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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연결] 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_기억·미래·번영_ _ 연합뉴스TV (YonhapnewsTV) 3-2 screenshot.png

출처 - <연합뉴스>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3.1절 기념행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뭣 모르고 내뱉던 후보 시절은 차라리 술주정이라 웃어넘길 수라도 있었지만. 이날은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 아닌가.

 

그날의 또 다른 발언.

 

[현장연결] 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_기억·미래·번영_ _ 연합뉴스TV (YonhapnewsTV) 1-49 screenshot.png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내린 역사적 사실 판단이다. 간단히 해석하면

 

=조선은 식민지 될 만했다.

 

사실 판단은 가치 판단을 끌어내기 위한 초석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길라잡이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을 도출하기 위한 전제다. 윤석열 정부에서 도출한 역사적 교훈은 ‘세계사 흐름에 잘 대응해야 함’. 그리고 그 방법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미국과 연대하여,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에 대항하겠다’는 것.

 

이것이 일제 강점기, 남북분단, 그리고 지금 맞이한 신냉전 시대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역사적 해석과 진단이다.

 

일본의 행보를 긍정하는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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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체결 기념 사진

 

한국과 일본이 연대해 어떤 적대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은 100년 전에도 있었다. 때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

 

아시아주의란,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저항하기 위하여, 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단결하라고 하는 주장

 

아시아 국가에 의한 아시아 발전을 주장하면서, 그 중심은 일본이어야 한다는 이념이다. 국가 간 연대라는 친화적 외교 전략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서양 열강에 대한 근대 일본의 국권 확립과 팽창을 위한 속임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게 먹혔다.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공포가 아시아를 휩쓸었다. 그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른 속도로 ‘근대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고 아시아 국가에서 본받아야 할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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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아회 집회가 자주 열린 가쿠슈인

 

조선 지식인들이라고 별수 있었겠나. 지금 표현으로 ‘J-근대화’에 홀딱 반한다. 1880년, 일본·청·조선의 지식인이 모여 설립한 흥아회(興亞會)가 대표적이다. 이들 중 일부는 정말로 아시아 삼국의 연대를 통해 평화롭게 각국의 독립을 보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아시아주의에는 심각한 맹점이 있었다. 서구열강이 아닌, 같은 아시아국에 총구를 돌리는 순간, 아시아주의의 의미는 무색해진다는 것.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당시 일본의 집권 내각은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아시아주의를 이용했다. 수백 년간 조선을 속국으로 삼은 청을 조선 땅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선을 해방하겠다는 아름다운 명분. 그 속에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청일 전쟁이 끝나고 1890년대 후반, 일본의 행보를 긍정하는 조선인들이 등장한다.

 

"갑오년에 청국을 치고 대한을 독립시켰으며 오늘날까지 가다듬어 서양 각국을 방어하며 동양을 보존하라." 

 

<독립신문> (1899.02.17)

 

수백 년 동안 조선을 지배하던 중화관이 흔들리고, 일본 유학파들이 근대적 개혁을 주도하던 상황. 을미사변 이후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이 각 지방에서 전개되고 있었지만, 한쪽에서는 일본의 팽창을 긍정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 남하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위협을 느낀 일본은 아시아주의를 적극 활용한다. 특히 전 세계에 퍼진 인종주의로 인해, 러일전쟁은 백인종 대 황인종의 대결로 인식되었다. 러시아에 의지하려던 고종의 바람과 달리 이런 주장도 나왔다. 

 

"러시아는 반드시 아시아를 공격한다. 만주를 잃으면 중국과 한국이 위험해질 것이므로, 일본은 자국의 이익뿐 아니라 동양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쟁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황성신문> 190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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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평화론'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아시아를 지키는 형님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1904년,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선언하고 제1차 한일협약, 을사늑약에 이르는 과정에 ‘극동 평화론’을 활용한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말한다.

 

“러일전쟁 결과 한국이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 양국 간의 결합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한일 외교 자료 집성』

 

저 밖의 못된 서양 양아치로부터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선 일본과 집을 합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이다. 꽤 많은 조선 사람이 이 논리에 동조했다. 많은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이야말로 한국의 평화를 보존하고 정치를 개혁할 자격이 있는 국가라 여겼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도 여전했다. 일본을 ‘서세동점’에 함께 대항할 우리 편이라는 생각에 매몰된 사람들이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현장연결] 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_기억·미래·번영_ _ 연합뉴스TV (YonhapnewsTV) 2-6 screenshot.png

104주년 삼일절 기념식 현장

출처 - <연합뉴스>

 

20세기 초, 한국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외교란 하나를 얻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고 치열하게 대립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직시하지 못하고 인종주의와 서세동점의 거대한 현상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결국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스스로 일본에 대한민국 국권을 내주었다. 혼을 잃는 순간, 나라 또한 사라질 수 있음을 외면한 것이다.

 

제국주의 국제 정세에서 조선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허울 좋은 명분에 국익을 내준 엘리트 관료들의 실책은 그보다 무겁다. ‘보편적 가치’라는 허상에 빠진 친일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방조했다. 이처럼 편협한 시각으로 판단하는 관료들, 2023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윤석열 정부는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한다. 아래는 대통령실 관계자가 한 말이다.

 

"한일 관계와 관련해 두 가지 정도의 세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세력. 하나는 어떻게든 반일, 혐한 감정으로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다. 누가 미래 세대를 고민하는 세력인가. 현명한 국민들이 잘 판단할 것"

 

국민의 의견을 ‘낡은 것’ 혹은 ‘미개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 선민의식에 쩔은 지식인들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실수다.

 

3·1절에 일장기 건 주민…이유 묻자 '윤 대통령 기념사' 언급 _ JTBC 뉴스룸 1-27 screenshot.png

출처 - <jtbc>

 

얼마 전 ‘삼일절 일장기 게양’ 사건이 있었다. 일뽕, 국뽕을 운운하며 다투던 각 커뮤니티에서도 위 사안에 있어서는 입을 모아 일장기를 건 집주인을 비판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누군가 부추긴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배운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레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단순한 감정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독도 문제와 같은 ‘국익’과도 관련된 이성적 판단이기도 하다. 이것을 ‘정치적 반사이익’ 정도로 치부한다면,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주도권을 내어준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끄러움 없는 자들의 후진 기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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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우리가 이룩한 지금의 번영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그 노력을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선열에게 제대로 보답하는 길입니다.”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 즉 한미일 3자 협력 강화는 순국선열에게 보답하는 일이라는 참신한 발상이다. 1953년 ‘제2차 한일 회담’ 준비의 일환으로 1952년, 이승만은 3.1운동 피해자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2013년 국가기록원에서 공개한 『3.1운동 피살자 명부』에 따르면, 당시 순국한 희생자는 총 572명. 조사가 부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국민이 희생당했음을 알 수 있다.

 

삼일절은 만세운동 기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중 희생당한 국민에 대한 추모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기념사에 “희생당하신 분들을 끝까지 발굴하고, 국가가 보답하겠다.”라는 발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의례적이라도 하는 게 당연하다. 

 

삼일절의 중요한 의미를 무시하고 참모들이 작성한 기념사를, 대통령은 마치 오작동을 일으킨 로봇처럼 카메라 앞에서 삐그덕삐그덕 내용을 전달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미래지향적인 엘리트라고. 그래서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정치하는 냉철한 논리주의자라 자위하면서.

 

그들에게 말한다. 이것은 감정과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 주권에 관한 기초적인 소양이라고. 그 행위를 이성의 영역으로 포장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후진 사람이라고 말이다.

 

공자의 유명한 일화로 글을 마무리한다. 

 

어느 날 길을 가다 똥을 누는 사람을 본 제자가 공자에게 묻는다.

 

“스승님, 왜 저 사람을 가르치지 않고 그냥 피해 가시는 겁니까?”

 

“저자는 일말의 양심도 없는 자다. 양심이 아예 없는 자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나?”

 

 

 

 


 

 

[참고문헌]

 

金度亨, 「韓末 啓蒙運動의 政治論 연구」, 『한국사연구』 54, 1986, 75-137.

전상숙, 「근대적 전환기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대한 한국의 인지적 대응: 국권 인식을 중심으로」, 『東亞 硏究』 33.2, 2014, 7-46.

신운용, 「安重根의 ‘東洋平和論’과 伊藤博文의 ‘極東平和論’」, 『역사문화연구』 23, 2005, 131-177.

최종길,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조선인의 반응 –흥아회를 중심으로-」, 『史林』 0.56, 2016, 97-125.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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