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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내용 요약>

 

소개: 94년생. 직업 없음. 대학 졸업장 없음.

경력: 몇 개의 사업 경험 +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생활 1년 6개월.

 

이후 필자는 택배를 하기로 마음먹고 중고 택배차를 구했다···


 

택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생수 배달 일을 먼저 경험했다. 막상 택배를 하려고 보니 빈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기도 했고 인터넷에 퍼져 있는 생수 배달 소개 글을 읽어보니 택배보다 더 좋아 보였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생수는 배달 건 하나마다 900원을 받는데 택배는 평균 750원을 받았다. 무엇보다 분실이나 파손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위험부담이 적었다. 택배는 안에 들어있는 물건에 따라 배상해야 하는 물건의 값이 천차만별이다. 손바닥만 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게 금반지일 수도 있고, 요즘에는 온라인 쇼핑으로 수백만 원대의 명품을 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잘못 걸렸다간 일은 일대로 하고 수개월 치의 월급을 날릴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생수는 비싸봤자 한계가 있었다. 일반 택배 일과는 달리 소장에게 가는 대리점 수수료를 지급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생수 전담팀 일이 일반 택배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무거운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거야 택배도 물건에 따라 생수보다 무거운 게 있을 수 있었고 아직 젊으니 그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패기도 있었다.

 

일을 시작한 첫날, 새벽같이 출근한 70대 어르신이 계셨다. 나는 첫날이라 그렇다 치고, 경력자도 저렇게 일찍 출근해야 하는 일인가? 느낌이 쌔해서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냐고 여쭤보았다.

 

"이따 손주 돌잔치에 가야 해서, 300개 후딱 마치고 가려고."

 

시원시원한 대답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선 참 반가웠다. 일을 하고도 돌잔치에 갈만한 힘과 시간이 남는다니, 누구라도 혹할만한 이야기였다.

 

"70대 어르신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열심히 해봐야겠다."라며 조용히 의지를 다지고 생수 배달 첫날을 시작했다. 하지만 첫 시작인 상차부터 만만치 않았다. 상차란 배달할 물건을 차에 싣는 과정인데 물이 무겁다 보니 200개를 싣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게차로 생수를 차 안에 넣고 나면 그 생수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작업은 사람이 직접 해야 했다. 첫날이라 지게차로 생수를 넣는 것까지는 같이 일하는 분들이 해줬는데도 워낙 무거운 물품이다 보니 쌓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렇게 두 시간 반의 중노동 끝에 드디어 본격적인 배달이 시작되었다.

 

막상 배달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높은 화물차가 익숙하지 않고 무거운 다량의 생수를 적재해 넓은 도로에서도 긴장이 되는데, 배달지들은 좁은 골목 구석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 같은 경우 가게 천막이 차의 지붕 높이보다 낮아 조심히 운전해야 했다. 한 번은 천막을 건드리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생수가 무거운 거야 당연한 거고,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이건 힘듦을 한참 넘어 고통스러운 수준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는 카트에 생수를 싣고 옮길 수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생수를 들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 다세대 주택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무거운 것도 괴롭지만 윗부분의 비닐 끈을 잡고 옮기다 보니, 손바닥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팠다. 안타깝게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배달지보다 없는 배달지가 훨씬 많아, 100개도 하기 전에 손바닥은 다 부르트고 온몸의 근육이 쑤시듯 아팠다.

 

'어떻게 첫날부터 이런 구역을 초보한테 맡기는 거지?' 

 

처음에는 원망 섞인 생각도 했다. 하지만 배달을 하다 보니 대부분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이라는 걸 알게 되고 체념 반 긍정 반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물을 배달하는 사람이다.'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집에 살면서 생수를 배달시키는 건 그들이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꼴을 갖춘 서울 아파트가 10억을 호가하는 이 시대, 영혼을 끌어당겨서라도 아파트를 사거나 빌릴 만큼의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벌이가 좋거나 그에 비등하는 담보가 있다는 거다. 그렇기에 서울에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얼음과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 물을 먹지, 생수를 시켜 먹을 필요가 없었다. 

 

생수를 배달시켜 먹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정수기를 설치하고 관리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되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차까지 없으면 장 볼 때 무거운 생수를 묶음으로 사서 집까지 가지고 오는 것도 불가능하니, 돈을 조금 더 내더라도 배달을 시켜 먹는 것이다. 다니는 학교나 직장 근처에서 월세살이하는 내 친구들이 그랬고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절 우리 집도 그랬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부모님 집에 돌아오기 전 자취하던 시절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힘들게 무거운 생수를 이고 지고 걸어오지 않아도 마법처럼 현관문 밖에 도착해 있는 맑은 물이 얼마나 반갑고 편했던가. 물론 이런 생각을 해도 찢어질 듯 아픈 근육이 덜 아프거나 곧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부어오른 손바닥이 도로 하얘지는 건 아니었다.

 

출처 뉴시스.jpg

출처-<뉴시스>

 

150개쯤 배달하고 나니 눈앞이 흐려졌고, 200개쯤 배달했을 땐 너무 지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후진하다가 뒤차의 헤드라이트를 깨부순 것이다. 안 그래도 곧 쓰러질 듯 피곤한 상태에서 화물차 운전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P(파킹)에 있던 기어를 D(드라이브)모드가 아닌 R(리버스)로 두고 악셀을 밟은 것이었다. 귀를 찢는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 흔들리는 그 순간, 뒤차의 헤드라이트와 함께 내 심장도 터졌다. 놀라서가 아니라 좌절감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망했다.'

 

일단 차에서 나가 손전등을 켜고 충돌한 차를 꼼꼼히 살폈다. 겉보기에 아무런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분명히 무언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차 번호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차주에게 상황을 알리고 다음 배달지로 향했다. 무언가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계속 꼬이는 법. 배달을 하고 돌아오니 주차 위반 딱지가 붙어있었다. 충돌사고에 이어 주차 위반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차장에서 부딪힌 차의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헤드라이트 안쪽이 다 깨졌더라고요. 지금 견적을 받아봤는데 78만 원 정도 나오네요."

 

보험으로 처리했다가는 할증이 더 붙게 되어 사비로 처리해야 할 상황, 수리비를 듣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을 시작한 첫날, 2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벌었지만 수리비로만 78만 원에 주차위반 과태료까지 물게 된 것이다. 과태료까지 합치면 80이 훌쩍 넘을 터.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고된 노동의 결과는 -60만 원이었다.

 

"더 하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연달아 나쁜 일이 벌어지니 겁이 더럭 났다. 남은 수량은 50개 남짓. 마저 일을 끝내기에는 멘탈이고, 몸이 성하지 않았다. 생수는 남은 수량을 차에 싣고 있다 다음날 센터에 보고하기로 하고 그대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과태료는 카텍스(서울시 교통위반 단속조회 서비스) 사이트의 '이의 제기'란을 통해 눈물겨운 호소를 한 끝에 면제받을 수 있었다. 내가 올렸던 글은 아래와 같다.

 

저는 생계형 생수 택배 기사입니다. 그날은 제가 처음 화물자동차로 일을 한 날이었습니다. oo 동은 도로가 복잡하고 골목길이 많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은데, 첫날이다 보니 모든 게 낯설어 주차할 곳을 계속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많이 헤맸습니다. 제가 불법주차를 했던 곳은 제 판단에 교통이 혼잡하지 않다 보니 제 차가 다른 차량에 피해를 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화물차를 운전한 첫날인 탓에 밑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황색 점선으로 된 주차금지 구간인지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전 배달지 주차장에서 앞차에 부딪는 사고까지 낸 상황에 생수를 애타게 기다리는 분들에게 배달은 계속해드려야 했기에 생수는 무겁고 전화는 계속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다음 배달 건의 주소지를 찾는 데 오래 걸려 불법 주정차 시간이 길어졌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다 보니 부주의했습니다. 과태료 면제가 되는지 모르겠으나 사정을 이야기하고자 의견을 제출합니다.

 

'모든 건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이의 제기란에 글을 썼는데 실제로 과태료가 면제되어 놀랐다. 세상이 아직까지 그렇게 삭막하지는 않구나 싶었다. 담당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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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