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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월말 김어준> 구독자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 있다.

 

을지문덕(을지로의 문구덕후)이라 불리는 사나이, 혹독 박종진 선생.

 

재야의 고수, 필기구 세계 톱 파이브... 까진 모르겠고, 내가 궁금한 건 이거였다.

 

대체 뭐 하는 분인가?

 

방송에서 스스로를 소개 하긴 했다.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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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들의 라이프 스타일. 덕후들의 덕질후기.

 

방송에서 다뤄지는 그의 세계는, 이 정도 카테고리에 넣기에 뭔가 다른 부피감이 있었다. 그에 관한 느낌을 굳이 정리해 보자면,

 

필기구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경험

호기심의 끝까지 가보는 집요함

마침내 다다른 종착점에서 깨우치는 문방사우의 도(道)

 

이 정도인데. 이것만으론, 아직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다. 어떤 인간인지.

 

하는 수 없다. 이럴 땐 직접 만나 맞짱 떠보는 게 장땡. 혹독한 연구가 만년필 연구소 박종진 소장을 만나러 을지로로 가본다. 다짜고짜.

 

필기의 道

 

산만언니(이하 '산') : 하필 왜 만년필을 좋아하는 건가?

 

박종진(이하 '박') : 만년필은 모든 필기구 중 가장 인간을 닮았습니다. 만년필을 공부하는 건 인간을 공부하는 것과 다름없죠. 첫 번째로는 나 자신. 나아가 타인과 세상을 알아가는 겁니다. 만년필을 연구하면서 저는 나 자신을 바꾸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사실 전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요즘은 신발에 관심이 많습니다. 파나마햇도 좋아하고. 야구와 영화도 좋아하고 개도 좋아합니다. 그중 만년필이 가장 인간적입니다. 만년필을 들여다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만과 교만한 마음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가장 아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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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필기구 덕후로서, 필기구들에 대한 느낌을 알려달라.

 

박 : 만년필은 겸손합니다. 만년필은 종이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소통하고 교감하는 필기구예요. 만년필은 절대로 종이에 상처를 내지 않습니다. 타협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상적인 필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낯가림이 있죠. 약간 까다로운 면이 있습니다. 아무 종이에나 써지지 않거든요. 어떻게 보면 내성적이죠. 또 잉크를 가립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세척도 해줘야 해요. 끊임없이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면들이 인간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죠. 인간도 관심이 필요한 존재니까요. 

 

연필은 순하죠. 착해요. 다 맞춰줍니다. 따로 길들이지 않아도 돼요. 순응합니다. 게다가 지워져요. 연필은 고집이 없습니다. 희생적이에요. 

 

볼펜은 '약간'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측면이 있어서 때론 종이를 아프게 합니다. 뒷면에 글씨가 배기게 되죠. 대신 볼펜은 낯을 가리지 않아요. 외향적이에요. 원만합니다. 성격이 좋아죠. 씩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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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정의하기 어려워요. 가장 어려운 필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은 아무나 못 다룹니다. 군자의 필기구라고 할 수 있어요. 초보들은 다룰 수가 없거든요. 붓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만의 길을 갑니다. 속내를 알아가기 힘든 친구예요. 여태 붓을 완벽히 정복한 사람이 역사상 별로 없다는 것도 붓이라는 필기구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죠.

 

산 : 만년필을 들고 오는 사람 중에,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나?

 

만년필을 망가트린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꼭 핑계 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만년필 보면 딱 알거든요. 만년필이 저한테 말을 해요. 펜촉을 들여다봅니다. 딱 알아요. 애가 장난친 건지, 와이프가 열받아 만년필로 찍었던지.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요. 그래야 수리하기가 편하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요. 애들 핑계를 댈 때가 많아요. 그럴 때 좀 괴롭죠. 실제로 애가 그렇게 망가트렸다고 해도 어른이라면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하는데, 애를 탓하는 건 보기가 안 좋죠.

 

덕후의 길 : 아내는 언제나 옳다

 

산 : 필기류뿐만 아니라 '혹독한 연구'가 종이, 먹, 벼루까지 문방사우를 총망라한다. 이런 덕질이 어디 보통 시간이 드는 일 인가 말이다. 대한민국 유부남으로서 이게 가능한 건가?

 

박 : 세상의 모든 아내는 설득이 안 됩니다. 그게 핵심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만년필 하나를 사기 위해 아내한테 백을 하나 사줍니다. 그러면 와이프가 오케이 할 거 같죠? 아니요. 아내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와이프는 백을 받아 들자마자 바로 물어봅니다. “너는 뭐 샀어?“ 그럼 깨지는 겁니다. 이런 식의 실수를 하면 안 돼요. 뭐든 산다면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셔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상대가 무뎌지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와이프가 내 만년필들의 가격을 안다. 그럼 복잡해지는 거예요. '아 만년필은 싼 거다'라고 인식하게 해 줘야 해요. 그래서 저는 와이프가 버려도 되는 만년필들을 그냥 집에 툭툭 던져둡니다. 그럼, 와이프가 버려요. 그래도 저는 절대 찾지 않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와이프가 나중에 비싼 만년필을 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아요. '아 뭐 싼 거겠지' 여기는 거죠. 주변에 친구들을 보면 뭘 사다가 꼭 걸리더라고요. 현명하게 행동하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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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팟캐스트<월말 김어준>

 

사실 만년필은 부피가 작아서 유리한 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수집품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건 아내를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해요. 모든 아내는 기본적으로 다 착해요. 그런 아내를 화나게 하면 안 됩니다. 잘 보세요. 제가 낚시에 취미가 생겨 낚싯대를 하나 사서 잘 가지고 놀아요. 그 단계에선 어떤 와이프도 절대 뭐라고 안 해요. 와이프가 언제 화를 내느냐. 낚싯대를 사고 또 사 자꾸 사서 모아두고 안 써, 그러면 와이프는 참지 않아요. 화를 내죠. 그러니 항상 재고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겁니다. 아내 모르게 새로 하나 샀으면 기존의 하나를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요령이 필요한 겁니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만약 우리 아내가 화가 났다? 그건 분명 본인이 뭔가 게으르게 행동해서 아내가 화가 난 겁니다. 

 

아내를 절대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사실 아무도 속이면 안 되죠. 모든 생명은 영험합니다. 아내가 됐든 남이 됐든 절대 누굴 속이려고 하면 안 돼요. 하지만 보통의 경우 와이프를 속여요.

 

산 :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취미 활동으로 아내분을 화나게 한 적이 없나?

 

박 : 예. 저는 없습니다. 물론 저희 아내가 너그러운 면도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절대로 아내의 분노 임계치를 넘기지 않습니다.

 

산 : (아내가 보기에)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것도 화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여가 시간을 가정에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넘어가기 쉽지 않을 텐데..

 

박 : 애랑 많은 시간 보냅니다. 저는 제가 할 건 다 해놓고 제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저는 술을 안 마셔서 일 끝나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그 시간에 연구하죠. 

 

중요한 처세 하나 말씀드리자면 저는 집에 가면 절대로 아내가 오가며 볼 수 있는 공용 공간, 즉 거실 같은데 누워있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제 방에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늘 유령처럼 움직입니다. 남자는 집에서 절대로 눈에 띄면 안 됩니다. 불리해요. 남자가 빈둥대는 게 눈에 띄면, 여자들은 생각합니다. '쟤가 왜 누워있지?' 그럼 뭐든 시키게 돼 있어요. 또 괜히 괘씸해집니다. 자기는 바쁜데 남편은 빈둥대는 거, 처음엔 봐줄 만하죠. 주중에 힘들었으니 주말에 쉬나 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죠. 그래서 저는 집에 있을 땐 항상 책만 봅니다. 이 세상에 책 보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아내는 없거든요.

 

산 : 만년필은?

 

박 : 꺼내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와이프랑 취미를 같이 하면 안 됩니다. 내 취미에 와이프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와이프에게 내 취미를 공개한다? 그거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산 : 만약에 아내분이 만년필이야 나야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묻는다면 뭐라 할 건가?

 

박 : 당연히 와이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해 줘야 합니다. 이럴 때 괜한 고집부리면 안 됩니다. 멍청하게 만년필이라고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 : 그러고 나서 새로운 만년필 가지고 노는 걸 걸리면?

 

박 : 바로 미안하다고 하고 싹싹 빌어야죠. '다시는 안 살게'라고. 아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줘야 합니다. 저는 이 모든 걸 만년필을 공부하면서 배웠습니다. 만년필을 쓰며 소통과 타협을 배운 거죠. 일종의 공감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볼펜처럼 연필처럼 일방적으로 상대를 위해 희생하거나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만년필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만약 이런 일에 내가 좀 부족하다 하는 걸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만년필을 쓰고 공부하며 그 태도를 익혀보시라 권합니다. 만년필처럼 행동하면, 세상사에 문제 될 게 전혀 없습니다.

 

만년필과 나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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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심오하게 접근한, 접근하고 있는 관심사가 아주 많은 것 같은데. 그중 왜 유독 만년필을, 혹독하게 연구한 건가?

 

박 : 저는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애착이 있습니다. 만년필을 사랑하지만, 만년필의 ‘필멸’ 또한 알고 있어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사람들은 자꾸 편한 것만 찾으니까요. 시대의 요구에 순응은 하지만 이 아름다운 필기구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쉽게 사라지는 게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나 혼자서라도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싶다. 해서 시작한 게 만년필 연구입니다.

 

산 : 방송에서 관찰력과 기억력이 유달리 좋아서 괴롭다고 하셨는데, 혹시 좋은 건 없나?

 

박 : 기억력은 좋은 편이죠. 전보다 못하긴 하지만 지금도 초등학교 1학년 때 풀었던 산수책 그림이 기억나요. 지하철에서 불신지옥 이런 거 하는 분들 그분들 얼굴도 다 알아요. 그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나잖아요. 그러면 괴롭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자꾸 만나면 불편할 수밖에 없죠. 저는 사람만이 아니라 고양이하고 개 얼굴도 기억해요. 남들은 제 기억력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기억력 좋아서 불편한 게 많습니다. 전에야 전화번호라도 외웠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영화를 좋아하는데,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수가 없어요. 만화책도 그래요. 다시 보면서 그 감동을 또 느끼고 싶은데 안 돼요. 괴로워요. 길 찾는 건 좀 유리합니다. 한 번 가본 데는 정확하게 기억나니까. 틀린 그림 찾기 이런 것도 잘하고요. 어찌 보면 제가 가진 재능은 시각적 재능일 텐데 사실 저는 이런 재능보다 중요한 게 창조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게 오래 기억하는 것보다 의미 있다고 보거든요. 

 

산 : 이번에 <월말 김어준>과 만년필 연구소가 함께 제작한 연필과 종이 세트 펀딩이 그야말로 잭팟이 터졌다.

 

박 : 김어준 총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월말>에 나가고 다양한 반응을 여러 통로로 주시니 좋더라고요. 일단 지난해 펜쇼 (다음카페 펜후드에서 주최하는 필기구 행사)에서도 <월말> 독자라고 밝히신 분들도 많이 오셨고, 저희 카페에도 많은 분들이 유입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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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팟캐스트<월말 김어준>

 

솔직히 <월말>방송 나가려면요. 두 달도 모자라요. 석 달은 공부해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다들 매달 나오라고 해요. 그건 솔직히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렇게 자주 나가면 혹독하게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부족한 채로 방송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방송하는 바로 직전까지 공부합니다.  또 <월말>에 나갈 땐 다른 방송보다 특별히 신경을 씁니다. 뭐랄까. <월말 김어준> 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거든요. 약간 맹수들이 모여 있는 느낌 그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김어준 총수랑 방송하는 게 무엇보다 즐겁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총수님이 바로바로 알아들으니까 속이 다 시원해요. 얘기할 맛이 난다고 할까요?

 

박종진 소장과 설렁탕을 나눠 먹고 을지로를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이자가 뭐 하는 인간인지에 답은 얻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이 사람도 나만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만큼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다. 자기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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