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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관(武官)은 권한은 적고 책임은 많은 3D 벼슬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중앙 정계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양반들이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죠. 

 

이번에 소개하는 영남 양반 노상추(盧尙樞, 1746~1829)도 이런 이유로 무관의 길을 갑니다.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의 자손이었던 그는 23살에 붓을 집어 던지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약 3년간 준비를 마친 후, 1771년부터 그는 과거(무과)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약 9년이 지난 1780년에서야 그는 합격의 영광을 거머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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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합격했으니까~

 

과거를 준비하며 재산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과거 합격은 기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크나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제 관직을 하사받고 임무를 시작하기만 하면 됐는데, 관직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노상추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으로써 아무 관직이나 할 순 없었기에 임금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는 ‘선전관’이란 관직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워낙 요직이라, 당시로선 서울 명문가 중심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영남+남인’이라는 페널티를 갖고 있던 노상추에게는 큰 욕심이었던 거죠.

 

그리하여 무려 3~4년 동안, 노상추는 관직 추천에서 탈락합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낮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수령이나 절도사가 되어 자신이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치는 것이었으니까요. 기다리다 못한 그는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고관대작의 집을 돌며 사정합니다. 그 덕이었을까요. 1783년 드디어 ‘무신겸선전관’이란 관직을 받습니다. 구체적 직무는 입직(入直), 즉 광화문 근방의 순찰과 경계 업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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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날이 이어지는 고된 업무와 외로운 타향살이로 노상추는 점점 지쳐갑니다. 후방의 군인들이야 경계 때 가끔 꿀이라도 빨지만, 임금님을 지키는 노상추는 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경계설 때도 임금님의 가마와 모든 벼슬아치가 오가는 광화문 앞 거리를 지킬 때가 많았죠. 승진하기 쉬운 만큼, 하루아침에 좌천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상추도 그런 썰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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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추가 보고 들은 무관과 문관의 차이 

 

1786년 1월 12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추운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동료들과 함께 몸을 녹이고 있는데, 부서의 하인이 다가와 잡담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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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은 얘기가 하나 있는데요. 나리들이 잘 아시다시피, 지난번 임금님 앞에서 활을 쏘는 행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때 임금님께서 하신 말씀을 크게 외치는 선전관이 계셨는데, 목소리가 너무 낮고 가늘어서 당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님께서 진노하셔서, ‘저 선전관과 책임자 송재서를 당장 잡아 올려라’라고 명을 내리시니, 순식간에 행사장 분위기는 얼어붙고 두 사람은 곧 임금님 앞에 잡혀 왔지요. 다들 곧 좌천이니, 심하면 유배도 가겠거니, 하면서 벌벌 떨고 있는데, 아 글쎄 송재서 나리가 임금님 앞에서 침착하고 정연하게 답하시는 겁니다. 그 덕분에 특별 교지를 내리셔서 참상 선전관에 임명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아닌가. 오늘 회의에서 목소리가 크고 또렷한 사람 6명을 미리 정하여 활쏘기 행사를 대비하도록 지침을 만들었다.

 

임금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스피커 관료가 직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자 왕의 진노를 사게 되지만, 곧 책임자인 송재서의 침착한 대응으로 둘 다 무사했을 뿐 아니라 송재서는 승진까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왕의 지척에서 일한다는 건 떡상의 기회과 떡락의 리스크를 모두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락 직전이었다가 한순간에 고속 승진해버린 송재서는 늘 그만한 준비가 되었던, 즉 ‘군기가 잡혀 있던’ 사람이었던 거죠.

 

군인에게 군기는 이렇게 중요하지만, 문관들의 각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노상추는 친척 형에게 이런 불만을 토로합니다.

 

1786년 9월 8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어제 친척 형 정달신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형에게 토로했다.

 

“형님. 제가 벌써 궁궐을 지키는 벼슬을 얻은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여러 국법에서 시위(侍位)를 엄격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죠. 하지만 문무백관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위 공직자든 일선 공직자든, 한 시간 동안만이라도 다리를 모으고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소란을 피우면서 자리를 이탈하거나 수시로 들락거립니다. 어가가 이동할 때에도 얌전히 따라가기는커녕 도중에 제멋대로 뛰어가거나 도망치는 사람도 있죠. 기강이 이렇게 해이하니,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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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행차에는 궁궐의 수비군과 문무백관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을 시위라 하죠. 국왕의 위엄과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매우 중요한 의례였지만, 많은 문관들은 매뉴얼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극에서 어가를 따르는 행렬은 질서가 정연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사이에 화장실도 가고 잠깐 집에도 다녀오는 등 온갖 사소한 ‘열외’가 있었습니다. 노상추의 눈에 군인은 조금이라도 각을 놓치면 엄벌을 받는데, 문관은 저렇게 해이해져 있으니 기가 찼을 겁니다.

 

노상추가 궁궐 수비군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개인적인 고생을 겪으며 ‘존버’한 이유는 단 하나, 고위 관직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연말 인사평가와 인사발령 때마다 촉각을 기울였는데요. 그는 서울을 떠나 지방의 수령으로 발령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지방 부임의 기회가 생깁니다.

 

 

빽없는 자의 서러움

 

1787년 6월 15일 ~ 6월 22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5일 : 오늘 인사평가 문서를 받았다. 우리 동료 중에 중(中)이나 하(下)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 흠결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인사평가를 잘 받았으니, 인사발령을 기대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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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 인사발령이 났다. 친척 형 정달신은 수령이 되었다. 이번 인사발령에서 수령으로 발령받은 유일한 영남 사람이었다. 그 밖에 쭉 이름을 훑어보는데, 나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내가 갑산(甲山)의 진동진(鎭東鎭) 만호로 발령받은 것이 아닌가! 이건 명백한 좌천이었다. 인사평가를 잘 받았는데도 좌천이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힘도 없고 줄도 없어서 벌어진 일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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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 또한 관직이니 죽는 것보다는 나은가. 정말 분하고 통탄스럽지만, 병조에서 나를 변방으로 밀어낸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신하 된 자가 충성을 다함에 우열이 있겠는가.

 

광화문 사거리의 칼바람을 견뎌내며 인사평가를 잘 받았건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다름 아닌 최전방, 그것도 ‘갑 to the 산’이었습니다. 갑산, 그곳은 ‘삼수’와 함께 묶여, 조선시대 내내 1타 유배지였습니다. 험준한 개마고원의 중심부로, 1월 평균 기온 –18℃(양구의 1월 평균 기온은 –7.9℃), 가는 길도 험하고 경작지도 적어 식량난이 일상인 곳. 모든 공무원이 ‘극혐’하는 곳이었죠. 그 암울한 근무지에서도 노상추는 여차하면 전투 중 목숨을 잃을 수도 ‘워스트 of 워스트’ 최전방 부대의 대대장으로 부임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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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현타 와서 사직서를 쓸까 말까 고민하는 노상추의 모습이 일기에 선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급제한 무과입니까. 유산 다 쏟아붓고 올인하여 간신히 얻은 벼슬이고, 걸핏하면 수일 연속 광화문 밤샘 경계를 해야 했던 ‘짬찌’ 생활도 버티며 지킨 벼슬입니다.

 

노상추는 어떻게든 멘탈 관리 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던 건, 라인에서 밀려 ‘억까’ 당한 게 분명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 군인이라면 한 번쯤 최전방으로 발령되는 게 맞긴 합니다. 조선 또한 변방 근무의 임기를 채워야만 더 높은 벼슬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신임 수령 인사 중 영남 사람은 단 한 명이고, 똑같이 인사평가를 잘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만 최전방 발령이니, 억까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상추는 터진 멘탈을 겨우 봉합하며 갑산으로 떠납니다. 하지만 부임 길 자체가 이미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여비가 모자라 빚을 지고 출발합니다. 이윽고 함경도로 들어서자 ‘산길은 막 흘려 쓴 글자처럼 구불구불 험했고, 고개에서 내려올 때는 말이 발로 자갈을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라고 기록하죠. 

 

거기에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고, 숙소는 낡아서 추위를 제대로 막지 못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여러 사람이 선물 또는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죠. ‘이 바닥에서 적당히 버티고 싶으면 뭔가를 내놔라’ 뭐 그런 유언무언의 압박이었을 겁니다. 이들의 협조가 없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니, 사대부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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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최전방 부대로 발령받은 노상추의 업무는 무엇이었을까요?

 

1787년 7월 17일 ~ 19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7월 17일 : 진동진에 도착하기 전, 병사 4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진동진 소속 병사들이었다. 대접받은 것이 저질 술 한 병과 삶은 닭 한 마리뿐이었으니, 헛웃음만 나왔다. 저녁에 진동진에 도착했다. 전임과 인수인계를 마친 후 부임하였다.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관할 지역에 백성이 몇이나 살고 있나 물었더니 39호라고 한다. 관사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7월 19일 : 아침저녁으로 진의 문을 열고 닫는다. 그저 이것뿐이다. 진을 열고 닫을 때 내는 나팔·북·징 소리가 나의 꿈을 깨우는 것일 뿐이니, 그냥 웃음만 나온다. 

 

8월 28일 : 오늘 병사들의 인원 점검을 했다. 각 지방에서 파견 나온 병사가 탈영하는 것도 막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이 지역 군사들이 강을 넘어 삼을 캐는 일을 막아야 했다. 듣자 하니, 백두산과 가까운 진들은 국법을 엄격히 지키면, 아무도 진에 남지 않고 다 도망갈 것이라고 한다. 조선은 진을 설치한 지가 오래되어 산에 나무가 없으나(진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밭을 갈고 땔나무를 하기 때문에), 청나라 지역은 그렇지 않아 산림이 무성하므로 삼을 캐고 사냥하기 위해, 혹은 나무를 베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때는 18세기 후반. 이 시기는 여진족의 국지도발이 심심치 않던 14~15세기도 아니었고, 청나라와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17세기도 아니었습니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으며, 전방에서는 이렇다 할 분쟁도 없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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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청나라는 자신들의 출신 지역인 만주 일대의 출입 및 거주를 금지하였습니다. 덕분에 무성한 산림과 풍부한 자원이 잘 보존되었죠. 반면, 조선의 북부는 마치 지금의 북조선처럼 산은 벌거벗고 자원은 씨가 말랐습니다. 그래서 조선 백성들은 먹을 것과 나무를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것은 조선-청 사이의 외교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노상추가 하는 일이라고는 딱 두 가지, 아침저녁으로 진의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군사들이 탈영하지 않게 인원 점검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진동진이란 지루한 일상과 낡은 건물만이 있는 곳일 뿐이었죠. 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이곳이 위험한 최전방이긴 하지만 과거처럼 여진족의 침공으로 목숨이 아주 간당간당한 곳은 아니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이런 진동진에 삼엄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고, 엄격한 훈련도 없었습니다. GOP에서 뽀글이 끓여 먹는 건 일탈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군기가 빠진 편이 나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최전방 부대의 상황은 달랐으니까요.

 

<계속>

 

 

※본 연재는 가독성을 위해 사료와 해석에 약간의 윤색을 더했음을 알립니다.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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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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