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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쟁의 슬픔 : 6년을 최전선에서 보낸 이가 쓴 전쟁소설

 

(3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덧없는 섹스와 무거운 인생 사이에서

 

(33) 팔레스타인의 양치기 소녀 : 이스라엘이 소녀, 아마니에게 한 일에 대하여

 

(34) 올리버 트위스트 : 가난한 인생의 두 가지 선택지

 

(35) 고래 : 인생이라는 이름의 펄프픽션

 

 

 

소설 『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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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민음사>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밤길을 걷고 있는 당신 앞에 아름다운 것, 은빛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것 두 개가 나타난다. 하나는 하늘에 뜬 달이고 또 하나는 발밑에 떨어져 있는 6펜스짜리 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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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진심으로 바라본다면 어느 것도 가질 수 있다 해보자. 그러나 하늘과 땅을 동시에 볼 순 없다. 당신이 ‘달을 동경하기에 바빠 발밑에 떨어진 6펜스를 보지 못’ 한다면 은화를 얻을 수는 없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하늘을 볼 것인가, 땅을 볼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 내가 직접 경험했던 이야기. 구역질과 찬사를 함께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자 관능적이며 동시에 비극적이기도 한 이 이야기가 당신의 선택을 도와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존재하지도 않는 신전을 찾아 헤매는 영원한 순례자’처럼 살고 있는, 바로 당신을 위한 이야기이다.

 

 

행복한 삶을 걷어찬 마흔 살의 스트릭랜드

 

상냥하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인상을 가진 서른일곱 살의 스트릭랜드 부인은 마치 자신처럼 집안을 우아하게 꾸며 놓고 있었다. 병에 꽂힌 꽃은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응접실의 커튼은 밝고 아름다웠다. 훌륭한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훌륭한 주부임을 인정했다. 

 

나는 당시 런던의 문단에 이름을 올린 터였고 책과 작가들을 좋아했던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나는 증권 중개인이라는 스트릭랜드를 이날 처음 보았는데,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이 가족들의 삶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매력적인 부인은 남편을 사랑했고, 의젓하고 귀여운 두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골치 아픈 삶의 모험 따위에는 시달려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러한 상태로 서서히 늙어 갈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가정에는 잘 정돈된 행복이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스트릭랜드가 이 행복을 발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마흔 안팎의 이 남자는 아내와 자식과 행복한 가정 모두를 버린 것이다.

 

에이미 보시오.

 

당신이 돌아오면 당신과 아이들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오.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소.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진 않겠소.

 

찰스 스트릭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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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달과 6펜스’ 中

 

스트릭랜드 부인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파리로 가 그를 만났다. 그를 설득하여 데리고 오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예상이 틀렸다. 그는 애인이 생긴 것도 아니었고 거금을 들고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혼자였고 그가 묵고 있는 벨쥬호텔은 파리의 지저분한 뒷골목에 있는 싸구려 호텔이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수염이 더부룩한 붉은 턱, 작은 눈과 커다랗고 공격적인 코, 큰 입과 육감적인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에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어떤 격렬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야수성을 발견했다. 그는 십칠 년을 함께 한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아이들 모두에게 그 어떤 책임감이나 미련도 갖고 있지 않았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이혼을 거절한 이유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싸늘한 노여움으로 점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절대 남편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트릭랜드가 비참하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저주를 쏟아 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친구 하나 없이 몹쓸 병에 걸려 자신의 망가지는 몸을 바라보며 죽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포기했다. 그녀는 스트릭랜드가 여자랑 달아났다면, 사랑 때문에 집을 나간 것이라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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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이기심이라고 말하며.

 

그녀는 나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왜 아내를 버렸는지 아세요? 순전히 이기심 때문이에요. 딴 이유는 없어요.”

 

오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런던이 지겨워졌다. 안정적이지만 단조로웠다.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는 전차와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제 런던은 나에게 어떤 신선한 자극도 전혀 줄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나는 한동안 파리에 가서 살기로 했다. 

 

 

착한 남자 스트로브를 이용하고 있는 스트릭랜드

 

더크 스트로브, 이 비웃음의 대상이자 어릿광대 같은 선량한 사람.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화가가 파리에서 나를 맞이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언제나 화사했고 평범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거실 장식용 등으로 잘 팔렸고, 그는 상당한 돈을 만지고 있었다. 동료 화가들은 늘 스트로브의 그림을 경멸했고, 그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조롱의 끝은 항상 뻔뻔스럽게도 그의 돈을 빌려다 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순진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어수룩한 스트로브는 놀림의 대상이 되면서도 늘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 그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화가 중 하나가 스트릭랜드였다.

 

“그 사람 정말 천재일세. 확실해. 지금부터 백 년 후에 말일세. 사람들이 자네나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찰스 스트릭랜드와 알고 지낸 덕분일걸세.”

 

이것이 스트로브가 그 모진 경멸과 멸시를 받아 가면서도 스트릭랜드에게 돈을 뜯기는 이유였다. 스트로브 자신은 엉터리 화가였지만 미술에 대한 감각만큼은 아주 섬세했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진지했고, 비평은 날카로웠다. 내가 아는 화가 중에 스트로브만큼이나 정확한 안목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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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트로브 부인은 달랐다. 그녀는 스트릭랜드의 오만함과 자기 남편에 대한 조롱, 그런데도 그런 자에게 돈을 뜯기는 남편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짧은 다리, 작은 키에 통통한 스트로브와는 어울리지 않게 육감적인 몸매와 괜찮은 얼굴을 가진 그녀에게 스트릭랜드는 그저 나쁜 사람이자 막돼먹은 인간에 불과했다.

 

바로 내 뒤에 선 스트로브는 덜덜 떠는 것 같았다. 불을 켤까 하다가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한구석에 어렴풋이 침대가 보였던 것이다. 불을 켰다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시체나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스트릭랜드가 찾아오지 않자 스트로브는 안달이 났다. 나는 스트릭랜드를 걱정하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스트릭랜드가 묵고 있는 골방으로 찾아갔다. 스트릭랜드는 자기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침대에 불편스럽게 누워 있었다.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열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트릭랜드의 체온을 재어보니 화씨 104도(섭씨 40도)나 되었다. 그는 분명히 중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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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브 부부의 헌신과 스트릭랜드의 반응

 

“여보, 거절하지 말아줘요. 난 그 사람을 도저히 그런 곳에 내버려둘 수 없어. 그 사람 생각을 하면 한잠도 자지 못할 거야”

  

“당신이 돌보세요. 그건 반대하지 않을 테니.”

  

그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죽을지도 몰라.”

  

“죽으라죠 뭐.”

 

스트로브는 자신의 아내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는 천재가 가난 속에서 개처럼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그냥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블란치 스트로브는 격렬히 반대했다. 그녀는 스트로브에게 똥개만 한 기개도 없느냐고 쏘아붙였다. 이윽고 그녀는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울음마저 터뜨렸다.

 

내가 그녀의 격한 반응 속에서 느낀 것은 그녀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날 분명히 그녀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오른 것을 기억한다. 결국 스트로브는 포기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토록 신경질적인 면모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는 스트로브가 좌절해 한참이나 시선을 떨구고 서 있는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허락했다. 허락의 순간 그녀의 얼굴은 희미한 홍조가 도는 것 같더니 이내 창백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의 아내 블란치였다. 그녀는 유능할 뿐 아니라 헌신적인 간호사 역할을 해냈다. 어디를 보아도, 스트릭랜드를 데리고 오겠다는 남편의 뜻을 그처럼 맹렬하게 반대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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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브 부부는 헌신적으로 스트릭랜드를 간호했다. 특히 그의 아내가 보여준 노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스트릭랜드의 몸을 씻겨 주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스트릭랜드는 살아났다. 비록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뼈와 살가죽뿐인 모습이었지만, 야수적인 관능이 어린 얼굴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스트로브 부부에게 감사했을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는 것 자체가 분하다는 태도였다. 그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부부에게 어김없이 조롱이나 냉소나 욕설로 보답했다. 나는 그런 그가 얼마나 밉살스러웠는지 망설임 없이 욕을 해주었다.

 

 

예상치 못한 블란치(스트로브 부인)의 선택

 

“여보, 저는 이 분을 따라가겠어요. 당신과는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스트로브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신음에 가까웠다. 스트릭랜드를 보내려 한 날, 그의 아내 블란치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스트로브는 이 장면을 지켜보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 스트릭랜드에게 달려들었으나, 오히려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스트릭랜드는 스트로브보다 큰 체격에 힘이 셌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엉엉 울면서 아내에게 호소했다고 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며 무슨 일이라도 다 할 테니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곧 깨달았다고 했다. 자신의 그런 말들이 오히려 아내를 지겹게 만들고 있을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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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황당한 사건의 전개와 스트로브의 태도 앞에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나약한 성미와 대책 없는 선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그래서 아내가 끝내 스트릭랜드를 따라갔냐는 나의 질문에 더욱 놀라운 대답을 했다. 자기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스트릭랜드의 그 어둡고 더러운 골방에서 사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자신의 스튜디오와 집을 주고 오히려 자신이 나왔다고 했다.

 

“난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네.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

 

내가 보기에 이제 스트로브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나는 스트로브에게 이곳을 떠날 거냐고 물었다. 스트로브는 아니라고 말했다. 아내가 다시 자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그때 자신을 찾기 쉽도록 가까운 곳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탓할 뿐이었다.

 

나는 스트로브에게 전혀 동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함께 자자고 했다. 도저히 그를 혼자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에게 베로날(수면제)을 충분히 주었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봉사였다. 

 

 

블란치의 자살과 그녀의 누드화

 

“자살해 버렸네.” 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놀라 부르짖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예측 불가한 것이었다. 스트릭랜드와 블란치의 관계가 결국은 불행하게 끝나리라 확신했지만,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형식이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스트로브는 손을 절망적으로 허우적거렸다.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울컥 흥분하여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녀는 수산(蓚酸)을 마셨다. 둘이 싸우고 스트릭랜드가 나가 버리자 저지른 짓이었다.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성대와 입과 턱은 독으로 타버렸고 곱던 살결을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더 잔인한 사실은 그녀가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스트로브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날, 스트로브는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절로 든 잠이었다. 나 역시 스트로브와 그의 슬픔을 내 마음에서 털어내 버리고 이제는 삶을 즐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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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봤네. 진짜 예술 작품 말일세. 나는 감히 손댈 수가 없었네. 겁이 났어.”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찾아온 스트로브의 말에 나는 기묘한 감동마저 느꼈다. 어릿광대 같은 그였지만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영혼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랑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그였다. 그는 짐 정리를 위해 찾아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최고의 걸작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최고의 걸작은 스트릭랜드가 그린 자신의 아내, 블란치의 누드화였다. 처음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질투와 분노로 그림을 찢어 버리려 했다고 했다. 그러나 찢기 바로 전, 그는 보았다고 말했다. 열정과 관능,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 대담하고 단순한 묘사, 육체의 무게뿐이 아닌 혼을 어지럽히는 영성(靈性)까지 깃들어 있는 작품을.

 

나는 그에게 그래서 스트릭랜드를 용서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트로브는 용서가 아닌 후원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트릭랜드를 만나 같이 네덜란드로 가자고 제안했다고 말이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으며, 블란치의 그림은 스트릭랜드에게 가지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트로브는 떠났다.

 

 

원하는 바가 서로 달랐던 스트릭랜드와 블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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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스트릭랜드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상종하고 싶지 않은, 구역질 나는 존재였지만 스트릭랜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모든 것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블란치는 로마 왕족 집안의 가정교사였다. 그 집 아들이 블란치를 유혹했고, 블란치는 임신했으나 버림받았다. 그때 스트로브가 나타나 그녀에게 헌신을 베풀었고 둘은 결혼을 한 것이다. 이것이 블란치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 스트로브의 아내가 된 사연이었다.

 

거리로 내쫓긴 미혼모의 처지 때문에 스트로브를 선택한 그녀였다. 스트로브의 사랑이 그녀에겐 모욕이었고 그녀의 쾌활함은 절망에서 오는 쾌활함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 앞에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남자, 거칠고 투박하며 크고 건장한 남자 스트릭랜드가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욕망덩어리, 바커스 신의 무녀(巫女)가 되어버린 것이다.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사랑했고, 그를 소유하려 했지만 스트릭랜드에게 그녀는 쾌락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구속을 원치 않았다. 블란치는 스트릭랜드의 애인이 되고자 했지만 스트릭랜드는 그녀가 단지 모델이 되어주길 원했을 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지배욕을 용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고.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꿈을 완성한 스트릭랜드와 비참한 최후

 

스트로브는 네덜란드로 떠났다. 일주일 뒤엔 스트릭랜드가 마르세유로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뒤로 나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가 타히티를 여행하지만 않았다면 스트릭랜드에 대한 나의 혼란스러웠던 추억도 단지 과거의 흔적으로 끝났을 것이다. 타히티는 그가 오랜 방랑 끝에 이른 곳이며 자신의 명성을 확립시켜준 그림들을 그려낸 곳이었다. 나는 타히티에서 그의 마지막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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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타히티 위치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그 어느 바다보다 황량한 태평양. 그곳에 타이티가 있었다. 높이 솟은 푸른 섬이다. 그곳에는 신비가 깃든 침침한 유곡(幽谷)이 있고, 그곳에서는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태고의 삶이 아직까지 영위되고 있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타히티에 가까이 갈 때 공상 속의 황금 왕국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불타는 하늘의 푸르름과 현기증을 일으키는 강렬한 색채가 있는 곳. 스트릭랜드가 이곳에서 최후를 보낸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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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쿠트라가 스트릭랜드의 비참한 최후와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해 말해 주었다. 어느 날 ‘아타’라는 원주민 처녀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는 17살의 나이에 스트릭랜드와 결혼해 아이까지 여럿 나은 상태였다. 아타는 스트릭랜드가 아프니 왕진을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고 한다. 닥터 쿠트라가 그녀의 애원을 거절하지 못해 찾아갔으나, 스트릭랜드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스트릭랜드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혐오스러운 병으로 일그러져버린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산속 자신의 오두막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닥터 쿠트라가 두 번째 그의 오두막을 방문했을 때는 모든 원주민이 떠나고 오직 아타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으나 스트릭랜드는 이미 흉악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작품, 벽화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創世)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에게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삶의 완성이자 그가 그토록 원했던 예술의 완성인 그 벽화를 보러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닥터 쿠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오두막과 벽화 모두 스트릭랜드의 유언에 따라 아타가 불태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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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인생의 목적, 꿈이냐 돈이냐

 

하늘엔 달이 떠 있고 발밑엔 은화 하나가 떨어져 있습니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반짝입니다. 그러나 모양과 빛깔이 같을 뿐이지 둘은 전혀 다릅니다. 달빛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설레게 합니다. 신비한 그 자태가 그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욕망을 자극합니다. 저 달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 저 달을 밟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욕망은 충동으로 바뀝니다. 그것의 이름은 ‘꿈’입니다.

 

발밑에 있는 은화는 그저 손을 뻗기만 하면 내 것이 됩니다. 주어서 주머니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밥으로 바뀌기도 하고 소주로 바뀌기도 합니다. 설렘과 욕망, 그리고 충동 같은 것은 없지만 참으로 유용합니다. 하루하루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당장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달과 은화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야 어두운 밤하늘에 동그랗게 떠 빛나는 달이 신기하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달을 쳐다보다 가끔씩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동전을 놓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 본 달이 아닙니다. 진부할 뿐입니다. 어른들이 하늘의 달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누군가 꿈을 꾸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부만 맞습니다. 어른들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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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스1>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질 것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챙겨야 할 가족들이 생깁니다. 사회생활이 쌓여가면서 자신만을 위해 존재했던 취향과 관심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니 옷, 자동차, 집 등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이 늘어납니다. 이 모두를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어린 시절 가슴에 품었던 둥근 달이 점점 작아집니다. 그리고 끝내 그 달은 동전만 한 크기가 됩니다. 스트릭랜드로 태어나 스트로브로 늙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존재에서 가족과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돈을 버는 존재로 바뀌어 살아갑니다. 꿈이 돈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기쁨과 자존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생명체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란 없습니다. 가난이 주는 고통이 끔찍한 것을 잘 압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받아야 할 멸시의 시선도 살면서 충분히 느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생의 목적이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인생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꿈이냐 돈이냐, 당연히 꿈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모두 독립된 하나의 세계입니다. 인생이란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고 혼자서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릅니다. 돈은 누구나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타인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 내 인생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꿈을 추구한다는 것,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때로는 비난이 따를 수도 있는 외롭고 두려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한 의무이고, 내 인생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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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무섭게 오르고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좋은 안주로 쉽게 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술이 필요할 때는 가급적 집에서 혼자 마십니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택시비나 대리비가 많이 아깝습니다.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전철이 끊기기 전에 자리를 파합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꿈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아직 그 꿈을 아직 잊지 않았음에 뿌듯해집니다.

 

‘착한 사람’이 아닌 오직 자신의 꿈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나쁜 남자’, 스트릭랜드의 활화산 같은 삶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누구보다 은화가 필요했지만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닌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인생이었습니다. 매일 밤 꿈을 꾸던 시절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해드리며 서른여섯 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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