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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혈연

 

우리는 살면서 많은 빌런을 만난다. 쉬는 날 카톡 보내는 상사, 꼭두새벽부터 쿵쾅 뛰어다니는 윗집, 내 플레이스테이션을 빌려 가 팔아먹은 친구. 이 정도는 소소하다. 문제는 지독한 빌런. 심지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인생이 상당히 고달프고 외로워진다.

 

아버지는 내 인생 최대 빌런이었다. 10대에는 두려웠고, 2-30대에는 증오했다. 그 무렵, 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이후로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이제 내 나이 40줄. 원망의 감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대신 한 인간의 영역에서, 그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나. 그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쯤 되면 눈치채시겠지만 나는 관점에 따라 제법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불행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빈곤 포르노를 쓰려는 것도 아니다. 세상엔 많은 언론사가 있고 많은 정치인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켜주고 싶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으니까.

 

나의 이 소박한 이야기가, 꽤나 독특한 근현대사를 가진 한국에서, 한국인의 가난과 불행을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위로받을 분이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는, 계속.

 

#1. 찾아가자 드래곤볼

 

드래곤볼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일곱 개를 다 모으면 용신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슬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어릴 적 "램프의 신비"라는 이상한 이름의 500원짜리 해적판으로 떠돌다가 중학생 무렵 주간 아이큐점프에서 부록 형식으로 연재되던 드래곤볼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콘텐츠였다.

 

구슬을 다 모으기만 하면, 뭐든지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다. 드래곤볼을 모으면 무슨 소원을 빌 것인가. 친구들과 자주 부질없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용신에게 소원 요청권을 무한정 달라고 하면 된다는 녀석이 있었다. 하나만 들어준다고 했는데, 그딴 꼼수가 씨알이 먹히겠냐고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 녀석도 있었다. 난 아무래도 좋았다. 누군가 내 소원을 무조건 들어준다는 상상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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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아이큐 점프가 나오는 요일의 문방구 앞은 만화책을 사려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험물이라기보단 격투 만화에 가까웠던 드래곤볼은 슬램덩크와 더불어 남자아이들에게 취향 저격이었다.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수업 시간에 만화책을 돌려보는 건 다반사였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손오공이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 하며 지구의 운명을 건 전투를 하는 건 내게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었다. 교실에서 친구들이 하는 공부는 시시하게 고작 숫자 나부랭이들과 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허나 나의 도피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걸 안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학으로 시작해 어그러진 나의 학업은 이내 수습 불가 상태가 되었고 나중에 취직하려고 치른 공기업 NCS 시험에까지 등장해 평생 내 발목을 잡고 물어뜯었다. 

 

그렇다. 어릴 때 공부 안하면 평생 고생은 아니지만 취업할 땐 반드시 발목을 잡는다;;; 후우.  

 

#2. 그놈의 수학 

 

수학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수학 불안(Math anxiety) 혹은 수학 공포증(Mathophobia)이란 말이 있다. 전체 인구의 약 17%가 수학에 대해 불안 또는 공포증을 느낀다고 한다. 수학 불안은 부정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수학 평가에서 나쁜 성적을 받거나, 낮은 수학 점수로 부모나 교사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수학 불안이 발생할 수 있고,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난산증(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등 산술에 어려움을 일으키는 학습 장애), 난독증 등도 수학 불안을 부추긴다.

 

수학 불안이 있는 사람은 감정(걱정, 스트레스, 초조함, 두려움), 생리(심박수 증가, 발한, 현기증 등 불안 및 공황발작), 인지(작업 기억력, 작업 집중력) 장애 증상을 보일 수도 있다. 증상을 치료하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신감이 부족해지고 불안 감정이 더 높아진다.

 

뭐, 고작 수학 못하는 걸로 이런 자료까지 들고 오냐, 하겠지만 나같은 사람에겐 매우 공감가는 연구 결과이다. 불안정한 가정 내 분위기와 끝이 없을 듯한 가난(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어렸을 때부터 칭찬 없이 꾸중에 올인된 양육방식은 이러한 증상의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미 늦은 일이니 할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베트남 참전용사로 PTSD를 얻은 아버지 밑에서, 별다른 국가의 조치 없이 방치된 가족들은 작거나 크거나 여러가지 다양한 문제를 겪지 않을까 한다. 아 물론, 수학 성적이 그랬던 건 내 머리가 나빴던 탓이란 것도 인정하지만 말이다.    

 

#3. 새가 날아가는 속도에 대하여

 

일단 아버지는 가정에 무관심했으니 수학으로 혼날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나의 수학 성적이 처참한 원인에 대해, 당연히 '노력'을 안 해서 그랬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력을 안 한다는 말'은 사실 기를 쓰고 노력하는 사람에겐 모욕적인 진단이긴 하다.

 

변명을 하자면 나라고 공부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집중력 장애가 있어도, 국어는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다. 반복해서 문장을 읽고 키워드를 찾아내면 문제가 풀리긴 했다. 공부라기보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 정도로 인식했다. 역사는 있었던 사실로 문제를 풀면 되었다. 하지만 수학은 적어도 내겐, 답이 없었다. 문제를 읽으면 내용이 머릿속에 입력되기 전에 기화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시속 20km로 달려오는 두 기차가 충돌하기 전까지, 기차 사이를 시속 40km로 날던 새가 이동한 거리를 알아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이딴 걸 왜 계산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차가 충돌할 정도로 대형 참사가 날 상황에서 날아가는 새의 속도와 거리 따위를 왜 알아야 하는 건가?

 

그렇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이런 불만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마련이고 수학 시험 시간만 되면 멍하니 문제지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학에 흥미를 잃는 걸 넘어 수학을 증오했다.

 

과목 하나를 완전히 놓자 도미노처럼 다른 공부도 무너졌고 결국 학업 자체를 놓았다. 그래, 난 공부를 못했다. 넨장. 

 

#4. 내가 학교에서 배운 건 수긍이었다

 

학교생활에 공부를 빼면 친구밖에 없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고 비슷한 성향을 지닌 아이들끼리 어울리고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도 내겐 용돈이란 개념이 없었다. 쉬는 시간 매점에서 파는 1,200원짜리 라면 한 그릇은 나에겐 귀하디 귀한 음식이었다. 어쩌다 돈이 생겨도 사 먹는데 몇 시간 동안 고민하다, 결국 사 먹지 않았다. "평범"하게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런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됐다. 애써 평범한 척 생활해야 했다.

 

선생, 학생 할 것 없이 폭력이 난무했던 우리 때의 남중, 남고가 그렇듯, 한순간이라도 약해 보이거나 무시당하면 잡아 먹힌다. 인간은 자신과 "다름"을 느낄 때 적대적이고 잔인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비단 학창 시절뿐만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규칙이다).

 

다른 아이들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왔다고 자랑할 때,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다. 우리 때는 한창 휠라나, 엘레쎄 나이키 가방이 유행했는데 나는 시장에서 사 온 이름 모를 상표의 허름한 가방을 메고 등교했다. 한 번은 어머니의 고향에서 보내온 꼴뚜기 볶음을 점심 도시락 반찬으로 한 달 내내 싸간 적도 있다.

 

불만은 없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도시락을 싸준 어머님께 감사하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도시락을 못 쌀 정도로 가난한 친구들은 지금도 존재하기에 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꼴뚜기가 뭐 어때! 한달 내내 같은 반찬을 먹으면 뭐 어때! 집에 쌀이 있는 것 자체로 감사할 형편인데.

 

허나 친구들 도시락통에 정성스럽고 예쁘게 담긴 비엔나 소시지나 LA갈비, 혹은 장조림을 보고 있자면 많은 생각이 든 건 사실이다. 나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평범하게 친구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갖고 싶었다. 휠라 가방도 갖고 싶고 LA갈비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부럽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 없다. 사달라고 조른 적도 없다.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 빨리 수긍했다.

 

그늘이 지는 마음을 외면한 채, 가슴속에 이는 불길을 발로 밟은 채, 담담한 척하며, '평범하게'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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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18 : 우리들의 성장 느와르>

 

 

#5. 불행이 불행에게

 

그렇게 나의 불행이 더 큰 불행을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위 좀 노는 무리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지냈으며 모범생 집단과도 잘 어울렸다. 중3 때 독서실 문 닫는 시간엔 나와 반장+일진+오타쿠라는 괴이한 조합으로 거리를 쏘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다행히 내 성격이 친구를 사귀는데 큰 어려움이 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땐 아이큐 점프에서 캡틴 서바이벌이라는 만화가 인기가 좋았다. 아이들 사이에선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말이 서바이벌 게임이지 그냥 서로 비비탄 총을 쏴대고 도망치는 위험한 놀이였다(우리 때는 그래서 눈을 다치는 아이들도 많았다).

 

당연히 비비탄 총은 나의 형편에 맞지 않았다. 주말, 독서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받은 돈으로 컵라면 하나를 사 먹고 걸어서 1시간 거리가 되는 도서관까지 갔다. 저녁까지 책을 보며 버텼다. 부모님에겐 죄송하지만 그렇게 한 달 정도 돈을 모았다. 영화 로보캅의 주인공이 썼었던 로보캅 총을 샀다. 만원 좀 넘는 돈이었다.

 

하지만 책장 뒤에 숨겨두고 친구들과 몇 번 놀지도 못하고 고장이 났다. 그걸 사기 위해 노력한 것과 비교하면 너무 빨리 고장이나 맥이 빠졌다. "만 원이면 떡볶이가 도대체 몇 개야..." 라는 생각도 들어 억울했다. 나의 한 달이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헌데, 근래 동생과 술을 먹다 동생이 20년 더 지난 고해성사를 한다.

 

"사실 옛날에 형 로보캅 총 고장 낸 거 사실 나다."

 

"엥? 그거 싸구려라 고장이 난 줄 알았는데."

 

"형 없을 때 친구가 비비탄총 자랑하더라고. 우리 집에 더 큰 총 있다고 가지고 나가서 놀다가 고장 냈는데 형한테 혼날 줄 알았는데, 형은 모르더라."

 

"... ..."

 

어렸을 때 동생은 나를 어려워 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일 것이다. 내가 한창 예민한 시기였기도 했고. 유치원을 다니고 있던 꼬마가 형의 총을 가지고 놀다 고장 냈을 땐 얼마나 놀라고 혼이 날까 걱정했을까? 동생도 나처럼 제대로 된 장난감을 가져본 적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보다 더 그랬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사준 장난감 총이 얼마나 부러웠을 것이며 형의 총을 얼마나 만져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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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똥파리>

 

 

마음이 아렸다. 내가 살아온 지리멸렬한 터널을 동생도 뒤따라 터벅터벅 걸어 왔다는 사실을 그때 자각했다. 나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지 못했던 부모님을 원망했는데 결국 나 역시 동생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형이었다. 내 생각만 하고 살았다.

 

 

<계속>