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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쟁의 슬픔 : 6년을 최전선에서 보낸 이가 쓴 전쟁소설

 

(3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덧없는 섹스와 무거운 인생 사이에서

 

(33) 팔레스타인의 양치기 소녀 : 이스라엘이 소녀, 아마니에게 한 일에 대하여

 

(34) 올리버 트위스트 : 가난한 인생의 두 가지 선택지

 

 

 

소설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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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문학동네>

 

 

금복이의 탄생, 싸구려 이야기가 시작되다

 

이 싸구려 이야기는 한 아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뭇 남자들을 뒤돌아보게 하는 요상한 냄새(누군가는 배란기 암컷 냄새라 했고 좀 더 배운 사람들은 페로몬 냄새라 했다)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의 이름은 금복이다. 금복이의 가슴이 복숭아만 할 때, 금복이는 달밤에 비린내가 몸에 밴 생선 장수의 삼륜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이로써 금복이의 다사다난한 인생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된다.

 

오래전 금복의 엄마가 아이를 낳다 죽은 이후, 그는 밤마다 욕정과 홀로 싸워야 하는 외로운 수컷이었다. 그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끔찍이도 사랑했지만 금복이 조금씩 여자의 태를 갖춰가기 시작하자 홀아비의 음욕은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홀아비의 눈에 금복이와 이웃집 소년이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금복이는 저고리를 벗고 작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고 소년은 조심스레 탐색하다 드디어 떨리는 손을 가슴에 대려는 참이었다. 홀아비의 눈깔이 뒤집혔다. 낫을 든 그 눈깔에는 질투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도망쳤고 금복이는 모진 매질을 당했다. 그 여린 몸뚱이에서 살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어디선가 생선 냄새와는 다른 이상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뒤이어, 남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한 어린 계집애가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쭈볐거리며 다가왔는데, 삼륜차 불빛에 자세히 보면 엉덩이도 제법 통통한데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어나려는 중이어서 생선 장수의 눈엔 그저 마냥 어린 계집애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시큼한 냄새나 풍기는 노인네들만 사는 산동네의 유일한 외지인 방문객. 그 노인네들이 환장하는 소금 덩어리 고등어 등을 삼륜차에 싣고 다니는 생선 장수 옆자리에 금복이가 앉았다. 하늘에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떴고 등짝에는 자신을 떠미는 듯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금복이는 마을을 떠났고 다음 날 마을 저수지에서는 홀아비의 시체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질투에 눈이 먼 금복의 엄마가 그를 데려갔다고 수군댔다.

 

 

생선 장수를 따라나선 금복이 앞에 새 사내가 나타나다

 

난생처음으로 산동네를 벗어나 부두라는 곳에 도착한 금복이. 그날 밤 생선 장수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금복이의 옷을 벗겼다. 금복이는 생선 장수 몸에 밴 독한 비린내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지만, 그냥 가만히 참고 있었다. 이것이 생선 장수가 베푼 호의의 대가일 터이니 금복이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금복의 가슴은 성난 복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엉덩이는 안반짝만하게 벌어졌다. 금복의 냄새는 더욱 진해져 부두의 진한 생선 비린내 속에서도 지나가는 남정네 누구라도 돌아보게 할 때였다. 그날따라 금복은 잠들 수 없었다. 생선 장수는 늘 그렇듯 금복의 배에 올라 몇 번 몸을 꾸물거리다 슬그머니 내려와 혼자 곯아떨어졌다. 금복은 밖으로 나갔다. 해안엔 희미한 달빛 아래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고, 금복이 고향을 떠나던 날 등을 떠밀던 그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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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보았다. 금복은 저고리와 치마를 벗고 알몸으로 물속에 들어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파도가 휘감았다. 금복은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헤엄쳐도 고래를 만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고래는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상실감에 빠진 금복이 앞에 다른 고래, 만질 수 있는 고래, 걱정이가 나타났다.

 

 

부두의 역사(力士) 걱정이, 금복이와 함께 하다

 

금복이 자리 잡은 부두에는 거대한 장골(壯骨)의 역사(力士)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걱정’이었다. 걱정이의 키는 팔 척이 넘었으며 검게 그을린 그의 구릿빛 팔뚝은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그의 뱃구레는 어린애쯤은 뛰어놀아도 좋을 만큼 넓었고 그는 한 끼에 커다란 주발에 담긴 고봉밥 다섯 주발, 삶은 돼지고기 두 근과 막걸리 한 말을 먹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배를 가만히 만져보며 거대한 생명체의 울림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손끝을 통해 느껴지는 진동에 온몸이 떨리고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사업가 기질 다분한 금복이는 생선 장수를 채근해 덕장을 차렸다. 덕장은 장사가 잘되어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던 어느 날 금복이 앞에 걱정이가 나타났다. 자신의 덕장에 나타난 이 거대한 사내의 모습에 넋이 나간 금복이는 선술집에서 무시무시하게 먹어 치운 걱정이가 하역부 숙소에서 웃통을 까고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그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낮잠을 자는 그의 배는 숨 쉴 때마다 거대한 파도처럼 오르내렸고 금복이는 매혹됐다. 그리고 눈을 뜬 걱정이는 달뜬 금복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느 날 걱정이가 금복이의 덕장으로 찾아왔고 금복이는 걱정이를 따라나섰다. 이것은 늙은 생선 장수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금복이의 허기를 달래줄 그 무엇도 없었다. 걱정이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생선 장수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었다가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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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넋 나간 표정의 생선 장수를 뒤로하고 금복이는 걱정이를 따라갔다. 이것은 금복이가 생선 장수를 따라 이 부두로 온 지 삼 년 뒤의 일이다.

 

그의 순박함을 사랑했으며 거대한 고래에 매료된 것처럼 단숨에 걱정의 육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마침내 둑이 무너졌고 걷잡을 수 없는 봇물이 쏟아져 내렸다. 걱정이가 변강쇠라면 금복이는 옹녀였다. 금복이는 부끄러움과 미숙함을 버리고 온몸을 걱정을 향해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금복이의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손가락 네 개뿐인 사내의 등장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그는, 부둣가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더러운 일에 빠짐없이 연루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네 개뿐인 건달이 부두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얼굴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이 있으니 칼자국이라 칭할 뿐이었다. 이 부둣가 도시에는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한 전도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김으로써 오래오래 기억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칼자국의 것은 칼자국에게.

 

오직 깡 하나로 일본으로 밀항해 야쿠자들 밑에서 어떻게 칼을 꽂아야 단숨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가를 배우는 열여섯 살의 소년 앞에 하얗게 분칠한 얼굴의 게이샤, 나오코가 나타났고 외로운 소년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어리고 정식 조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소년은 자신의 칼을 꺼내 손가락 하나를 잘라 나오코에게 내밀었다. 자신을 기억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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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따이

 

세월은 흘렀고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라이벌 조직원에게 칼을 꽂아 정식 야쿠자가 되었다. 입단식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 충성을 맹세한 그는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다시 나오코를 찾았다.

 

한참 후 그를 기억해낸 나오코는 다시 거절했다. 그가 아직은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다시 그녀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랐고 늘 앞장서 칼을 휘둘렀다. 조직의 이인자가 된 그를 나오코는 또 거절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오야붕이었다. 그는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잘라 그녀에게 바쳤다.

 

세월은 흐르고 상사의 고통은 더 심해져 갔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라이벌 조직의 표식이 새겨진 칼을 오야붕의 가슴에 꽂았다.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그 시체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 이후 두 조직 간의 치열한 전쟁을 주도했고 끝내는 승리하여 드디어 오야붕이 되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만 남은 그, 칼자국은 다시 그녀를 찾았다. 드디어 그녀는 허락했다.

 

칼자국은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에 감동과 희열을 느꼈고 밤새 몇 번씩이나 쾌락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나오코를 보았을 때 그만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하얀 분칠이 지워진 나오코는 축 늘어진 젖가슴과 주름투성이 얼굴을 가진 늙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간의 세월이 칼자국의 다섯 개 손가락과 나오코의 젊음을 앗아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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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발...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노라

 

칼자국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하며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 여섯 개의 손가락과 비극적 사랑을 가슴에 묻고 칼자국은 조국으로 돌아와 부둣가 도시 밤거리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그 맹세는 지켜지지 못했다. 금복이 칼자국의 극장에 나타났을 때, 칼자국은 금복에게서 나오코의 냄새를 맡았다. 칼자국은 두 개밖에 없는 손가락이 달린 손으로 금복의 손목을 쥐었다.

 

 

일 톤짜리 밥벌레가 된 걱정이

 

거대한 태풍이 부두를 덮친 날이었다. 태풍에 쌓아놓은 통나무 더미가 무너져 인부들을 덮칠 때였다. 걱정이는 자신의 몸으로 그 통나무를 막았다. 위대한 힘이었다. 그 큰 통나무가 걱정이의 가슴과 팔 앞에서 멈추고야 말았다. 그러나 인부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더 크고 더 많은 통나무들이 걱정이를 덮쳤다. 걱정이는 무너졌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대. 스스로 완전한 존재여. 나의 모든 것, 내 모든 비밀과 기쁨, 내가 걸어온 모든 발걸음, 내 모든 피와 살을 들어 바라건대 부디 이이를 구해주소서. 그 대가가 무엇이든 기쁘게 받겠나이다.

 

목 병신 다리 병신이 되었고 밤마다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능은 점점 더 낮아지는 걱정이 앞에서 금복이는 빌고 또 빌었으나 걱정이는 오직 그 무시무시한 먹성만이 남은 밥벌레가 되었다. 그리고 걱정이의 몸무게가 오백 킬로그램에 육박할 때, 그의 성기가 완전히 살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 그가 싸재끼는 어마어마한 양의 배설물을 대형 요강이 감당하지 못할 때, 더 이상 금복이에게 먹을 것을 살 돈이 없었을 때, 그래서 오직 칼자국의 도움만으로 살아갈 때, 금복이는 칼자국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자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 만일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자를 당신으로부터 영원히 분리해놓을 수도 있어.

 

걱정이의 몸뚱이가 이제 일 톤에 육박할 때였다. 금복이는 칼자국 제안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파란 불길이 이는 듯한 눈빛으로 칼자국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혀를 물고 죽겠다고.

 

 

두 사내와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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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잡귀가 울어대는 것처럼 바람 소리가 시끄러운 밤, 걱정이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깼다. 걱정이는 자신의 살덩어리들 앞에서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려고 용을 썼다. 부둣가 최고의 역사였던 그였다. 비곗덩어리 속의 근육이 꿈틀대며 마침내 온몸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살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본 것은 금복이가 알몸으로 낯선 사내를 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걱정이는 뱃가죽을 바닥에 질질 끌며 힘겹게 부둣가로 걸어갔다. 온 힘을 다했다. 길바닥에 비벼지는 뱃가죽에서 피가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걱정이를 깨운 바람 소리가 금복이도 깨웠다. 잠에서 깬 금복이는 강렬하게 다가오는 불길한  예감에 허겁지겁 걱정이를 찾았으나 걱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칼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금복이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부둣가로 달려갔다. 금복이의 눈에 칼자국의 등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거대한 파도가 보였다. 금복이는 증오심에 눈이 멀었다.

 

배에 와 닿는 금속성의 낯설고 차가운 느낌, 뱃가죽이 찢어지는 순간의 엄청난 혼돈과 날카로운 고통, 내장기관들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작살의 부드러운 직선 이동과 이물감, 등뼈를 스치며 마침내 쇠꼬챙이가 등을 꿰뚫고 나갈 때의 공포와 결국은 끝났구나 하는 어이 없는 안도감,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엄청난 공복감......

 

작살에 관통당한 칼자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걱정이는, 내가 죽이지, 않았어. 그는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평대에서 시작하는 새 인생

 

이름은 평평하나 坪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 垈 사람 살 집 아니로다

 

...... 야,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평대, 이름으로만 짐작하면 너른 들판과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넉넉한 마을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민망한 너새집 서너 채에 제대로 된 밭뙈기 하나 없었으니 완전히 세상과 고립된 벽촌 중의 벽촌이다. 밥 한 끼, 술 한 잔이라도 얻어먹을까 했던 어느 방랑 시인의 분노가 그가 남긴 시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철도가 평대와 평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다. 이 궁벽한 벽촌을 관통하는 철도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거리를 찾아 몰려드는 인부들, 건설회사 직원들, 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음식점들, 그리고 그들의 외로움을 달래 줄 작부들. 공사 중에 다친 사람들이 있으니 병원도 들어섰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줄 교회도 들어섰다. 평대에 빅뱅이 시작되었다.

 

이 빅뱅의 혼란한 와중에 한 여인이 평대로 흘러들어왔다. 칼자국을 죽인 후 사 년을 거지들에게 몸을 팔면서라도 버티고 버텨 끝내 살아낸 금복이였다. 그녀는 폐허가 된 평대역 근처 국밥집을 개조해 ‘평대다방’을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평대 최초의 다방이었다. 매혹적이고 슬픈 듯 관능적인 여주인 덕에 다방은 곧 모여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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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여주인은 미친 듯이 그리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간혹 돈 자랑과 함께 추파를 던지는 남정네들도 있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돈, 돈만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평대다방의 여주인은 아버지, 첫사랑, 그리고 두 번째 사랑까지. 세 명의 남자를 죽게 한 금복이였다.

 

금복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서 젊음은 모두 지나가 버렸으며 가장 뜨거웠던 시간으로부터도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사이 칼자국과 걱정에 대한 기억도 점차 멀어져 이젠 얼굴조차 희미한 상태였다.

  

 

고래극장의 오픈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의 종지부

 

초대된 귀빈들이 테이프를 끊는 절차를 마치고 줄을 잡아당기자 마침내 휘장이 걷히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극장의 전모가 드러났다. 거대한 고래가 막 물에서 뛰쳐나온 듯 꼬리를 한껏 치켜든 극장의 모습은 군중들이 상상했던 이상의 놀라움을 안겨주어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평대역 앞, 평대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고래극장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젠 평대의 유력인사가 된 금복이 감격에 겨워하며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금복은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이날을 위해 금복은 여성까지 버렸다. 나이를 먹으며 호르몬의 변화가 가져온 영향도 있었겠으나 금복은 스스로 남자가 되었다. 

 

금복이 어린 날 낯선 부둣가에서 보았던 고래의 그 거대한 모습. 고래는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자살,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간 두 남자의 죽음에 맞서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제 두려움 많았던 묘한 냄새의 소녀는 냄새가 사라진 나이에 남자로 변신하여 드디어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가장 큰 공포에 맞서 승리했음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야 만다. 아무런 전조가 없이도. 그것은 운명의 법칙이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제대로 된 펄프픽션 - 싸구려 소설, 삼류 소설을 의미 - 이 아니다. 끝난 것 같았던 금복의 다사다난한 인생에 가장 큰 저주가 남아 있었다.

 

평대 유일의 극장, 고래극장은 그날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객은 좌석을 모두 채우고도 모자라 통로까지 빼곡히 점령했다. 극장 안은 관객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들은 어디선가 희미한 휘발유 냄새를 맡은 듯했다. 그것은 바로 전날 밤, 극장에서 잠을 자던 영사기사가 난로 기름통을 들고 가다 그만 의자에 걸려 넘어지며 바닥에 쏟은 것이었다.

 

금복은 귀빈석에서 가득 찬 관객들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꺼냈다. 칼자국이 남긴 유물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였던 그녀는 그만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극장은 지옥이 되었다. 질식의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 이리 밀리고 저리 쓰러지며 짓밟히는 사람들, 그리고 몸에 불이 붙어 미친 듯이 바닥을 뒹구는 사람들. 세상에 다시없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금복은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취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쳤으나 마침내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회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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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이름의 펄프픽션

 

의미가 있으니 소중한 것일까요, 소중하니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한 번뿐인 인생이다 보니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생각보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 보니, 살아내다 보니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옵니다. 80억 명의 사람 중에서 죽는 순간에 “내 인생은 참으로 의미가 있었어, 난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루 종일 날갯짓을 하다 가는 나비가 하루를 영원으로 알 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식으로 살다 가는 것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中 -

 

영겁의 시간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 인생입니다. 먼 과거의 일이지만 어느 날 문득 떠올리면 어제의 일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많이 해봤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이 그럴 것이라 짐작됩니다. 꽤 긴 시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인생 순간들이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로 느껴질 것입니다. 생각보다 우리 인생은 허무합니다. 오죽하면 ‘인생무상’이란 말이 있겠습니까.

 

금복이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첫사랑은 자살로 생을 끝냈고 두 번째 사랑은 자신이 스스로 죽였습니다. 이 여러 죽음 앞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이란 오직 생존의 욕구였습니다. 평생 매 순간을 그녀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발버둥 칩니다. 거대한 고래, 그 무엇으로도 감히 죽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고래는 금복의 살고 싶다는 욕망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었습니다.

 

고래극장으로 상징되는 생명,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그녀의 욕망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녀의 인생 역시 고래극장 속에서 끝나지요. 

 

펄프픽션이라 불리는 소설, 혹은 소설 장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펄프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실리던 소설들을 뜻하는 말로 시작해 발전한 장르입니다. 당시 질 좋은 고급 종이에 제대로 정성 들인 소설들이 25센트 정도 할 때,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 흥미 위주로만 쓰인 싸구려 소설들을 실은 이 잡지는 대략 10센트 정도에 판매됐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걸맞게 저렴한 소설들이 실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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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들은 강도, 살인, 섹스, 마약 등의 자극적인 내용들이 주종을 이뤘고, 어떨 때는 외계인이 지구인과 섹스를 벌이다 마약을 먹고 악귀를 물리친다는 장르 파괴 내지는 장르 융합의 놀라운 실험 정신을 보인 어질어질한 소설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펄프픽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인생이란 결국 별다른 의미 없이 순간순간을 때우다가는 싸구려 펄프픽션 같습니다.

 

한 여인의 다사다난한 일대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암흑가 누아르이자 삼류 치정극이며 공포 소설이기도 한, 한편으로는 믿지 못할 성공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내용의 개연성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읽는 순간을 즐기면서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으면 됩니다. 일종의 한국식 펄프픽션 스타일의 소설이니 말입니다.

 

황당한 내용에 별 의미 없는 시간 떼우기용 소설 잡지를 두 번 이상씩 읽는 독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한번 읽으면 어디 구석에 처박아 놓습니다. 처박힌 펄프픽션은 며칠이고 먼지를 뒤집어쓰다가 어느 날 결국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아까울 것도 없고 그게 당연합니다. 할 일 다 한 것이고 본분에 맞게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만약 혹시라도 한번 돌아보고픈 소설이 있다면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뒤적거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소장 가치 따위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말입니다.

 

의미 없는 허무한 인생, 그러나 그나마 누군가 한 번쯤이라도 기억해주는 인생이길 바란다면 가끔은 자신의 인생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틈날 때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먼지가 묻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다사다난했던 금복이의 인생과 죽음을 소개했습니다. 서른다섯 번째 인생 탐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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