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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11시간 후

 

잠에서 깼다.

 

약에 취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가관이었다. 허물 벗듯 벗어 놓은 옷가지, 방바닥에 흩어진 배달 음식의 잔해(?)와 술병. 환하게 켜진 형광등 아래 우웅- 소리 내며 돌아가고 있는 PC.

 

휴대폰에 불빛이 들어온다. 현재 시각 새벽 3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처음 떠오른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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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약이 있어야 한다. 약을 먹지 않는 한, 나는 내 자신을 믿지 못한다. 형광등을 켜고 서둘러 약을 찾기 시작했다.

 

정신과 질환을 처음 앓거나 혹은 알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분들에게 먼저, 이 말을 꼭 해야겠다.

 

“널 과신하지 마.”

 

내 의지로 뭔가를 극복한다? 물론 그런 경우 있다. 다만 그건 소수의 선택 받은 이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병’을 앓는 경우라면 말이 달라진다. 

 

팔다리 부상만 봐도 부목을 하고, 깁스하고 진통제를 처방받는다. 통증은 내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 질환도 마찬가지다. 정신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을 찾고, 상담받고, 약을 먹어야 한다. 

 

인류 문명이란 거대한 유산을 구축한 만물의 영장처럼 보이지만, 결국 호르몬에 의해 조종되는 ‘동물’일 뿐이다. 단 하나의 호르몬 이상으로 온몸에 문제가 생기고, 그 호르몬 불균형을 한방에 조절해주는 게 ‘약’이다. 약 안 먹고 버티다가 더 큰 일 난다는 건, 제대로 병원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아픈 게 몸이든 머리든, '아프면 약 먹는 것'은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내게, 약이 없다는 거다. 

 

몸에 지니는 것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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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와 알코올 중독을 앓다가 최근에 이혼 한 친구 놈이 하나 있다. 그는 지갑 속에 비상약을 여러 알 챙겨 다녔다. 그중 공황장애 약은 그에게 ‘부적’ 같은 존재였다.

 

“이거 하나만 있으면 돼.”

 

전조증상 비슷한 게 발생하면, 그는 약을 꺼내 먹지 않고 손에 들고 비볐다. 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가벼운 증상들은 넘길 수 있다고 했다. 

 

사건 발생 12시간 후 

 

약이 없다.

 

가방을 비롯한 모든 걸 회사에 놓고 왔다. 여분이 있겠지. 당장 집안을 다 뒤졌는데, 나오는 건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바륨(수면제) 세 알이 다였다.

 

참고로, 난 가끔 수면제를 처방받는다. 평소에도 수면 부족 상태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정말 위급한 증상이 발생했을 때 약을 먹고 자 버리기 위해서다.

 

수면제 세 알을 꺼내서 만지작거리다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이날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기 싫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불안함은 더해졌다. 아침까지 약을 먹지 않고 버틸 자신이 없었다. 갈등이 시작됐다. 

 

“지금이라도 수면제를 먹어야 하나?”

 

“아냐, 지금은 괜찮아.”

 

“실은 안 괜찮아. 그냥 먹고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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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마음에 방과 거실을 뱅뱅 돌았다. 평소, 깔끔떠는 성격은 아니어도 적당히 주변 정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바닥 청소를 했고, 작업실 각은 딱 맞춰야 했고, 화장실은 락스를 뿌려가며 청소했다. 그런데 어느새, 집은 폭탄 맞은 상태였다. 허물 같이 늘어진 옷가지들과 쓰레기가 바닥에 넘쳤다. 내가 무너지고 있는 게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올라왔다. 불안하고 절망스러웠다. 그 절망은 나를 베란다로 이끌었다. 석 달 전부터 베란다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다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아파트 15층이다.

 

제로의 영역에서 탈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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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용인시 정신건강 복지센터>

 

나에겐 ‘제로의 영역’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사람이 많이 몰리면(개인마다 ‘많이’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확실히 내 기준치는 평균보다 낮다) 입을 다문다.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감정의 마중물까지 다 퍼 올린 상태”가 된다고 할까.

 

수다, 위로, 호응과 같은 타인의 감정적 도움 자체를 거부한다. 평소엔,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이때는 그것마저 하지 않게 된다.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으로 끝없이 파고 들어가 침잠(沈潛)한다. 

 

타인에게 내 상황을 말하지 않는 것. 정말 위험한 상태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본인 피셜 '최악의 상황'이라 판단되면 말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나를 괴롭히는 수많은 잡념과 고민을 혼자 떠안는 것이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게임 오버네.”

 

이렇게 결론을 내려버리는 거다. 지금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이미 감정적 빈사 상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누군가에게 전화해라.

 

새벽 3시에 전화해서 대화할 수 있는 친구,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 몇이나 되겠나.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을 매번 반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 추천은 139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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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번호 없이 1393

 

언제 어느 때든 전화할 수 있는 국가기관이다. 일단 전화해라. 전화 걸어서 상담사에게 지금 내 상황을 말하고, 울든 수다를 떨든 하소연하든, 어떻게든 하라는 거다. 그 감정을 떨쳐 내는 것이 우선이다. 감정을 수면 위로 올리고, 도움 요청 단계에 들어서면 ‘내’가 내린 최악의 판단을 막을 수 있다.

 

나중에 돌아보면 결국 ‘한’ 고비였다. 그 고비를 넘지 못해 사람은 죽고 산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외로움이 들고, 좌절감으로 무너진 순간에도 망각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아프다. 아프니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

 

현대 사회에서 마음의 병을 앓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정도가 모두 다를 뿐. 그렇다고 병을 당연하게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부풀린다. 처음에는 자책, 우울, 불안함에 몸이 망가지겠지만 이후에는 망가짐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제로의 영역’. 그거 꽤 무서운 단계다. 주변의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다는 건 “얘 귀신 들린 것 같다.”는 상태와 흡사하다. 주변의 충고, 위로, 조언을 귓등으로 듣기 시작하면, 끝없이 내 안을 파고 들어가게 된다. 그 끝은 죽음밖에 없다. 왜냐고? 내 안에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끝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가기 싫다면. 좋은 거 하나 더 보고, 맛있는 음식 하나 더 먹고, 좋은 사람들과 한 마디 더 수다 떨고 싶다면, 전화를 걸어라. 통화할 사람이 없다고? 주변에 널린 게 상담 전화다. 일단 나를 믿고 1393을 눌러라. 온갖 곳으로 다 연결해준다. 그렇게 해서 혼자가 아니란 걸 확인해라. 다이얼을 누를 용기를 내라고.

 

그래서 나도 그 새벽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더듬더듬 다이얼을 누르면 연결되는, 그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서.

 

아니, 살기 위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