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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조선 후기, 중앙 정계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양반들이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무관(武官)’이었습니다. ‘영남+남인’이란 페널티를 갖고 있던 영남 양반 노상추(盧尙樞, 1746~1829)도 이런 이유에서 무관의 길을 선택합니다.

 

약 12년의 준비기간 끝에 어렵사리 과거(무과)에 합격했지만, 빽 없는 노상추가 좋은 자리를 추천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고관대작들의 집을 돌며 사정한 끝에 겨우 광화문 근방 순찰과 경계 업무를 맡는 ‘무신겸선전관’이란 관직을 받습니다. 과거 합격했지만, ‘대기’만 타다 약 3~4년이 지난 후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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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임관이닷~~

 

하지만 갓 임관한 ‘짬찌’에다 왕 주변에서 근무하는터라 꿀 빠는 건 상상도 못 하는 고된 근무가 계속되었고, 타향살이는 외롭기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노상추는 ‘존버’하며 좋은 인사평가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각고의 인내와 노력 끝에 좋은 인사평가를 받았지만, 빽이 없던 그는 결국 모두가 기피하는 ‘워스트 오브 워스트’ 최전방으로 발령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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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이었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최선을 다해 최전방에서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빽이 없던 그에게는 근무평가를 잘 받는 것만이 진급하여 ‘수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갈수록 진급에 혈안이 된 노상추는 환곡과 관련해서도 백성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가차 없이 대했습니다.

 

노상추는 수령이나 절도사가 되어 자신이 가진 재주를 마음껏 펼치는 것을 꿈꿨습니다. 무관의 직책 중 수령이나 절도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직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진급만을 신경 쓰며 최전방에서 힘겹게 5년의 세월 견딘 노상추에게 다시 한번 좌절이 찾아옵니다.

 

자신보다 근무평가가 안 좋은 이들도 잘만 부사(각 고을의 수령)로 발령받았는데, 노상추는 또다시 부사로 발령받지 못한 것입니다. 국방부 장관인 병조판서를 비롯, 인사권을 쥐고 있는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진땀 나도록 다니지만, 성과가 없던 것이죠. 어쩌겠습니까. 그는 ‘서울+노론’이 아닌걸요. 노상추는 궁궐 수비군인 오위장 직책을 받고 계속 뺑뺑이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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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띠~이~~~발~~~~!

 

그런데 그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지난 기사부터 보시길 추천!

 

 

정조의 눈에 든 노상추

 

1792년 11월 18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오전에 임금님께서 주재하시는 활쏘기 및 진법 지휘 시험이 열렸다. 나는 활쏘기에서 1등을 했지만, 진법 지휘 시험에서는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 훈련대장에게 물으셨다.

 

“이번 활쏘기 시험의 1등은 누구인가?”

 

“노상추가 1등을 하였습니다.”

 

“진법 시험은 어떠했는가?”

 

“진법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하였다. 그를 불러와 내 앞에 다시 시험 보게 하라.”

 

라는 말씀을 내리셨다. 내가 임금님 앞에서 재시험을 마치자, 임금님께서 말씀하셨다.

 

“시골 사람인데도 참 잘하는구나. 통과다.”

 

행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니, 임금님께서 내리신 공문이 왔다.

 

“올해 활쏘기 시험과 진법 시험에도 모두 노상추가 1등을 하였다. 그에게 삭주 부사의 벼슬을 내리라.”

 

나는 어명을 보자마자 전하의 은혜에 감동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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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어~언~~하~~ 흑흑...

 

궁궐 수비대는 임금님 곁에서 근무하므로, 실력과 운이 받쳐준다면 언제든 특채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노상추에게도 그날이 왔죠. 활쏘기에서 1등을 하자, 정조는 그를 대놓고 밀어주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이미 통과하지 못한 진법 시험도 재시험을 볼 수 있게 배려하죠. 

 

그런데 정조의 “시골 사람인데도 참 잘하는구나.”라는 말이 재밌습니다. 당시에는, 적어도 정조가 보기에 출신 지역에 따라 관료들의 레벨이 달랐다는 의미죠. 특히 영남 출신임에도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흡족했던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의 인사 시스템이 왕이 이렇게 밀어주지 않으면 영남과 비노론 출신은 높은 벼슬을 하기 힘들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임금의 은혜를 받자, 노상추의 평판도 하루아침에 떡상합니다. 갑자기 여러 고관대작이 “자네의 이름을 일찍부터 알았네. 자네 할아버지도 참 대단한 분이셨지.”라면서 온갖 친한 척을 하죠. 권력의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일수록, 임금님의 총애가 누구에게 향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던 겁니다. 정조 또한, “네가 삭주 부사의 임무를 잘 마치고 오면, 너에게 방어사의 벼슬을 내리겠다.”라는 약속까지 합니다. 방어사는 종2품, 이순신이 역임했던 수군통제사와 같은 직급의 벼슬입니다. 정조가 이 정도의 약속까지 한 건, 대놓고 밀어주겠다는 뜻이죠.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수령 자리를 얻어낸 노상추. 게다가 그가 얻은 직책은 평시에는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수령이지만, 군 지휘 체계로서는 여러 지역을 통솔하는 여단장급의 중임이었습니다. 과연 그의 삭주 부사 자리는 잘 풀렸을까요?

 

 

망가진 징병제를 보고 통탄하다

 

1793년 12월 25일-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군대를 점검하기 위해 바로 훈련을 실시했다. 대장기를 앞세우고 삭주부 남문 밖에서 기마병 수백 명과 보병 수십여 명의 훈련을 감독했다. 그런데 군사들은 신호체계인 북과 깃발의 사용법, 그리고 진격과 후퇴의 전법도 알지 못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점호 불참자도 수두룩해서 실제 가용병력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우선 소집 대상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군 복무를 기피하고, 가난한 백성들은 군 복무를 피해 떠돌아다닌다. 조금이라도 부유한 사람들은 영장이 날라오면 평범한 백성들에게 돈을 줘서 대리 복무를 시킨다. 하지만 그 백성들도 돈만 받고 사라지므로 군대는 텅텅 빈다. 이렇게 나라의 모든 백성이 군 복무를 피하고, 수령들은 지역 민심이 두려워 법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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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주 위치

 

평안도 삭주는 의주 옆에 있던 고을로써,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곳 병사들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 그 잡채였습니다. 부대 내 수신호 체계를 아무도 알지 못하고, 각개전투 방법 또한 아무도 몰랐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된 걸까요? 

 

노상추는 그 원인을 ‘징병제의 모순’에서 찾습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군대에 가는 건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 불만을 잠식하기 위해선 공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하지만 공정성이 상실되자, 있는 집과 없는 집 모두 군대를 회피합니다. 자신의 생업을 내팽개쳐서라도 말이죠. 노상추는 이 ‘노답 현실’에 아연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음을 탄식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좋은 수령은 지역민과 친화적인 관계를 구축하여 최대한 징집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는데요. 물론 ‘친화적인 관계’란, 유력자와 이익을 주고받는 것으로 구축되었죠. 노상추는 고민했을 겁니다. 간신히 임금님의 눈에 든 지금, 적당히 근무하고 무난한 평가로 승진할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 갈아엎어야 할 것인가. 굉장한 중압감이 그를 덮쳤을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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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머리 아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다름 아닌 노상추 본인이 ‘적당히’를 모르는 FM의 화신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옆 동네 창성 수령과 심각한 갈등으로까지 이어지는데요. 노상추가 일기에 구구절절 적어놓은 그 스토리를 살펴보죠.

 

옆 고을 수령과의 신경전

 

1794년 7월 12일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부하직원에게 창성 수령이 한 말을 전해 들었다.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나에게 수청들었던 기생이 있는데, 삭주 부사가 그 기생이 삭주의 기생이라서 인원 점검을 한다는 핑계로 데려가 버렸네. 삭주 부사가 잘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잘못했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부하직원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인간의 천박한 인간성을 제대로 느꼈다. 올해 1월, 창성에 방문했을 때, 그는 “창성과 삭주는 분명히 관직의 서열이 다르고 체통도 다른데, 어째서 삭주 부사는 성안에서 감히 권마성(勸馬聲)을 시행했는가”라고 심통을 부린 적이 있다. 황당했던 나는, “무슨 소리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삭주 부사와 창성 수령은 법적으로 동등한 관계입니다만”이라고 답했지만, 그는 화를 내면서 ‘급이 다르다’는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 뒤로도 계속 나의 업무를 트집 잡으면서 협박을 놓더니, 지난 5월에 그가 삭주에 왔을 때는 전담 비서관을 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주 수령이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체포하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나는,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전담 비서관을 붙여야 한다니, 그런 전례가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이번엔, 해당 담당자를 잡아 보내라는 공문이 날려 보냈다. 공문에는 저항할 수가 없어서 일단 담당자를 올려보냈는데, 담당자는 창성 수령에게 차근차근 전례를 말하였고, 창성 수령은 그의 논리정연한 대답에, “지난번에 너희 수령이 예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죽을 만큼 곤장을 쳐야 하지만, 이번에는 참작해준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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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동네 창성 수령과의 갈등은 그해 1월에 있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권마성, 즉 “물렀거라~ 사또 행차시다.”라는 사극 대사처럼, 공직자가 행차할 때 앞에서 소리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요즘으로 치면, “대대장님 입장하십니다. 부대 차렷!”을 외쳤는데, 그 앞에 연대장(이라고 자신이 주장하는)이 있었던 겁니다. 창성 수령은 “자네와 나는 급이 다른데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권마성을 하는가!”라고 화를 내었고, 노상추는 이에 대해 법적으로도 관례적으로도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맞서죠.

 

그때부터였습니다. 창성 수령은 사사건건 노상추의 트집을 잡기 시작하는데요. 특히, 5월에는 전담 비서관을 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건수를 잡았고, 괜히 노상추의 부하직원이 조사에 소환되는 일도 있었죠. 무엇보다 총애하는 기생을 둘러싼 유치한 기 싸움이야말로 갈등의 클라이맥스였습니다.

 

이 갈등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먼저, 조선은 관직의 공백이 생기면, 인근의 수령 등에게 겸임을 맡겼는데요. 겸임이 반복되면 원래는 동등한 계급의 공직자 사이에 위아래가 생깁니다. 또 당시 지휘 체계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평시의 지휘 체계, 유사시의 지휘 체계, 징집병과 예비군의 지휘 체계가 복잡하게 꼬여 있었죠. 이러니 갈등이 안 벌어질 수가 없었던 겁니다.

 

물론 실제로는 동료들과 싸워봐야 커리어에 좋을 게 없으니, 적당히 자존심 굽히고 넘어갈 때도 많았습니다. 이 경우 당시 창성 수령 구명원이 노상추보다 일찍부터 수령직을 수행한 선배였으니, 적당히 선배 대접을 해 주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예법이라면 죽어도 포기 못 하는 FM의 화신이었다는 점입니다. 권마성 사건 때, 창성 수령은 그에게 “우리 사이에 예법 그런 거 차리지 말고 그냥 편히 오십쇼.”라고 말하는데요. 이는 “권마성 같은 걸로 서로 피 보지 말고, 그냥 친하게 지내자.”라는 제스쳐였죠. 그런데 노상추는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FM대로 질러버린 겁니다. ‘영남 명문가 출신의 양반 무관’, 이 프라이드는 그의 정체성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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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비켜라~ 나 영남 양반 노상추다

 

두 번째 이유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창성 수령 구명원과 노상추는 승진 경쟁자가 된 것 같습니다. 정조가 노상추를 삭주 부사에 부임시키기 전, 구명원의 이름도 고려되었거든요. 그러니까 구명원의 입장에서는 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라이징 스타가 자신의 바로 옆 동네로 부임한,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던 겁니다. 돌아가는 사정상, 그 둘 중 경쟁의 승리자가 차기 사단장이 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구명원은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지만, 노상추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슬기로운 사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이 진흙탕 기 싸움에 대한 소식이 평안도를 넘어 조정까지 들어갔거든요. 그 결과는 두 사람 모두의 파직이었습니다. 

 

 

파직 이후의 삶

 

무승부처럼 보이지만, 이 싸움은 사실 노상추의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정조의 기대를 받고 부임한 부사직에서 1년 만에 돌아왔고, 진흙탕 싸움이 조정에 알려져 온갖 구설수를 자아냈기 때문입니다. 구명원과의 싸움은 정조가 다시 불러줄 때까지 벼슬을 하지 못할 정도로 커리어의 큰 타격이었습니다. 한편 구명원은 그 이후에도 충청 수사까지 올라갑니다.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렵지만, 결국 ‘라인 싸움’에서 밀린 노상추의 KO패였던 것이죠. 

 

정조는 다시 노상추를 불러 중히 쓸 생각을 했으나,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와 함께 노상추의 커리어도 끝이 납니다. 노상추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죠.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한때 임금님의 총애를 받았고 벼슬도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갔던 덕분에, 그는 고향에서 유력자가 되어 가문을 크게 키워냅니다. 어쩌면 은퇴 후의 삶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정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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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조선의 직업 군인, 노상추의 이야기였습니다. 노상추의 커리어에서는 한국의 군대 문제와 함께 생각해볼 만한 여러 이야깃거리가 있었습니다. 그중 제일 심각했던 건 ‘징병제’ 문제입니다.

 

당시 조선은 수 세기 동안 누적된 여러 모순이 꽉 막힌 수챗구멍처럼 쌓여가던 시기입니다. 그중에서도 군역 문제는 19세기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노상추는 그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징병 대상자는 날이 갈수록 줄어가는데, 군에 대한 처우와 인식은 날이 갈수록 낮아집니다. 보급은 갈수록 질이 떨어지고, 간부들은 그저 커리어 쌓기에만 급급하죠. 인사 제도 역시 불공정해 출신 성분과 라인에 따라 이미 진급이 결정되고, 힘없고 돈 없는 백성들만 군역을 집니다.

 

이런 현실에서, 노상추는 비록 앞뒤가 꽉 막힌 FM이었지만, 조금 더 자부심 있는 관직 생활을 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큰 반칙 없이 당당히 무과에 합격했고, 비록 작은 관직을 받았을 때 불만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직무를 수행했으니까요. 안타까운 점은 그런 사람도 어느새 승진 때문에 백성을 쥐어짜는, 아니, 쥐어짤 수밖에 없는 구조에 휩쓸리게 된 점입니다. 그러다 결국, 사내 정치에 실패해 커리어도 몰락하죠. ‘참군인’은 사라지고 정치질만 남게 되는 군대의 구조, 그런 군대를 양성해내는 군 제도의 구조 속에서 어쩌면 이순신이 될 수도 있었던 인재가 흔한 군인 아저씨가 된 건 아닐까요?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노상추의 삶 속에서 우리 시대의 군 문제를 조금 더 진지하게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병사의 주적이 간부인 시대, 이제는 간부들도 보람을 느끼지 못해 한숨만 늘어가는 이 시대가 끝나면 좋겠습니다.

 

 

※본 연재는 재미를 위해 사료와 해석에 약간의 윤색을 더했음을 알립니다.

 

 

 

참고문헌

 

(1)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front/index.do)

(2)정해은, 「조선후기 무관 노상추의 중앙 관직 생활과 그 의미」, 민족문화논총 제73집, 2019.

(3)___, 「조선 후기 무신의 중앙 관료생활 연구」, 한국사연구 (143), 2008.

(4)한국사데이터베이스 노상추일기 (https://db.history.go.kr/)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해서 기사로도 책 속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링크) 챕터 일부 이야기를 소개했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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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