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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내용 요약>

 

소개: 94년생. 직업 없음. 대학 졸업장 없음.

경력: 몇 개의 사업 경험 +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 생활 1년 6개월.

 

이후 필자가 생수 배달 일을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났다···


 

1. '나도 택배기사 할래' 택배기사 꽁무니 졸졸졸

 

생수 배달 첫날부터 마이너스 60만 원을 기록하고 나자 영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엔 시베리아나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죄수처럼 벌 받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생수가 무거워 몸이 힘든데, 이렇게 힘들게 일해봤자 첫날의 손해를 메꾸는 것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사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생수 배달을 추천하던 블로그 글을 쓰는 아저씨는 어째서 결코 힘들지 않은 일이라고 이 일을 추천했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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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손해를 메꾸고 돈을 벌게 된 넷째 날부터도 일할 맛은 영 나지 않았다. 강제 노동하는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은 좀 덜어졌지만 몸이 힘든 건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몸의 마디마디에서 뚝뚝 꺾이는 소리가 나고, 손바닥 피부는 다 벗겨져 하얗게 일어났으며 팔이 뽑힐 것처럼 아팠다. 이렇게 계속 일하다가는 미래의 건강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하긴 이 일이 그렇게 벌이가 좋고 쉬운 일이라면 하겠다는 사람이 널려 있을 테다. 뭐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그만두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서른을 눈앞에 둔 주제에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 천만 원짜리 차를 샀고, 공들여 자격증도 땄는데 이제 와서 다시 커피 로스팅처럼 벌이는 적지만 몸 편한 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원래 하려 했던 일반 택배까지 경험해 보자. 일반 택배를 해보고도 도저히 못 하겠으면 그때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하고는 이전보다 여유롭게 일했다. 평소에는 하루 20만 원은 채워야겠다 싶어 적재함에 생수를 3층으로 실었다. 2L 생수 6통, 한 팩을 기준으로 한 층에 80개라 3층을 실으면 240개인데 하루 223건이 20만 원이니 3층을 채워야 20만 원 이상 벌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20만 원을 벌고 싶다고 매일 벌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날 할당받은 배달 물량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량이 적은데 더 벌고 싶으면 다른 기사들과 협의 후 센터 직원을 통해 조율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물량을 적게 받고 싶으면 센터 직원에게 미리 이야기해두면 되었다. 생수 센터에는 언제나 고정 구역이 없는 대기 기사들이 있었고, 자신이 할당받은 물량보다 더 받아 돈을 더 벌고자 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생수 일을 처음 시작하는 기사들은 취업 알선 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택배차 구입 등 초기 자본이 들어가니 그 비용을 빨리 차감하고자 하나라도 더 배달하려는 사람이 많았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반 택배로 이직을 마음먹은 후부터는 80개든 100개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물량을 받았다. 10만 원만 채워도 잘한 거다, 하는 마음으로 물량을 확 줄였다. 대신 배달하러 돌아다니면서 택배 조끼를 입은 택배기사만 보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기사 자리 나는 곳 없나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칩거 시절의 나였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첫날부터 마이너스 60만 원을 기록한 아오지 탄광 생수 배달 기사인 나에게 낯을 가리거나 창피해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상대가 이상하게 쳐다봐도 불쌍하게 여겨도, 어떻게든 이직만 할 수 있다면 아무 상관 없었다. 다행히 택배를 하시는 기사님들은 기본으로 30대 이상이고, 40에서 50대가 평균일 정도로 나이대가 있으셔서 그런지 얼굴에 철판 깔고 다가오는 20대 생수 기사를 신기해는 할망정, 밀어내진 않으셨다. 그렇지만 어디에나 성질이 급한 사람은 있는 법이고, 그날따라 유독 힘든 하루를 보내 화가 가득한 사람도 있는 법, 대놓고 무시하거나 경계심을 보이는 분들도 물론 있었다. 그럴 땐 굴욕감을 실감하기보다 두 손에 생수 한 팩씩 들고 다음 배달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이직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난 뒤 일주일 동안 총 열네 명의 택배기사에게 이직할 만한 자리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어, 마침 우리 터미널에 그만둔다는 친구가 하나 있어요. 구인 공고 내볼까 하던 차에 잘됐네요. 일주일 뒤에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어요?"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환한 낮, 담배 한 대 피우며 느긋하게 꽃구경하시던 어느 기사님 말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그 터미널이 살던 집에서 차로 3분 거리였다니.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벚꽃엔딩'보다 백만 배는 더 달콤하고 로맨틱한 '생수 엔딩'이었다. 기사님께 연락처를 드리고 그날 남은 생수 배달을 가뿐하게 마무리했다. 조금 어려운 구역이긴 하지만 힘든 생수 배달도 해봤으니 문제없을 거라고 덧붙이는 기사님 말에 남은 생수들이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같이 꽃구경할 상상 속 여자 친구보다 30대 택배 기사님의 얼굴이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봄날이 아닐 수 없었다.

 

2. 할 일도 많은데 택배기사를 한다고?

 

"나 택배기사 됐다."

 

자랑스럽게 주변에 얘기하자 친구들 대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침묵을 택했다. 대기업 사무직 친구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와, 누가 보면 대기업 공채라도 된 줄 알겠다. 그게 그렇게 좋냐?"

 

허물없는 사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내포된 약간의 편견과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물론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 일을 할 거였고,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 세상에 다시 나온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친구는 바로 자신의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래서, 택배기사는 얼마 버는데?"

 

"매달 다르지만 내가 가는 자리는 이거저거 다 떼고 월평균 4, 500 정도 되는 거 같더라"

 

친구가 이어 물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냐?"

 

"아니 하루 7-8시간 일하는 기준으로 그만큼 벌어가는데 전임자분 보니까 많이 일한 달은 800만 원대도 벌어갔더라. 근데 난 그렇게까진 못할 거 같아서."

 

친구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근데 택배기사는 좀 그렇잖아. 일도 힘들고, 세상에 할 일도 얼마나 많은데"

 

친구의 말에 나는 적당히 무시할까 하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보단 제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꼰대질을 택했다.

 

"일 힘든 거야 모든 일이 그 일 나름의 힘든 점들이 있겠지. 대기업 신입사원은 뭐 안 힘드냐? 대기업 사무직이나 택배기사나 다 사람 하는 일이고 세상에 필요한 일이야. 넌 택배 기사 없이 살 수 있어?"

 

순간 정적이 흐르더니 다른 친구가 끼어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야"

 

나는 친구의 말 '세상에 할 일도 얼마나 많은데'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당시 수많은 일 중에서 택배를 선택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년 6개월 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도저히 당시 멘탈로는 일반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다. 얼마를 벌든 매일 사람들과 치이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택배기사는 혼자 하는 일이니 그런 위험이 없었다. 매일 걷고 힘을 쓰니까 자연스럽게 운동도 되고 잡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밤에 잠도 잘 올 것이고 나에게는 이만한 일이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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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비즈워치/이명근 기자(qwe123@bizwatch.co.kr)>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게는 몸으로 하는 것, 특히 노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택배 상하차를 해본 적은 있지만 공사판이라든지, 육체 노동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일을 본업으로 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노동 중에서도 중노동인 이 일에 적응하면 앞으로도 사는데 어떠한 일도 못할 것 없다는 자신감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 돈도 빌리고, 일자리를 얻고자 얼굴에 철판 깔고 현업 기사들을 직접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그런 노력 끝에 시작한 택배 일은 마침 근무 조건도 나와 딱 맞았다. 살던 집에서 터미널이 차로 3분 거리밖에 안 되었으며, 회사처럼 입고 나갈 옷이나 머리 스타일에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또 혼자 배송하기 때문에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건 팟캐스트를 듣건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 시야는 확보해야 했지만 귀는 자유였다. 업무시간 중 틈틈이 강의를 들으며 지식을 쌓고 공부를 하는 등 자기 계발을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었다. 택배만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송하면 일한 만큼 돈이 따박따박 들어오니 내게는 그 무엇보다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당시 택배 일은 내가 다시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적의 일이었다. 생각의 정적을 깨니 친구가 웃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야 첫 월급 받으면 술 한번 사라니까."

 

내가 말했다.

 

"감당할 수 있겠어? 그때 내가 너무 힘들다고 징징거릴 수도 있는데."

 

내가 툴툴대자 친구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넌 분명 잘할 거야, 안주 맛있는 걸로 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