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어떤 연재인가  

 

교과서엔 나오진 않는, 조선시대 일기 속에 담긴 출근러들의 삶과 비애를 통해, 그들의 삶도 오늘날 여러분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호된 신고식을 당하는 신입사원, 왕비에게 탈탈 털리는 미관말직, 할 거 다 해 봐서 파직만 기다리는 만렙 고인물까지. 녹봉에 웃고 출근에 울었던 ‘조선 직딩’들의 숨 가쁜 이야기 속에서 어느덧 여러분의 하루가 떠오를 겁니다.

 

연합뉴스.jpg

 

 

목차 (연재 중 조금씩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1부

 

1. 만년 참봉 금난수의 현기증 나는 관직 생활(링크)

2. ‘영남의 1타 선비’ 김령의 신입사원 분투기(링크)

3. 최전방 GOP 삼수갑산 장교의 삶, 노상추

4. ‘소확횡’과 재테크를 동시에, 유희춘

5. 인서울 출근러 황윤석의 셋방살이

 

2부

 

6. 국제외교전의 현장에 던져진 외교관, 황중윤

7. “범인은 바로 너!” 수사관이자 재판관, 서유구

8. “나 도지삽니다.” 그런데 선정(善政)을 곁들인, 조재호

9. ‘기로소 고인물’ 권상일의 ‘파직은 거들뿐’

 

 


 

 

조선의 무관(武官)이란 권한은 적고 책임은 많은 3D 벼슬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중앙 정계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양반들이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죠. 동시에 서자와 면천(免賤) 받은 천인 출신도 도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노상추(盧尙樞, 1746~1829) 또한 그랬습니다.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의 자손이었던 그는 23살에 붓을 집어 던지고 활을 들었습니다. 그 뒤로 약 30년 동안 집을 떠나 여러 부대를 떠돌죠. 18~19세기를 살았던 조선 직업 군인의 삶, 노상추의 일기로 살펴봅니다.

 

 

조선 무관은 관직을 받는 것도, 버티는 것도 힘들다 

 

명망 높은 남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노상추는 원래 문관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23살(1768년), 현실적 제약과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무과로 방향을 틀죠. 이때부터 병법서를 기반으로 한 필기시험과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실기시험을 준비합니다. 노상추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771년부터 본격적인 무과 시험을 치르기 시작합니다. 약 9년간 무과 시험을 도전한 끝에 1780년 합격의 영광을 거머쥡니다. 1780년 노상추의 일기를 보면, 그의 합격 수기를 볼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조선시대 무과 시험장의 풍경을 한 번 살펴보죠.

 

조선무과시험.PNG

1664년(현종 5년) 한시각(韓時覺)이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중 '길주과시도'다.

함경도 길주에서 무과 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렸다.

<사진 클릭하면 확대>

 

1780년 2월 25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2월 22일 : 오늘 드디어 무과가 치러졌다. 첫 시험은 목전(木箭, 나무로 만든 화살)이었다. 약 290m 길이의 표적을 두고 세 번을 쏘는데, 나는 290m를 쏴서 얻는 기본점수 외에도 각각 36m 이상의 추가점수를 얻었다. 두 번째 시험은 철전(鐵箭, 궁력이 강한 무과 시험용 화살)이었다. 철전은 약 100m 길이의 표적을 두고 쏘는데, 이 역시 나는 세 번의 쏘기에서 각각 53m 이상의 추가점수를 얻었다.

 

2월 23일 : 오늘은 조총과 편전(片箭,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발사체를 통해 활을 쏘는 무기. 사거리와 살상력이 뛰어나 조선의 A급 병기였다) 시험을 봤지만, 나는 모두 적중시키지 못했다.

 

편전.jpg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편전을 쏘는 장면

 

2월 24일 : 오늘은 필기시험을 치렀다. 역대 장군들의 업적을 모은 『장감박의(將鑑博議)』가 출제되었다. 많이 공부했던 책이라 무난히 풀었다. 이 밖에도 『대학(大學)』, 『사마법(司馬法)』,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관한 시험을 치렀다. 필기시험 후 내가 가채점했을 때는 모두 A였지만, 실제 점수는 B로 나왔다. 역시 내가 인맥에서 달린 게 분명하다.

 

2월 25일 : 오늘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이 12번째에 있었다. 아, 너무나 기뻤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 25년 만의 집안의 경사를 바로 내가 이뤘다니. 정말 행복하다.

 

조선시대 무과 시험은 초시(1차)-복시(2차)-전시(3차)로 진행되는데요. 활·조총·기마술을 비롯한 무예 시험과 병법서를 기반으로 한 부대 지휘 시험, 그리고 관직자로서의 기초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법전과 유교 경전에 관한 시험 등으로 진행됐습니다. 

 

원래는 초시에서 190명을 뽑아 최종 28인만을 선발하였지만, 전쟁이나 국지도발이 발생할 때마다 합격자 수는 매우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합격자가 많아질 때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는 모두에게 기회의 장이 되었지만, 양반 사회에서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노상추는 9년 만에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합격합니다. 원래는 최상위 성적을 받아야 하지만, 자신이 노론이 아니라 남인이라서 밀려났다고 의심하죠. 영남 출신의 남인, 그리고 ‘인맥이 없다’라는 출신 성분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는 원흉이 됩니다. 물론 합격 당시에는 남인이라는 꼬리표가 지긋지긋하게 그를 따라다닐 줄은 몰랐죠. 기쁘기 그지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더는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이 컸습니다.

 

휴 다행이다.jpg

휴~ 다행이다

 

1782년 5월 7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간신히 시험에 합격했더니, 남아있는 땅은 고작 집터로 쓸 땅 800평과 영 시원치 않은 논 1,600평 정도밖에 없었다.

 

아버지께 가산을 상속받았을 때 500여 냥 정도의 (가치가 되는 많은) 땅을 받았는데,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야금야금 팔아버렸고, 이사하면서 산 땅 또한 과거 때문에 팔아버렸으니 유산으로 받은 나의 500냥은 모두 과거에 갖다 바친 꼴이다. 이거 완전, 앞으로 굶어 죽게 생겼다. 그놈의 ‘입신양명’이 뭔지, 내가 미쳤지.

 

노상추는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의 대부분을 자신의 과거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갈 때마다 땅을 팔아야 했죠. 합격했을 때 남은 건 집과 자그마한 땅 밖에 없었으니, 빚을 지지 않는 한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 최후의 도전에서 그는 합격 목걸이를 쟁취했으니, 얼마나 안도했을까요. 이제부턴 꽃길만이 펼쳐질 테니까요.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술 파티, 그리고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와 “네가 가문을 빛냈다.”라며 축하를 건넸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영조가 역모 사건 이후 대놓고 영남을 차별하던 때라, 노상추의 급제는 집안의 경사가 아니라 영남 공시생 모두에게 좋은 신호였죠. 이제 남은 건, 관직이었는데요.

 

...... ......

 

그게 그러니까,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짤.gif

띠바! 어디 간 거여~~!!!

 

1782년 11월 1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혜화문(惠化門) 밖에서 말을 타면서 활을 쐈다. 좀 서툴렀지만, 그럭저럭 잘 쏜 거 같다. 

 

요즘은 벼슬자리 하나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과거 합격을 원하던 마음보다 두 배는 커졌다. 평소에는 말 타는 게 좀 무서워서 말 위에서 활쏘기를 좀처럼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말을 탈 때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이게 다, 그놈의 벼슬 욕심 때문이 아닐까. 벼슬 욕심이 겁도 사라지게 하다니, 정말 웃긴다.

 

노상추가 노리는 자리는 임금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는 ‘선전관’이었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죠. 물론 다른 자리도 많았지만, 노상추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으로써 앞으로 높은 벼슬을 해야 했습니다. 즉, 서얼이나 미미한 가문 출신의 급제자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거죠. 뭐든지 첫 커리어가 중요한 법이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자리는 워낙 요직이라, 당시로선 서울 명문가 중심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영남+남인’이라는 페널티를 갖고 있던 노상추에게는 꽃길이 아니라 이미 흙길이 예정되어 있던 셈이죠. 어찌나 답답했는지, 그놈의 벼슬 욕심 때문에 성격이 바뀌었다며 자조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무려 3~4년 동안, 노상추는 관직 추천에서 탈락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무과에 급제한 지 무려 17년 만에 관직에 진출한 케이스도 있었죠. 초조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노상추는 눈을 낮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노상추의 꿈은 수령이나 절도사가 되어 자신이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는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꼭 달성해야 하는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선 더 이상 방구석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존심을 굽히고 고관대작의 집을 돌기 시작합니다. 

 

제발요.jpg

제발 관직 좀 주세요. 제발요~~!!!

 

그 덕이었을까요. 드디어 1783년 ‘무신겸선전관’에 올랐습니다. 구체적으로 수행한 직무는 입직(入直), 즉 순찰과 경계 업무였죠. 경계 업무를 서던 노상추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1784년 1월 15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타향에서 새해를 맞으니 외롭고 우울했다. 지난 5일에는 임금님의 어가가 사직단으로 향하는 날이라 밤새 경복궁 앞 대로에서 경계근무를 했다. 그 뒤로 임금님의 일정에 따라 계속해서 경계근무에 투입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친구들과 함께 휴가를 얻었다. 이름 날리기가 이렇게나 힘드니 그저 우습다.

 

1787년 3월 5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오늘도 경계근무에 투입되었다. 그저께부터 광화문에서 경계근무를 선 것이 벌써 사흘이다. 그동안 한 것이라고는 활쏘기뿐이다. 오늘은 드디어 퇴근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근무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다시 투입되었다.

 

경계, 모든 군인이 해야 하는 기피 업무입니다. 온종일 찬 바람 쐬면서 각 잡고 있어야 하니, 여간 괴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죠. 어떤 날엔 3일 연속으로 경계를 섰는데, 짬에서 밀렸는지 다시 재투입 되는 일도 있었죠. 특히, 겨울만 되면 괴로움과 서러움은 두 배가 되었는데요. 노상추는 

 

“밤새 숙직하는 꼴이 사람의 마음을 슬프고 비통하게 한다.” (1784년 10월 18일)

 

“궁궐을 밤새 지키는 일은 내 임무지만, 평생 앓게 될 병이 여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겠다. 이름 한번 날리자고 이게 무슨 꼴인가” (1784년 10월 19일)

 

라는 심정을 일기에 남깁니다. 

 

조세호.jpg

... 드릅게 하기 싫습니다

 

겨울밤, 칼바람은 불어오고 별은 총총한데, 콧물 흘리며 밤하늘을 쳐다볼수록 미래는 막막하고, 고향에 있는 식구들 생각도 간절하고, 나는 여기서 대체 뭐 하고 있나 생각도 드는, 뭐 그런 흔한 군인의 잡생각에 빠지게 되었죠. 역시, 병사나 간부. 조선시대 군인까지, 생각하는 건 다 똑같습니다.

 

후방의 군인들이야 경계 때 가끔 꿀이라도 빨지만, 임금님을 지키는 노상추는 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경계설 때도 임금님의 가마와 모든 벼슬아치가 오가는 광화문 앞 거리를 지킬 때가 많았죠. 승진하기 쉬운 만큼, 하루아침에 좌천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상추도 그런 썰을 듣게 됩니다.

 

<계속>

 

 

※본 연재는 재미를 위해 사료와 해석에 약간의 윤색을 더했습니다.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입체_조선복지실록__띠지.png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