간논지 창건 주체가 직접 약탈한 것이라면 새로운 반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유네스코에서 합의한 ‘문화재 불법 반·출입 등에 대한 협약’은, 1970년 이후 반출된 문화재를 대상으로 규정한다. 심지어 한국에서 진행하는 ‘약탈 문화재 환수 운동’은 주로 일제 강점기나 개항 시기에 발생한 문화재를 대상으로 진행한다. 고려 말 왜구에 의해 약탈당한 문화재의 경우, 다른 논법이 필요하다.

 

약탈 여부도 마찬가지다. 약탈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정상적인 취득에 대한 증거 모두 정황 증거가 대부분이다. 불상 제작은 1330년, 종간이 불상을 가져왔다는 연도는 1526년~1527년이다. 부석사 측이 『고려사』에 근거해 약탈설을 제기했지만, 200년의 공백을 해소하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

 

약탈국의 협조가 필요하다

 

일본인에게 ‘왜구 문제’는 이미 지나가 버린 오래된 역사다. 약탈 문화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위가 어떻든, 그것은 ‘한반도에서 흘러 들어온 문화재’일 뿐이다.

 

이를 두고 쓰시마 사람들은, 한반도와 쓰시마의 수백 년간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문화재가 오고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것을 약탈로 규정하는 한국인의 태도에 반발한다. 일부는 약탈일 수도 있지만, 구입하거나, 기증받았거나, 버려진 것을 주워 온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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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문화재 현황조사 결과 (2023년1월 기준)

<출처 -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약탈 여부를 입증할 방법이 부족하다. 기록 자체도 부족하고,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실소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음보살상은 간논지 측에서 복장을 개복했기에 연도를 확정할 수 있었다. 같이 도난당한 동조여래입상은 통일 신라 때 제작된 것이 확실하지만, 기록이 없어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일본에 반출되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역사적 의미를 밝히지 못한, 수많은 우리 유물이 있을 것이다. 선조(先祖)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빼앗겼는지 알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설령 기적적으로, 대법원판결을 통해 금동보살좌상의 소유권이 부석사에 있음을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당해 판례에 따라 일본 열도에 혼재된 수많은 한반도 문화재를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화재 환수는, 정부의 재정적, 행정적 지원 아래 ‘민간과 민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부석사 관음상의 경우, 부석사와 간논지 간 성지순례, 쌍둥이 불상 봉안, 불상 장기 이운 등의 형태로 조금씩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물론 소송까지 간 지금은 어렵겠지만.

 

문화재 환수를 위한 새로운 셈법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피해와 상처가 크다. 그리고 피해자가 한 수 굽히고 협상에 임해야 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전란으로 수없이 많은 유·무형 문화재 소실을 겪었다. 슬프게도 현실에서, 가해자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단 유물을 받아 조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그 결과 문화재 반환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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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는 약탈에 의한 반출이 명백하게 기록으로 증명된 유물이다. 기록을 발견하고 이후, 환수를 위해 외교적으로 노력했다. 그렇게 간신히 ‘소유권 이전’이 아닌, ‘장기 임대’라는 형태로 환수할 수 있었다. 

 

현재 금동보살좌상은 지역사회, 조계종, 부석사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잘 준비해서 승소하는 것 외 다른 출구 전략은 없다.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 일본의 협조는 필수적이다. 외규장각 의궤의 경우와 같이 일단 문화재를 한국으로 반입할 필요성이 있다.

 

약탈 문화재를 돌려받는 건,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같아 보이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본이 “우리가 약탈한 것이니 도로 가져가십시오.” 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일본의 협조를 구하는 과정이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부석사로 돌아오는 조건에 ‘한국 부석사와 일본 관음사가 함께 모시는 관음보살’이라는 글을 새긴다면 많은 국민이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2심 판결을 마주한 지금, 난 역사의 한 조각을 다시 잃게 될까 두렵다. 자칫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역사 조각들을 잃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래서 범부인 나는, 천진난만한 희망을 품어본다. 도난 문화재, 특히 고려 말 이전에 유출된 문화재 조사, 연구, 나아가 환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셈법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자산이 될 경우를 생각하고,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약탈 문화재가 우리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는 건 머지않은 일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석광현, 「대마도에서 훔쳐 온 고려 불상의 서산 부석사 반환을 명한 제1심판결의 평석」, 2017, 3-58.

송호영, 「누가 「고려 불상」을 소유하는가?」, 2019, 279-313.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부석사 불상은 장물인가 회수물인가(링크)>

[뉴시스] <대전고법 “금동관음보살좌상 소유권은 일본”...관음사 취득시효 인정(링크)>

[한겨레] <한국 절도범이 불상 훔쳐간 지 2년, 쓰시마 사람들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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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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