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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관(武官)은 권한은 적고 책임은 많은 3D 벼슬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중앙 정계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양반들이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죠. 영남 양반 노상추(盧尙樞, 1746~1829)도 이런 이유로 무관의 길을 갑니다. 약 12년의 공부 끝에 합격의 영광을 거머쥡니다.

 

하지만 ‘영남+남인’이란 페널티를 갖고 있던 노상추가 좋은 관직을 얻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습니다. 좋은 자리는 서울 명문가 중심으로 선발되었으니까요. 결국 노상추는 3~4년 동안 대기만 타다 자존심을 굽히고 고관대작들의 집을 돌며 사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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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좀 주세요. 젭~알!!!

 

그 덕이었을까요. 드디어 1783년 ‘무신겸선전관’이란 관직을 받아 광화문 근방의 순찰과 경계 업무에 투입됩니다. 그러나 왕과 가까운 곳에 근무하는지라 업무는 고되고, 타향살이는 외로웠습니다. 노상추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럼에도 ‘존버’했던 이유는 고위 관직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우선 인사평가를 잘 받아 인사발령 때 지방의 수령으로 가길 희망했는데요. 기대와 달리, 빽이 없던 그는 좋은 인사평가에도 불구하고 ‘워스트 of 워스트’ 최전방 부대의 대대장으로 발령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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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이 난 곳은 ‘갑산’. 험준한 개마고원 중심부로, 가는 길도 험하고 경작지도 적어 식량난이 일상인 곳으로 모든 공무원이 ‘극혐’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는 18세기 후반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어서 하루하루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으나, 노상추가 발령받은 갑산의 ‘진동진’은 너무나도 지루한 일상뿐이었습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저녁으로 진의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군사들이 탈영하지 않게 인원 점검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진동진에 삼엄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고, 엄격한 훈련도 없었습니다. GOP에서 뽀글이 끓여 먹는 건 일탈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군기가 빠진 편이 나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최전방 부대의 상황은 달랐으니까요.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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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부대의 어려움과 숨어있던 최정예 병사들

 

1789년 3월 6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지난 연말, 종성(鍾城) 관할의 동관진(潼關鎭)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 건너편에 사는 오랑캐들이 밤에 도강하여 사다리를 타고 성에 잠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수물자를 탈취하고 조선 여성을 납치해갔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다음 날, 수비대장인 한세창이 상급 부대에서 질책을 받았다. 한세창은 상급 부대에서 돌아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상급부대에서는 병으로 죽은 것처럼 꾸며서 조정에 보고했다고 한다. 청나라 지역에 끔찍한 흉년이 들어서 6진을 침략하는 일이 종종 생기고 있지만, 먼 지역이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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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추가 부임한 곳은 갑산입니다. 세종 시대의 4군 6진으로 따지면 4군에 해당하는 압록강 상류 지역입니다. 반면 6진은 두만강 하류 지역이며, 지금 북한-중국-러시아가 맞대고 있는 곳이죠. 두만강 건너편에는 청나라가 출입 및 거주를 금지했음에도 그 지역에 계속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나라라는 대국의 백성이지만, 사실 과거 여진족의 생활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죠. 그들은 종종 강을 건너와 6진을 약탈했는데, 위의 일기가 바로 그런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상급 부대는 이 일을 쉬쉬하며 ‘자연사’로 둔갑시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요?

 

최전방이란 곳은 참 어렵습니다. 지역 자연환경은 혹독하고, 상부의 지원물자는 적고, 늘 적 부대로부터의 위험이 도사리고, 병사도 간부도 기피하며, 지역 백성들도 살기 힘든 곳입니다. 간부가 백성과 병사를 혹독하게 대하면 비협조와 탈영이 돌아오고, 편안하게 대하면 꼭 이런 사고가 터집니다. 

 

세계일보.PNG

출처-<세계일보> 링크

 

예컨대, ‘노크 귀순’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한 22사단을 떠올려볼까요? 혹독한 환경 때문에 모두가 기피하는 지역이지만, 작전지역은 너무나 넓고 해야 할 임무도 많습니다. 당연히 여기저기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죠. 그렇기에 더욱 편안함보다는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 유지를 위해 병사들을 너무 갈구다 보면 불행한 사고가 발생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곳입니다.

 

조선의 6진도 이와 비슷한, 혹은 이보다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조차 6진에서 근무하다가 징계를 받았으니, 과연 ‘별들의 무덤’이라 할만합니다.

 

어쨌든 향방작계 예비군과 다름없는 병사들이 모인 곳으로 발령받은 노상추는 다른 최전방의 군인들보다 편했습니다. 그런데 예비군의 유구한 전통이 있죠. 느긋하게 누워서 엉덩이나 벅벅 긁던 아저씨들이 포상이 걸리는 순간 누구보다 뛰어난 참 군인으로 돌변한다는 것. 노상추도 그러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1789년 9월 26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이달에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지역 무과시험이 열렸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 기존의 벼슬하던 사람들은 승진할 수 있었고, 벼슬 없는 사람들은 벼슬을 얻을 기회였다. 그런데 뛰어난 무사들이 많이 등장했다. 편전 시험에서는 무과 출신 이문해, 북청 출신인 이행이 모두 적중시켰다. 기추(騎芻,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시험) 시험 때는 북청 출신 최상봉과 영하 출신 이달륜 및 박창익 등이 모두 적중시켰다. 특히, 갑산 관아의 남자종 김성흠이 기추에서 좋은 성적을 달성하여 면천되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지역의 무사 선발 시험이 열리자, 왕년의 무과 급제자와 누워있던 말년 병장들이 최정예군으로 돌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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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일반 병사들이 대활약하면서 벼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죠. 특히, 관아의 남자종은 탁월한 무예를 뽐내며 양민으로 신분 상승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군기가 다 빠진 당나라 군대처럼 보였지만, 부대를 캐리하는 A급 병사들이 꽤 있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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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최전방 GOP에서의 삶이 흘러가는데, 역시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탈전방’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공적과 평판을 높여서 수령으로 승진하는 것만이 최대 관심사였죠. 체면에 관계된 것이라면 예민하게 반응했고, 공적과 관계된 것은 다른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특히, 환곡과 관계된 업무가 그랬습니다.

 

 

환곡과 승진

 

1789년 10월 ~ 12월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0월 11일 : 내려온 공문을 보고 탄식했다.

 

“귀관이 올해도 전년처럼 환곡을 잘 거두면 승진을 요청하는 장계가 올라갈 것임.”

 

10월 24일 : 갑산 부사와 얘기를 나눴다. 갑산부의 환곡은 모두 1만 5천 섬이 지급되었는데, 그중 5천 석만 거두었다고 한다. 반면 진동진은 총 1천 5백 섬을 나눠줬는데, 지금까지 1천 2백 50섬이나 받아들였다. 이 얘기를 하니,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환곡 거두기를 독려한 까닭에 지금까지 환곡이 많이 걷혔으나, 아직까지도 받아내지 못한 환곡은 전적으로 지방 병사들 때문이다. 정말 분하고 통탄스럽다. 병사들은 지역 주민의 사정과 눈치를 보면서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내 승진이 걸려 있는데,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11월 20일 : 그동안 잔여 환곡이 도저히 들어오지 않아, 관아 문을 닫아걸고 폐업했다. 내가 일을 안 하면 공무원은 급료를 받을 수 없고 백성들 또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결국엔 지역 주민들이 미납 환곡을 바쳐, 거두지 못한 환곡은 고작 70섬뿐이다.

 

12월 25일 : 갑산부의 여러 지역에서 환곡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추수할 때 미리미리 독촉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연말인 지금에서야 독촉을 다니고 있다. 우리 진동진은 진작에 거의 다 채워서 다행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는 비난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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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을 거두는 건 지방관들의 가장 어려운 일이었죠. 걷자니 백성들의 원망이 심하고, 안 걷자니 조정의 압박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방관은 ‘적당히’, 너무 걷지도 않고 너무 안 걷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슬기로운 수령 생활’이 필요했죠. 그런데 노상추는 FM 그 잡채였습니다. 승진이 걸려 있었으니까요. 마치 진급을 앞둔 대대장처럼, 그는 백성들의 원망이나 동료들의 눈총을 무시한 채, 정해진 환곡량을 거의 다 채우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그에게는 쾌거였지만, 병사와 백성들에게는 ‘폭정’이었죠. 당연하게도 퇴임 무렵이 되자 그의 밥상엔 풀만 올라옵니다. 

 

이렇게 갑산 GOP에서의 군 생활이 끝납니다. 참 지긋지긋했겠죠. 이제 노상추의 관심사는 오로지 진급과 승진으로만 쏠렸습니다.

 

 

다시 겪는 빽 없는 무관의 비애

 

서울로 돌아온 그는 갑산 근무에 대한 평가를 잘 받아 당상관, 즉 정3품 절충장군의 품계로 진급합니다. 병사들을 움직여 무너진 관사를 새로 지었고, 역시 병사들을 갈궈서 환곡을 잘 받아낸 덕분이죠. 군대라는 조직은 참 이상하게도 지휘관의 평가와 사병들의 만족도가 반비례합니다. 그 뒤틀린 조직의 체계는 조선에서도 유효했나 봅니다.

 

이제 품계가 올랐으니, 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수령 자리를 따내는 작업이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40대 중반, 커리어가 한층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연령대였죠. 그의 구직 활동은 청년들의 에너지 레벨보다 높았습니다.

 

우주여 도와주소서.PNG

간절히 원하노니,

우주여 도와주소서~!

 

1790년 6월 16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병조판서를 만나러 갔다. 그의 푸대접이 점점 더 심해진다. 하지만 내가 병조 판서의 눈에 들지 못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1792년 6월 22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오늘 인사 발령이 났다. 나는 또다시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이번에도 수령 직을 얻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호에서 바로 부사(각 고을의 수령)로 승진했는데, 그들은 딱히 엄청난 공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특혜를 받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난한 평가를 받았지만, 경상도관찰사가 밀어줘서 승진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꼬라지가 참.... 그냥 내 자신이 불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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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장관인 병조판서를 비롯, 인사권을 쥐고 있는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진땀 나도록 다니지만, 성과는 좀처럼 나지 않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는 ‘서울+노론’이 아닌걸요. 요즘으로 치면 육사 출신이 아닌 ROTC 출신이라서 진급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병조판서 집에 수차례 찾아가도 그에게는 항상 푸대접만이 돌아왔고, 궁궐 수비군인 오위장 직책에서만 계속 뺑뺑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뚝 떨어집니다.

 

<계속>

 

 

※본 연재는 재미를 위해 사료와 해석에 약간의 윤색을 더했음을 알립니다.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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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